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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실천하는 경건 /마6:1-8, 16-18
소설가 A J 크로닌 박사가 영국 웨일즈 지방의 작은 도시 광산촌에서 의사로 봉사할 때, 올리븐 데이비스라는 간호사와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녀는 20여년 경력의 간호사인데, 능력과 인내심과 명랑함을 지니고 지역 주민들에게 많은 봉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능력과 봉사에 비해 봉급이 터무니없이 적어 크로닌 박사가 항의를 했습니다. “간호사, 왜 당신은 보다 많은 급료를 받으려 하지 않소? 그렇게 조금 받고 일한다는 것이 이상스럽소. 당신의 가치를 사람들이 알고 하나님이 아실 거요.”그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나는 살아가기에 충분할 만큼 받고 있어요. 내 가치를 하나님만 아시면 그것으로 보상이 충분합니다.”인생의 값어치는 가치의 기준을 어디 두느냐에 달렸습니다. 두 종류의 봉사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에게서 칭찬받고, 인정받고, 높아지기 위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봉사자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은밀한 가운데 하는 봉사자입니다.
어느 회사 사장 비서가 이웃돕기 성금을 가지고, 서울 시내 모 일간 신문사를 찾아갔습니다. 이웃돕기 성금을 기탁한 그 비서는, ‘이 성금을 내신 우리 사장님 사진을 신문에 실어 주십시오.’하며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신문사에서는 신문에 얼굴을 낼 수 있는 성금의 한도액을 말해 주며 어렵다고 하자, ‘그러면 그 성금 돌려주십시오.’하며 되찾아 갔다고 합니다. 아무리 명예가 귀중하고 본능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기탁한 불우 이웃돕기 성금을 다시 찾아갔다는 이 사실은 그냥 웃어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직장생활이나 학교에 다니는 것과 같은 공적 생활이 있는 반면에, 가족끼리 오붓한 파티를 한다든지 혼자서 독서나 음악감상을 즐기는 등의 사생활이 있습니다. 그런 ‘프라이버시’(privacy)는 공적 생활과는 달리 당연히 ‘은밀한’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몰래 해야 할 부끄러운 일이나 범죄행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사생활의 즐거움과 행복을 제대로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끼리만 하는 파티를 이웃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구경할 수 있는 장소에서 한다면, 분위기를 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며,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때에는 배우자나 자녀들로부터도 방해를 받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에서도 그처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있습니다. 공적 신앙생활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예배이며, 각 기관별 모임이나 주일학교 또는 성가대의 봉사활동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반면에 사적 신앙생활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개인 경건생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사생활과 마찬가지로 ‘은밀한’것이 되어야만 그 보람과 은혜를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하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율법을 폐하시거나 부인하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다만 사람들의 잘못된 율법 이해와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아주려고 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힘쓰는 경건이 참된 경건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세 개의 창문이 달려 있다고 합니다. 기도의 창문, 금식의 창문, 구제의 창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의 창문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사용하는 영적 대화를 위한 창문이라면, 금식의 창문은 자신의 내면 세계를 성찰하고 자신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기 위하여 사용하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제의 창문은 바깥 세상과 교류하기 위하여 열려져 있는 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3개의 창문이 다 고장이 난 것입니다.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너희 의”라고 하신 데서 “의”는 “경건”이라 해도 좋을 말입니다. 경건하게 행동하되 “사람에게 보이려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에게 보이려고”경건하게 행동한다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에게는 상을 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기본 원칙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적용하셔서 사람들의 잘못된 관행을 비판하시며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유대교 경건의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요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 그 자체를 문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훈련과 실천에 있어서 모두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구제는 이웃을 향한 것이고, 금식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 볼 때, 이 세 가지는 우리의 신앙이 균형 있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 세 가지는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기본적인 의무사항으로 여겨지던 것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 그 자체를 의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는 본질적으로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의의 표현이고 그 훈련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절에서 밝히신 기본원칙을, 제일 먼저 ‘구제’에 적용시켜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이 널리 퍼져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매우 어렵게 살고 있었던 시기에는, 특히 구제가 경건의 중요한 요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세 가지는 ‘사람에게 보이려고’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앞에서 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심으로써, ‘개인 경건생활’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만 보이는 의로운 생활’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성도라면 누구나 반드시 행해야 할 세 가지 ‘은밀한 개인 경건생활’에 대하여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어떻게 ‘상을 베풀어’주시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2-4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구제’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물질적으로 돕는 선행을 가리키는데, 문제는 그것을 ‘사람에게 드러내어 칭찬을 들으려고 일부러 회당과 거리에서 행하는’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실제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구제하는 일들이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단정하셨습니다. 이 ‘외식자’란 ‘연기자(actor)’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들 앞에서 구제하는 것은 많은 칭찬을 받기 위해서 일부러 하는 행위이며, 그것은 관중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기 위해서,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실제로 당시에 구제할 때에 나팔을 불면서 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부러 표를 내고, 눈에 띄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공개적 구제행위의 진짜 목적은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으로부터 감사와 칭찬을 받는 것’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요란하게 떠벌이는 구제는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곧 구제하는 본인이 진짜 원하는 바 그 받고 싶어 하는 영광을 이미 다 받은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진실한 경건생활은 아니라고 단정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 구제라는 것은 비록 타인 앞에서 자랑하려는 의도는 없다 할지라도, 자기 스스로 자만하게 될 소지도 다분한데, 3-4절에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른손’과 ‘왼손’은 많은 경우에 같은 일을 동시에 하기 마련입니다. 두 손으로 무거운 물건을 함께 들어올리고, 두 손으로 도구와 재료를 동시에 잡고서 작업을 하기도 하며, 또 박수를 칠 때에도 반드시 두 손이 맞닿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제할 때에는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 이 말씀이 구제할 때 두 손으로 주지 말고, 한 손으로 주라는 뜻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곧 남에게 구제를 해 주고 있는 자기 자신조차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겸손한 자세로 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곧 남에게 구제를 베풀면서 ‘아, 내가 지금 이런 착한 일을 하고 있구나. 더구나 남에게 보이지 않고 은밀하게, 정말 겸손하게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조차 스스로 가지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같은 사람의 한 쪽 손이 하는 것을 다른 한 쪽 손이 모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합니다. 어떤 일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오래 습관화하면, 그 일을 하고 나서도 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볼 일 있어서 집을 나왔다가, 혹시 전기나 가스 안 끄고 나온 것 아닌가 해서 다시 들어가 보면, 잘 끄고 나온 사실을 확인하곤 한 적이 한두 번쯤 다 있을 것입니다. 구제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해야 하고, 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언제 얼마나 했는지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도록 그냥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 구제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갚으시리라’고, 곧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구제생활을 기억해 주시고, 그 상급의 계좌를 지켜 주실 뿐 아니라 이자에 이자까지 쳐서 반드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공적으로 결코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칭찬하지 않고, 그저 남에게 베풀기만 하는 구제라는 것은, 전도서의 말씀처럼 불신자들의 눈에는 마치 ‘식물을 물위에 던지는 것’처럼 그냥 재물을 없애버리는 행위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 날 후에 반드시 도로 찾게’해 주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구제란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요청 받기 전에 그냥 먼저 주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은 방식과 똑같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영혼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였지만, 감히 하나님께 그것을 구할 엄두도 못낼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에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먼저, 일방적으로, 아무 조건 없이 그냥’주셨습니다. 이처럼 무조건 받는 사랑을 스스로 체험한 성도라면, 그런 사랑의 빚을 어려운 이웃에게, 특히 바로 내 곁에 있는 약한 성도에게, 구제를 통하여 갚아 나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구제’란 어떤 선한 양심이나 인류애 같은 데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성도라면 자동적으로 실천하게 되어 있는 선행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공적으로 빈부의 격차 해소나 소득의 재분배 따위의 개념에서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각 성도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절로 행할 수밖에 없는 일인 것입니다.
서울 서초구의 한 교회에서 섬기고 있을 때에,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교인이 한 명 있었는데, 어느 장로님께서 구제헌금을 가져오셔서, 목사님에게 이름을 밝히지 말고 그분에게 전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받은 교인은 ‘아, 아마도 아무개 집사님께서 주신 것이군요.’라고 전혀 엉뚱한 교인을 짚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목사님은 그 교인께서 잘못 짐작하셨다고 귀띔도 해 드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가만히 내버려 둠으로써, 그 구제금을 받은 교인은 자기가 잘못 짐작한 그 집사님에 대하여 감사와 사랑을 간직하게 될 것이고, 정작 그 구제금을 드린 장로님은 100퍼센트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니,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닐까요?
