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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사초군(莎草軍)
정의
산릉에 떼를 입혀 가다듬는 일을 하는 역군.
내용
사초군(莎草軍)은 산릉(山陵)을 새로 조성하거나 수리할 때, 산릉에 떼를 입혀 잘 가다듬는 일을 하는 역군이었다. 조선후기 산릉역에서는 도성 주민이 상여를 메는 여사군(轝士軍)으로 징발되어 사초군의 일까지 수행하는 일이 많았다. 대체로 단기간의 부역노동에 속하였다. 산릉역일 경우, 사초군의 수는 1,000명에 달하였으며, 산릉을 수리하는 역사에서는 300여 명을 동원되는 일이 많았다. 공인계(貢人契)에서 자원하여 사초군의 일을 부담하는 일도 있었다. 1673년(헌종 14) 효종 영릉(寧陵) 천릉역(遷陵役)의 예를 보면, 능상(陵上)에 깔 사초 6,000장을 모화관(慕華館)에서 떼어 올 때, 농민 800명을 징발하되, 모군의 예에 따라 품삯을 지불하였고, 이를 능상으로 옮겨 오는 일은 상번군(上番軍)인 도방군(到防軍)을 시켜 사역하였다. 모두 52,000여 장의 사초가 조달되었으며, 여기에 면포 520여 필이 지불되었다. 사초를 덮는 일을 주도하는 사초장(莎草匠)은 산릉도감 삼물소(三物所)의 장인을 불러 썼다.
용례
知敦寧李宗城上書 略曰 戶錢之不可行 其說有四 一曰不均也 二曰不足也 三曰增田結之役也 四曰失士夫之心也 (중략) 何謂增田結之役也 我國民役 田與戶二者而已 田賦則固有定制 而烟戶之役 名色至繁 至於海西 關東 則一戶所出殆過田賦 至於畿內 則雉鷄 柴草 氷丁之外 有別星則以釜鼎器皿而收錢焉 以延逢前排而受錢焉 有喪葬則以擔持 雜色軍而收錢焉 以造墓莎草軍而收錢焉 通諸路言之 雖最輕歇處 一年所收以錢計之 戶不下四五十文矣 (하략) [『영조실록』 26년 6월 22일]
참고문헌
『효종영릉천릉도감의궤(孝宗寧陵遷陵都監儀軌)』
산릉(역)(山陵(役))
정의
왕이나 왕비의 능을 조성하는 데 따르는 공역.
개설
넓게 보면 산릉역(山陵役)은 세자 등의 묘소를 새로 조성하거나, 능·묘를 고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는 데 따르는 공역까지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대동법이 시행된 17세기 이후에도 노동력 징발의 요역은 잔존했다. 대동법 이후의 요역은 공식적으로는 크게 2가지 분야에 한정되었다. 하나는 지방관청의 일상적인 관수 잡물들을 조달하는 일로써, 지방 재정 운영에 있어 일정 한도 내에서 잡역세 운영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산릉의 역사와 중국에서 오는 사신의 접대와 관련된 요역이었다.
산릉역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능묘의 조성은 수개월에 걸쳐 이루어지는 대규모의 역사였기 때문에 많은 노동력과 각종 잡물이 투입되어야 했다. 때문에 일찍부터 중요한 요역 종목으로 파악되었다.
17세기 초엽의 산릉역에서는 대체로 8,000~9,000명의 역군을 한 달씩 징발하는 것이 관례였다. 연인원 270,000명가량이 필요하였고, 천릉역이라면 이보다 적은 연인원 210,000명 정도가 소요되었다. 각 지방에서 징발된 농민들이 산릉역의 주된 노동력이었다. 예컨대 1632년(인조 10)의 인목왕후(仁穆王后) 산릉역에서는, 전국의 요역농민 2,100명이 30일 동안 부역노동에 징발된 바 있었다.
산릉역은 대규모의 공역이었기 때문에 여러 유형의 부역노동이 함께 징발되었다. 전국의 승도를 징발해서 임시적인 부역군으로 편성한 승군과 군역 부담자로서 특히 고역에 시달리던 수군은 모두 이 시기 국가의 대규모 토목공사에 빈번히 동원되는 부역노동의 자원이었다. 인목왕후 산릉역에는 요역농민인 연군(烟軍)뿐 아니라, 1,000명의 승군과 700명의 수군도 함께 징발되었으며, 그 외에 연인원 37,000여 명의 모군이 별도로 고용되었다. 당시 부역노동의 가장 대표적인 담당자였던 연군·승군·수군은 각기 1개월 부역에 소모되는 식량을 스스로 장만하였으며, 역소에서 필요한 괭이·삽 등의 작업도구를 지참하는 경우도 많았다.
산릉역에서는 능소 부근의 경기 민호에 돌아가는 요역의 부담도 있었다. 회장(會葬)하는 인원에 대하여 그들이 들어가 있을 곳에 미리 가가(假家)를 짓고, 때로는 방을 만들어 구들까지 놓게 되는데, 이 같은 공역이 산릉역에 따르는 특수한 요역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또 각 고을에서 나누어 맡은 이들에 대한 접대 역시 경기 주민의 부담이었다. 예장(禮葬) 발인 때 상여를 끄는 여사군(轝士軍)을 비롯한 각종 차비군(差備軍) 약 5,000여 명을 동원하는 일은 매번 국상 때마다 한성부에서 담당하던 분야였다.
대규모의 요역 징발은 막강한 국가권력의 능력으로도 점차 버거운 일이 되고 있었다. 대체로 원거리를 이동해서 응역하게 되는 부역군의 요역 부담이 지나치게 무겁고 비효율적이라는 것, 농번기에는 연군을 징발하기 어렵다는 것, 강제 징발된 부역군의 작업 능률이 크게 떨어질 뿐 아니라, 때로는 공역의 합리적인 진행을 방해하기에 이른다는 것 등이 원인이었다. 부역군은 피역·도망·대립의 방도를 써 가며 요역 징발에 저항하였다. 관의 입장에서도 구태여 저항과 비효율이 따르는 낡은 역역(力役) 체계에 의존할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 더구나 유민으로 전락하여 도회지로 유입하는 몰락 농민들을 고용한다면 진휼에도 보탬이 되는 또 다른 이점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17세기 초엽의 토목공사에서 요역 징발을 대신하여 고용 잡역부인 모군을 고용하는 새로운 노동력 수급 체계를 점차 도입·정착시켜 갔다. 17세기 초엽부터 산릉역에 모립제가 적용되기 시작하였고, 그 비중은 점차 확대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산릉을 정하고 조성하는 일은 국가의 막중한 대사로 여겨졌다. 따라서 대동법이 시행된 후 많은 요역 종목이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분야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나, 산릉역의 분야는 상당 기간 요역의 역종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영조대의 『속대전(續大典)』에서는 산릉 및 조사(詔使) 외의 일체 요역으로써 다시 민을 번거롭게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첨가되었다. 산릉역이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역사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요역 분야로서 특수하게 관리될 필요성이 있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내용
왕이나 왕비가 사망한 지 5개월 만에 장례를 치러야 했으므로, 산릉의 영조공사는 이 기간 내에 모든 공정을 마쳐야만 하였다. 산릉도감을 설치하고 상지관(相地官)을 파견하여 능역(陵役)을 택정하면, 소요되는 인력을 헤아려서 분정·징발하거나 혹은 모립·고용하였으며, 이때부터 비로소 역사는 시작될 수 있었다.
