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화2길 : 산성 로타리 - > 경기 광주역
봉화 2길은 출발부터 혼선을 주었다. 그것은 하남시에서 조성한 둘레길과 봉화2길이 똑같은 명칭으로 한양 삼십리길을 조성하고 들머리에서 진행방향을 광주시에서는 산성 로터리에서 검단산 방향을 향하고 경기옛길은 정반대 방향인 산성 파출소가 소재한 곳으로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길을 가도 검복리 남한산성로 465길에서 서로 만나지만 봉화길을 걷고자 아곳에 왔기에 경기 옛길이 인도하는 산성 파출소가 있는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지만 세계 문화유산인 남한산성을 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이 아쉽다.
남한산성의 첫 인연은 40년 전 처음 직장생활을 할 때 성남으로 납품을 하고자 상대원동에 이르러 산성의 성벽을 보고 회사의 업무는 내팽개친 채 산성에 올라 남문에서 무너진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본 것이 첫 인연이었다.
그 후 백두대간을 종주한 동지들과 남한산성의 능선 곳곳을 누비지 않은 곳이 없지만,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에는 찾아오지 않았는데 오늘 산성에 이르렀음에도 스쳐 지나 가고있으니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일었다.
옛 추억이 담겨있는 남한산성, 하지만 세게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도 마음만 있었을뿐 게으른 탓에 다시 찾아오지 않았고 오늘도 스쳐 지나가지만 잊을 수 없는 남한산성임을 자각하며 산성 파출소, 소방서를 지나갈 때 산성은 천민 서흔남이란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흔남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대에 포위당해 성 안팎의 소식이 끊기자 전령을 자처하였다. 왕의 유지(諭旨)를 거지, 병자 행세를 하며 적진을 빠져나가 외부의 지원군에게 전하고, 적의 동태를 알려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천민에서 종2품의 신분에 올랐다.“
한편 그와 관련하여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던 인조를 등에 업고 무사히 대피시킨 후 그 상으로 곤룡포를 얻어 평생을 소중히 여기다가 죽은 뒤에도 곤룡포와 함께 묻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고 한다.
우리의 역사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목숨을 건 평민들의 殺身成仁의 정신이다. 그들은 위정자들의 팝박에 따른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國家安危가 직면할 때에는 오히려 선두에서 서서 목숨을 걸고 항거하였다.
한양의 4대문안에는 들어갈 수 없고 시내에 소재하였던 사찰을 산속으로 추방하였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승군을 조직하여 왜적과 대항하고, 학문에만 정진하던 유생들은 의병을 모집하여 나라를 지켰는데 병자호란 때에는 서흔남같은 천민의 위국 충절의 기개가 있었다.
서흔남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길 때 좌익문에 이르렀다(10시05분) 행궁의 좌측인 동쪽에 있다 하여 좌익문左翼門으로 현판을 내걸었는데 동쪽에 있는 성문이라 하어 동문으로 부르기도 한다.
복원된 성곽과 팔작 지붕을 바라보니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위용은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오지 않으면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좌익문을 바라보노라니 다시금 성곽을 따라 사대문을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좌익문에서 봉화길은 산기슭에 설치한 데크길을 따라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걸어간다. 데크길이 다하니 큰골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장수마을 검복리를 알리는 현수막을 걸어 놓았고 곧이어 검복리 버스 정류장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봉화길은 길 찾기에 주의를 요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지금까지의 걸어온 아스팔트길의 대로에서 우측의 작은 소로길로 진입하여 곧바로 좌측의 남한산성로 465길로 진행하여야 했다. 이 길은 산성 로터리에서 검단산에 올랐다가 하산하면 봉화길과 서로 만나는 지점이었다. 이곳에서 보이지 않았던 경기 옛길 표지기를 비로소 볼 수가 있었다.
계속되는 포장도로를 진행하다 숲길로 진입하여 족두리 바위를 지나서 쩍바위가 있었다. 쩍바위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리자 이에 놀란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하였으니
인조가 청태종을 향하여 세 번 절할 때마다 바닥에 이마를 아홉번 두드린 三拜九叩頭禮를 올린 것은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는驚天動地 민족 최대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회심 고개에 이르니 시 한 편이 걸려있다.
