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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쁨을 나누는 임마누엘 원문보기 글쓴이: GIoria
21.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막1:14-20
■ 이야기 속으로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변화 받고 목사가 된 김익두 목사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본시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남들이 다 알아주는 난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과거의 지저분한 삶을 다 청산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김익두가 죽었습니다!"라는 자신의 부고장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과연 김익두가 변했을까?'라는 의아심을 품고 일부러 그를 시험해 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심스럽게 그를 향하여 작은 돌멩이를 던져 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노골적으로 바가지에 찬물을 담아서 그에게 끼얹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모든 것을 참고서 과거처럼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난폭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철에 목사님은 무악재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교통수단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막길을 올라갔습니다. 이제 다 올라갔습니다. 땀을 닦으며 쉬고 있는데, 웬 술 취한 청년 한 사람이 다가와 다짜고짜 목사님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더니 무조건 목사님을 두들겨 패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저 가만히 맞고만 계셨습니다. 한참 때리던 청년은 맞는 상대방이 대꾸도 하고 반항도 해야지 신이 나서 두들겨 팰텐데, 그저 가만히 맞기만 하니까 제 풀에 꺾여서 때리던 손길을 멈추었습니다. 그제야 목사님은 청년의 손을 꼭 쥐고서 물어보았습니다. "이제 다 때렸습니까? 도대체 왜 나를 때렸습니까?" 목사님이 본시 유명한 불량배인지라 얼마나 팔 힘이 세었겠습니까? 그러니 청년은 내심 기가 꺾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모른 척 하고 짐짓 언성을 높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보다 먼저 올라와 기분 나빠서 때렸다! 왜 어쩔래?"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내가 도대체 누군지 알고 그러는 것입니까? 내가 바로 김익두라는 사람입니다. "그제야 청년은 목사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청년은 싹싹 빌었습니다. "아이고, 형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술에 취해서 사람을 몰라보았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 때 김익두 목사님이 이런 유명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이놈아, 예수는 내가 믿는데 복은 네가 다 받았구나!" 만일 목사님이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안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길로 청년은 반쯤 죽었을 것입니다. "이놈아, 너 살고 싶거들랑 잔소리하지 말고 날 따라와." 그러면서 목사님은 청년을 부흥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로 청년도 새사람이 되고 나중에는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익두 목사님도 육신을 가진지라 깡패의 기질이 되살아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질책했다고 합니다. "이놈, 죽은 김익두야!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아직도 울리지 않는데 왜 벌써부터 살아서 일어나려고 하느냐? 좀 더 죽어라 이놈아!" 그러면서 자신을 죽이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듭난 생명을 주셨습니다.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곧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 먼저 확인해 볼 질문
당신은 무엇을 구하기 위해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지금 갈구하는 것이 영혼을 살리는 일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 주제 속으로 “주님의 부르심”
‘부르심’이란 무엇일까? 이것을 영어로 'calling' 이라고 합니다. 즉 전화벨이 울리면 사람은 그 울리는 곳으로 향하여 가서는 그 전화기를 들고 대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부르심’ 이란 바로 무엇인가에 응답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명’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소명’ 이란 어느 특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부르시어서 그에게 맡겨주신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소리와 일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나의 이기심이나 이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음성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것입니다.
막10장에 보면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디매오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이 잘 다니는 길목을 택하여서 거적을 깔아놓고 구걸을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잘 다니는 여리고 어느 길목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데 그가 자꾸만 듣게 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란 사람을 만나면 어떤 병이든 해결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이 여리고 땅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아니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소리만 들어도 감사하고 자신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오늘은 자기가 자리를 잡고 있는 이 지역을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처음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여인처럼 흥분이 되었고 어떻게 첫 마디를 그에게 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는데 사람들이 웅성이면서 무리를 지어서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는 그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하여 사람을 소리를 듣고는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지금 왜 이렇게 시끄럽고 소란스럽냐고 물으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예수님이란 분이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순간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그러자 바디매오가 지르는 소리로 인하여 자나가던 무리의 분위기가 험악해 졌습니다.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너는 구걸이나 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고 왜 소리를 질러서 우리들의 귀를 아프게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소리를 알안 곳 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 때 가던 길을 멈추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정중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를 부르라’...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는 ‘그가 너를 부르신다’ 고 하였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Call him'... 'He's calling you' 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부르심입니다. 바로 바디매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애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일어났습니다. 부르심에 응하여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한 가지의 겉옷을 내어버리고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그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눈을 뜨는 순간 구걸하는 자리에 앉아 잇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제의 바디매오가 아닙니다. 바디매오는 조금 전 까지도 소경이었고, 거지였지만 이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르심에 응하여 나아갈 때에 그의 인생의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제 그는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이었던 ‘존 와너메이커’에게 대통령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의 탁월한 경영 솜씨를 가지고 장관직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교회학교 교사인데 내가 만일 장관이 되어 나라 일에 바빠 내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학교 교사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와너메이커’가 장관직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문 기자가 그를 만나 미국의 장관직이 교회학교 교사만도 못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야 교회학교 교사직은 나의 본업이고 장관직은 부업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평생 해야 할 교회학교 교사직이 본업이지 한두 해 하다 말 장관직이 본업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부르심을 받은 소명자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이 자리를 그저 한때 잠깐 경험해 보는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일평생 해야 할 본업으로 생각하며 강한 소명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 주제에 대한 확인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부르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또한 다른 이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을 영혼의 어부로 보내시는 것을 믿습니까?
