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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문헌
곽장양문록(郭張兩門錄)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10권 10책. 낙질본. 국문 필사본. 〈몽옥쌍봉연록 夢玉雙鳳緣錄〉의 후편이다. ‘몽옥기린전(夢玉麒麟傳)’은 〈몽옥쌍봉연록〉의 이칭(異稱)이다.
〈곽장양문록〉은 〈몽옥쌍봉연록〉에서 장홍이 진태강과의 사이에서 낳은 광염·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연작의 후편이다.
광염과 혜가 거듭 곽씨 가문과 혼인하도록 하여 서사의 폭을 양 가문으로 확장시키고, 각 가문에 새로운 구성원이 진입하면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와 그 해결 과정을 반복적으로 서사화했으며, 마지막에는 가문 연합을 통한 동반자적 번영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양문록형(兩門錄型) 가문소설이다.
시대적 배경은 당(唐)나라 덕종(德宗)∼헌종(憲宗) 연간인데, 허구적 내용이지만 기본적인 역사의 흐름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결구하였다.
현전 이본의 필사 시기는 1773년(영조 49) 봄으로, 뒤에 정조의 후궁이 된 의빈성씨(宜嬪成氏)가 필사에 참여했다. 또 필사를 주도한 ‘일궁가’와 ‘이궁가’는 정조의 두 여동생인 청연군주(淸衍郡主)와 청선군주(淸璿郡主)일 것으로 추측된다.
1·2권은 홍태한(洪泰漢) 소장본이고, 3∼10권은 홍두선(洪斗善) 소장본인데, 본래 하나의 질을 이루었던 것이 분산된 것이다.
전체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당나라 덕종(德宗) 때 좌승상 장홍의 장녀 광염은 분양왕(汾陽王) 곽자의(郭子儀)의 증손 선경과 혼인한다. 선경은 아름답지만 지나치게 엄정한 광염과 금슬이 화락하지 못해 주씨·한씨·이씨·가씨를 차례로 맞아들인다.
한씨는 자색과 성덕을 갖춘 광염이 일시적으로 소대(疎待)를 받고 있지만 결국 선경의 애정을 독점할 것으로 판단하고 모해를 결심한다. 한씨는 광염과 가씨를 모해하여 축출하고, 악행을 감추기 위해 시모 양부인마저 곽부에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경원병(涇原兵)의 난리에 양부인이 실종되는데, 광염이 우여곡절 끝에 사경을 헤매고 있는 양부인을 찾아 선약(仙藥)으로 회생시킨다. 축출된 한씨는 황제의 후궁 마재인과 결탁하여 곽문을 모해한다. 이로 인해 선경은 유배되고 광염은 궁비(宮婢)가 되지만, 광염이 황제의 신임을 얻어 선경을 해배시킨다.
선경은 유배지에서 옥초라는 미인을 얻는데, 옥초는 회서(淮西)의 반란에서 선경을 도와 공을 세운다. 한씨와 마재인은 황위를 찬탈하려다가 죽음을 당하고, 선경과 광염은 화락한 부부가 된다.
안남왕(安南王) 장홍의 사자(四子) 혜는 곽애(郭曖)의 차녀 현요와 정혼했는데, 모친 승평공주(昇平公主)가 혜의 호탕함을 보고 혼약을 파기한다. 현요는 부모를 속이고 황제의 양녀가 되어 혜와 혼인하지만, 한동안 혜와 곽애 부부는 불화한다.
혜는 마씨, 이씨를 연이어 맞고 이씨의 서형(庶兄)을 소실로 삼는다. 이씨의 계모 황씨가 이씨 형제를 미워하여 선경과 혜를 출전시킨 후 모해하여 혜의 처자들이 유배된다. 도중에 이씨 형제는 적벽강에서 도적의 습격을 만나 물에 빠지지만 유모의 구조로 살아나고, 결국 혜도 누명을 벗는다.
간신이 조정에 성하자 선경과 혜는 은거한다. 황씨는 혜의 첩 혜란을 시켜 이씨 형제에게 간부(姦夫)가 있다고 모함한다. 혜가 이씨 형제를 죽이려 하자 두 사람은 현요의 지시대로 달아난다. 시간이 흐른 후 혜는 뉘우친다.