남한산성 한양 삼십리길
과거 보러 이 길 때라 가던 선비네들
이 고개 넘다가 과거에 낙방하여
회심 고개 주저앉아 산적이 되었다네
산적 붉은옷 벗어버리고
툭툭 털고 회심 고개 뒤로하고
고향으로 봇짐싸서 떠나던 이 고개
그 마음 돌탑이 되어 바람 소리만 나부끼네
과거에 낙방하여 쌓인 울분을 참지 못하고 끝내 도적이 되었다가 죄를 뉘우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설화에서 성인 공자께서 ‘허물을 고치는데 꺼리지 않는다’ 하셨고(過則勿憚改)
퇴계 선생도 ‘허물을 고치는데 인색하지 않고 의로움을 들으면 즉시 따르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 하였으니 비록 산적의 행위는 용서할 수 없을지라도 ‘붉은옷 벗어던진 그 마음 돌탑처럼 굳고 단단하니’ 선비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회심고개를 내려오는 길은 험한 길이 되어 나무 계단으로 이어졌고 하산하여 숲길에서 포장도로를 걸어가지만 첩첩이 산으로 쌓인 마을길이었기에 비록 아스팔트길일지라도 자연을 파헤치지 않고 오히려 동화되는 길이었다.
고즈넉한 산간마을 길을 걸어 히든 까페에 이르니 봉화길은 좌측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숲길이 시작되는데 선사시대 무덤을 상징하는 고인돌이 있었고 이 마을의 특징을 상징하는 황소와 연자방아를 전시해 놓았다.
다섯 그루의 소원나무를 지나 완만한 산등성이가 계속되는데 이 숲길을 연자말 숲이라고 했다. “잣나무 우거진 풍요로운 마을/청솔모, 다람쥐가 잣나무를 오르내리며/ 먼길떠나는 길손을 맞이하던 숲/....... (이하 생략)
이라고 말없이 들려주는 그 소리가 다정다감으로 다가와 걸음걸음에 신바람이 난다. 하지만 오르고 또 오르는 길이 되어 땀방울이 이마에 맺히며 숨이 차오를 때 산마루에 이르니 합격 바위가 있였다.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걸어가면서 이곳에 이르러 천지신명께 급제를 빌었던 그 마음은 천년이 되도록 변하지 않을 바위가 되어 옛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합격생으로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합격 바위를 내려서는데 ‘하늘이 빚어 놓은 우애 넘치는 형제 바위’와 ‘세상이 천지개벽하던날 험한 세상 외롭지 말라고 자매로 만들었다는 자매 바위’를 대하니 ”형제는 수족이요, 부부는 의복임을 마음에 새기어 형제자매의 우애를 잃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오른다.
보고 싶은 어머님, 그리고 아버님!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셨던 부모님의 마음을 어찌하여 살아 생존에 깨닫지 못하였을까?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을 저질로 놓고 그리워하고 있으니 또다시 부모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합격 바위를 내려서는데 눈길을 끄는 시 ”나는 천년의 고목, 나는 바람이어라“는 시 한 편이 걸려있다.
골바람 내려와 도포 자락 휘날리며
한양길 걷던 선비 고운 자태로
고향 노모의 그리움에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으니
어느새 검복리로세
너는 천년의 고목이러라
나는 바람이어라
부모님의 은혜와 형제자매의 우애를 다시금 새기며 합격 바위의 산등성이를 내려와 또다시 포장도로를 걸어간다. 산간 마을 길의 포장도로는 자동차 도로가 아니다. 마을을 원활하게 통행할 수 있도록 도로를 포장하였기에 자연을 헤치는 행위도 아니다.
마울이 다하면 다시 숲길이 시작되고 숲길을 내려서면 도로를 걸어가는 이 길을 한양 삼십리길이라고 명명한 경기 옛길 홈페이지에서는 이렇게 평했다.
”한양 삼십리길은 남한산성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조성된 숲길입니다. 목현동에서 남한산성면 산성리를 잇는 12km의 등반코스로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넘었던 옛길입니다. 합격 바위와 새오 고개의 돌무덤은 선비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목현1동 마을회관 이정표를 따라 검복리, 산성리, 불당리, 오전리를 지나 목현동에 이르게 되는 구간은 옛길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세월의 사연을 품은 구간으로 대자연의 정취와 함께 걸어보시길 바랍니다.“
또다시 숲길이 시작되는데 김헌영 총무는 길바닥이 헤쳐있는 것을 보고 멧돼지 흔적임을 말하면서 우렁찬 개짖는 소리에 멧돼지 사냥 중임을 환기 시켜 주며 ‘이 야’ 큰소리를 외친다.
평생을 산에 다니었고 이 땅의 1대간 9정맥을 완주하고 전국의 산하를 탐사한 타고난 산군인 김헌영씨의 말을 듣고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산마루에 오르니 새오 고개였다. 새오 고개의 진실이란 시한편이 걸려있다.