■ 말씀 속으로 “영혼을 구하는 소명의 삶”
1) 순종하여 따르는 믿음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사역지가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이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그 갈릴리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베드로의 형제가 그물을 바다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부르시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가시다가 야고보 형제를 부르시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서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의 일터를 두고 그들의 재산을 두고 따라 나섰습니다. 말씀대로 라면 그들은 부르심에 바로 응답하여 따라나섰던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 되어 지 는 모든 상황을 다 설명하려면 아마도 이 책을 수 백 권을 가지고도 못 다 쓸 것입니다. 그들의 직업은 어부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어부는 예루살렘의 잘 배우고 지도급의 사람과 아주 천하게 사는 사람들의 중간층인 중산층인 것을 역사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오늘에 말하면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아버지와 품꾼들을 두고” 떠낫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의 생활은 품꾼들을 두고 어부 일을 했다면 아마도 부유한 층일 것입니다. 즉 재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그렇게 쉽게 버리고 따라 가기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어부인 좋은 직업을 버려야 하는 결단을 했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어렵고 부족한 생활이 아닌 부유한 생활을 했다고 보면 그 생활도 포기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에게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장모가 있다는 것을 보면 혼자가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부모도 있었고 자식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족들과 헤어지는 아픔도 슬픔도 참아야 했습니다. 그 뿐입니까? 두고 가야하는 가족은 또 누가 부양할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했다는 것입니다.
2) 소명을 따라 사는 삶
그러므로 우리들도 부르심의 소명에 따라 살려면
①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17절을 보면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명예를 준다거나, 지금보다 더 좋은 직장을 준다거나, 더 나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사업의 길을 알려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단지 고기를 낚았으니까? 사람을 그렇게 하는가보다 라는 것은 짐작으로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결단이 있어야 했습니다.
② 포기를 해야 합니다.
자신의 것을 다 포기하던 얼마를 포기하던 포기하지 않으면 부르심에 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③ 주님께서 책임지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 하실 때 주변을 돌아보고, 뒤를 돌아보고, 그 말씀을 따르다가 혹시 잘 못되지 않을까? 열려하는 것은 믿음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저 단순하게 주님의 말씀에 몸을 던지는 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야 할 행동인 것입니다. 주님의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셔서 우리인생에 개입하시는 주님을 믿어야하는 것입니다.
3) 인생을 주님께 거는 신앙
2009년 1월 1일자 중앙일보 인터넷 판에 ‘중국 선교사가 된 카이스트 박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부제목으로는 ‘돈과 출세 버리고 기독교인답게 살고 싶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기사내용은 이렇습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던 카이스트 출신의 한 화학공학 박사가 어느 날 무엇에 홀린 듯이 성령에 이끌려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교 활동을 벌이고 있다. 주인공은 최하진 박사. 최 박사는 대덕연구단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골프와 명품 오디오 기기, 그리고 고스톱에 빠져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라고 하는 의문과 함께 크게 깨달음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돈과 출세의 노예가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다운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그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람이 그의 그런 결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고민하고 갈등한 끝에 결정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나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에 나간 모태신앙인이었으나, 발목까지만 교회에 담근 채 세상을 좇아 살았다.”고 말하면서 “어느 날, 성경 창세기를 읽던 중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하란에서 죽었더라.’고 쓴 대목을 보고서, 나도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겠구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그가 선교사가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최하진 박사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출세의 길을 달려온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편안하고도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그런 입장과 형편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그 스스로 고생길을 자초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명예는 물론이요, 즐기던 골프와 고스톱도 다 버리고, 이름조차 가명을 써야 하는 위험한 중국선교를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부탁한 것도 아닙니다. 그 스스로가 선택한 길입니다. 그가 그런 길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그 부르심의 소명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가 쓴 ‘네 인생을 주님께 걸어라’ 라는 책 마지막 표지 발문을 보면 “주님만 의지하고 넘실대는 요단강 물에 발을 내 딛어라 불가능 앞에서도 기죽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라 주님께 전부를 건 자의 인생을 책임져주시는 주님을 체험하라 전능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 분께는 기적이 아니지만 당신의 눈에는 기적인 그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도록 당신 자신이나 세상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인생을 걸라” 고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 정리와 확신
바디매오는 고침 받은 즉시로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내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삶이 바로 소명의 삶인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고 너를 세상에 보내지 않았느냐? 주님의 간절하신 이 요청 앞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자들은 곧 일어나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 말씀에 순종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순종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계속 순종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침 7시까지 만나자고 했는데 늦는 사람은 저녁 7시에 만나자고 해도 역시 늦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 불러 주시는 주님 음성 앞에 자신을 내어 놓고 부르심의 소명 앞에 나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 확신의 질문과 결단
1. 베드로 사도와 카이스트 최하진 박사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2. 주님이 당신을 처음 부르실 때 구원을 위한 부르심과 동시에 주님과 함께 구원을 전하기 위해 부르신 것으로 믿습니까?
3. 우리가‘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면 어떤 준비와 자세와 필요합니까?
■ 다함께 드리는 기도
주님, 저희가 주님의 부르심과 전하는 이의 입술을 통해 주님을 뵈었듯이 우리도 누군가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소명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희에게 주님의 구원사역에 동역하는 복된 삶을 허락해주시옵소서. 늘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전도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