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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0.5점 차이로 탈락했을 때의 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너무 속상해서 울고 있는데 그냥 틀어놓았던 찬양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 .”선발전에서 떨어졌는데 그 분이 자신의 길을 알고 있다고 하시니, 그 찬양을 들으며 믿음을 가지고 선수 생활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나 리우 올림픽 선발전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리우 올림픽 1차 선발전에서도 장선수는 6등을 했습니다. 1,2차전 선발전에서 합계 3등 안에 들어야 올림픽에 나갈 수 있으니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었겠습니까? 그렇게 1차전을 마치고 장 선수는 아버지에게 전화로 이렇게 푸념을 했답니다. “나 이제 교회 안 다녀요. 하나님을 안 믿으면 성질도 내고 할 텐데 그렇게도 못하니 더 힘들어요” 그 때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네 믿음의 분량이 그 정도밖에 안되니 그렇다.” 그 말에 장선수는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리고 2차전에서 1등을 하면서 기적적으로 3위에 올라 국가대표가 되었답니다. |
우리의 삶에는 때때로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그 정도밖에는 되지 않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이죠.
욥의 고백이 생각나는 때가 있습니다.(욥기 23:8-9)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수 없구나.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장 불행한 순간은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요, 가장 행복하고 담대한때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주의 임재 아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가 아닐까요?
생각나는 찬양이 있습니다.
주의 날개 아래 거하는 것 주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
나의 가장 큰 소망 나의 가장 큰 은혜
주와 함께 동행하는 일
2019년 5월 청소년부에서 사역하는 박성만 목사님이 안수 받고 첫 설교를 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설교가 너무 떨려서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떠는 이유를 생각해 보니 설교를 잘하고 싶어서였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와 함께 해주세요.”
그 날 설교가 창세기 39장을 내용으로 한 요셉의 이야기였습니다.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에게 붙여진 별명이 ‘형통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형통함이란 모든 일이 잘되었다는 의미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다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던 사람이죠.
그에게 형통함이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다는 말입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갈때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애굽의 총리를 꿈꾸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삶이 형통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죠.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소망은 문제없는 삶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삶이 아닐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주의 날개 아래거하는 삶이 아닐까요?
욥에게 있어서 얼마나 막막한 상황입니까?(욥기 23장 8-9절)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의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니 말입니다.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식들과 재산을 다 잃고 건강도 잃은 상황에서 친구들이 그에게 욕을 합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그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묵상의 유익은 우리가 인생의 모든 것을 이해하거나 알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분문 말씀 10절에 ‘단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NIV 성경에 보니 ‘test’라고 되어 있더군요.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시험’은 ‘단련’과 동일한 말인듯싶습니다.
시험의 시간들을 통해서 우리 인생이 순금처럼 제련되고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뜨거운 불에서 하나하나 더러운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거짓된 삶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주 좋은 예가 될 듯합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시험을 볼 때 감독하는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을 보세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와서 당당하고 신나게 답을 쓰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문제는 보이는 데 답이 보이지 않아 고민하거나 긴가민가해서 알쏭달쏭해 하는 학생도 있을 것입니다. 또 아예 시험을 포기하고 답안지에 1자를 칠하고 잠을 자는 학생들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학생들을 보며 시험장에서 감독하는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난 후에야 답을 확인해 틀린 것과 맞는 것을 확정하게 될 것입니다. |
때로 우리 인생이 ‘연단’의 순간을 지나고 ‘시험’을 치를 때, 하나님은 침묵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길을 하나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입니다.
욥기 23장 10절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우리가 아는 것은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욥의 이런 고백은 그가 시험의 시간 중에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물었고, 답답하지만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 연단의 시간을 걷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아신다.’는 고백은 ‘일상의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찾아오는 고백입니다. 운명론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인생’에 대한 기대를 가질 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욥의 고백은 지금 가는 길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단련하고 계심을 고백하니, 이후 ‘순금같이’ 나올 자신을 기대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만일 자신의 삶에서 실망이 찾아왔다면, 아마도 대부분이 원치 않는 환경 때문일 것입니다. 때때로 자신의 삶이 ‘하찮게’ 여겨질 때, 인생이 실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죠.
