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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6 주일설교
히스기야와 산헤립
(왕하 18:28~36)
저와 설교학을 같이 공부하는 목사님 중에 진도가 고향인 분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 집에 진돗개를 길렀는데 어느 날에는 똥개 네 마리와 싸워서 이겼다고 합니다. 진돗개는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싸울 때만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인도 평생 한 사람에게만 충성하는 것이 진돗개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진돗개는 오직 자기 주인 말만 듣는다니 어쩌면 사람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사람이 누구의 말을 따르느냐 하는 데는 세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1)훌륭한 분을 선택하여 그 분 말만 듣는 진돗개 형이 있습니다. 2)줏대 없이 이 말을 듣다가 저 말도 듣다가 하는 갈대 형이 있습니다. 3)누구 말도 듣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하는 똥고집 형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스타일이신가요? 여러분은 누구의 말을 듣습니까?
이 세상에는 자기 말을 들으라고 요구하는 많은 목소리가 있습니다.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 애인, 배우자,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 세상 권력자. 사탄. 사탄의 속삭임을 전하는 꽃뱀. 이 많은 목소리 중에 여러분은 누구의 말에 반응합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누구 목소리에 반응하고 따르는 것이 생명의 길인지 가르쳐 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 목소리를 따라야 하는지,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깨닫고 생명의 길로 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난주에는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와 그의 어머니 헵시바에 관한 말씀을 설교했습니다. 지난주 설교 중에 히스기야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을 설명했는데 그 중 첫 번째 사건인 앗수르 대군을 물리친 이야기를 오늘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히스기야 당시에 앗수르는 중동지역에 대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조병호 박사가 쓴 『성경과 5대제국』이라는 책에서 첫 번째로 설명하는 제국이 바로 앗수르입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된지 6년 만에 앗수르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8년 후에 앗수르는 유다를 정복하려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부하장수 랍사게를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고 위협을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가 너희를 구원하리라고 말하지만 그 어떤 왕이나 신도 자기 백성을 앗수르 왕의 손아귀에서 건지지 못했듯이 여호와도 별도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히스기야의 말에 속지 않고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면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게 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왕 히스기야는 그 전에 이미 백성들에게 산헤립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역대하 32:7~8>에서 히스기야가 백성들에게 하는 말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이렇게 말한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혜립의 편지를 들고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앗수르의 대군 185000명을 밤사이에 다 죽여 버렸습니다.
히스기야가 백성에게 한 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1)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시다. 2)그들과 함께 하는 자는 사람들이고 우리와 함께 하는 이는 여호와시다. 3)여호와가 우리를 도우시고 대신 싸우실 것이다.
반면에 랍사게가 전하는 산헤립의 말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1)나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한 신이 어디에 있느냐? 2)히스기야는 모든 신들을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했는데 실수한 것이다. 그러니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히스기야의 말을 들은 백성들은 앗수르 왕이 위협해도 안심했습니다. (대하 32:8)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
앗수르 군대에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백성들은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가 백성들에게 대답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왕하 18:36) 백성이 잠잠하고 한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이것은 바로 성도의 바람직한 반응입니다. 세상 세력의 위협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목사의 말을 듣고 안심하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반응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당연하지만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히스기야의 말보다 산헤립의 말이 더 그럴듯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산헤립은 중동의 모든 나라를 합병한 대 제국 앗수르의 왕이었습니다. 반면에 히스기야는 앗수르 대군에 포위된 작은 나라 유다의 왕이었습니다. 상황적으로 볼 때, 히스기야의 말보다 산헤립의 말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 백성들이 히스기야의 말을 들는다는 것은 목숨을 건 믿음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성경을 통해 볼 때 인간들의 역사는 불신의 역사요,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그런 실패의 역사는 아담과 하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먹어도 죽지 않으며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고 한 사탄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후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보다는 사탄을 선택했습니다.
노아 때에 하나님은 홍수로 인류를 쓸어버리시고 믿음의 사람 노아의 가족만 남겼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후손들은 땅에 흩어져 충만하라는 명령 대신에 시날에서 바벨탑을 세우고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제국을 세우려고 했다가 언어가 혼잡해지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여호와만 섬기면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이 살게 될 텐데, 그들은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역사는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었지만 다윗의 후손 왕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온갖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사사기 뿐 아니라 열왕기의 역사도 불순종과 실패의 역사입니다.