바로 이처럼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만 나타나는 이런 구제, 교회 경상비의 재정보고에는 나오지 않더라도, 하늘 아버지께서 기록하고 계시는 비밀구좌에 예치되고 있는 구제가, 갈보리교회의 각 성도들을 통하여 그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끊임없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먼저 받은 사랑에 감격해서 성도와 이웃에게도 그냥 줄 줄 아는 이런 구제를,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앞에서 늘 행함으로써,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우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주시는 상급을 넘치도록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5-8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의사소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진솔한 행위인데, 그런 기도까지도 ‘외식’으로 행하는 자들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두 가지로 경고하셨습니다. 그 첫째는 ‘사람을 의식하면서’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일 아침과 오후와 저녁에 정해진 기도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형편만 된다면, 성전에 나와서 기도드리는 것을 가장 이상적으로 여겼는데, 성전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는 가까운 회당을 찾아가거나, 아니면 그냥 길거리에서나 집안에서라도 그 시간만 되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기도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그런 정기 기도 시간이 가까워지면, 회당과 거리와 같은 공공장소로 일부러 나가있다가 그 시간에 딱 맞추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란듯이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자들이 그렇게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고, 그들의 정기적인 기도생활에 감추어진 진짜 의도를 딱 꼬집어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기도생활에서 나타날 수 있는 두 번째 외식은 ‘일부러 길게’기도하는 것인데, 이어지는 7절과 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 역시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언부언’이란 ‘같은 말을 반복해서 시간을 오래 끄는’기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같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 이방 우상종교에 그처럼 형식적으로 반복되는 기도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랍비들 역시 기도는 길면 길수록 좋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레위라는 랍비가 ‘어쨌든 긴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라고 가르쳤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외식적인 기도 대신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자기 집안에 개인 기도실을 꼭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며, 특히 당시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다 단칸방 집에 살았으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어떤 ‘비밀스러운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바깥 사회나 다른 사람과 철저하게 분리되고, 오직 자신과 하나님만 남아 있는 마음의 방’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가리켜 ‘은밀한 중에 보시는’아버지일 뿐 아니라 ‘은밀한 중에 계시는’아버지이시기도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처럼 골방 속에서 은밀히 기도하는 성도는, 그냥 자기를 ‘내려다보고 계시는’하나님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 골방 안에서 자기와 ‘마주 앉아 계시는’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천주교의 묵주기도’인데, 예를 들면 소위 ‘환희의 신비’제1단에 보면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머릿속에서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 상황을 상상하면서, 입으로는 주기도문을 한번, 성모송을 열 번, 그리고 영광송을 한 번 외우는데, 손으로는 지금 몇 번 외웠는지를 묵주구슬을 돌리면서 세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 내용에는 “1917년 파티마에 발현하신 성모님의 부탁으로 묵주기도 중 ‘영광송’다음에 ‘구원을 비는 기도’를 추가하게 되었습니다.”라는 식으로 때로는 ‘마리아가 직접 나타나 부탁해서’ 새로운 것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제1단이 끝나면 제2단으로 넘어가는데, 그런 단들을 다섯 개씩 모아서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빛의 신비’등으로 부르는 하나의 기도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개의 어떤 ‘신비의 기도문’만 해도 주기도문을 다섯 번, 성모송은 50번, 영광송을 다섯 번 반복하게 됩니다. 기도문 자체가 아예 중언부언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확하게 중언부언하기’위해서 묵주를 주판알처럼 돌려서 계산까지 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예수님께서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지적하신 대상에 정확하게 해당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경건한 성도들은 그런 ‘길거리의 기도’나 ‘일부러 길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만의 골방에서 하나님과 은밀히 만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 저 좀 뵙고 싶습니다.’하고 그 골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거기에는 무슨 예약이나 문밖 소파에서 10분을 더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으며, 나보다 먼저 와서 그 방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더구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 골방에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의 병이나 결핍을 비롯한 모든 소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이라고는 그저 그 골방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버지’하고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당신의 자녀를 위하여서만 항상 열려 있는, 이 기도의 골방을 언제든지 찾고, 거기서 세상도 잊고 주위 사람도 신경 쓸 필요 없이, 오직 하늘 아버지하고만 나누는 은밀한 교제의 기쁨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6-18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이란 문자 그대로 음식이나 음료를 끊는 것을 말합니다. 아침식사를 영어로 ‘breakfast’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깨뜨리다, 중단하다’의 ‘break’와 ‘금식’의 ‘fast’라는 단어를 합성한 것입니다. 곧 ‘금식을 중단하다’라는 말인데, 바로 어제 저녁에 식사한 이후 밤새 금식하던 것을 이제 아침이 되어서 중단하고, 밥을 먹는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금식은, 그처럼 ‘하룻밤 동안만 하는 금식’이 아니라 하루 세끼를 다 굶는 완전한 금식이나, 하루 중 한 끼, 또는 두 끼를 거르는 부분 금식을 가리킵니다. 또한 기간으로 볼 때에는 하루 금식에서부터 시작하여, 며칠 또는 몇 주일에 걸친 장기간의 금식도 있습니다. 실제로 모세의 율법에서 꼭 금식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는 날은, 일 년에 단 한 번, 바로 구약의 대속죄일 하루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금식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를 보였는데, 그 최고조에 이른 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행한 금식입니다.
물론 금식을 자주 또 정기적으로 하는 것이야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만, 문제는 ‘나는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나이다’라고 자랑하면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의 비유에도 나오듯이, 그들은 자기들이 ‘일주일에 두 번’곧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떠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은 일부러 얼굴에 재를 바르고 더 수척하게 보임으로써 자기가 금식 중에 있다는 사실을 과시까지 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외식을 꾸짖으시면서, 17절에서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인생을 즐기기 위한 준비를 상징했습니다. 전 9:7-8절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하지만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금식할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금식 중에는 더욱 머리도 잘 빗고 면도도 깨끗이 하고 얼굴화장도 평소처럼 예쁘게 해서 조금도 사람에게 표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일부러 머리에 기름을 안 바르는 것은 남보다 더 경건해 보이려는 의도로 비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금식하며 그것을 남들에게 티를 내기 위해, 초췌해보이도록 머리에 기름도 안 바르고 슬픈 기색을 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쳐다봐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기를 기대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금식할 때에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고 그 진실함에 응답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행하는 경건은, 하나님께서 보시고 인정하시는 참된 경건이 아니며, 단지 외식이며 위선일 뿐이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은밀한 가운데 경건을 실천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주부가 금식한다는 핑계로, 다른 식구들의 밥도 안 차려 주는 것은 경건생활이 아니라, 오직 죄를 더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금식 기간이 40일이었으니 ,나는 겸손하게 거기서 하루를 빼서 39일 동안만 금식했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상 겸손이 아니라 교만일 뿐인 것입니다.
