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볼강휴게소를 지나 야산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울란바토르 시내로 가는데 퇴근 시간에 맞물려 도로에 차량이 너무나 많아 양혜숙 선생과의 만남이 어렵게 되어 약속을 내일로 연기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드렸더니 양혜숙 선생이 내일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는 '이태준선생기념공원'에서 제74회 광복절 경축식 행사가 있는데 '고조선 유적 답사회' 탐사대원들 모두 행사에 참여하면 좋겠다는 광복절 행사 공식 초청장이 폰으로 날아왔다. 이번 몽골 여행시 통신이 원활하게 터져 sns 활동에 전혀 불편함이 없어 참으로 좋았다.
나는 안동립 탐사대장에게 울란바토르 광복절 행사 소식을 전하고, 양혜숙 선생에게 안동립 대장의 행사 참여의사를 바로 알렸다.
이태준(1883~1921)선생은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24살인 1907년 10월 1일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하고, 28세인 1911년 6월 2일 졸업하고 의술개업인허장(제92호)를 수여받았다. 2회 졸업생인 이태준은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옥살이 휴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도산 안창호를 만나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의 권유로 최남선에게 추천되어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의 자매단체인 청년향우회에 가입하고 활동하다가 일제가 조작한 사건인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중국 난징으로 급히 망명한다.
105인 사건은 1911년에 일제가 대한제국의 민족투사들과 독립항쟁을 탄압하고 무단통치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1910년에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安明根, 1879년 9월 17일~1927년 7월 7일)이 황해도 일천 일대를 중심으로 만주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금하다 일제 경찰에 잡혔는데, 조선총독부는 이 행위를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을 위한 모금 활동으로 날조하고 전국에서 600명의 독립항쟁가들을 검거하여 온갖 고문과 날조로 105명에게 실형을 선고한다.
이 과정에서 신민회의 존재가 처음으로 드러나 신민회는 해체되고 신민회 참여자들은 모두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 1심에서 105명 모두 유죄를 선고를 받았으나, 항고심 2심에서는 99명은 무죄, 6명은 유죄가 선고되었다. 윤치호는 6년을 수감하였고, 이동휘는 함경도에서 체포되어 황해도 무의도에서 3년을 유배되었고, 옥관빈과 양기탁은 4년을 감옥에서 살았고, 이승훈은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안명근은 10년간 감옥에서 복역을 하다 1922년 출옥후 남만주로 망명 1927년 타국에서 병사한다.
1912년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이태준은 어렵게 국내 탈출에 성공하여 난징에 도착하자마자 <기독회의원>에서 의사로 취직하고,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군의관 감무(監務)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1914년 이태준은 김필준의 매제인 김규식(1881~1950) 선생의 권유로 몽골 울란바토르로 향한다.
당시 몽골은 의료 사정이 매우 열악하고 화류병이라는 매독이 퍼져있어 의료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였다.
당시 몽골에서는 병에 걸리면 라마교 승려에게 부탁하여 주문을 외우고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하는 옛 방식을 고집하고 있어서 병이 잘 났지를 않았다.
이태준은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같은 뜻을 가진 위대한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큰 뜻을 갖는 «동의의국(同議醫局)»이라는 병원을 개설하여 근대적 의술로 많은 몽골사람들과 중국인들의 풍토병과 다양한 질병 퇴치에 전념한다. 1914년에는 몽골의 마지막 황제인 '보그드 칸 8세' 주치의로 선정되고 神人, 극락에서 내려온 여래불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또한 중국군 사령관 가오 시린(Gao Silin)의 주치의로도 활약했다. 1919년 7월 보그드 칸은 몽골 최고 훈장인 일명 금강석이라고 불리우는 '에르테닌 오치르'를 이태준에게 수여한다. 이태준이 훈장을 받은 사실은 1919년 11월11일 <독립신문>에 보도되어 국내에 널리 알려진다.
대암 이태준은 몽골에서 많은 독립투사들을 지원하고 비밀 항일투쟁 활동에 큰 공적을 남긴다.
한인사회당 주도로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확보한 코민테른 자금 40만불 상당의 금괴 운송에 관계하다가 마땅한 사람이 없어 의열단에 가입하여 직접 운송에 참여를 결정한다.