산릉의 조성을 주관하는 산릉도감은 임시로 설치된 관서였다. 여기에는 삼물소(三物所)·조성소(造成所)·노야소(爐冶所)·대부석소(大浮石所)·보토소(補土所)·소부석소(小浮石所)·별공작(別工作)·분장흥고(分長興庫)·번와소(燔瓦所)·수석소(輸石所) 등의 작업장이 마련되었다. 삼물소는 석회와 가는 모래 및 황토를 준비해서 현궁(玄宮)의 묘실을 조성할 때 광중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이 3가지를 섞어 벽에 바르는 일을 맡았다. 조성소는 정자각과 찬궁을 지었으며, 대부석소는 문무석 등 큰 석물을 제작하였고, 노야소는 철물 등의 제작을 담당하였고, 보토소는 산릉 주변의 필요한 곳에 흙을 채워 메우는 일을 맡았고, 수석소는 석물의 운반을 담당하였다.
특별히 노동력이 많이 요구되는 공정은 돌을 깨는 부석(浮石)과 운반하는 수석(輸石) 등의 석역(石役)과 보토 및 사초(莎草) 작업, 그리고 능의 부속건물을 건축하는 작업 및 석실을 조성하는 작업 등이었다. 석역은 혼유석(魂遊石)·비석·석인·석수 등 석물의 제작을 위한 것이었는데, 먼저 돌을 떼어 내는 부석의 작업부터 시작해야 했다. 여기에는 석수들이 동원되었지만, 이들을 보조하기 위해서, 또 채석에 앞서 실시되는 굴토의 작업 등에 더 많은 수의 인부가 필요하였다.
산릉역에서 가장 많은 인부가 동원되는 분야는 대체로 돌 나르는 일이었다. 큰 돌덩이를 능소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부석소가 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다음에 능역의 보토 작업과 능 위에 덮을 사초를 떼는 작업, 그리고 부속건물인 정자각·재실·비각 등을 건축하는 데에도 많은 인부가 투입되었다. 그 밖에도 산릉역의 필수적인 공정이었던 석실의 조성과 이곳의 수분 침투를 막기 위하여 사용되는 삼물의 조성, 이어서 능역의 청소 작업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부의 동원이 필요하였다.
17세기 초엽 징발역군에 의한 산릉역에서는, 연군·승군·군인이 대거 징발되었다. 이 같은 역군 징발 체계는 17세기 초엽 이래 단계적으로 모립제로 전환되어 갔다. 산릉역의 각종 잡역은 점차 모군의 노동력을 중심으로 수행되어야 했다. 모군들은 삼물소·조성소·대부석소·소부석소·수석소·보토소·노야소·분장흥고·번와소 등 능소의 여러 작업장에 분산 배치되어서 각종 잡역을 담당하였다.
17세기 초엽의 산릉역에서는 모군과 함께 징발역군인 연군·승군·수군 등이 사역되었는데, 대체로 수석소·보토소·대부석소·조성소의 순으로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었다. 채석·운석·보토·건물 조성 등의 작업에 많은 인원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엽의 산릉역에서는 보토소·조성소·삼물소 등의 작업장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노동력을 쓰고 있었다. 특히 석물의 규격이 작아졌을 뿐 아니라, 수레 등 운반시설이 많이 활용되어 돌을 싣고 나르는 일에 필요한 노동력이 크게 절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초엽의 산릉역에서는 17세기 초엽, 아직도 부역노동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었던 시절의 토목공사에 비해서 투입된 노동력 전체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음을 볼 수 있다. 그 기간에 산릉역에서 필요한 노동력의 크기는 절반 내지 3분지 1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변천
17세기 이후 산릉역에서 모군을 고용하게 되면서 막대한 양의 고가(雇價), 곧 품삯을 지불하는 데 드는 대규모 재정 지출이 요구되었다. 각 도의 연군을 징발하는 대신 연군가포(烟軍價布)를 거두게 함으로써 모군을 고립하는 재원으로 삼거나, 부조(扶助)라는 명목으로 각 도의 감영·병영·수영에 면포를 나누어 청구하기도 하고, 혹은 사복시·상평청·병조·공조 등 중앙 각사에 비축되어 있는 면포를 호조로 이송하여 산릉역을 중심으로 한 국상의 모든 비용에 쓰게 하였다.
17세기 초엽 산릉역의 노동력 징발 체계는 연군·수군·승군의 부역노동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1608년(광해군 즉위)의 선조 목릉(穆陵) 산릉역에서 자원 역군에 한해 면포를 거둔 것을 시발로 하여 1630년(인조 8) 선조 목릉 천릉역에서 하삼도 및 강원도 연군 3,000명에게서 가포를 거두게 되면서, 이후 산릉역의 노동력 수급체계에서 모립제가 적용되는 비중은 점차 늘어났다. 연군의 산릉역 징발은 1645년(인조 23)의 소현세자 묘소역을 마지막으로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수군 등 군병이 동원되는 마지막 사례는 1673년(현종 14)의 효종 영릉(寧陵) 천릉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승군(僧軍)도 1757년(영조 33) 정성왕후(貞聖王后) 산릉역에 징발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징발되지 않았다. 산릉역에서의 노동력 수급 체계는 이같이 부역노동에서 모립제로 점차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18세기 중엽 이후의 산릉역이 17세기 초엽의 산릉역과 비교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건물 조성이나 능역 보토 등의 작업을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인부를 써서 공사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력 조달 체계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 변동의 원인으로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모립제의 방식으로 고용된 모군은 징발역군 사역의 비효율성을 점차 극복해 나아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부역 기간이 끝나서 빨리 귀환하기를 바라던 종전의 징발역군과는 달리, 품삯을 받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일터를 찾아 돌아다니던 직업적인 공사장 인부였다. 둘째, 징발역군의 부역노동에서 모립제의 고용노동으로 전환되면서 많은 인건비의 재원이 필요한 경비상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시기의 각종 역사에서 최소한의 인부만을 고용하는 방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공비의 절약을 위한 노동력의 절감이 요청되었다. 각종 장비의 개선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그러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의의
조선시기의 산릉역은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는 대표적 토목공사 가운데 하나였다. 일찍부터 노동력 징발의 부역노동이 적용되었는데, 특히 농민의 요역노동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군인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것도 노동력을 보충하는 방편이 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부역승군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는 추세를 보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모군을 고용하는 모립제가 적용됨으로써 부역노동으로부터 고용노동으로 노동력 조달 체계가 변동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부역노동의 해체와 물납세화, 상품화폐경제의 발전과 임노동의 발전상을 보여 주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강만길, 『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 한길사, 1984.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윤용출, 「17세기 초의 結布制」, 『釜大史學』 19, 1995.
윤용출, 「17세기 후반 산릉역의 승군 징발」, 『역사와 경계』 73, 2009.
삼시료(三時料)
정의
일꾼이나 장인 등 관의 역사에 동원된 일꾼들의 세끼 식사에 드는 요미.