구제는 스스로 자랑해야 남들이 알 수 있고 개인기도 역시 그러하지만, 금식은 굳이 남들에게 보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타나게 됩니다. 곧 얼굴이 수척해지고 몸에 힘이 빠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저절로 나타나는 것’까지도 나타나지 않도록 ‘은밀히’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그 금식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9:15절에서도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성도가 금식해야 할 때도 있음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금식은 식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억제함으로써, 절제와 극기의 자세를 계속 유지하게 해 주고, 바로 그런 가운데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시편 35:13절에서 다윗이 고백한대로입니다.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그렇다면 언제 그런 특별한 금식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까? 대표적인 경우를 두 가지만 들자면, 죄 회개의 기도와 어떤 간절한 소원의 기도가 있을 때입니다. 요나의 경고를 듣고 니느웨의 모든 백성들과 왕이 다 금식하고 회개했던 것이라든지, 다윗이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들을 살려주시기를 간구하면서 금식기도했던 것 등이 그런 예입니다. 그런 영적 비상사태를 만나면, 그냥 아침을 거르는 김에 하는 금식이나, 다른 교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주일 점심 식탁에서 혼자만 표내는 금식이 아니라, 오직 자신과 하나님 둘만 아는 은밀한 금식을 통하여, 그 하늘 아버지께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를 드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여러 가지 형편과 상황 가운데, 저에게 기도 부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처럼 목사에게 기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좋은 자세이고, 여러 상황 가운데 성도들을 위하여 축복 기도하는 것은 목자와 제사장으로서 기꺼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목사가 대신 해 주는 기도보다는, 자기 자신이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기도하는 것이, 하늘 아버지께 직통으로 가는 기도이며, 실제적으로 훨씬 더 능력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로 가볍게 넘겨버려서는 아니 될 자신의 중한 범죄에 대하여 통회자복하는 기도, 절대로 밋밋하게 낭비해 버려서는 아니 될 자신의 인생을 두고 일생일대의 승부를 거는 기도, 결코 수수방관할 수 없는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두고, 그야말로 사생결단으로 오직 주님께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기도, 이런 뜨겁고 간절한 기도제목을 두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늘의 아버지께 금식하며 기도드림으로써 하나도 남김없이 응답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제는 이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지극히 은밀한 영적 사생활이며, 기도와 금식도 그야말로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놓는’ 성도만의 행복한 프라이버시입니다. 혼자만 즐겨야 할 개인생활을 남들 앞에 다 내놓고 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과시욕에 빠져 있든지, 아니면 무언가 비정상적인 사람의 행동인 것이 틀림없는 것처럼, 개인 경건생활을 ‘사람 앞에 보이려고’하는 것 역시 오로지 외식적 종교생활일 뿐인 것입니다. 반면에 구제와 기도와 금식과 같은, 경건생활의 기쁨과 은혜를 아예 맛볼 줄 모르는 교인은, 자신만의 사생활을 통한 행복을 전혀 누릴 줄 모르는 사람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 기도할 때, 금식할 때’곧 ‘언제나’라고 하셨지, 곧 ‘혹시 구제나 기도나 금식을 하게 되면’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곧 이 세 가지 경건생활은, 참된 성도에게는 무슨 ‘선택사항’이 아니라 ‘전공필수’과목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교회가 공적으로 전도와 선교에 최고의 힘을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성도 개인적으로는 반드시 은밀한 구제에 마음과 힘을 쏟아야 합니다. 매일 새벽과 시간 나는대로 예배당에서 통성으로 합심하여 올리는 기도도 드려야 하지만,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누워 있을 때나 서서 걸어갈 때나, 언제 어디서든지 자기만의 ‘골방’을 통하여 주님과 1대1로 만나는, 기도에 항상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정말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에는, 그 어떤 ‘기도의 능력이 있다는 신통한 목사나 권사’를 통해서가 결코 아니라, 바로 자기만 아는 금식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중보해 주시는 가운데, 그 응답을 반드시 받게 되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제’는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도’는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며 ‘금식’은 자기의 육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봉사를 하지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반드시 상을 주신다.’고 약속된, 이런 은밀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실로 자기만의 ‘경건의 능력과 신비와 은혜’를 늘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된 구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은밀한 가운데 봉사하는 참된 구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여,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하게 하옵소서. 금식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 나 자신을 향한 거룩한 창이 열리는 경건한 삶이 우리 속에 인태하는 축복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 마 6:9-15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경청, 공감, 배려 등을 배우면서 우리는 소통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서로 이야기하다 보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이해가 어렵고 무슨말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서로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말로는 표현하지 않고 이야기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인이나 과정은 빼고 결론만 이야기 할 때 한참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느 때는 같은 말을 들었는데 서로 다른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서로 이해하는 부분이 달랐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소통의 어려움은 의외로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공부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알기 위한 기술을 습득합니다.
우리에게 기도란 하나님과의 소통 교제하는 수단이기에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 간의 소통이 굉장히 중요하듯이, 하나님과의 소통도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가 바로 소통의 방법인데,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이고, 이것을 우리는 기도의 모범 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마 제일 먼저 주기도문을 외웠을 것이고,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주기도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면서도 이 주기도문을 생각없이 외우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의미와 뜻에 대해서 살펴보고, 주기도문을 외울 때 의미를 생각하시면서 외우기를 바랍니다. 9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로 시작합니다. 1절부터의 말씀을 잠깐 보면 ‘외식하는 자와 같지 말라,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라, 네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기도하라, 중언부언 하지 말라, 이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 후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9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기도는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위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도드리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십니까? 세상 어떤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을 ‘아버지’로 삼고 삽니다. ‘돈’을 보고 아버지 해보십시오. 돈이 ‘오냐, 무엇을 도와줄까? 돈 더 줄까? 돈이면 다 되지? 권력도 사고, 지식도 사고, 사람도 사고, 뭐 못 사는 것이 없지?’‘권력’을 아버지라 불러보십시오. ‘암, 권력 하나면 돈은 물론 못하는 것이 없지!’ 혹 어떤 사람들은 우상을 ‘아버지’로 섬기며 살기도 합니다. 돈이나 권력, 우상 등이 진정 참된 아버지 구실을 하고 있습니까? 돈이나 권력, 우상 등은 인격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인간보다 못한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의 아버지나 물질이나 권력, 그 어떤 존재도 그 사람의 금세와 내세를 끝까지 함께 하며 책임질 수 없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이러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이를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8:14-16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올바른 기도생활을 통해 기도에 응답을 받고자 하면,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수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녀되는 성도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요일 5:1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인간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였을 경우,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집니다. 세상에 살 동안 때로 아픔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아버지’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것들을 견디고 감당하기가 쉬워지는 것입니다.
주어진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것들은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 주어진 시련과 고통은, 자신을 더욱 더 성숙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채찍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7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참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까?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주어진 고난과 징계가 어떠하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히 12:7-8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예수 믿는 여러분은 사생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참 아들인 것을 믿기 바랍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설사 오래동안 여러분과 함께 살게 되더라도, 늙어가는 육신의 아버지가 여러분의 삶에 허전함을 메워주거나, 여러분을 보호하고 사랑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거꾸로 여러분이 그 육신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보호하고 사랑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육의 아버지를 그 생명이 다하기까지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영광과 축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끝까지 이해하시고 사랑하시며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정상적인 관계는 이해와 사랑과 보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가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은, 그만큼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깊이 이해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 6:32절에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절“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기도의 주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기도에 대한 교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때,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부분적이지만 경험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이 예수 믿고 하나님께서 다스리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한 번은 예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7:20-21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결코 어떤 땅이나 영토가 아니라 오직 인간의 마음과 심령, 그리고 인간의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 하나님의 지배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통치하실 때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히 6:5절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시 34:8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가 비록 악한 세상에 살고 있다해도 내세, 곧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맛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세의 능력”은 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는 세상” 곧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을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사는 능력”이것이 바로 내세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미래에 완전히 누리게 될 천국을 경험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따라 살게 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에 넉넉한 성령의 열매들을 맺으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예수가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라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어떤 일로 친구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마침 그때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는 여러 번 시도했으나 예수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림이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림 제작을 중단하고 며칠 동안 명상에 잠겼다가 실패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재주 있는 손을 가졌다고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가졌다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을 때 나는 예술가도 될 수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될 수 없다.”다 빈치는 즉시 친구를 만나 화해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전에 얽혔던 분한 생각을 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 뒤 며칠이 지나 다시 작업실에 들어가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얼굴을 아주 만족스럽게 화폭 위에 그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찾는 것이 성한 눈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뜻합니다. 내 성격이나 내 욕심이 다스리는 세계가 아닙니다. 걱정과 불안과 나의 좁은 생각을 몽땅 묶어, 하나님이 관리하시도록 맡기는 믿음의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정치적인 왕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랑의 왕국인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세계 마라톤 대회에서 감격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결승점을 불과 1.6km를 앞두고 1등으로 달리고 있던 선수의 다리에 심한 쥐가 났습니다. 2등으로 달리다가 이것을 본 선수는 1등으로 달리던 선수를 부축하여 일으켜 함께 천천히 달렸던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둘 다 등수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경기장에 입장하여 마지막으로 운동장을 돌 때,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1 등을 하느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믿고 지금 여기서 그 사랑과 축복, 행복을 부분적으로 맛볼 수 있는 것이며, 장차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완전한 사랑과 행복을 누리게 될 미래 영역입니다.