이태준은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독립자금 금괴 40만루불중 36만불 상당의 금괴를 여러 사람을 통해 안전하게 다 전하고 마지막 남은 4만루불 상당의 금괴를 베이징으로 직접 전달하려고 기차를 탔다가 1921년 2월 일본 밀정의 밀고로 몽골을 침입하여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던 소련 백위파 운게른 스테른베르그(1885~1921) 부대원들에게 기차에서 1921년 8월15일 체포되어 고륜으로 압송되어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가 사형집행조에 의하여 비참하게 38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몽골 사람들은 이태준 선생과 한 살 된 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자이승 전망대가 위치한 산 구릉의 서북 경사지에 묘지를 단장한다. 이 묘지는 오랜 기간 몽골의 왕족과 귀족인 라마승려들의 묘지터였는데 자이승 전망대 를 건립하고 올라가는 길을 새로 만들면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동안 이태준 선생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을 역사에 묻혀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에 최규하 대통령이 대암(大岩) 이태준 선생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표창 추서 내용은 김규식 지사의 파리평화회의 임시정부대표단 참석 경비 2000원 헌납에 따른 공로로 추서하였다.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격상되는데, 이것은 1919년에 받은 몽골 최고 훈장 서훈으로 다시 격상되었다.
1990년 3월 한국과 몽골이 수교를 하게되어 국가간 교류 사업이 활발하게 새롭게 추진된다.
연세의료원이 1993년 몽골국립대와 의학 교류협정을 체결하고 나서 1994년에 몽골·연세 친선병원을 건립하고 몽골 국민들 치료에 정성을 쏟는다. 몽골 사람들은 '그곳에 가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 병원은 항상 만원이었다. 비롯 입원 환자를 위한 병상이 마련되지 않았는데도 매일같이 100명의 환자가 몰려왔다.
1998년 4월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인 반병률 교수가 연세대에서 개최된 '한국 의사 배출 90주년 기념강연회'에서 ' 세브란스와 독립운동'에 대회 강연한 이후 의사 이태준 선생의 공적과 존재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몽골 최초 개업의사이며, 몽골YMCA를 세워 초대 이사장과 몽골·연세 친선 초대병원장이었던 전의철 박사(1931~ ) 부부가 여러 해 동안 이태준의 묘소를 수소문하고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 조성에 온 힘을 다해 노력한다. 이태준 선생의 묘소를 알아내려고 몽골 정부 기록보존소를 방문하여 기록을 몽땅 뒤지고 몽골국영TV에 광고방송을 내보내 제보자를 찾았지만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전의철 박사는 몽골에서 조국 독립과 혁명운동에 참여한 이태준 선생님의 묘소 찾기를 단념한 채 마지막 소원인 '이태준기념비'라도 세워야겠다는 간절한 생각으로 2000년 몽골 울란바토르시에 200평 부지를 공식 요청한다.
그런데 얼마있다가 뜻밖의 소식이 날아든다. 울란바토르시에서 "대통령궁과 가까운 부지에 2,127평을 주고, 여기에 기념공원을 세우면 어떠냐?"라고 역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장소는 몽골 울란바토르 시내가 모두 바라다 보이는 몽골의 성산(聖山)보그드산 '자이승 전승기념관' 아래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
몽골에서 병원장을 마치고도 기념비 조성에 적극 앞장섰던 전의철 박사는 연세의료원과 그동안 알고 지낸 모든 사람들에게 연락하고 몽골대사관과 많은 사람들의 협조와 연세대 의대동창회의 비용 마련으로 2000년 7월 8일 이태준기념비와 가묘를 세우고, 2001년 7월 19일 이태준기념공원 준공식을 가졌다.
2006년 게르 형태의 이태준기념관을 세웠으나 얼마 안가서 망가지고 비가 새고 부서져 몽골에 다녀온 많은 여행가들이 글들을 통해
기념공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되며 계속 논란이 되었다.
2007년 5월 28일 '엥흐바야르 남바르' 몽골 대통령이 한국을 국빈 방문하여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한·몽골 정상회담 결과 공동 언론발표문> 21항를 발표하면서, 15항에 "양측은 한·몽골간 역사적 우의의 상징으로 울란바토르시에 세어진 이태준의사 기념공원을 영구히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적극 협력하고 , 이를 위해 필요한 법적 절차를 조속한 시일내에 완료하기로 하였다."고 이태준의사 기념공원 사업에 협의하였다.
2007년 경남 함안군은 몽골 현지를 방문하고 돌아와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하고 2008년 9월 6일 이태준 선생 선양에 대한 모임을 처음으로 개최하고, 2012년 1월 13일 '대암 이태준선생 기념사업회 사단법인 ' 등기를 마치고 많은 사업을 펼치고 있다.
2008년 1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와 몽골 자연환경부간 양해각서를 체결, 부지의 안정적 사용 기반을 마련하였다.
2010년 6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와 연세의료원의 재정지원으로 통나무집 형태의 이태준기념관을 신축하여 주몽골대사관, 재몽골한인회, 연세의료원, 몽골 정부 파견자로 구성된<이태준 기념공원 보존위원회>가 조직되어 관리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15평 규모의 이태준기념관 내부에는 대암 이태준 선생이 도산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과 1936년 빌행된 여운현 선생의 1921년 이태준의 묘소 참배 기록문인 «몽고 사막 여행기», 이태준의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사진과 많은 자료가 진열돼 있다.