내용
요역노동에 징발된 백성은 부역 기간에 소모되는 식량, 곧 역량(役糧)을 스스로 부담하였다. 역량을 징발역군이 스스로 마련하였던 것은 요역노동이 무상의 강제노동이라는 수취제도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역군에게 역량이 지급되는 특수한 경우도 때로는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15·16세기에는 예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의 토목공사에 징발된 역군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사례가 점차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부역노동의 물납세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농민 등을 관의 토목공사에 징발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으며, 동원하더라도 단기간에 그친다든지, 역량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사역하는 일이 많았다.
모립제 하에서 고용된 모군은 품삯을 받았다. 작업 기간 중에 소모되는 식량은 대체로 모군들이 지급받는 고가(雇價) 속에 포함되었다. 때로는 삼시료(三時料)나 점심미(點心米) 등의 명목으로 고가와는 별도로 지급되기도 하였다. 원칙적으로 역량을 지참하지 않는다는 점은 모립제의 고용인부인 모군이 종래의 징발역군과 크게 다른 차이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군현에서 고용하는 향모군(鄕募軍)일 경우에는 간혹 역량을 지참케 하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고가를 추가로 지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1736년(영조 12) 남원현의 수령이 관내의 권농관에게 보낸 전령에서, 이 지역 농촌 임노동자인 용군(傭軍)들이 하루에 미곡 1말(斗)과 삼시(三時)의 주식(酒食)을 받고 일하는데, 그 이상 지급하지 말 것을 지시한 바 있다. 1769년(영조 45)의 명릉(明陵)의 보토(補土) 공사의 경우, 510명의 모군이 19일간 고용되었고, 일을 마친 뒤 19일분의 고가로서 전 2량, 포목 1필씩을 받았다. 그러나 그 밖에도 고가와는 별도로 매일 삼시료를 지급받았음을 볼 수 있다. 모군의 삼시료와 함께 자원역군의 점심미로 지출된 것이 모두 미곡 500여 석에 이르렀다.
용례
兵曹與軍器監提調 議工匠激勵及加數條件以啓 (중략) 一 尙衣院工曹鑄字所匠人無他役 而分番役使 或受三時之料 或受兩時之料 或受賞職 本監匠人五日相遞入番 只受一時之料 各有日役 而無時綵棚儺禮 專掌爲之 [『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참고문헌
『명릉익릉주산봉사태처보토등록(明陵翼陵主山峰沙汰處補土謄錄)』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삼정일자(三丁一子)
정의
조선시대 한 가호에 양인 장정 3명이 있으면 이 중 1명의 역을 면제해 주던 조치.
개설
삼정일자(三丁一子)는 조선전기 외방 향리가 향역에서 벗어나 중앙의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로 활용되었다. 고려시대 향리는 지방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층으로 역할을 하였지만, 고려후기로 접어들면서 그 위상이 점차 약화되었다. 조선초기만 하더라도 과거에 응시하거나, 삼정일자로 향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었지만, 향촌의 실무 행정을 담당하는 향역자 수가 줄어드는 문제로 향리의 관직 진출은 점차 차단되었다. 삼정일자는 각 군현의 수령이 해당 인원을 파악하여 이조에 보고서를 올리면, 이조에서는 각사(各司)에 이들을 나누어 역을 부과하였다가 기간이 차면 다른 자리로 이관시켜 그 역(役)을 면제시켜 주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392년(태조 원년) 9월에 반포된 주군향리면역법(州郡鄕吏免役法)을 살펴보면, 제술업(製述業)의 급제자나 생원·진사시 합격자, 군공(軍功)이 현저하고 이전에 공패(功牌)를 받은 적이 있는 자, 잡과(雜科) 출신으로 관직을 지내고 기한이 다 차서 다른 관으로 옮겨 가는 도목거관자(都目去官者), 삼정일자(三丁一子)로 뽑혀 향역을 면제받은 자를 제외하고는 아무 사유도 없이 역을 회피하는 사람과 관직을 부당하게 받은 사람은 자신과 자손까지 본역(本役)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처럼 조선초기에는 지방 향리도 중앙의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법적으로 열어 두었다. 그러나 향리의 역을 면해 주는 것은 관아의 행정 사무를 돌볼 인력이 줄어드는 문제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지방 수령으로서는 삼정일자를 파악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변천
향촌의 제반 사정을 파악하고 실무를 보좌하던 향리들이 향역을 대대로 이어 가기보다, 역을 면하여 중앙의 관료로 출사하려는 움직임이 지속되면서 세종대 이미 향역자 수가 적어 이들을 충원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되었다[『세종실록』 11년 1월 6일]. 조정에서는 향역에서 벗어나려는 자들이 늘어나자 과거 급제자와 삼정일자를 제외하고는 2대·3대에 걸쳐 향역을 지고 있는 자들의 면역을 불허함으로써 향역을 점차 고정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다.
16세기 무렵부터 양반 사족층이 향촌사회의 지배층으로 성장하여 자치질서를 형성해 감으로써 향리는 수령을 보조하는 하나의 직역군으로 세습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향리에게 면역과 출사의 기회로 작용하였던 삼정일자의 원칙도 효력을 상실해 갔다.
참고문헌
이성무, 「조선 초기의 향리」, 『한국사연구』 5, 1970.
최은철, 「15세기 향리면역법에 대하여」, 『역사과학』, 1995.
상례조발(常例調發)
정의
1471년(성종 2년)의 역민식 규정대로 8결의 경작지에서 1명의 역부를 낼 수 있는 요역 종목으로 지정된 분야에서 요역을 징발하는 일.
내용
1471년(성종 2년)에 제정된 역민식(役民式)에서, 요역제 운영에 있어서 징발의 기준, 징발의 체계 등을 규정한 바 있다. 모든 수세전(收稅田) 8결마다 1명의 역부를 징발해서 사역하는 방식을 상례조발(常例調發)로 규정하였다. 또 관찰사는 공역(功役)의 크고 작음을 헤아려 순환해서 징발할 것, 역사의 규모가 커서 별례조발(別例調發)이 필요할 경우에는 6결에서 역부를 차출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상례조발의 요역 종목에는 서울에서 얼음을 저장하는 일, 금(金)을 캐는 일, 참(站)·관(館)을 수리하는 일, 목장을 쌓는 일, 공탄(貢炭)을 땅에 묻거나 교량을 만드는 일, 교초(郊草)를 베는 일, 철물을 취련(吹鍊)하는 일, 목장에서 말을 몰고 다니는 일, 예장(禮葬)에서 무덤을 만드는 일 등이 포함되었다.
전세·공납을 중심으로 한 현물 조세는, 그 조달·상납의 과정에서 요역과 관련되었다. 예컨대 전세미의 수송은 요역의 한 종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역은 현물 상납의 조세제도를 보완하는 기능도 아울러 담당하였다. 특히 요역은 공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공납은 지방의 관부에서 왕실 및 중앙 각사에 바치는 현물 조세로서, 그 일부는 군현의 주민을 사역하는 것을 통해서 조달되었다. 이 경우, 중앙정부와 지방관부의 관계에서는 공납이지만, 지방관부와 민호의 관계에서는 무상의 강제노동인 요역 징발의 방식이 적용되고 있었다. 특히 정해진 수량의 정례적인 공납·진상의 물종이 소속 군현민의 관례적인 요역 부담에 의해서 조달되는 경우, 이러한 요역은 상시잡역(常時雜役)·상시요역(常時徭役)·연례요역(年例徭役)·상례요부(常例徭賦) 등으로 불리었다. 요역에서의 상례조발은 이 같은 상시잡역에서의 요역 징발을 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잡다한 요역 부담 중에서 비교적 정기·정량적인 성격을 띠는 요역이었다.