11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여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으로, 주어진 현재 삶에 일용할 양식으로 족한 줄 알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풍부에도 궁핍에도 족한 줄 아는 삶의 태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교부였던 클레멘트는 “재물은 구두와 같다.”고 했습니다. 구두는 무작정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발에 맞아야 편하고 좋은 구두입니다. 마찬가지로 재물을 많이 가졌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분수에 맞아야 합니다. 사치스럽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각자의 분수에 맞는 생활수준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현재 물질이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쓰임받는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으면 적은대로, 약하면 약한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쓰임받고자 할 때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낼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먹을 양식을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주셨습니다. 출 16:4-5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그런데 그 양식을 거둘 때에 1인당 한 오멜씩, 다시 말해 하루에 필요한 양식만을 거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여, 일용할 양식 외에 다음 날 먹을 양식까지 거두어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양식에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제육일, 다시 말해 안식일 전날에는 각 사람마다 갑절의 양식인 두 호멜씩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일용할 양식을 하늘에서 내리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안식일 전날에 이틀 분의 양식을 거두었지만, 그 양식을 벌레가 먹거나 냄새가 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칠일, 곧 안식일에는 일용할 양식을 거두러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백성중 더러는 안식일에 양식을 거두러 나가 보았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다음날까지 남겨 놓은 자의 만나를 썩게하신 것은 첫째, 내일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라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지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 ‘만나’를 하루 세끼 먹을 일용할 양식만을 거두라는 것은 소유욕,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물질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재물의 노예가 되어 그 인생이 추하고 비참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물질축복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물질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버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욕심을 죄의 근본으로 정하고, 그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죄는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함께 나눔으로, 하늘나라에 부유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12절“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4-15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 과거의 삶을 하나님께 고백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과거의 삶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을 때만 삶의 가치가 있으며, 현재와 미래에 생명과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형제를 용서해야만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분명한 교훈이 마태복음 18:21-35에 있습니다. 용서는 일곱 번을 하면 되는가의 질문에,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 용서하라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예화입니다. “형제의 죄를 무려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고요?” “농담하는 건가요? 그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알고서도 말입니까?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나를 용서한다고요?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저지른 일들을 당신은 몰라요.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요.”이같이 남이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가슴에 한을 품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고 생각하십니까?”고 물어 보면, 대부분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여러분의 모든 죄가 이미 완전히 용서되었다는 것을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죄사함받는 방법은, 자신의 죄를 대신할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죄가 그 동물에게 전가되고, 사람의 죄를 뒤집어 쓴 동물은 죽여서 태우거나 광야로 내보냈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그 사람의 죄가 완전히 속죄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에 와서는 어떻게 속죄함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시대에는 동물에게 죄를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희생양으로 생각하여 예수 앞에 모든 죄를 고백하면, 예수가 그 죄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자신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속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에 대한 믿음이 구약시대의 손을 동물의 머리에 얹고 죄를 고백하는 행위를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용서는 예수를 믿는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의 고백만이 용서받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에 대한 고백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앞에 나온 그것으로 이미 용서된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오는 그것으로, 이전에 가졌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한 적이 없으시며, 우리의 죄 때문에 등을 돌리신 적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여러분에 대한 사랑은 여러분의 죄 때문에 변하거나 실망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으며, 그분은 항상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앞에 나온 너는 이미 용서되었다.”그러므로 믿음의 고백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기 위해서이며, 변함없는 하나님과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모든 죄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 믿음의 고백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죄를 고백함으로 죄로부터 오는 죄책감, 긴장, 고통 그리고 정신적 억압 등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여전히 그 죄책감에 눌려,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는 용서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용서하고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이 미친 개를 땅에 묻을 때 꼬리만 땅위에 기념탑처럼 남겨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옛날에는 미친개를 끌어다가 산채로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위험한 개를 묻을 바에는 완전히 묻어야지 꼬리만 땅위에 남겨 놓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형제의 죄도 용서하려면 깨끗이 묻어버리듯 용서해야지 일부분을 남겨놓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의 피는 제아무리 흉악한 죄일지라도 흰눈같이 희게 하시며, 그 지은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게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덮어두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지워버려 영원히 기억조차 되지 않게 하십니다.
예수는 여러분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서 이미 용서하셨다는 것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받아드리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어찌 나같이 끔찍한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하시겠는가?”하며 여전히 기뻐하지 못하고 무거운 죄의 짐을 짊어진 채 힘겹게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믿음의 고백으로 사는 사람은 이제 형제의 죄에 대하여 중심으로 용서해야만 합니다. 형제를 용서하기 전에 자신도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었음을 잊지 말고 기꺼이, 그리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해야만 합니다. 유대 랍비의 교훈에 따르면, 형제의 죄에 대하여 세 번까지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만약 네 번째 죄를 범하게 되면, 용서하지 않고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관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용서의 한계를 세 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될까요? 넉넉하게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되지 않을까요?”일곱 번이나 용서하는 자신의 관대함에 대해 칭찬을 기대했던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끝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말씀하신 것이 앞서 보신, 마태복음 18:21-35, 탕감 받은 종의 비유입니다. 그 종 자신은 거액의 빚을 탕감 받았으나 자기에게 극히 작은 빚을 지고 있는 동료에 대해서는 아주 무자비한 요구에 무자비한 빚처리를 행함으로 그 주인으로부터 자신도 무자비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하신 말씀의 중심은 너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이웃의 죄에 대해서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3절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앞으로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으로,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악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며 사는 기도생활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게 자신의 연약함을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사탄의 시험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믿기 때문에 사탄의 시험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시지만, 십자가에 죽는 그 순간까지 사탄의 시험은 계속되었습니다. 기도많이 한다고 사탄이 시험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성경 많이 본다고 사탄의 시험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고, 사탄이 시험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죽을 때까지 해야만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탄의 시험이 많은 곳이며, 우리는 그 시험에 넘어져 악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연약한 인생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시험을 이길만한 힘과 지혜가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결코 사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악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이렇게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와 같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컷들의 바람기도 유전자 처리로 없앨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미국 에모리대 연구팀은 한 마리의 암쥐에 충실한 프레리 들쥐 유전자를, 바람기 많은 숫쥐에게 투여한 결과, 숫쥐가 한 마리의 암쥐만을 찾는 성향으로 변했다고 영국 과학잡지 네이처에서 밝혔습니다. 에모리대 연구팀은 인간 외의 다른 영장류를 상대로 유사한 실험을 최근 실시했으며, 곧 인간 실험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영국 BBC 방송이 보도했습니다. 프레리 들쥐의 유전자를 받은 숫쥐들은 때때로 다른 암쥐와 교미하기는 했지만, 결국 한 마리 암쥐만을 찾는 성향으로 변했다고 연구팀은 강조했습니다. 연구팀은 유전자 하나로 바람기와 같은 복잡한 성향을 바꾸는 것이 가능함을 입증한 실험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유전자를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성향의 배우자나 자식을 만드는 일도 가능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남편이나 아내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다른 여자나 남자를 보고서도 전혀 시험들게 되거나 악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주기도문 가운데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부분을 빼버려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자신이 원하는대로 만들어, 시험받을 일이 전혀 없으며, 악에 빠질 가능성도 전혀 없게 된다면, 결국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며, 인간의 존재가치는 상실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시험을 받되, 그 시험을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과 지혜, 말씀으로 이기며 악에 빠지지 않게 되었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 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지켰을 때 인간의 가치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생활을 통해, 마음과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지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런데 성경 원문을 보면 ‘호티’라는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우리가 쓰는 말로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다시 설명하자면,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주석가 윌리암 핸드릭슨은, “주의 기도를 마무리 지을 때 우리의 눈을 들어 위로 향하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확신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영광 돌리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기도의 가치는 영원합니다. 시대를 초월한 모든 성도들이 이 기도를 함으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할 것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확대되어, 마침내 온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드리는 모든 심령마다 ‘아멘’ 할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모임 마침의 기도가 아닙니다. 생활의 기도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생활이 죽어 있다면, 이번 기회에 나의 기도가 올바르게 세워지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만약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주문 외우듯이 기도했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루에 세 번 주의 기도를 묵상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의 기도를 다시 만나고,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기도를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을 몰랐던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도록, 아버지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옵소서. 서로에게 지은 죄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 하셨으니,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사람들을 용서할 때 주님께서도 우리의 잘못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험에 들게 하지 않도록 기도하게 하옵소서. 시험을 승리하기 위하여 영의 양식을 먹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 마 6:19-24
“교회 출석에 장애물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헌금’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면서 주일헌금으로 오천원 또는 만원 정도하는 것은 부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정도라면 기꺼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라든지 건축헌금을 하게 된다면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생겨난 말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려면 돈이 있어야 해!”수긍은 가지만 전혀 맞는 말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12장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제자들과 함께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이 많은 금액의 헌금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헌금하는 것도 보셨습니다. 그 여인은 두 렙돈의 동전을 궤 속에 넣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2:43-44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보신 것은 금액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 믿으려면 돈이 있어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 그 마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냐 돈이냐’의 저자 죠지 버트릭목사는 “사람이 섬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의 최종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신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돈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민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돈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분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만약 재물에 관한 성경적인 올바른 지식과 이해가 없으면, 신앙생활하는 내내 이 문제로 인해 갈등하게 될 것이고, 마음은 불편할 것입니다.