2017년 2월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이태준 선생을 선정되었다. 공적 개요 중에는 그동안 나타난 여러 활동과 함께 1921년 의열단에 폭탄 제조 기술자'마자르' 소개 추진이 병기되어 있다. 소설가 박태원(朴泰遠,1910~1986)은 «익산과 의열단»이란 책에서 '마자르'가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1898~1958)을 찾게 되는 감동적인 장면을 서술하였다.
현재 많은 몽골 사람들은 몽골에서 인술을 편 대암 이태준 선생의 숭고한 박애 정신를 높이 기리고, 1994년 몽골·연세 친선병원장을 마치고도 여러 해동안 변함없이 의료 봉사를 해주고 몽골을 떠난 전의철 박사 부부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고 공적을 기억하고 있다.
이태준 선생은 한국·몽골 친선의 상징적 대표적 인물로 추앙받고 평가받고 있다.
제74회 광복절 경축식을 몽골 울란바토르 이태준선생기념공원에서 페이스북으로 실시간 생중계를 하면서 조국 독립 항쟁에 나섰던 先人들을 추념하였다. 해외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제74회 광복절 경축식장은 감동 드라마의 연속이었고, 경축식 행사에서 기념사를 들으며 정말 눈물을 참느라 무척 힘들었다. 광복절 경축식 식장에는 서울에서 온 합창단, 공연단, 관광객, 정치인, 몽골에 거주하는 600명의 교포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되었다.
몽골 울란바토르시 이태준선생기념공원 제74회 광복절 경축식 행사장(2019.8.15 오전 10시)
뒤에서 두번째 줄에 저리거 사장, 독도를 다녀올 때 입은 파란색 옷의 안동립 대장, 초록색 모자의 정의영 대원, 흰색 머리의 정호진 대원, 자료를 송출하는 궁인창 대원, 홉스콜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계신 홍승원 단장)
제74주년 광복절 경축 기념식은 예정보다 30분 늦게 진행되었다.
서울과 동시에 경축 기념식을 진행해야하는데,
대통령 기념사가 몽골주재 한국대사관에 늦게 도착하여 식전 공연을 모두 관람하고 경축식이 시작되었다.
기념사, 축사 인사말 경청
제74회 광복절 행사가 개최되는 '이태준선생기념공원' 주변이 일찍 차량통제가 된다고 하여 대원들은 아침 일찍 호텔을 출발하여 제 오전 9시30분에 도착하였다. 광복절 경축식장에는 무대 준비와 리허설 준비로 바쁜 모습이었고 행사가 에정보다 조금 늦게 시작된다는 말씀에 자이승 전승 기념탑을 먼저 다녀오기로 하였다.
태극기를 손에 든 김상수 교수
행사장 준비 모습
자이승 전승 기념탑(Zaisan Memorial)은 몽골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연합 몽골인과 소련 군인들을 기리기 위하여 1971년에 건립되었디. 612개의 계단을 오르면 과거의 아픈 전쟁을 다시 한 번 생각하였다. 전승기념탑에 오르면 현대화된 울란바토르 시내가 잘 보인다.
안동립 탑사 대장과 김상수 교수도 몽골 힐링여행중에 있었던 즐거웠던 일들을 회상하며 자이승 전승 기념탑에 올랐다.
아침 일찍 울란바토르 역전을 보고 싶어서 오전 6시30분 운동 삼아 걸어서 역에 도착했다.
역에는 미터기가 달린 택시들과 가격을 정해서 타는 자가용 택시가 무척 많았다.
북경과 울란바토르를 오가는 기차는 시베리야를 횡단하여 멀리 모스크바까지 이어진다.
오전 7시 30분 북경가는 기차에는 젊은 외국인들과 가족 여행객이 많이 승차하였다.
기차에는 중국 기차임를 알리는 문장과 행선지를 알리는 한자와 몽골 키릴문자도 있었다.
울란바토르 역전 앞 사진
몽골을 두 번이나 방문했지만 키릴문자를 알지 못하여 조금은 아쉬었다. 몽골의 철도 개발은 1949년에 처음 시작되어1961년에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몽골 종단 철도(TMR)의 총연장은 1,815km로 러시아 울란우테에서 중국 국경 얼렌까지이다. 내년에는 몽골철도박물관을 꼭 구경해야겠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는 날씨에 홍승원 단장과 함께 울란바토르 기차역 내부를 돌아보고 아침 산책을 즐겼다. 이제는 호텔로 돌아가 아침 식사를 하고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장으로 이동해야한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보이지 관광호텔에 도착했다.