용례
下役民式于戶曹 一應收稅田 每八結出一夫 觀察使量功役多少 循環調發 若事鉅不得已加調發 則六結出一夫 須啓聞乃行 其京藏氷 採金 修站館 築牧場 埋貢炭 造橋梁 刈郊草 鐵物吹鍊 牧場驅馬 禮葬造墓 爲常例調發 築城 運米 天使轎夫 新築牧場 波吾達 焰硝 輸木 石築 堤堰 山臺 採葛 石灰燔造 爲別例調發 [『성종실록』 2년 3월 19일]
참고문헌
강제훈, 「朝鮮初期 徭役制에 대한 재검토」, 『歷史學報』 145, 1995.
김종철, 「朝鮮初期 徭役賦課方式의 推移와 役民式의 確立」, 『歷史敎育』 51, 1992.
윤용출, 「15·16세기의 徭役制」, 『釜大史學』 10, 1986.
有井智德, 「李朝初期の徭役」, 『朝鮮學報』 30·31, 1964.
상번(上番)
정의
번을 서기 위하여 근무처로 가는 것.
개설
조선시대에 서울로 올라가 상번(上番)하는 역인(役人)으로는 군인(軍人)·의원(醫員)·기인(其人)·각사노비(各司奴婢)·나장(羅將)·조예(皂隷)·장인(匠人) 등이 있었다. 궁궐 수축 등의 공사를 위하여 인부를 상경시킬 때도 상번이라고 하였다. 자기 차례가 되어 서울로 가는 것은 상번,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쉬는 차례가 되어 거주지에 머무르는 것은 하번(下番) 또는 퇴번(退番)이라고 하였다.
상번하는 방식은 역(役)의 종류에 따라 달랐다. 군인의 경우 각 고을의 군인을 모아 병마절도사가 1차로 점열하고, 우후(虞候)나 군관을 두목인(頭目人)·압래인(押來人)으로 정해 서울로 인솔시켰다. 각사노비의 경우에는 도회소(都會所)에서 여러 고을의 노비를 모아 중앙에서 파견한 차사원(差使員)이 인솔하였다. 상번하는 노비의 부실이나 부정은 수령과 차사원이 점검하고, 중앙의 각 근무처에서 다시 점검하였다. 이들이 근무처에서 공무를 수행하다 사망하면 그 시신을 역로(驛路)로 우송하였다.
근무처에서의 역이 고되어 15세기 무렵부터는 역을 피해 거주지를 떠나 도망치거나, 다른 사람을 대신 근무처로 보내는 대립(代立)이 성행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일반 백성의 상번은, 직접 군역을 담당하는 대신 포(布)를 납부하는 납포(納布)로 대체되어 갔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군인·의원·기인·각사노비·나장·조예·장인 등 다양한 역인이 상번의 형태로 역을 수행하였다. 그중에서 군인이 대표적인 번상 역종(役種)이었다. 조선전기에는 친군위(親軍衛)·별시위(別侍衛)·갑사(甲士)·충찬위(忠贊衛)·충순위(忠順衛)·정병(正兵)·취라치(吹螺赤)·파적위(破敵衛)·장용위(壯勇衛)·팽배(彭排)·대졸(隊卒)·수군(水軍)·조졸(漕卒) 등 대부분의 군인들이 번상의 형태로 군역을 수행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장번(長番)인 훈련도감 군인을 제외하고 각 군영의 번상병(番上兵)들 역시 상번의 형태로 군역을 수행하였다. 의무 군인을 대표하는 정병을 중심으로 상번의 내용과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국대전』이 반포될 무렵인 1475년(성종 6)의 군액을 보면 정병은 72,104명에 달하였는데 그중 상번 군인은 27,620명, 유방(留防) 군인은 44,484명이었다. 상번 군인은 8번으로 나뉘어 2개월씩 근무하였고, 유방 군인은 4번으로 나뉘어 1개월씩 근무하였다. 일단 군적(軍籍)에 정병으로 등재되어 상번 군인이 된 자들은 반드시 서울로 올라와 상번 근무를 해야 했다. 만약 상번하지 않으면 일족이 피해를 입었다. 고향에서 터를 잡고 농사를 짓고 살기 위해서는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번 근무를 하는 자들은 상번 기일 5일 전까지 각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야 했는데 교통이 불편한 당시로서는 상경(上京) 자체가 고역이었다. 강원도나 전라도, 경상도의 연해, 산간벽지에 거주하는 군인들은 서울로 올라오는 데만 8~9일이 걸렸다. 또 상번하는 과정에서 강물에 빠져 서울에서 생활할 물자를 다 잃어버리거나, 산을 넘을 때 다치거나 죽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올라온 상번 군인들은 군장(軍裝) 점고(點考)를 받아야 했다. 이때 까닭 없이 점고에 빠지는 자가 10명 이상에 이를 때는 절도사·수령은 계문추단(啓聞推斷), 그 두목인(頭目人)·압래인(押來人)은 장(杖) 60대, 본인은 장 90대에 처한다고 정해졌다. 이때 기병(騎兵)들은 군영에 들어가 거주하면서 점고를 받아야 했으나, 사가(私家)에 거주하면서 점고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군영은 마초(馬草)나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비좁고 더워 생활하기가 불편하였으며, 군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군장을 갖추지 못한 기병들이 이에 따른 처벌이 두려워 다른 사람의 군장을 훔치는 경우가 빈번했던 것이다.
한편 군인들은 군장이 갖추어져 있어도 뇌물을 별도로 준비해야 했다. 군장을 점열하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하인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불합격되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면포를 잔뜩 싣고 와서 병조(兵曹) 색리(色吏)에게 뇌물을 주고 번상 근무에서 빠지거나, 대립인을 세우기도 하였다.
군장 점열을 마친 상번 군인들은 궁성 각 문의 파수(把守), 도성 안팎의 순찰, 도성 4대문 밖 경수소(警守所) 근무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궁성 각 문의 파수에는 정병과 갑사 등이 호군(護軍)의 영솔 하에 대문(大門)은 30명, 중문과 대문의 좌우 협문에는 20명, 소문과 중문의 좌우 협문에는 10명, 종묘에는 4명, 도성 문에는 8명씩 배정되어 근무하였다. 도성 안팎의 순찰은 병조에서 출직(出直) 군사를 2개소에 나누어 순찰시켰다. 그리고 경수소 근무는 화재 예방과 도적 방비를 위해서 도성 안팎에 설치된 경수소에서 숙직하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상번 군인들은 다양한 업무에 종사하였다.
변천
조선전기의 국역은 상번제가 중심을 이루었다. 즉, 조선전기에는 갑사와 정병 등 중앙군의 대표적인 군인들이 상번의 형태로 군역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16세기에 이르러 갑사는 소멸되어 갔고, 정병 중 기병은 보군(步軍)화되었으며 보병은 포(布)를 내고 번을 서지 않는 수포군(收布軍)화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 정부는 장번제로 운영되는 훈련도감과 더불어 상번제로 운영되는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등의 군영을 잇달아 설립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부역제(賦役制)의 동요와 수취 체제의 변동 속에서 상번제의 유지는 힘들어졌다. 결국 조선후기에는 장번제와 상비병제가 군제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김종수, 『조선 후기 중앙 군제 연구: 훈련도감의 설립과 사회 변동』, 혜안, 2003.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편, 『한국 군제사: 근세 조선 전기편』, 육군본부, 1968.