좀 더 멋지고 굉장한 일들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으나, 평범한 자신의 일상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결국 ‘실망’이라는 단어는 ‘깨어진 자신의 기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럼 여기서 묵상하는 사람들을 통해 묵상의 유익을 나누어 볼까요? 묵상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기대하게 되는 지를 말입니다. |
먼저 묵상이라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의미 있고 복되게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오류 가운데 하나는 ‘묵상’을 통해 특별한 일을 꿈꾸며 인생의 드라마틱한 순간만을 기대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요즘 깨닫는 것은 일상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욥기 23장 8-9절)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이 말씀을 통해 어떤 느낌이 드나요?
하나님은 앞에서도 일하시고 뒤에서도 일하십니다.
하지만 욥이 그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욥은 왼쪽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돌이켜봐도 그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부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뉴스 하이라이트
가끔 TV 프로를 보면 스포츠 ‘하이라이트’라는 제목으로 방영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축구 같은 경우는 현란한 개인기로 골을 넣는 장면, 야구는 결정적인 순간에 홈런을 치거나, 환상적인 수비를 하는 장면, 요즘은 당구 중계를 참 많이 하는데 당구는 개인의 기록인 ‘하이런’을 치는 장면, 미식축구에서는 환상적인 패스와 캐치 그리고 터치다운의 순간들, 농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높이로 덩크 슛을 하는 장면 같은 것들이죠.
이런 장면을 보고 마음에 상상을 해보면, 우리도 그런 경기를 할 때 이렇게 환상적인 플레이를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쭙잖게 흉내를 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결정적 플레이 뒤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패스가 있었고, 평상시 뼈를 깎는 노력이 있었겠지요.
(오래전 축구를 하면서 가졌던 착각!) 언젠가 골프 해설을 하던 교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프로선수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참 놀랍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멀리,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칠 수 있는지 말이죠. 그런데 정작 선수들은 18홀 경기를 하고, 수십 번 스윙을 하는 동안 자신의 맘에 드는 샷은 1~2번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저는 말씀 묵상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매일 매일 일상 속에서 말씀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 아주 중요한 결정의 순간들을 맞이할 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누군가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멋진 결정과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이 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묵상의 가장 큰 유익은 우리의 기대가 깨어지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들어와 믿음을 가지게 되는 명확한 증거는 우리의 시간과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과 때’로 바뀜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함이 아니라 가장 확실한 믿음의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실체가 없는 기대를 우리는 ‘요행’이나 ‘행운’이라고 말합니다.
묵상하는 자들의 기다림이 이와 다른 이유는 가장 확실한 믿음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시며 우리의 인생에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그 분의 약속과 말씀을 붙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소망의 항구로 우리를 끊임없이 이끌어가는 원동력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변에서 꽤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서조차 기다림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제사장 사가랴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친족입니다. 이들을 통해 6개월 먼저 세례요한이 태어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 때 천사가 사가랴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너에게 아이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사가랴는 그의 아내 엘리사벳과 함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천사의 메시지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정작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셔도 자기 상식의 한계를 벗어나면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포인트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내가 믿는 것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는 하지만 내가 믿는 것을 벗어나는 순간 “기도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라는 굳센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기대가 없는 믿음은 허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피상적으로 보이고 내 삶에서 충분히 묵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묵상의 유익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 능력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말씀 안에서 내게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으며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은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아니, 이미 일하고 계시던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내가 원하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뿐이지 하나님의 손이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저는 뮤지컬을 참 좋아하기도 하고 볼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요즘 뮤지컬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음악도 좋지만 무대의 변화와 미디어의 기능이 참 놀랍다는 것 입니다. 사실 연기자들보다 더 놀라운 것은 무대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무대장치들입니다.
지난 해 뉴욕에서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뮤지컬을 보면서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이 말하고 노래하는 것들이 놀랍게도 무대 여기저기서 신비롭게 들립니다. 사실 배우의 능력이 아니라 무대 뒤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묘한 음색으로 관객들에게 들리는 것이죠.
