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글] 3.1 운동 당시 손병희와 이완용의 대화
ㅇㅇ(223.39) 2024.05.26 19: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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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을 앞두고 민족대표 33인이자 천도교 지도자인 손병희는 "매국노까지 독립을 원한다면 온 민족이 다 독립을 원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라며 이완용의 집에 찾아가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세상에서 당신을 매국적이라고 하는데 흥국대신(興國大臣) 한번 될 생각은 없소?"
이에 이완용은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했다.
"내가 2,000만 동포에게 매국적이라는 이름을 들은 지 이미 오래이오. 이제 새삼스러이 그런 운동에 가담할 수는 없소. 이번 운동이 성공해 독립이 되면, 먼 다른 동리 사람들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 동네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외다. 손 선생의 이번 운동이 성공해 내가 그렇게 맞아 죽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올시다."
이후 이완용은 일제에 거사 계획을 누설하지는 않았지만 3.1 운동이 발발한 후 일제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만세운동을 망동이라 비난하는 경고문을 세 차례나 게재하였다.
일제 앞잡이로 악명 높았던 신철이라는 경찰도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것을 알아채고 보성사 사장 앞에서 선언서를 압수했으나 총독부에 고자질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몸을 피했다는 것을 보면 , 친일파들도 마음속으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막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3.1독립만세운동은 인구의 10%가 넘는 인구가 참여하는 대규모 운동으로 확대되었으나 33인 혹은 48인의 민족 대표가 제대로 주축을 이루어 운동을 이끌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33인 대표는 거사일에 자수하고 감옥으로 들어갔으니 청년 학생들은 구심점이 약한 운동을 가열차게 지속하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에 결국은 무너지고야 말았다.
그러나 4월11일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촉발점이 되어 대한민국의 민족정신을 세계만방에 알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