김광철, 「조선 전기 양인농민의 군역: 정병(正兵)을 중심하여」, 『부산사학』 3, 1979.
김종수, 「16세기 갑사(甲士)의 소멸과 정병(正兵) 입역의 변화」, 『국사관논총』 32, 1992.
생선간(生鮮干)
정의
한강변에 거주하며 임금 및 대궐 안의 식사를 관장하던 사옹방에 생선을 진상하는 역을 담당하던 자.
개설
생선간은 일반 양인이었지만 군역을 지지 않고 사옹원에 생선을 진상하는 것을 신역으로 하던 사람이었다. 이들은 한강변에 거주하던 양인에서 차출되었다.
생선간의 구성
처음에는 한강 주변에 거주하는 어부로서 가을두(현 양화진 근처)에 19명, 서강에 4명, 독음포(현 옥수동)에 12명씩 골라 생선간에 배정하였다. 이후 1441년(세종 23)에는 한강에서 통진까지 강변에 사는 양인이나 천민 중에서 100호를 뽑아 3번 교대로 생선간의 역을 수행하는 대신,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1447년(세종 29)에는 그 수를 120호로 늘려 생선간의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특정한 물자를 공물로 바치거나 특정한 기관에 신역을 제공하도록 뽑힌 장정 중에 ‘○○간’이라 불리는 자가 많았다. 이들은 노비가 아니면서도 특정한 기관에 예속되어 정해진 역을 바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양인 신분이었지만, 천한 역에 종사하였고,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역도 세습되었다. 이른바 신량역천에 해당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신분을 양인으로 간주하면서도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또 세습하면서 천한 역에 종사한다는 것은 제도적으로 모순이 있었다. 또 호적과 군적이 정비되면서 공노비나 일반 양인 중에서도 ‘○○간’이 부담하던 역에 차정되는 사례가 많아졌다. 따라서 ‘○○간’을 폐지하고 일반 양인으로 대체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하여 1415년(태종 15) ‘○○간’을 모두 보충군에 편입시키고, 일반 양인과의 구분을 없애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들에게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또 역도 세습하지 않게 하였다. 그러면서 군역이 아닌 특수한 역을 지는 자들을 ‘○○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강변에 거주하면서 사옹원에 생선을 진상하던 생선간이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은 일시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생선간은 세종대에만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일반 양인으로, 굳이 천역으로 비춰지는 생선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합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문종 이후에는 이들에 대한 호칭도 생선간에서 어부(漁夫)로 바뀌게 되었다.
참고문헌
유승원, 『조선초기신분제연구』, 을유문화사, 1987.
선무군관(選武軍官)
정의
균역법으로 인한 재정 손실을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군포 부과 대상자로 선정된 군관.
개설
균역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1인당 양역 부담을 연간 2필에서 1필로 줄였기 때문에 줄어든 세원을 보충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였다. 이에 지방의 세력가나 부유한 평민 가운데 군역을 지지 않던 사람들을 군관으로 포함시켜 그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을 선무군관이라 하였다. 이들은 상민(常民)은 아니어서 군보(軍保)에 넣기는 아깝지만 그렇다고 양반도 아니어서 완전히 군역을 면제하기도 합당하지 않은 부류였다.
균역법 시행 당시 6도에 배정된 선무군관의 총 인원은 24,500명이었다. 경기도와 강원도에 각 2,000명, 황해도에 3,500명, 충청도에 4,000명, 전라도에 6,000명, 경상도에 7,000명을 배정하였다[『영조실록』 28년 6월 29일]. 이들은 해마다 군관포 1필 또는 돈으로 2냥을 냈다. 초기에는 평민보다 부담을 줄여 주자는 의논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 군역 부담 금액이 헐한 선무군관에 투속(投屬)하는 폐단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일반 평민과 똑같이 1필을 부과하도록 확정하였다. 다만 각종 잡비는 면제해 주었다.
담당 직무
군역을 지지 않던 이들에게 갑자기 군관포를 부과하면 저항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선무군관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들은 군사로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훈련에는 참여하였고 수령 직속의 군사로 배정되어 유사시에는 수령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이들에게는 약간의 특전이 있었다. 매년 한 차례씩 무예를 시험 보아 각 도마다 1등을 한 사람은 곧바로 전시(殿試)에, 2등은 곧바로 회시(會試)에 응시할 수 있었다. 1등부터 7등까지는 그해의 군관포를 면제해 주었다.
변천
균역법 제정 이전에는 임시로 이들을 별군관(別軍官)이라 불렀으나[『영조실록』 27년 1월 5일], 1751년(영조 27) 정월에 선무군관이라는 이름으로 확정되었다[『영조실록』 27년 1월 17일]. 균역법 시행 이후 선무군관포라는 이름으로 이들에게 해마다 포 1필을 징수하였다.
양역변통 논의의 맥락에서 보면, 선무군관은 17세기 전반부터 시행하려다 무산된 유포(遊布)가 균역법에 부분적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균역사실(均役事實)』
『균역사목(均役事目)』
김성우, 「조선후기 ‘한유자’층의 형성과 그 의의」, 『사총』 40·41, 1992.
정만조, 「균역법의 선무군관 -한유자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사연구』 18, 1977.
정만조, 「조선후기의 양역변통논의에 대한 검토: 균역법성립의 배경」, 『동대논총』 7, 1977.
정연식, 『조선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세초(歲抄)
정의
조선시대에 6월과 12월마다 이조에서 죄가 있는 관리를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는 일, 혹은 병조에서 군역 액수의 결원을 조사하여 보충하는 일.
개설
조선시대에 매년 6월과 12월마다 이조(吏曹)에서 죄가 있는 관리를 적어 왕에게 보고하는 일이나 병조(兵曹)에서 군역의 역종별로 사망[故]·도망(逃亡)·질병으로 말미암아 생긴 결원을 조사하여 보충하는 일을 말하는데, 주로 후자의 경우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혹은 포상해야 할 사람을 왕에게 보고하던 일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이때 추천되는 사람으로는 농민이나 상인, 목축에 빼어난 자, 효행이나 절의가 있는 자, 시험 성적이 좋은 관리 등이었다.
내용 및 특징
이조에서 1년에 두 번 있는 인사고과인 세초가 있을 때에는 조사를 받고 있는 관원에게 녹봉을 지급하지 않았다. 또한 성균관에서 돌려 가며 실시하는 백일장의 제술 시험은 해마다 세초 때에 그 점수를 합산하여 우등 3명씩을 문과 회시(會試)에 바로 응시하게 하였다.
