성탄 전일입니다. 매년 그래왔듯 교회학교를 중심으로 올해에도 성탄의 기쁨을 나누려 성탄전야제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교회가 성탄 즈음 맞이하는 익숙한 풍경이겠지요. 준비하는 손길들이 참 고맙습니다. 그 정성어린 준비의 과정 속에서 화의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성탄은 분명 온 세상에 참 평화를 전해주기 위한 하늘의 자기 희생이며 그렇기에 고귀한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 켠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그 무언가가 있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차분해지고 고요해집니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 성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상은 여전히 고통이 깊고 불의가 넘쳐나며 악이 득세합니다. 사랑이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그리스도인은 고통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의 편이 되어주기를 주저하고 자신들만의 신앙놀이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 땅에 교회는 많지만 예수와 상관 없는 교회들이 많고, 그런 교회일수록 오히려 더욱 소리를 높이며 예수의 이름을 거들먹거립니다. 우리가 부를 성탄의 찬송이 사랑의 화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려는 부단한 노력 없이 부르는 노래라면 이 얼마나 공허한 울림이 될까요? 저는 여전히 우리들 자신이, 지금의 교회가 평화의 왕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2천년 전에도 이런 암울한 상황 가운데 오시지 않았느냐고, 그러니 너무 절망 어린 메시지를 주는 건 성탄에 찬물을 끼얹는 게 아니냐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분이 육신을 입고 오시기까지는 그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 역할을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교회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산고(産苦)의 아픔은 사양한 채 천국행 티켓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성탄 시즌에 자꾸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가 있습니다. 김지하가 쓰고 김민기가 지어 부른 <금관의 예수>입니다. 이 노래는 1973년 원주 카톨릭회관에 올려졌던 희곡 <금관의 예수>에 처음 불려졌습니다. 이 노래는 교회가 예수의 머리 위에 쓰인 가시면류관을 벗겨내고 대신 금관을 씌워 권력과 타협하는 종교가 되었음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슴이 시려옵니다. 우리의 현실을 가감 없이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이 노래의 후렴 부분은 가난한 이들의 친구인 예수를 기다리는 이들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초점을 잃은 공허한 눈빛의 사람들은 어쩌면 예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제도화된 교회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들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따뜻한 사랑의 근원인 ‘저 하늘’과 하나님의 사랑이 오롯이 깃든 ‘저 벌판’을 얼어붙게 한 것은 참 신앙을 잃어버린 우리 자신입니다. 뜨거운 태양의 빛마저 잃게 만드는 우리의 거짓과 완악함으로 지금 거리에는 얼굴 여윈 ‘예수’가 머물 곳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이 외침은 이번 성탄을 맞이하는 저의 노래입니다. <2023.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