이후는 낙질이나, 결말은 헌종(憲宗) 즉위 후 번진(藩鎭)을 토벌하여 선경이 연왕이 되고 혜는 제음왕이 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몽옥쌍봉연록-곽장양문록 연작 연구(지연숙, 고려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7)
곽해룡전(郭海龍傳)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국문필사본과 함께 1917년 영창서관(永昌書館)에서 발행한 활자본이 전한다. 원나라 때 인물인 주인공 곽해룡의 영웅적인 무용과 충렬을 그린 작품이다. 이 계통의 다른 소설들과 같이 주인공에게 초인적인 힘을 부여하여 영웅화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 해룡은 그의 아버지 곽승상(郭丞相)이 불전에 시주한 은공으로 남해 중림사(重林寺)의 관음보살이 점지하여 태어났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곽승상은 원나라 황제 23년 국가가 어려워졌을 때, 어진 신하를 가려 쓴 공으로 온 나라에 그 이름을 떨쳤으나, 우승상(右丞相) 등 간신의 모함으로 멀리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해룡이 15세 때 적소(謫所)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도중 적소검(摘小劍)과 갑주(甲胄)를 얻고 용문산에서 천문과 지리를 배우고 병서를 얻어 병법과 신기묘술을 터득한다. 신황제 즉위 5년 서번(西蕃)이 월지(月支) 가달(加達)과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물리치고 적진에 잡힌 황제를 구한다.
해룡이 곽승상의 아들임을 비로소 알게 된 황제는 적몰(籍沒 : 죄인의 재산을 모두 거두어 들이는 것)했던 가산을 반환하고 아버지 곽승상을 위왕에 봉하고 해룡을 충렬후좌승상(忠烈侯左丞相)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간신들의 모함에 속아 개선한 해룡을 기다려 목베게 한다. 해룡은 곧 설산도의 적소에 있는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찾아갔으나 이미 진번국에 잡혀간 뒤였다.
해룡이 반역을 꾀한 진번국을 다시 치고 아버지를 구출하여 황성으로 개선하자, 왕은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해룡을 부마로 삼아 부모를 효봉(孝奉)하게 하였다. 곽승상이 죽은 뒤 해룡은 위왕에 봉해지고 국태민안한 가운데 백년화평을 누린다.
이 작품은 간신과 반적을 퇴치하는 신기한 주인공의 무용과 전기(戰記)의 묘사가 대부분이고, 주인공의 애정과 결혼담은 거의 배제되어 있다. 그리고 입신양명의 유교적 이상과 공명주의를 근간으로 충효사상을 고취함과 동시에 불교적 색채가 매우 강하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의 출생이 불공에 의한 것이고, 진번국을 칠 때 남해 중림사에서 7일 동안 불공을 드려 도를 깨쳤다는 것, 운수산(雲水山) 용왕당(龍王堂)을 찾아 용제(龍祭)를 지내고 음조(陰助)를 얻었다든가, 진번과 접전 때 오백나한과 삼만육십사천왕(三萬六十四天王)을 부렸다는 내용은 모두 불교사상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해 준다.
<<참고문헌>>韓國民俗과 文學 硏究(金烈圭, 一潮閣, 1971)
<<참고문헌>>韓國古典小說硏究(金起東, 敎學社, 1981)
<<참고문헌>>英雄의 一生-그 文學史的展開-(趙東一, 東亞文化 10, 서울大學校東亞文化硏究所, 1971)
관가정문집(觀稼亭文集)
조선 후기의 학자 이광정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이광정(李光鼎)의 시문집. 2권 1책. 목활자본. 권두에 장승택(張升澤)의 서문과 권말에 후손인 석기(奭基)의 지문이 있다.
권1은 시 4수, 서(書) 2편, 소(疏) 1편, 회계(回啓) 1편, 완문(完文) 1편, 서(序) 1편, 권2는 부록으로 만장(挽章)·가장(家狀)·행장·묘갈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대체로 자연시이나 선도와 단학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자계서원청액소 紫溪書院請額疏〉는 김일손(金馹孫)의 조부이며 성리학자인 김극일(金克一)을 모신 자계서원에 대하여 사액을 청하는 상소문이고, 〈예조회계 禮曹回啓〉는 청액을 하는 상소에 대하여 조정에서 사액을 윤허한 회계문이다.