한편 병조에서 해마다 6월과 12월에 죽거나 병들거나 도망간 군인을 조사하여 보충하는 것을 ‘세초대정(歲抄代定)’이라고도 하였다. 대정(代定)이란 군현의 군안에 기재되어 있는 군역·납포자 가운데에서 노제(老除)·도망·사망 등으로 결원이 생긴 경우에 대신할 후보자들인 대망(代望)·망납자(望納者)에서 선발하여 충당하는 것을 말하였다. 이때에 일정한 법률에 따라 충정하도록 하였으며, 법령을 위반하여 충군(充軍)하였을 경우 제위율(制違律)로 수령과 색리(色吏)를 다스렸다. 군역 세초와 관련한 처벌 법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초에서 탈루된 사람이 10명 이상인 수령은 파직하고, 3명 이상이면 자급을 내리며, 2명 이하이면 장 80에 처하고, 관리·감독의 실무를 담당하는 감고(監考)와 색리는 1명 이상이면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이주시키는 형벌에 처하였다. 둘째, 세초를 기한 내에 마치지 못하면 그 수령은 추고하여 자급을 내리고 각 관아의 자문을 담당하는 향소(鄕所)의 담당자는 도(徒) 1년, 색리는 도 2년에 처하고 군역에 충당시켰다. 셋째, 세초에 군역에 빠진 액수를 충정(充定)하는데 대읍은 7명, 중읍은 5명, 소읍은 3명 이상의 액수를 채우지 못하면 모두 해당 수령은 관련 업무를 인계할 수 없었다. 또한 세초 때에 인정채(人情債) 쓰는 것을 금단했다. 인정채는 뇌물로서, 군역 차정에 대한 불법적 행위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변천
군역의 세초는 해마다 조선시대에 매년 이루어졌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에 걸쳐서는 세초를 통해 지역마다 양역을 역종별로 정액화하였다. 이에 따라 결원을 대정(代定)하는 과정에서 역종이 변경되기도 하였다. 각 군현은 도에서 군현에 배당한 군액에 맞추어, ‘읍안(邑案)’에 기재되어 있는 군역자의 소속과 역종을 변경·조정하였다.
지방군영에 소속된 군역자의 세초는 수령이 직접 점검하고 대정한 증서와 함께 그 결과를 감영이나 지방 군영에 보고해야 했다. 기존의 지방군은 소속처인 군영에 직접적으로 징병·징수되었는데, 세초 과정에서 군역부과 관계를 군현의 지방관아에서 통괄할 수 있게 되었다. 흉작 시 대정하는 일은 세초와 관계없이 결원이 발생하였을 때 바로 대정하도록 하는 ‘수시충대(隋時充代)’의 방법이 요구되기도 하였다.
18세기 중엽 이후로는 지역마다 고정된 군액으로 인하여 실제의 군역 부담자가 군적에 등재되지 않는 등, 세초가 형식적으로 시행되는 경우도 있었다. 단지 상번하거나 조련하는 군사에 대해서만 19세기까지 실제 복무하는 군역자가 파악되었다.
참고문헌
『수교집록(受敎輯錄)』
손병규, 「18세기 良役政策과 지방의 軍役運營」, 『軍史』 39, 國防軍史硏究所, 1999.
손병규, 『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 17~19세기 지방재정사 연구』, 역사비평사, 2008.
소경요역(所耕徭役)
정의
경작하는 사유지인 소경전에 부과된 요역, 혹은 경작하는 사유지에 부과된 조세 일반.
내용
소경요역(所耕徭役)이란 경작하는 사유지인 소경전(所耕田)에 부과된 요역을 뜻하였다. 요역의 용어를 넓게 쓸 경우에는 공부(貢賦)·부세(賦稅)·부역(賦役)과 같이 부세 일반을 지칭하였다. 따라서 소경요역의 광의의 개념은 경작하는 사유지에 부과된 조세 일반을 뜻하였다. 협의의 개념으로 소경요역이라 한 것은 요역을 징발하는 기준이 개별 민호의 토지 소유면적에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소경전세(所耕田稅)가 전세를, 소경공부(所耕貢賦)가 공부를 뜻하는 것과 같은 표현 방식이었다. 세종대 이후 토지 소유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요역이 부과되었고, 특히 성종대 이후 그러한 원칙이 법제화됨으로써, 다른 물납의 조세와 함께 전결을 단위로 한 수취 형태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소경요역이란 이같이 요역 징발의 기준이 전결에 있다는 것을 뜻하며, 소경전세·소경공부와 같이 전결에서 수취되는 3가지의 기본 세목 가운데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소경전잡역(所耕田雜役)이란 용어도 이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용례
兵曹啓 凡京役人 竝皆完護本家 獨鷹人未有完恤之典 今後番上之時則所耕徭役外雜役 例皆蠲減 從之 [『세종실록』 19년 3월 11일]
참고문헌
강제훈, 「朝鮮初期 徭役制에 대한 재검토」, 『歷史學報』 145, 1995.
김종철, 「朝鮮初期 徭役賦課方式의 推移와 役民式의 確立」, 『歷史敎育』 51, 1992.
윤용출, 「15·16세기의 徭役制」, 『釜大史學』 10, 1986.
有井智德, 「李朝初期の徭役」, 『朝鮮學報』 30·31, 1964.
소모승군(召募僧軍)
정의
승병을 조직하거나 토목공사와 같은 역사를 수행하기 위해서 불러 모은 승군, 혹은 불러 모으는 일.
내용
나라에서 승군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일은 2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임진왜란 때 볼 수 있듯이 승병이 조직되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경우였다. 승군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뚜렷한 공로를 세웠다. 승군은 비상한 시기에 잠재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인데, 임진왜란 이후의 지배층 관료들은 이 같은 승군의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한 뒤, 처음으로 산성을 수호하는 의승(義僧)을 편성하였다. 정규의 군역으로 편제된 산성의 승군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북한산성을 비롯한 각처의 산성에 승군이 설치되어 군역으로서의 승역은 확대되었다. 부역제도 변동의 시기에 과도기적인 대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승역의 또 다른 형태는 민간의 요역을 대신하는 일이었다. 대동법 성립 이후 농민을 대상으로 한 요역 징발이 어렵게 되자, 관부의 각종 토목공사에서 빈번하게 승군을 징발하였다. 승군의 부역노동은 전통적인 요역노동을 대신하는 효과적인 대안이었다. 요역노동의 비중이 감소하고 소멸되던 시절의 노동력 수급 체계에서, 승역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7세기 초엽에 정부는 주로 축성이나 영건공사에 부역승군을 활용하였다. 승군을 징발하는 일이 관례화되면서, 점차 소모(召募)라는 표현은 자취를 감추었다. 더 이상 불교 교단이나 사찰의 자발적인 참여가 아니라, 관찰사·수령으로 이어지는 행정 체계를 동원한 징발 방식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용례
傳曰 郭震卿乃僧人義嚴也 今若分遣軍官于山寺召募 則以營建一事 僧軍累年調用 今又擾害 甚爲不可 各別戒飭 使勿作弊於寺刹 震卿壬辰之亂 爲義僧將 頗有功勞 還俗爵軍功同知 至是 以西事警急 使之召募僧軍 [『광해군일기』 14년 1월 27일]
참고문헌
윤용출, 「17세기 후반 산릉역의 승군 징발」, 『역사와 경계』 73, 2009.
수리군(修理軍)
정의
궁궐이나 관아 시설을 수리하는 일에 동원된 역군.