새오鳥峴 고개의 진실
바쁘게 한양가던 발길 모두어
성황당 앞에 간절히 빌던
청운에 푸른꿈들 아직 이곳에 머물렀던가
참화의 임진난도 아프게 지켜보며
지그시 견디어낸 숱한 어제와 오늘
첩첩히 개켜진 사연들이 눈물이여
둔전 마을 성황당에 채우고 쌓아쌓아
장엄한 이 민족 역사에
침묵으로 서리어라
새오 고개를 내려서 목현1동 마을회관에 이르렀다. 편의점에 들려 냉커피를 마시며 피로를 달래며 자동차와 함께 가는 도로변을 걸어간다.
목현이란 지명은 일제 강점기에 목감리의 목과 조현리(鳥峴: 새우고개를 한자로 표기)의 현자를 따서 명명한 지명이다. 이곳에서 한양을 가려면 지금까지 넘어온 길을 역방향으로 하여 새우 고개를 넘어 산성을 거쳐 갈 수가 있고 또 다른 길로는 이배재二拜峴 곧바로 넘어갈 수가 있다.
註 : 이배재二拜峴
절을 두 번 하는 고개'라는 뜻의 명칭이 붙은 것은 옛날 충청도의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한양이 보여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하여 한 번 절을 하고, 부모가 계신 고향을 향하여 다시 한번 절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조선 시대의 유학자 이황(李滉)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임금을 향하여 절을 두 번 하고 길을 떠난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네이버 지식백과]
그런데 어찌하여 평탄한 이배재를 넘지 않고 산길을 오르내리는 험준한길을 선택하여 한양으로 걸어갔을까? 이배재는 벼슬아치인 사대부들만이 걸어갈 수 있는 길로 무명 유생들은 통행을 제한했기에 피눈물을 흘리며 과거 급제란 간절한 마음으로 새우 고개, 회심고개의 준령을 넘어간 것일까?
(유)보천상사가 있는 도로가에 이르렀을 때 봉화길은 도로가에서 산기슭으로 진입하였다. 짤막한 거리로 골목길이었지만 아마도 조선 시대 봉화대로의 원형 노선으로 여겨졌다.
봉화길의 원형 노선에서 신작로에 진입하여 목현천변을 걸어간다. 마치 드넓은 평야 지대를 걷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일자로 쭉 뻗은 길이 놓여있고 그 끝자락에는 오른쪽, 왼쪽으로 우뚝하게 솟은 두 봉우리가 맞이하고 있었다.
재빠르게 지도를 확인한 김헌영 총무는 좌측의 산은 칠사산이고, 오른쪽의 산은 국수봉이라고 하였다. 가면 갈수록 서로가 가까워지고 있는 형태가 마치 너와 내가 보고 싶은 친구를 빨리 만나고자 서로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았다.
신명 나는 걸음걸음에서 목현천이 경안천에 합류하면서 더한층 넓어진 경안천변에는 단체 경기를 할 수 있는 운동장, 잔디광장 그리고 보행자와 자전거 전용길을 조성하여 근린공원인 청석 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시민들의 여가를 즐길 수있는 휴식공간으로 되살아 난 것을 보니 사람도 자기만의 생각에 옳다고 집착하지 않고 타인의 견해도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다면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승화될 수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기와 반대의 사고를 지닌 사람과 대화하고 타협할 수 있는 도량을 소유한 사람이 참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음을 말없이 보여주며 유유히 흘러가는 경안천을 바라보면서 걸어간다.
멀리 경안천을 횡단하는 다리가 눈에 띈다. 아마도 오늘의 종착지도 대교 인근에 있을 것이란 생각때문인지 발걸음이 빨라졌는데 맑은 천변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걸음은 더욱 빠른 것 같았다.
자연은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을 훼손하면 반드시 그 합당한 대가를 차르여야 한다. 자연의 향기를 맡으면서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 매우 감사함을 청석 공원에서 다시금 느낄 때 멀리 느꼈던 대교에 이르렀다.
대교는 사람이 건널 다닐 수 있는 다리가 아니라 전동열차가 다니는 경강선 철도였고 산책로 또한 이곳에서 그 임무를 마치었다. 산책로에서 도로에 이르니 도로 건너편에 봉화2길 종착지인 경기 광주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일시 : 2024년 10월 17일 수요일 맑음
● 동행 : 김헌영 총무님
● 동선
- 09시50분 : 산성 로타리
- 10시45분 : 회심고개
- 11시20분 : 합격 바위
- 12시10분 : 새오 오개
- 12시45분 : 목현1동 마을 회관
- 14시15분 : 경기 광주역
● 총거리 및 소요시간
- 총거리 : 19km
- 소요시간 : 4시간25분
첫댓글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는 둘레 길을 상세히 소개하셨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고금알석의 좋은 글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