〈향약완문 鄕約完文〉에는 향소(鄕所)·향교·학궁(學宮) 등의 규례 및 제도를 혁신하기 위한 절목 13조항을 적고 있다.
제1·2조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실천지침, 제3조는 향장(鄕長)이나 유림의 영수에게 무례한 행위를 자행할 때의 벌칙규정, 제4조는 학궁의 유사(有司)를 선임하는 규례, 제5조는 선비들의 향교 숙식에 대한 절제문제, 제6조는 학궁의 예산용도에 관한 규정, 제7조는 학궁의 사무 집행에 관한 규례, 제8조는 학궁과 서원의 유사를 교체하는 규례, 제9조는 향소의 향임(鄕任)을 선임하는 규례, 제10조는 향소의 좌수(座首)를 선임하는 규례, 제11조는 일반인의 향소출입에 관한 규례, 제12조는 지방수령의 영송(迎送)에 관한 규례, 제13조는 향소에 재직한 향임의 차사(差使)에 관한 사항 등을 제정한 기록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국민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관곡집(寬谷集)
조선 후기의 학자 김기홍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김기홍(金起泓)의 시문집. 5권 2책. 필사본. 1895년(고종 32) 방손 영철(英哲)이 족손 응린(膺麟)과 함께 편집하였다. 권두에 이규원 (李奎遠)의 서문이 있고, 발문은 없다.
권1에 소장(疏狀) 8편, 권2에 서(序)·기 17편, 권3에 시 101수, 권4·5에 야승(野乘) 12편, 전(傳) 8편, 잡기·한담편(閑談篇) 등이 있다. 〈청배계서원사액소 請陪溪書院賜額疏〉는 정여창(鄭汝昌)·유희춘(柳希春)·기준(奇遵) 등 6인이 북방교화에 공이 커 그들을 제향하고자 배계서원을 세웠으니, 사액을 내려달라고 한 소이다.
〈육진유생삼부정군소 六鎭儒生三不定軍疏〉는 북방 육진의 선비들도 국가에 등용될 수 있도록 무과의 신설을 요구하는 등 북방정책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여 지방행정을 개혁하기를 주장한 소이다. 〈북관기 北關記〉는 함경도의 10개진에 관한 내력을 자세하게 밝힌 내용이다.
〈산천편 山川篇〉은 두만강·백악산(白岳山)·장좌연(長佐淵)·적도(赤島) 등 함경도의 산천 및 도서의 위치와 그곳에 얽힌 야담 등을 수록하였다. 〈묘원편 廟院篇〉은 서원과 사당에 관한 위치와 내력 등을 적은 글이다. 〈풍화편 風化篇〉은 함경도의 풍속과 향약 등의 야사를 적은 글이다.
〈고적편 古蹟篇〉은 이성계(李成桂)의 선조들에 관한 고적을 기록한 내용이다. 〈적객편 謫客篇〉은 함경도에 귀양왔던 정여창·유희춘 등 유명인사들에 관한 기사를 기술한 것이다. 〈관곡실기한담 寬谷實記閑談〉은 관곡팔경의 경물(景物)에 관한 시가이다.
그 밖에도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지은이가 함경도 경흥 출신으로서 직접 함경도의 고적을 자세히 조사하여 서술하였으므로, 함경도의 역사 및 조선 후기의 북방문제에 관한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관극절구십이수(觀劇絶句十二首)
신위(申緯)가 지은 관극시(觀劇詩)
1826년(순조 26) 신위(申緯)가 지은 관극시(觀劇詩). 칠언절구로 모두 12수이다. 작자의 문집 ≪경수당전고≫ 권34(제7책)에 수록되어 있다. 〈춘향가〉를 연행하는 창자(唱者)의 모습과 이것을 보는 관중들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단순히 연희모습을 표현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을 작자 나름대로 소화시켜 치밀하게 구성을 한 데 특징이 있다.