내용
수리군(修理軍)은 궁궐이나 각급 관아의 영건이나 수리의 역사에 동원된 역군이었다. 궁궐·관아의 영건·수리에는 흔히 요역농민인 연군이 징발될 수 있었다. 국초 이래 한양 신도(新都) 건설의 일환으로 궁궐 및 기타 부대시설의 영건이 거듭되는 가운데 민정의 부역이 빈번하였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궁궐의 영건은 왕실의 권위를 안팎에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대규모의 역사에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궁궐의 영건 역사는 도성 내에서 진행되었으므로, 부역승군의 징발은 곧 승도(僧徒)의 도성 출입 문제에 대한 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서 궁궐 영건의 역사에서는 성종대 이후 특히 군인과 연군이 많이 징발되었다. 그러나 1606년(선조 39) 이후의 종묘·궁궐 영건공사에서 모군이 고용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그 뒤의 궁궐 영조공사에서는 거의 연군이 사역되지 않았다. 단지 잡역 수행을 위한 단기간의 요역 징발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도성 내의 사정과 달리, 지방군현의 영건 역에서는 17세기 이후에도 요역노동의 징발에 의존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더 많았다. 군현의 관아 건물이나 공적 시설물을 때맞추어 수선하는 일은 수령의 일상적인 업무 가운데 속하였기 때문이다. 영건 역의 규모가 클 경우에는 일개 군현에서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에는 감사에 보고하고, 그 지원 아래 가까운 군현의 연군을 함께 요역노동에 징발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지방군현의 영건 역에서 연군을 장기간에 걸쳐 징발 사역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대체로 단기간 노역이었고, 무상의 강제노동이라는 부역노동 본래의 모습과는 달리 부역 기간에 필요한 식량을 관에서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리군은 징발 역군인 경우도 있으나, 17세기 이후에는 모군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았다. 수리군은 참여한 역사의 종류에 따라, 빙고수리군(氷庫修理軍)·역수리군(驛修理軍)·대내수리군(大內修理軍)·경복궁수리군(景福宮修理軍)·인정전수리군(仁政殿修理軍)·사섬시수리군(司贍寺修理軍) 등으로 불렸다.
용례
御晝講 上謂李克培曰 氷庫修理軍八百 無乃太多乎 欲量減之 克培對曰 臣亦以謂太多 上遣注書 往審功役 命減三百 [『성종실록』 5년 9월 17일]
참고문헌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수영패(隨營牌)
정의
평안도병마절도사의 친병(親兵).
개설
조선시대 평안도 병영에는 각 진(鎭)에 예속되지 않고 병안도병사가 직접 거느리는 수영패라는 친병이 있었다. 이들은 북경으로 가는 사신 일행을 여진족[野人]의 습격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호송 군사로 차출된 군대였다. 본래 별도의 호송군이 있었으나 서북 변방의 사정이 좋지 않을 때 특별한 사태에 대비하여 호송군 외에 수영패를 데리고 갔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광해군 때에 이르러 수영패는 훈련을 받는 정식 군대에 편입되었다. 당시 후금의 정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훈련된 군사들이 많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본래 수영패에는 내수사 노비들과 함께 평안도의 부유한 민호들이 대거 투속하여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이들 투속자들을 모두 찾아내어 정군(正軍)으로 편제하고 군사로 양성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평안도의 군사제도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이는 병자호란 이후 청(淸)나라와의 군사·외교 관계로 인한 것이었다. 군사를 양성할 수 없었던 평안도에서는 부방(赴防)하는 군인들을 돌려보내는 파방(罷防)을 단행하고 대신 모든 군사에게 포목을 내도록 하였다. 청나라와의 사신 접대에 필요한 지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포(布)를 거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수영패도 연간 포 3필(疋)을 내는 등 많은 부담을 떠맡았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평안도의 양역제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인조 말년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 1647년(인조 25)에 수영패에 부과된 군포 3필은 2필로 줄어들었고, 평안병사가 관장하던 군포는 1650년(효종 1)에 비변사로 이관되었다.
수영패에 부과된 포 3필은 2필로 줄어들었으나 그들에게는 군병(軍兵)으로서의 역(役), 발군(撥軍)으로서의 역 등이 함께 부과되어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그러던 중 1721년(경종 1)에는 모든 평안도 군인의 역가(役價)를 포 1필로 통일하는 조치가 단행되었다. 그것은 역가 부담을 1필로 통일하는 조치일 뿐 아니라, 포를 납부하는 납포(納布)와 직접 군역을 수행하는 입역(入役)을 모두 부담하던 정군들에게 납포의 의무를 없앤 조치였다. 이로써 정군과 보인(保人)을 확연히 구분하여 군사제도를 운영하려는 것이었다.
정군과 납포군으로 군인을 확연히 구분하는 일은 그로부터 10년 후 평안도어사 이종성(李宗城)의 건의로 1731년(영조 7) 중앙정부 차원에서 해결책을 마련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른바 정삼장(精三壯)이라 부르는 병영의 정초군(精抄軍)·삼수군(三手軍)·장무대(壯武隊) 8,900여 명의 1필 역 부담을 없애고 그 결손분은 비변사에서 관장하는 감영과 병영의 포를 지급하여 채우도록 하였다. 이어서 수영패의 납포도 없애는 방안이 추진되었다.
조직 및 역할
주로 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호위하였으며 짐을 수송하는 일도 맡았다.
변천
1731년(영조 7)의 수영패에 대한 역 부담 경감은 그다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던 듯하다. 1746년(영조 22) 당시에도 평안도의 군정들이 모두 1필을 내어 다른 도에 비해 역 부담이 헐하지만, 병영 소속의 수영패는 그렇지 못해서 스스로 신포(身布)를 갖추어서 전마와 군장을 갖추고 부번(赴番)하는데, 3~4일 거리를 가는 동안 말을 세내고 장비를 빌려 왕복하는 데 근 10일 남짓 걸리니 신포 외에 각종 비용이 적잖이 들어가서 가난한 백성들이 한 번 이 역에 들어가고 나면 감당을 못하고 파산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조처는 후에 어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750년(영조 26) 균역법이 시행될 때에나 1758년(영조 34) 『관서양역실총(關西良役實摠)』이 간행될 때에도 수영패에 관한 논의는 별반 없었다. 이것으로 보아 수영패의 납포 면제는 1740년대 후반에 가서야 완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수영패의 입번은 계속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도 수영패가 입번하였다는 보고 기사가 있다.
참고문헌
권내현, 「조선 후기 평안도 방어 체제의 정비와 이완」, 『사학연구』 69, 2003.
정연식, 「17·18세기 평안도 양역제의 변천」, 『한국문화』 27, 2001.
순환조발(循環調發)
정의
요역의 노동력을 징발할 때, 관찰사가 필요한 노동력의 크기를 고려하여 도내의 각 군현에서 순차적으로 돌아가며 분정(分定)하거나, 수령이 군현 내에서 순차적으로 돌아가며 징발하는 일.