어느 미국인 부부가 동네를 산책하다가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크고 아름다운 집을 보았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도 언젠가 저런 집에서 살게 될 거예요.’남편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여보, 너무 허황된 꿈 아니예요? 지금 우리 집을 판 돈으로 저런 집을 산다는 건 어림도 없어요. 은행잔고와 내 수입이 얼마인지도 당신이 잘 알잖아요.’부부는 그 집 앞에서 30분 동안이나 된다, 안 된다로 옥신각신 했습니다. 그후 몇 달 동안 아내는 집요하리만큼 열심히 남편을 설득했고, 마침내 아내의 믿음이 남편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남편도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주실 거야’라고 확신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 마침내 부부는 살던 집을 팔고 큰 땅을 사서 꿈에 그리던 그런 집을 지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베스트셀러가 된 ‘긍정의 힘’의 첫 장 ‘비전을 키우라’에 등장하는 저자 조엘 오스틴 목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이 책을 읽은 분들은 공감하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송한 말씀을 드리자면, 미국의 많은 신학교에서는 조엘 오스틴 목사를 포함한 번영신학의 메시지가 기독교 복음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그의 책과 설교를 가득 채우고 있는 메시지와 목차와 제목을, 시중에 범람하는 자기계발서의 그것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시면, 금방 알게 됩니다. 믿음을 긍정으로, 비전을 야망으로, 은혜를 성공으로, 하나님을 내 안의 가능성으로 바꾸어서 읽으면 아무런 차이가 없는 내용임이 금방 드러납니다. 큰 집, 좋은 차, 사업 성공, 병 치유를 하나님의 은혜라 가르치고, 더 큰 집을 꿈꾸는 것을 비전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그런 집을 주시리라는 자기최면을 믿음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도, 그리고 제자가 구할 하나님의 나라도 없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설교 중에 조엘 오스틴 목사의 메시지를 이단보다 더 위험하다고 비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제자됨의 가장 큰 장애물인 탐욕을 비전으로 포장하고, 하나님을 그 탐욕을 채워주시는 심부름꾼 정도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거짓된 메시지에 현혹되어, 자신도 비전을 품고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것을 간절히 믿으면, 4,000만불(500억)이 넘는 재산을 가졌다는 조엘 오스틴 목사처럼 부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런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비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탐욕의 다른 이름이며, 그 탐욕이야말로 제자도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산상설교 중 예수님이 구제와 기도, 금식에 대해 가르치신 후 들려주시는 세 개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 6:19절부터는 제자도의 가장 큰 장애물 두 개를 소개하십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제자가 추구할 이상은 무엇입니까? 산상설교에 두 가지 이상이 소개됩니다. 첫째는 개인적인 것으로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공동체적인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이상을 추구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 두 가지는 무엇일까요? 탐욕과 근심입니다. 오늘 본문은 탐욕을 다루는데, 이를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3개의 비유를 차례로 들려주셨습니다. 각각 보물, 눈 그리고 종의 비유입니다.
19-20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먼저 보물의 비유의 메시지는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먼저 땅에 쌓는 것이란 돈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모으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를 위하여…’곧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라고 합니다. 왜 하늘에 쌓는 것이 우리를 위하는 길입니까? 첫째 이유는 땅에 쌓아두면 손실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19절하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1세기 유대인들은 진흙을 이겨 집을 지었습니다. 은행도 없던 시절 돈이나 보물을 집에 둘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문을 잘 잠그고 나가도 도둑이 벽에 구멍을 뚫고 들어와 훔쳐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래 집을 비워야 할 땐 도둑이 찾지 못 하도록 동전과 귀한 물건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그러면 습기 때문에 옷감에는 좀이 슬고 동전에는 동록이 생겨서 못 쓰게 되었습니다. 땅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손실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이민 간 한 한국인이 있었는데, 처음에 가서 할 일이 없어서 튀김집을 했다고 합니다. 튀김집을 하다보니까 기름을 손으로 많이 만집니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곳은 은행에다가 저금을 많이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세금을 많이 물게 되니까, 자기 수입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돈을 버는 대로 그는 그것을 자루에 넣어서 땅속에 파묻어 버렸어요. 그후 몇 년 후에 돈이 필요해서 그 자루를 꺼내서 열어봤더니, 좀이 다 쓸어가지고 왜냐하면 기름기가 있으니까 벌레들이 모여들어 가지고 돈을 다 못쓰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 결국 버렸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 땅에는 우리의 물질을 영원히 보관할 만한, 보호할 만한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늘에 쌓은 보물은 손실이 결코 일어나지 않고 불어나기만 합니다. 20절하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사람들은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양식을 사고 남은 것은 알뜰살뜰 아껴서 저축을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고도 경제성장 시대를 맞이할 때 80년대 90년대 저축률이 세계 1위였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당시에 적금이 최소한 3개 이상은 되었습니다. 자녀를 대학 보내려고 교육 보험을 들었습니다.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주택 적금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입니다. 그리고 엄마들끼리 모여서 곗돈을 붓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이 돈을 모으는 행동에 대해서 옳다고 여긴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종교 개혁이 있기 전인 16세기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기독교인이 돈을 모으는 것은 죄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종교 개혁자들은 정직하게 일한 돈으로 양식을 사고, 남은 돈을 모으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직하게 번 돈을 열심히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시대적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기존의 귀족이나 왕족 이외에도 평민 중에서 돈을 크게 버는 새로운 부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자본주의가 이어져 온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고 수입이 생겼는데, 그것으로 양식을 사서 먹고 여유가 생겼을 때, 그것을 저축하는 것 자체는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손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지, 부지런히 돈을 모으는데 우리의 손이 바빠서는 안 됩니다. 우리 손이 오로지 돈을 많이 버는데 혈안이 되어서 밤이 늦게 까지 일한다거나, 주일에도 일한다거나,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 일한다거나 하게 되면, 그의 손은 오직 돈을 이 땅에 모으는 데 치우친 것입니다. 우리의 손은 우선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일을 하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손에 주신 재물을 가지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 다음에 남은 것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손으로 구제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늘에 쌓는 것은 고통받는 이웃과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래에셋의 박현주 회장이 쓴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라는 책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바르게 벌어서 바르게 쓸 때 돈은 아름다운 꽃이 되어 활짝 피어납니다!”그렇습니다. 돈은 바르게 벌어서 어려운 이웃과 나눌 때 아름다운 꽃이 됩니다. 그러나 돈을 추하게 벌어서 나누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쌓아놓을 때, 그 돈은 악한 독초가 됩니다. 돈을 꽃이 되게 하느냐, 아니면 독초가 되게 하느냐는 전적으로 그 돈을 가진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아름다운 꽃이 되게 할 때 그 돈은 하늘에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눅 12:33절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그러면 일용할 양식을 사고 남은 것은 전혀 저축을 하지 말고 모두 구제비로 사용하라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요? 첫째, 먼저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립니다. 둘째,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셋째, 구제를 위해 사용합니다. 구제비의 구약성경의 기준은 셋째 해 곧 구제의 십일조 드리는 해의 십일조입니다. 신 26:12절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이 있습니다. 신 26:19절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가지고 이 땅에 재물을 쌓지 말고, 부지런히 이웃을 돌아보고 선한 일을 하는데 바쁜 손이 되기를 바랍니다.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땅의 손실과 하늘의 상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하는 첫째 이유라면, 둘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보물이 있는 그곳에 들러붙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질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과거에 열심히 저축을 하던 시대에 텔레비전에 나오는 익숙한 장면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저금통장을 여러 개 만들어놓고 그것을 옷장 깊숙이 간직합니다. 그리고 매달 월급날이 되면 가장 기본적은 생활비를 남겨두고 통장에 입금합니다. 