제1수는 전체의 도입부로서 본격적인 연희가 벌어지기 전 구경꾼들이 모이는 광경을 묘사했다. 제2수는 구경꾼 중 남녀간의 애틋한 정을, 제3수에서는 판소리를 시작하기 전 목을 풀기 위해 단가를 부르는 창자의 모습을, 제4수는 〈춘향가〉에 대한 당시 청중들의 반응을, 제5수는 당대 명창인 고수관(高壽寬)·송흥록(宋興祿)·염계달(廉季達)·모흥갑(牟興甲)과 김용운(金龍雲)에 대한 묘사를 했다.
제6수는 청중들의 〈춘향가〉에 대한 감상태도를, 제7수는 창의 다채로움을, 제8·9수는 7수에 이은 판소리에 대한 감상을, 제10수는 판소리의 장면을 보고 느낀 자신의 심정을, 제11수는 광대의 타고난 좋은 목소리에 넋을 잃고 구경하는 관중들의 심리를, 제12수는 공연이 끝나고 고요해진 연희장을 묘사하였다.
〈관극절구십이수〉는 판소리가 창극으로 발전하기 이전의 작품으로서 19세기 전기 판소리의 면모를 가장 섬세하게 보여주는 소리〔唱〕에 대한 대표적 작품이다. 이로 인해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춘향가〉의 면모를 살필 수 있고, 당시 배우들의 연희모습, 무대정경, 관중들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신위는 평소 연극에 깊은 관심을 가져 당시 천대받던 기인(伎人)들을 동정했으며, 명창 고수관과의 교분도 무척 두터웠다. 그의 작품 〈관극절구십이수〉는 뒤에 나온 윤달선(尹達善)의 〈광한루악부 廣寒樓樂府〉와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 觀優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警修堂全稿
<<참고문헌>>韓國演戱詩硏究(尹光鳳, 二友出版社, 1985)
관동와주(關東瓦注)
고려 후기 문인 안축의 시집
고려 후기 문인 안축(安軸)의 시집. 저자가 47세(1328년) 때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가 되어 그 이듬해까지 관동 명승지를 살펴보고, 그 감회를 한시로 읊은 기행시들이다. ≪관동와주≫가 실린 ≪근재집 謹齋集≫ 함주본 권1에 실려있다.
모두 145수로 오언율시 18수, 오언고시 10수, 칠언절구 76수, 칠언율시 34수, 칠언고시 7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에 실린 한시문을 보면, 당시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우선 1328년(충숙왕 15) 5월 30일 개성을 출발하여 백령역(白嶺驛)에서 잠자던 밤 큰 비가 쏟아질 때 지은 시나, 〈대우탄 大雨歎〉 등에서 수재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덜어주려 근심하는 모습과, 관동지방의 명승인 금강산·국도(國島)·천도(穿島) 등을 관광하러 줄을 잇는 관료들의 접대에 골몰하는 백성들의 참담한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삼탄 蔘歎〉·〈염호 鹽戶〉 등에서는 관료들의 극도에 달한 가렴주구의 모습들을 읊었다. 이 기행시문의 마무리로 쓴 작품이 경기체가인 〈관동별곡〉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관동와주≫의 한시들을 앎으로써, 〈관동별곡〉을 좀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데서 문헌적 의의가 높다 하겠다.
<<참고문헌>>竹溪誌
<<참고문헌>>朝鮮歌謠集成(金台俊, 朝鮮語文學會, 1934)
<<참고문헌>>鄕歌麗謠新釋(池憲英, 正音社, 1946)
<<참고문헌>>麗謠箋注(梁柱東, 乙酉文化社, 1959)
<<참고문헌>>高麗歌謠의 硏究(李明九, 新雅社, 1974)
<<참고문헌>>謹齋詩歌攷(金倉圭, 榮州經商專門大論文集 2, 1979)
<<참고문헌>>謹齋關東別曲評釋考(金倉圭, 大邱敎育大學國語敎育論志 8, 1981)
관동일록(關東日錄)
조선 전기에 김시습이 관동 지방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들을 엮은 선집
조선 전기에 김시습(金時習)이 관동 지방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들을 엮은 선집. 김시습은 생애의 대부분을 방랑과 배회로 보냈다. 관서·관동·호남·영남 등지에 족적을 남겼다. 그 가운데에 관동 지방을 가장 많이 돌아다녔다. 관동지방과 관련한 시는 ≪유관동록 遊關東錄≫·≪관동일록≫·≪명주일록 溟洲日錄≫의 세 편으로 엮여져 있다. 현전하는 ≪매월당집≫에는 모두 360여 제목의 시가 남아 있다.