내용
1471년(성종 2년)에 요역의 운영 방식을 규정한 역민식(役民式)이 제정되어, 징발의 기준, 징발의 체계 등을 규정하였다. 모든 수세전(收稅田) 8결마다 1명의 역부를 징발해서 사역할 수 있다는 것, 관찰사는 공역(功役)의 크고 작음을 헤아려, 순환해서 징발할 것 등을 포함하였다. 관찰사는 역사의 규모를 참작하고, 관내 군현에서 징발할 수 있는 인원수를 고려하여, 군현별로 요역을 분정하였다. 관찰사는 도내의 전 군현을 대상으로 일제히 역부를 징발할 수도 있으나, 대체로 순환조발(循環調發)의 방식을 채택하였다. 일이 있을 때마다, 관내 각 군현을 돌아가며 요역을 부과하는 윤차균역(輪次均役)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요역 분정의 방식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요역 부담에 있어서 지역적인 불균형이 있었다. 예컨대 대로 연변에 있는 군현에 보다 많은 부담이 전가되었다. 연로의 군현은, 그 지리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임시적인 각종 잡역을 집중적으로 부담하는 형편이었다. 특산물이 생산되는 군현이라면, 공납·진상과 관련된 요역 부담이 많아질 수 있었다. 따라서 도내에서도 요역제의 운영은 지역적인 불균형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순환해서 부과하는 방식은 공물을 상납하는 일에도 적용되었다. 조선초기에는 호별(戶別) 토지 소유량에 따라 호등(戶等)을 나누어 공물을 분정하였지만, 성종대 이후 역민식에 의한 전결 분정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8결윤회의 분정 방식이었다. 공물을 윤회 분정하는 일은 16세기말 선조대에도 시행되었다. 1년에 여러 번 각관에 공물이 부과될 때마다 8결 단위로 돌아가면서 거두는 방식이었다.
용례
下役民式于戶曹 一應收稅田 每八結出一夫 觀察使量功役多少 循環調發 若事鉅不得已加調發 則六結出一夫 須啓聞乃行 其京藏氷 採金 修站館 築牧場 埋貢炭 造橋梁 刈郊草 鐵物吹鍊 牧場驅馬 禮葬造墓 爲常例調發 築城 運米 天使轎夫 新築牧場 波吾達 焰硝 輸木 石築 堤堰 山臺 採葛 石灰燔造 爲別例調發 [『성종실록』 2년 3월 19일]
참고문헌
윤용출, 「15·16세기의 徭役制」, 『釜大史學』 10, 1986.
이정철, 「조선시대 貢物分定 방식의 변화와 大同의 語義」, 『韓國史學報』 34, 2009.
신량역천(身良役賤)
정의
조선초기 신분은 양인이지만 천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봉수간·염간·진척·화척 등 칭간칭척으로 불린 계층.
개설
신량역천 계층은 조선왕조가 개창되어 신분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칭간칭척자(稱干稱尺者)로서 이들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해 왔던 계층으로 보충군(補充軍)이라는 병종에 속해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은 신분보다 그들이 지는 역의 특수성에 의하여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갔다.
담당 직무 및 변천
조선왕조는 건국 직후 통치체제를 쇄신해가는 가운데 신분제 역시 정비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신분은 양인인데 지는 역이 천한 신량역천 계층이 나타나게 되었다. 신량역천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칭간칭척자’였다. 칭간칭척자들은 대부분 특정 기관에 소속되어 군역 이외에 특수한 역역(力役)에 종사하거나 일정액의 현물을 부담하였다. 정부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능·묘 등에 제사와 수호를 위하여 마련해 둔 위전(位田)을 지급하거나 잡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칭척자는 신라 이래 신분과 역을 세습해 온 천역 부담자였고, 칭간자는 고려전기까지 ‘척(尺)’으로 부르던 일단의 천역 부담자가 후기에 와서 ‘간(干)’으로 대체되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이들은 일반 양인들과는 구분되는 존재였다. 1392년(공양왕 4)에 문적이 분명하지 않은 자와 천부(賤夫)·양녀(良女) 사이의 소생을 양인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1401년(태종 1) 양(良)·천(賤)이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교혼(交婚)한 남녀를 별거시킴과 동시에 노주(奴主)를 처벌하고 그들의 소생을 신량역천으로 선언하였다. 사실상 이 무렵 신량역천 계층이 탄생한 셈이었다.
신량역천의 실질적인 내용은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키면서도 관리로의 진출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이들에게 천역을 부담시킨 것은 칭간칭척자의 선례에 따른 것이었다. 국가는 이들을 천역 대신 신역, 즉 군역에 충당하였지만 사재감 수군이라는 특수한 군역에 몰아넣음으로써 일반 양인과 구분하였다. 동시에 관직에 진출하는 자격을 불허하려는 본래의 목적을 관철시켰다[『태종실록』 14년 1월 4일]. 이러한 방침은 태종 말년에 와서 일정한 제한을 가하되, 관직 진출을 일부 허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들을 한곳에 모아 놓기 위하여 사재감 수군(水軍) 대신 보충군(補充軍)이라는 특수한 병종을 신설하였다. 이에 염간(鹽干)을 제외한 모든 칭간칭척자는 보충군의 입속 대상이 되었다[『태종실록』 15년 3월 8일]. 비록 서울에 와서 역을 행해야 한다[赴京入役]는 부담으로 인하여 기피자가 속출하였지만 그 반대의 측면도 있었다. 즉, 칭간칭척자가 보충군안(補充軍案)에 들어가게 되면 이전까지의 역이 면제되었을 뿐 아니라 입역을 마치고 서반의 대장(隊長)·대부직(隊副職)을 받아 정7품까지 오를 수 있게 한 것은 그들의 신분적 지위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조치였다.
정부가 칭간칭척자를 신량역천이라 하여 보충군에 입속시킨 데에는 현실적인 목적도 있었다. 건국 이래 호적(戶籍)과 군적(軍籍)을 정비하면서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국역 자원이 대폭 증가하였다. 이에 반하여 국내외 정세는 안정세를 유지하였다. 그 결과 국가는 대규모의 역사나 특정 물자의 생산을 위하여 일반민호와 군사의 유휴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여기에 1406년(태종 6)에 폐지한 각사노비 80,000여 구(口)를 확보하여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업무에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사항이 칭간칭척자와 같은 정역호(定役戶)를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중앙의 각 아문에 사령(使令)이나 잡역에 동원되던 서반(西班)의 대장·대부를 숙위(宿衛)의 임무로 환원시키고 그 공백을 칭간칭척자로 메우려는 의도도 있었다.
칭간칭척자를 보충군에 입속한 조치는 이들에 대한 양인으로서 신분 보장과 천역 부담의 철폐를 제도적으로 확인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는 칭간칭척자의 소멸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점차 칭간칭척자는 신분적 제한보다 그들이 지는 역의 특수성에 의해 규정되었다. ‘간(干)’, ‘척(尺)’이라는 특수한 계층을 지칭하는 칭호가 점차 정역호를 가리키는 칭호가 되면서 이들 칭호도 점차 소멸되어 갔다. 그리하여 세조대에 이르면 신분적 차별을 보이지 않는 ‘부(夫)’나 ‘군(軍)’을 사용하거나, ‘간’이라는 표현이 삭제되었다. 이에 따라 법제상 신량역천의 계층은 사라지고 단순한 수사적 의미만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담당한 역이 고역(苦役)이며 이 고역을 세전(世傳)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는 변하지 않았다. 이는 법제상으로는 사라졌으나 현실에서는 여전히 신량역천의 계층이 존재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참고문헌
유승원, 「조선초기의 ‘신량역천’계층-칭간칭척자를 중심으로」, 『한국사론』 1, 19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