도산 안창호
제74주년 광복절 기념식 리플렛
이태준선생 기념공원 안내 표지판
제74회 광복절 경축식장 준비 사진(몽골 울란바토르)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 비석
행사 안내
이태준선생 기념공원
전승기념탑 입구에 전시된 탱크 조형물
김상수 교수와 이효웅 해양탐험가
"소련사의 기억은 하늘의 태양처럼 영원하고, 대지를 태우는 불처럼 신성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몽골은 구 소련군을 지원하여 많은 성금을 보내고 탱크 여단 병력을 파병했다. 탱크 조형물 아래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3년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1945년 베를린까지 탱크가 갔던 길이 그대로 비석에 새겨져 있다. 자이승 톨고이 앞마당에 있는 탱크 조형물은 베를린에서 가져온 실물로 1968년에 자이승 도심 교차로에 있었는데 2003년 이전하였다.
자이승 전망대 모자이크 벽화에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보여주었다. 1939년 5월 11일부터 9월 16일까지 이어진 할인골 전투(할하 강)에서 일본 관동군은 소련군의 근대화된 기갑 전력에 수 만 명이 괴멸당하고 소련군도 8,000명 이상이 전사하였다.
최근 들어 자이승 전망대 주변이 개발되기 시작하여 신도시가 세워지고 있었다. 작년 6월에는 집들이 적게 보였는데 개발 속도가 엄청나게 빠름을 볼 수 있었다. 이 지역은 겨울에 매연이 적어서 점차 신흥 주택가로 변모하고 있다.
모자이크 벽화에는 우주인이 그려져 있는데 1981년 3월22일(14:58:55 UTC) 구 소련이 제작 발사한 Soyuz 39호 우주선에는 연구 우주비행사로 몽골인 구르락차(Gurragchaa)와 소련인 우주비행사인 사령관 자니베커프(Dzhanibekov)가 타고 있었다.
소유주 39호는 우주 15번째 탐험으로 8번째 승무원들을 Salyut6 우주정거장으로 데려갔다. 그는 아시아 두 번째 우주인이 되었고, 전 세계 101번째 우주인, 몽골은 아시아 최초의 우주인을 탄생시킨 국가가 되었다. 구르락차는 1947년 12월생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모스코바 시주코스피 공군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몽골에 돌아와 비행조종사가 근무하다가 우주센터 실무자에게 발탁되어 1978년부터 가가린조정센터에서 우주여행을 충실하게 준비했다.
우주에서 7일 20시간 42분 3초 동안 머물면서 성공적인 우주개발에 공헌한 구르락차는 양국에서 '인민영웅;의 칭호를 수여했고, UN의 소회의에서 우주 개발의 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시절 몽골 인민회의 부장과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2000년~2004년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2003년에는 많은 몽골 국민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화유지군을 파송하여 이제는 몽골인들이 평화 유지의 중요성과 국제교류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구 소련(소비에트)은 몽골의 우수 인력을 가가린조정센터에서 길러냈고, 소유즈 39호 백업 승무원으로 몽골인 우주비행사 '마이 다르 자빈 간조 릿'을 양성했다.
구르락차(Gurragchaa)는 소련-몽골 우주공동비행을 기념하는 주화에 들어있는 위대한 인물이다. 몽골 국기에는 달이 그려져 있다.
몽골 사람들은 높은 곳에 상징물을 세우기를 숭상하여 많은 봉우리와 언덕에 기념물을 조성하였다. 자이승 언덕에도 기념물을 세웠는데 러시아 조각가 레오가 만들었다. 기념물에 있는 낫은 농민, 망치는 노동자, 칼은 러시아의 독립과 자유를 의미하였다.
제74주년 광복절 식순
홍승원 단장과 이효웅 해양탐험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국민이 지킨 역사
국민이 이끌 나라
광복 74주년(몽골 울란바토르 이태준선생 기념공원)
기념식
애국가 제창
신익재 대표(출판사 비지아이)는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을 드론을 띄워서 모두 촬영하였다.
앞으로 소중한 자료로 남을 것 같다.
만세 삼창하는 모습을 안동립 대장이 360도 카메라로 촬영하였다.
오래동안 자리에 앉았던 대원들은 뒤에 서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리를 양보하였다
나는 광복절 행사장 모습을 페이스북을 통하여 실시간 중계하였디.
고조선 유적 답사회 탐사대원(2019.8.15)
감동의 시간이었던 광복절 행사를 마치고 간단사로 출발하면서 기념촬영(자이승 전승탑 주차장)
대한민국 만세! 몽골울스 만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