≪관동일록≫은 작자 김시습의 나이 49세 이후에 이루어졌다. 작자가 1483년(성종 14년, 계묘) 3월에 육경자사(六經子史)를 싣고 관동의 산수를 섭렵하러 떠나는 것을 남효온(南孝溫)이 전송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앞서 ≪유관동록≫은 김시습의 나이 26세 때에 이루어졌다.
또 내금강 일대의 편력 노정을 중심으로 시들이 엮여져 있다. 이것에 비하여 ≪관동일록≫은 춘천을 거쳐서 강릉과 양양을 찾은 노정에 따라 시들이 엮여져 있다. 춘천에 도착한 다음 해에는 강릉에 있었다. 강릉과 양양에서 두 해 가량 머물렀던 듯하다.
김시습이 춘천지방에서 지은 시에서는 풍물이나 경승을 소재로 한 〈소양인 昭陽引〉·〈춘사 春思〉·〈등소양정 登昭陽亭〉·〈숙우두사 宿牛頭寺〉·〈도신연 渡新淵〉·〈청평사 淸平寺〉·〈고산 孤山〉 등의 시와 병중의 고통을 호소한 〈병후病後〉·〈병중 病中〉이라는 제목의 시가 많이 보인다.
김창흡(金昌翕)이 세외지심(世外之心 : 속세를 벋어난 마음)을 노래한 절창이라고 예찬한 김시습의 오언율시 〈동소양정 登昭陽亭〉 3수 가운데에 첫 수인 “새 저편으로 하늘은 다하려 하는데, 근심 속에 한은 하염 없어라. 산은 대개 북쪽에서 굽어 나오고, 강은 절로 서쪽을 향하여 흐른다(鳥外天將盡, 愁邊恨不休. 山多從北轉, 江自向西流).”는 시구도 춘천에서 지은 것이다.
김시습은 강릉지방에서는 사패(詞牌)에 전사(塡詞 : 중국 송나라 때 유행한 한시의 격식)하여 경승지에서의 감회를 노래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한송정(寒松亭)은 석주만(石州慢), 경포(鏡浦)는 동선가(洞仙歌), 화표주(華表柱)는 만정방(滿庭芳), 백사정(白沙汀)은 팔성감주(八聲甘州), 동선관(洞仙舘)은 강성자(江城子)의 사패를 이용하였다.
≪관동일록≫의 〈한송정〉은 무심히 흘러가는 역사와 광활한 우주자연 속에 미세한 존재로 있는 자기 자신을 돌아본 사(詞 : 중국 운문의 한 형식)이다. 비감하면서도 고원(高遠)한 맛을 준다. 〈산거증산중도인 山居贈山中道人〉이란 제목의 시 가운데에 다섯 수는 ≪국조시산 國朝詩刪≫과 ≪속동문선 續東文選≫에 선록되어 있다.
허균(許筠)은 그 시에 대하여 “유이(流易 : 쉽게 흐름)하고 담아(淡雅 : 맑고 아담함)하여 더할 나위 없는 상품이다.”라고 비평하였다. 회해(詼諧 : 해학)의 투로 질박한 삶에 대한 동경을 표현한 명편이다. ≪관동일록≫의 시들은 김시습의 시편들 가운데서도 특히 고독한 내면 정서를 짙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梅月堂集
<<참고문헌>>梅月堂의 關東遊歷考(崔承洵, 江原文化硏究 제11집, 1992)
<<참고문헌>>金時習論(沈慶昊, 한국한시작가연구 3, 한국한시학회, 1997)
관란문집(觀瀾文集)
조선 중기의 학자 이승증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학자 이승증(李承曾)의 시문집. 4권 2책. 목활자본. 1821년(순조 21) 방손(傍孫) 홍리(弘离)와 7대손 언호(彦灝) 등이 편집, 간행한 초간본을 보완한 것으로, 1863년 9대손 익경(益慶)과 방손 운정(運楨) 등이 중간하였다.