통장에 찍힌 액수나 남은 적금 횟수를 헤아려 보면서 주인공은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통장에 입을 맞추고는 통장을 가슴에 품고 너무 좋아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모습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설사 남은 재물을 가지고 저축을 한다고 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축해서 모아진 재물이 있다면, 그것의 주인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 재물의 주인은 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학 2:8절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내가 열심히 일하고 아껴서 모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통장에 쌓인 돈을 보고 마음이 뿌듯하고 든든해하고 어깨가 으쓱해진다면,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재물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돈의 주인은 언제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잠시 내게 맡겼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목사님이 나체촌에서 예배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사모님과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어떤 복장으로 갈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벗고 있는데 목사님 부부만 정장을 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다 벗고 예배를 인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부부는 수영복을 입고 목사님은 어깨 위에 스톨을 걸치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래도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벗은 몸에 긴 타올로 주요부위를 가린 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이 목사님이 예배 내내 한 가지 생각 때문에 예배를 제대로 인도하기가 힘이 들었답니다.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바로 ‘이 사람들이 헌금을 할 수 있을까? 벌거벗은 몸에 지갑이 있을 리 만무하고.’ 웃자고 해 본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의 마음이 에배가 아니라 헌금에 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예수님은 재물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눈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육체의 눈의 기능에 대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눈이 좋아야 온 몸이 행동하기에 편하고,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둠에서 헤매는 것처럼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깊은 의미는 영적인 역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이 오로지 돈을 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 그 눈은 나쁜 눈이요, 우리 눈이 선한 일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밝은 눈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밝은 눈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천사를 대접하였던 아브라함, 시어머니를 섬기기 위해서 유대 땅에 온 룻을 도와준 보아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자 신세가 된 다윗에게 양식을 제공하였던 바르실래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22절부터는 눈의 비유가 시작되는데, 이 내용이 좀 아리송합니다. 이것은 1세기 유대인들이 이해하는 눈의 기능을 묘사합니다. 오늘날처럼 시각정보가 안구를 통해 뇌로 전달되어 외부의 상을 인식하는 원리를 몰랐던 고대인들은 눈을 몸의 창으로 이해했습니다. 눈을 감으면 빛이 안 들어오고 눈을 뜨면 빛이 몸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몸의 등불이라고 불렀고, 눈이 좋으면 빛이 몸 안에 들어와 몸을 밝게 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눈과 몸을 이용한 이 비유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눈은 곧 마음을 의미합니다. 전 2:10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눈과 마음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곧 눈과 마음은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몸은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마음은 삶에 빛을 비추는 창문이라는 뜻입니다. 성한 눈, 좋은 눈은 그럼 무슨 의미일까요? 잠 22:9절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고통받는 이웃에게 후히 나누어주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이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23절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
반면 나쁜 눈도 있습니다. 나쁜 눈은 또 무엇일까요? 그것은 만족을 모르는 마음입니다. 전 4:8절에 보면 ‘어떤 사람은,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이라고 했습니다. 잠언에 악한 눈은 이런 눈이라고 하였습니다. 잠 28:22절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성경에 악한 눈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한 후에 재물을 빼돌렸던 아간이 그러했습니다. 나발은 다윗이 자신의 가축을 지켜준 은혜를 망각하고, 다윗의 도움 요청을 냉혹하게 거절하여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재물에만 눈이 가 있는 악한 눈을 가진 자들입니다.
사람은 자꾸 보는 것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재물을 보는 자는 세상을 따라가고, 결국은 마귀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눈이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예수님이 바라보는 것에 같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항상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과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재물에 눈이 가 있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 요일 2:16절에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라고 했습니다. 만족을 모르는 마음은 은혜의 빛을 가려서 삶이 어둠으로 가득 찬다는 뜻입니다. 곧 우리의 마음이 땅에 있느냐 하늘에 있느냐, 만족을 모르는 인색한 마음이냐 후히 베푸는 너그러운 마음이냐에 따라, 삶의 질이 어둠에 둘러쌓인 불행한 것이 되기도 하고, 은혜의 빛으로 가득찬 복된 것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하는 마지막 이유는 보물을 땅에 쌓으면 우리가 그 보물의 노예가 되어 마침내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세 번째인 종의 비유가 설명해 줍니다. 우리가 좋든 싫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아가미가 아닌 폐로 호흡하고, 지느러미로 헤엄치지 않고 다리로 달리고, 네 다리로 달리지 않고 두 다리로 걷는 것처럼, 피조물인 이상 창조주를 섬기는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의 종이 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복된 일입니다.
본문에서 ‘섬기다’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의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노예가 되다’입니다. ‘섬기다’는 번역은, 원문의 어감에 비해 너무나 부드럽게 되어 있습니다. 노예는 당연히 ‘한 주인’만 섬길 수 있지, 결코 “겸하여”섬길 수 없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모든 시간, 모든 힘을 다 바쳐서, 문자 그대로 자기 인생 전체를 몽땅 다 오직 단 한 명뿐인 자기의 주인을 위해서만 일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노예가 “두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아예 그 말 자체가 근본적으로 성립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노예가 이 세상에 있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 틀림없습니다.
신앙이 좋고 선정을 베풀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종종 궁궐을 빠져나가서 서민들과 사귀고 대화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한번은 믿음이 좋은 한 과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여왕은 과부와 함께 신앙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중에 과부의 믿음에 감동을 한 여왕은 “부인을 찾은 손님 중에 가장 고귀한 분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여왕은 과부가 “예수님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을 기대했는데, 전혀 뜻밖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가장 귀한 손님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여왕 폐하이십니다. 제 생애 최고의 손님이십니다.” 그러자 실망한 여왕은 “부인을 찾아 주신 최고의 손님은 예수님이 아닐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과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여왕 폐하, 예수님께서는 결코 손님이 아니십니다. 제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집에 처음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을 위해 존재합니다.”여러분이 섬기는 예수님은 필요할 때 부르는 손님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모시고 있는 주인이십니까? 주인이라는 것은 언제나 주인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누구이냐는 물음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똑똑한 개와 멍청한 개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똑똑한 개는 주인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하지만 멍청한 개는 먹을 것을 주면 따라갑니다. 온전한 삶이 아닌, 지금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을 따라갈 때, 우리에게는 주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해져야 물질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하여!”라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물질을 주신 주님이 보시기에 부끄러움이 없이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물질이 사용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하여 누가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물질을 사용할 때, 주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재물’이라는 말은 원어로 ‘돈 신’을 뜻합니다. 돈의 신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돈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고, 돈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지만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돈은 필요한 것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또한,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기 전에는 돈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멋진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이고, 사람은 ‘나눔의 대상’이고, 물질은 ‘사용의 대상’이라고 말입니다. 행복은 질서가 잘 지켜질 때 찾아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돈을 거의 신처럼 숭배합니다. 돈 따라 직업과 배우자를 선택하고 진로를 결정합니다. 또한 돈 때문에 미워하고,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강도질합니다. 그처럼 돈만 따라 살면 인간은 질이 나빠집니다. 결국 신앙은 돈과의 싸움입니다. 곧 내 마음 중심에 “돈을 모실 것인가, 하나님을 모실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기에, 돈에서 해방되어야 진짜 신앙이 가능합니다.