성경의 모든 역사는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모범적인 믿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반면교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그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믿음의 사람들이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믿음의 후예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불순종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이야기, 그런 구원의 역사를 ‘구속사(救贖史)’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지나 교회 시대를 통해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왔는데 지금 우리는 바로 그 구속사의 흐름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나 신약 사도들과 교회의 이야기, 그리고 초대교회와 한국교회의 부흥 이야기는 모두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믿음의 왕 히스기야의 이야기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히스기야의 말을 듣고 산헤립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유다 백성들의 이야기도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산헤립의 부하 랍사게가 아무리 위협해도, 랍사게의 말이 히스기야의 말보다 그럴듯하게 들려도 전혀 대꾸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던 유다 백성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우리는 매번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들어야 할 말씀으로 첫째는 성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예수님의 최후 승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사의 설교가 있습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물리쳐야 하는 사탄의 음성도 있습니다. 산헤립의 위협이 있습니다. 산헤립은 목사의 말대로 하다가는 실패할 것이며, 성경말씀대로 살아서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땅에 살면서 하늘 법칙대로 살 수 없으니 살아남으려면 땅의 법칙대로 살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그 속삭임은 매우 그럴듯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볼 때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던 것처럼 우리 앞에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그런 거짓말과 속임수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물리치고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해결하셨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말도 됩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죄를 해결해 주셨다는 말은 성도가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유혹은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성도는 그 거짓말을 분별할 수 있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지켜야할 것 중에 주일성수 문제를 이야기 해 봅시다. 주일(主日)는 세상의 날이 아니라 Lord’s Day, 주님의 날입니다. 때로는 주일에 예배를 포기하고 일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우리의 재산 유무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달렸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 2:26)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죽자고 고생만 하는 죄인의 길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먹고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워서 예배를 포기하는 성도들이 전국에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조심도 하고 방역 수칙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칼럼에 썼듯이 조심하면서도 꼭 할 일은 해야 합니다.
매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은 3600명 정도입니다. 죽지 않아도 교통사고로 다친 사람과 장애를 입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일하러 가고 놀러 다닐 때, 교회 올 때도 자동차 타고 옵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죽은 사람은 6개월 동안 300명입니다. 1년이면 600명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은 코로나로 죽은 사람보다 6배나 많습니다. 죽은 사람만 생각해봐도 코로나보다 자동차가 6배 무섭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무서운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자동차가 무섭지만 조심하면서 타고 다닙니다. 코로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조심하고 예방수칙 지켜야죠. 우리는 식사도 포기하고 오후에 성경공부도 보류하고 주중의 모임도 다 취소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교회가 코로나 바이러스 공장인 것처럼 교회에 가지 말라고 문자를 보내고 교회에 행정명령을 내립니다. 설마 중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속에 교회에서만 활동하는 DNA를 심어서 보냈단 말입니까?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보다 6배 위험한 자동차도 조심하면서 타고 다니듯이 코로나 바이러스도 예방수칙 잘 지키면서 모여야 하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정부에서 교회 가지 말라고 하는 말은 꼭 산헤립의 말 같습니다. 서너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가 벌써 반년이 지났고 전문가들 중에는 코로나 시대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코로나가 안 끝나면 이제 예배드리기를 포기해야 하나요?
꼭 모이지 않아도 영상으로 예배드려도 충분할까요? 여러분은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영상통화만 하면 충분합니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군대 간 아들과 매일 통화해도 너무 너무 만나고 싶습니다. 만나서 꼭 안아 주고 싶습니다. 같이 지내고 싶습니다. 같이 밥 먹고 같이 놀고 싶습니다.
히브리서 10:25에서 말세가 될수록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는데 코로나 시대가 되고 보니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성도는 모여야 됩니다. 우리는 안 모이면 죽습니다. 당장은 안 죽는 것 같지만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하면 우리 영혼은 서서히 죽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몸이 와야 합니다. 교회 와서 마스크를 쓰고 서로 떨어져 안고 악수도 못 하고 얼굴만 보더라도 모여야 합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처럼 큰 교회도 방역을 철저히 했더니 확진자 한 명이 다녀갔는데 한 명도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교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중앙침례교회같은 대형교회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교회가 직장보다, 식당이나 카페보다 더 위험하지 않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도 히스기야의 말을 듣고 산헤립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말이 더 그럴듯한 그런 상황은 언제나 계속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말을 들으시렵니까? 진돗개는 평생 한 주인만 섬긴다는데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저의 주인은 세상에 아니라, 돈이 아니라, 안락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만 듣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