책머리에 이민수(李民秀)의 중간서문과 장시하(蔣時夏)의 구서(舊序)가 있고, 책 끝에 이익경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 32수, 논 3편, 습유(拾遺)로 통대구사림문(通大邱士林文) 1편, 권2∼4는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는 효심을 표현한 〈자경 自警〉, 자신의 담박한 소신을 드러낸 〈한거잡영 閒居雜詠〉등이 있다.
논은 〈역론 易論〉·〈시격론 詩格論〉·〈조화론 造化論〉으로 모두 학술적인 내용들이다. 〈역론〉은 ≪주역≫의 대의를 논한 것으로, 역이란 천지에 싣고 사물에 들어가는 이치라고 말하고, 역이 흩어져서 만물이 된 것이 천조(千條)와 만조(萬條)가 되며, 역이 운행해 시세(時世)가 된 것이 천분(千分)과 만석(萬析)이 되는데, 그 이치를 따져보면 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이 될 뿐이니, 이것이 곧 도의 원류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통대구사림문〉은 임진왜란 때 대구사림에게 보낸 격문으로, 비록 70세의 늙은 몸이나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설 터이니, 동참하여 적을 소멸하자는 내용이다.
부록 중 권2는 행장·묘지명·정려각기·정려각중수비명·지곡서원묘우상량문(智谷書院廟宇上樑文)·상향축문(常享祝文)·도연서원묘우상량문(道淵書院廟宇上樑文)·도연서원기(道淵書院記)·구맹대시(鷗盟臺詩)·명(銘)·가(歌), 권3은 세계도·향교통문(鄕校通文)·도통문(道通文)·본향통자인문(本鄕通慈仁文), 권4는 정존겸(鄭存謙)·유의건(柳宜健)·정충언(鄭忠彦)·이채(李采) 등의 발문과 이만각(李晩慤)·이재흠(李在欽)의 중간발문,창의문후(倡義文後)로서, 대부분이 임진왜란에 관한 고증사료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관란유고(觀瀾遺稿)
조선 전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의 시문집
조선 전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元昊)의 시문집. 4권 1책. 석인본. 1927년 원지상(元持常)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한치응(韓致應)의 서문과 권말에 원세신(元世臣)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일고(逸稿)로 탄세사(歎世詞)·몽유록(夢遊錄)·여우인서(與友人書), 권2·3은 실기(實記)로 전(傳)·행장·묘갈명·녹서(錄敍)·계(啓)·축문·지(識)·시장(諡狀)·기·유장(遺狀)·지(誌)·소·계문·봉안문·상량문·기략(記略)·사적·통문·비명·고유문·창건기·공문, 권4는 척유(摭遺)로 방목(榜目)·사화록(士禍錄)·제영(題詠)·후서(後敍) 등과 추록으로 도형(圖形) 8면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의 평생 저술을 그의 손자인 숙강(叔康)이 무오사화로 화를 당했을 때 불에 태웠기 때문에 전하는 시문이 별로 없다. 〈탄세사〉에서는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옛일을 회상하면서 불의에 항거하는 선비의 지조를 토로하고, 사람들이 영화를 생각하여 의리와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을 탄식하였다.
〈몽유록〉은 단종을 추모한 나머지, 꿈에 사육신을 상봉한 의제(擬題)로서, 어느날 준수한 남아를 만나 왕 앞에 인도되어 그 곳에서 여섯 신하와 함께 주연을 베풀고 시 한수씩을 읊으며 고금치란에 관한 일들을 의론하면서 놀다가 헤어졌는데, 깨어보니 꿈이었다는 내용이다.
이 〈원생몽유록〉의 작가에 대하여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여우인서〉에서는 자신의 구차한 삶을 부끄러워하면서 죽어서 선왕을 모시는 것이 정도(正道)인 줄은 알고 있으나, 어리석고 용렬하여 옛 철인들의 자취를 본받지 못함을 한탄했다. 규장각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