오늘날 물질 축복을 받았다는 간증은 많지만, 그 물질을 잘 썼다는 간증은 적습니다. 사실 부자가 물질을 잘 쓴다고 입증되기 전에는 그를 존경하기 힘듭니다. 나눔이 없이 많은 소유를 자랑하면, 자기가 무엇인가 된 줄 착각하게 해서 오히려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주인이 정해지면,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부자가 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부자가 되고 나서 우리 삶의 주인이신 그분이 어떻게 쓰기를 원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돈을 다스리는 삶을 살든지, 돈이 주인이 되어 우리가 노예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누구인지가 정해지면, 돈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부자가 되려는 욕망에 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성장연구소에서 출판한 책 중에 회계사가 직업인 김동윤 장로님이 쓴 책이 있는데, ‘예수님 다음으로 돈이 좋아요.’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붙는게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 다음으로 돈이 좋아요.’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죠? 예수님을 가장 좋아하고 다음에 돈이 좋지요? 돈이 좀 많았으면 좋겠고, 좀 넉넉했으면 좋겠고, 아마 그런 바람들 여러분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김동윤 장로님은 그의 책에서 이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돈이 보낸 편지라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는 움켜쥐고는 나를 당신의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당신의 것이 아니지요. 나는 아주 쉽게 당신을 지배할 수 있어요. 우선 당신은 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죽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부디 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나를 다루어주세요.’ 우리가 자칫하면 돈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은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바르게 사용해야 된다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강단에서 ‘돈’은 금기시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조금도 거북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며, 애매하게 돌려서 말씀하지도 않으셨을 뿐 아니라, 아예 명백한 명령으로 내려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그야말로 구구절절 ‘돈에 관한 것’이 아닙니까? 그것도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비유를 통하여, ‘재물 관념이 바로 되어 있는 사람은 온 몸이 밝은 인생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장님이나 다름없다’라고 실로 쉽고도 적나라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돈을 열심히 버는 것은 ‘엿새 동안에 힘써 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돈을 모으기만 하는 것을, 인생 목표로 삼는 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그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그야말로 ‘일만 악의 뿌리’이며, 결국 ‘자기를 스스로 찌르는 저주’나 마찬가지입니다. 재물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으며, ‘사람의 주인’은 더더구나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주시는 이 복을 정말 받아서 누리는 분들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딤전 6:7-8절에 보니까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그리고 여러분의 필요를 하나님 앞에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사용하고,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속에 날마다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성경적인 재물관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게 하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재물을 이 땅에 쌓지 말고, 선교와 구제에 사용하여 하늘에 쌓아두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은 재물이 모여진 곳에 있지 말게 하시고, 그 재물의 주인이시 하나님을 향하여 두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은 재물을 모으는 데 있지 말게 하시고, 내가 도와야 할 이웃을 향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않게 하옵소서.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 마 6:25-34
탈무드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올 때는 두 손을 불끈 움켜 주고 나오지만, 죽을 때는 그 손을 편다. 생명에 들어설 때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갖지만, 그 생을 떠날 때는 그의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고 만다. 가져갈 것 아무것도 없는데도 숨 쉬는 동안은 근심과 염려가 떠나지 않는다.”
어떤 상담가가 걱정 근심에 대하여 분석 정리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걱정거리는 무엇입니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사례가 40%,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걱정하는 사례가 30%, 질병에 걸릴 염려가 12%, 장성한 자녀들과 친구들에 대한 걱정이 10%였다고 합니다. 걱정의 92%가 걱정 안해도 되는 일들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근심 걱정하는 것의 90% 이상은 사서 걱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현대는 정보 사회입니다. 인터넷의 도래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양의 정보를 우리는 거의 날마다 접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보 과잉으로 인해서 우리가 꼭 알지 않아도 좋을 정보까지 습득한다는데 있습니다. 식자우환이라는 말이나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 몰라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것까지도 시시콜콜 알게 되다보니까, 근심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몰라서가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이 알아서 걱정입니다. 좌우지간 현대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염려에서 시작해서 염려로 마칩니다. 건강 걱정, 자식 걱정, 직장 걱정, 돈 걱정, 정치 걱정, 경제 걱정, 환경 오염 걱정, 심지어 자꾸만 늘어나는 흰 머리털 걱정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들의 염려에는 끝이 없습니다. 작년 6월 22일 55세의 할리우드 억만장자 영화제작자인 스티브 빙이 자택인 할리우드 인근 고급아파트 27층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여러 편의 성공한 영화를 제작해왔고, 자산이 5억 5천만 달러가 넘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하고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인들의 말로는 그가 코로나 사태로 봉쇄조치와 자택격리가 길어지면서 우울감을 주변인들에게 호소해 왔다고 합니다.
최근의 어느 목사님과 대화하던 중에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노라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서,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는 것이 이틀에 한 번 꼴이라는 것입니다. 딱히 이것이다 할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그래서 몹시 피곤하고 지친다는 것이지요. 흔히들 말하는 공황장애증상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목사도 그런 증세를 겪느냐고 혹 의아해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목사도 교통사고 당하면 다리 부러지는 것처럼,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런저런 정서적 문제를 겪습니다. 아무튼 코로나 사태 초기에는 감염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면, 사태가 장기화되면서는 감염 못지않게 정서적 고통이 커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야기된 경제적 어려움, 봉쇄조치로 인해 느끼는 고립감, 미래가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겹치면서, 우울증, 불면증 등 다양한 정서적 문제를 가져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의사들에 따르면 모든 병의 70% 정도가 마음이 지어낸 것에서 오는데, 그 주된 원인이 스트레스와 걱정 때문이라고 한다. 영적인 문젯거리를 가진 사람들이 보낸 수천 통의 편지를 읽는 가운데, 나는 걱정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심장 전문의들은 염려를 심장 질환의 제 1원인으로서 꼽았다.’ 그렇습니다. 염려 때문에 사람들은 신경성 위장병에 걸립니다. 염려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염려 때문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염려야말로 현대인들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최고의 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염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우리는 결코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염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주신 해법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염려하는 사람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설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염려하지 말라고 설교해야 할지, 또 모든 사람이 알 만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정작 저 자신이 한 주간 많은 염려를 했습니다. 염려는 걱정, 근심이라고 해도 됩니다.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도 염려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염려라는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주위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폐해가 잘 느껴지지 않을 뿐이지, 인간에게 큰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염려라는 독한 병입니다. 인간의 오랜 역사 가운데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염려라는 질병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는지, 염려라는 장막에 갇혀 인생을 허비했는지 모릅니다. 인간의 삶을 불행으로 만드는 단초에는 늘 염려라는 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염려처럼 끈질긴 것도 없습니다. 왜 염려할 필요가 없는지, 그 내용을 잘 설명해 주고 위로해 줄 때는 고개를 끄떡이지만, 그 설명이 끝나기도 무섭게 돌아서면 또다시 ‘하지만’이라며 염려하는 게 우리의 실상입니다.
염려처럼 전염성이 강한 것도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에서 염려가 시작되지만, 결국 이 염려가 모든 인격과 몸을 지배하게 됩니다. 곧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염려가 힘을 발휘합니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이 염려하게 되면, 옆에 있는 또 다른 사람도 염려하게 되고, 이어 또 다른 사람도 염려에 전염됩니다. 게다가 염려처럼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것도 없습니다. ‘worry’라는 단어의 어근의 뜻은 ‘물어뜯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물어뜯어서 우리로 찬송과 기도를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염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염려를 다섯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하나씩 설명해 주십니다.