배우들은 무대 장치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곳에서 여전히 노래합니다. 뮤지컬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무대 장치를 준비한 감독의 손길에 따리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기다림과 기대”는 바로 무대 뒤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며 느끼고,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분명하게 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어느 유명한 영화 제작자의 인터뷰에서 나왔던 인상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Q. 관객들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참 흥미롭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스토리를 전개해 나갈 수 있을까요? A. “그건 간단합니다. 마지막 결론 장면을 정해놓은 게 제일 먼저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영화를 만들어갑니다.” |
‘기대’는 이미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며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우리 삶이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악의 심판을 믿습니다. 우리는 결국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묵상은 우리를 기도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인도합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0. ‘…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구하거나 생각한다는 것은 ‘기도’가 아닐까요?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대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믿음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기대한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기대를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의 기대를 채워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여전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기대를 상실하고 맙니다.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조급함’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기대가 있는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서두르지 않도록 인도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늘 ‘기회’가 찾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오는 것인지, 아니면 사단이 우리를 유혹하려는 불의한 방법인지를 잘 구별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사단의 방법은 우리의 욕망에 ‘만족’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방법은 불의를 넘어 공의의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공의와 진리가 우리의 욕망을 따라 오기보다는 욕망을 넘어서야 하는 순간이 더욱 많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1949년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아주 젊은 설교자였던 시절, 로스엔젤레스의 한 집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윌리엄 R.허스트라는 신사가 그 설교를 듣게 된다. 허스트는 미국 대도시들에 신문사를 소유한 언론 재벌이었는데, 설교에 감명을 받고나서 자기 소유의 전 신문사 주필들에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기사를 내보내도록 했다. 기사가 나간 후 빌리 그래함은 순식간에 미전역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이후 그의 집회는 미국의 대형 스타디움에서 열렸고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자신을 홍보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자신을 알리는 ‘셀프 홍보’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 생각하고 그러한 노력이 우리를 성공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는 사람, 그리고 세우시지 않는 시간에 세워지는 것을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 방법 혹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법을 우리는 ‘인간적’이라고 말하며, 조금 더 지나치게 표현한다면 ‘욕망적’, ‘악마적’이 될 수도 있다. |
말씀을 묵상하는 자,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자가 가지는 믿음의 특권이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가장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며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오늘 참 묘하게도, 이 말씀을 거의 1년 전에 준비해 놓고 정리를 하다 생각난 일인데요.
2018년에 미국 맨해튼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참 많은 일을 같이 했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라고 말을 했더니 그 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마 그 때는 하나님이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아마도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이기에 만나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다보면 그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 순간 말입니다.
‘기다림’ - 말씀을 묵상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이런 믿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
원칙1: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장애는 ‘좋은 것’이 보인다는 것이죠. 조금 손해 보는 것 같고, 조금 더디 가는 것 같아도 약속을 소중하게 여기고 지키는 신실함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가치와 욕심으로 인해 약속을 깨거나 신실함을 잃지 않도록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묵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만나게 되죠.
“하나님은 우리를 빠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옳은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원칙 2: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연스런 욕망이 있습니다.
사실 욕망은 우리 인간들이 가진 본능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욕망이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욕망대로 살아가면 죄를 짓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길을 가게 만드는 것이 ‘묵상’입니다. 우리의 욕망을 이기고자 할 때, 손해 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참 바보같이 보이는 경우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가장 치열했던 싸움은 ‘욕망’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쓰실 수 있지만 아무나 쓰시지는 않습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의 욕망을 누를 수 있는 자를 하나님의 쓰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화’된다는 것은 어느 날 우리들의 모습이 이렇게 변해 가는 것이죠. 처음에는 의무적으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어느새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말입니다.
원칙 3: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 말씀이 나를 세워주는 날이 옵니다. ‘신앙인’은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가장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이 됩니다.
우리가 말씀의 원칙을 하나씩 지켜 나가다보면 어느 날 문득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주변의 사람들이 그 원칙을 세우고 살아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묵상에 이 원칙을 적용한다면,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불현듯 그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고 지지해주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