그런데 25절의 첫 글자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25절 말씀이 24절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25절은 24절에 대한 결론으로서 나온 말씀이라는 사실이지요. 그러므로 24절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주님께서 25절 이하의 말씀 전체에서 주시고자 하는 요점을 바로 깨달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24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이게 무슨 말입니까? 두 주인을 섬기는 일이 염려의 원인이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 하다 보니까 염려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희랍어로 ‘염려한다’는 말은 본래 ‘마음을 나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왜 염려합니까? 마음이 나누어져서 두 주인을 섬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돈, 둘 다 섬기려 하기 때문에 마음이 나누어져 염려가 생깁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도 살려고 하니까 염려가 찾아옵니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다 잡으려고 하니까 염려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은 마음이 끊임없이 분열되어서 평안이 없게 됩니다. 약 1:8절 말씀처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인 것입니다. 생각이나 행동, 결정 모든 면에 있어서 불안정해지기 때문에 염려가 떠날 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음 속에 두 주인, 세 주인, 수많은 주인들을 섬기기 때문에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 갈라져서 염려도 비례해서 많아지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한 사람의 생애는 누구를 섬기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섬기는 대상이 고귀하면 그 사람의 인생도 고귀하여집니다. 특별히 한 분 주님을 섬길 때 우리는 마음 속에 신뢰와 안정감이 생겨서, 여러 주인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마음이 늘 단순하고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염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마음에 여러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섬기는 숫자에 비례해서 근심 걱정도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염려를 덜고 생활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단순히 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단순히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부유하고 가장 넉넉하고 가장 고귀한 주 하나님 한 분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이외에 세상적인 주인을 많이 섬기면 많이 섬길수록, 그 마음에는 염려와 근심이 떠날 날이 없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25절‘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첫 번째로 주님은 염려가 우리의 몸과 목숨을 상하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우리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가장 근원적인 염려를 예로 들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 말씀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어떤 메뉴를 선택할지, 또는 의류점에 가서 어떤 옷을 고를지 정도의 선택의 어려움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 먹고 살아갈 수는 있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염려와 걱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염려에 놓인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염려가 몸을 상하게 하고,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실제로 몸이 상하게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염려로 쌓이게 되면 그때부터 불안해집니다. 두려움이 생깁니다. 의심이 많아집니다. 조급해집니다. 나중에는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과 가족에게 신경질 부리고 안달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뜯어 상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상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몸을 망가뜨리고, 심지어 목숨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때로 염려는 우리의 가정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두 번째로 염려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앞당겨 가져와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므로, 오늘을 충일하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헨리 나우웬은 염려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않은 시간과 장소를 무엇인가로 가득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다시 말해, 염려란 우리의 마음을 ‘혹시’로 가득 채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혹시 암에 걸리지 않을까?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혹시 실직하지는 않을까? 혹시 결혼을 못 하는 건 아닐까? 혹시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혹시 아이가 뛰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 혹시 학교 간 아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이런 식으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혹시’로 가득 채우는 게 염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가 불행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 미래는 불행 속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하느라 오늘이라는 시간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신나게 내리막으로 뛰어 내려갑니다. 엄마는 따라 내려가면서 말합니다. “안 돼! 안돼!”왜 안 된다고 할까요? 뛰다가 넘어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안 된다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아이가 뛸 때 함께 뛰면서 기분 좋게 뛰어 내려가지를 못합니다. 아이가 넘어질지 모른다고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뛰어놀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엄마는 염려 때문에 그 시간을 충일하게 보내지 못합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과 부모 역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대학입시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라고 염려하느라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합니다. 심지어 걱정 때문에 잠도 이루지 못합니다. 정작 제대로 공부를 못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반복됩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현실로 가져와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그래서 결국 오늘을 제대로 살아내는 못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귀던 사람이 갑자기 결별을 선언하면 어떻게 하지? 아직 만나는 사람도 없는데…. 아기를 못 갖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아직 결혼도 안 했고, 결혼할 사람도 없는데…. 아빠의 사업이 망하게 되면 어떡하지? 아직 아빠는 사업을 구상 중인데…. 우리는 왜 이렇게 먼저 앞으로 달려가서 걱정하는 것일까요? 걱정하느라 오늘이라는 귀한 날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까지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세 번째로 우리는 종종 일어나지 않을 것을 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염려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 아주 고전적인 예화가 있습니다. 늘 걱정과 염려가 많아서 사업을 하기가 쉽지 않았던 ‘아서 랭크’라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염려하느라 매일매일 힘들고 불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 좋은 생각을 합니다. 일주일 중 하루를 ‘염려하는 날’로 정하는 것입니다. 염려 상자를 만들어 염려나 걱정거리가 생기면 내용을 적어 상자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곤 그 염려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일주일 중 단 하루, 수요일에만 염려 상자를 열어, 적어둔 내용을 읽으며 염려하기로 정한 것입니다. 드디어 수요일이 되어 염려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과연 많은 염려 종이들이 나왔습니다. 한 장씩 한 장씩 읽어 가면서 본격적으로 걱정을 하려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사이에, 한 주간도 안 되는 그 사이에, 저절로 많은 염려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는 걱정거리가 안 된 것들이 70% 이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우리가 너무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자주 걱정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병원에 가서 MRI 촬영을 합니다. 간에 알갱이 몇 개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CAT Scan을 촬영하자고 합니다. 병원을 나오면서 걱정과 염려가 생깁니다. ‘혹시 간암일 수도 있다는데 간암이면 어떡하지? 간암이란 진단이 나오면 가족들에게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술을 받아야 할까? 아니면 자연치유를 선택해야 할까? 자연치유를 위해서 시골로 내려가면 누가 나를 따라와 줄까? 하던 일은 어떻게 하나? 사표를 내야 하나? 아니면 휴직 처리를 해야 하나? 개인사업이라면, 내가 하던 이 사업을 누가 맡아서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수술을 받는다면 어느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할까? 혹시 수술을 받다가 의사 선생님이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배우자는 어떻게 하나?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 저의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염려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염려들은 며칠 후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이 “별문제 없는데요.”라는 말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질 걱정거리입니다. 곧 쓸모없는, 쓸데없는 걱정들입니다.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네 번째로 예수님은 염려해도 소용없는 것들을 우리가 염려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이 말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닌데, 하나님의 영역을 붙잡고 쓸데없이 걱정하고 근심하며 염려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님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암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라고 우리는 염려합니다. 그렇게 걱정한다 해서 우리가 암에 걸리지 않습니까? 염려한다고 암에 걸리지 않습니까? 암에 걸리는 것은 우리의 염려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한다고 암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역을 넘어섭니다.
예를 들어 산 위에 좋은 집을 짓고서 살고 계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매우 큰 염려를 하고 있었습니다. 산 위의 아주 좋은 집에 살면서도 늘 마음에 ‘산불이 나면 어떻게 하지?’라는 염려를 품고 계셨습니다. 그럼 차라리 도시에 내려와 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곳에 살면서 매일매일 ‘산불이 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에 사로잡혀 계셨습니다. 여러분, 산불이 나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편 127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 127:1-2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우리가 아무리 걱정하고, 계획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생각하고, 염려해도 하나님이 세워 주지 않으시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그러므로 걱정과 염려 없이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복입니다.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까? 염려를 이기는 첫 번째 방법은 ‘나의 신분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우리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공중의 새 정도가 아닙니다. 들의 백합화 정도가 아닙니다. “들의 꽃들도 공중의 새들도 하나님께서 입히고 먹이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를 믿으라. 너희는 나를 믿는 자들이 아니냐? 나의 자녀들이 아니냐?”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어렵게 자수성가한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나이 오십이 다 되도록 결혼도 하지 못하고, 열심히 가족만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늙으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양했고, 직업이 없는 동생들을 뒷바라지했습니다. 자신이 벌어오는 것으로 살림을 하느라 걱정과 염려가 끊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늘 가계부를 적고, 하루하루 필요한 물건을 계산하고, 집을 옮기는 문제, 전세를 얻는 문제, 동생들에게 가게를 얻어 주는 문제, 아버지의 건강 문제 등으로 늘 씨름하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던 날 한 간증입니다. “이제 내게도 의지할 분이 생겼으니 참으로 기쁩니다. 나의 걱정과 근심을 내어놓을 수 있는 의지할 분이 생겼으니, 이제 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린아이가 소파 위에서 아버지에게 뛰어내립니다. 아버지는 그 아이를 붙잡아 줍니다. 그러면 아이는 까르르 웃고 다시 올라갑니다. 소파에 올라가 다시 뛰어내립니다. 아버지는 또다시 받아냅니다. 아이는 또다시 웃고 다시 올라가 뛰어내립니다. 만약 이 아이가 ‘아빠가 혹시 안 받아주면 어떻게 하지?’라고 염려했다면 뛰어내릴 수 있겠습니까? 아빠를 믿기 때문에 뛰어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즐겁게 뛰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이가 됩니다. 염려가 사라지면 놀이가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두 번째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염려를 극복하는 방법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라’는 것입니다.보다 근원적인 것에 우리의 관심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염려를 극복하기 위해 삶의 가치관과 방향성이 달라져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질적인 것, 명예, 건강 등 세상적인 것에만 관심을 쏟게 되면, 결국 우리는 염려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암에 걸리면 어떡하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그것이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죽어도 하나님 나라가 약속돼 있으니, 무엇을 겁낼 것인가? 내가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하며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면 염려가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축복의 약속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덤으로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쓸데없이 욕심에 매여 염려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생의 가치관을 바꾸고 하나님을 위하여, 보다 복 되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하여 노력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주님께서 선물로 내려주실 것입니다.
28-29절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세 번째로 염려를 이기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염려와 반대되는 매우 중요한 관점이 오늘 이 말씀에 숨겨져 있습니다. 염려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무엇일까요? 바로 ‘감탄’입니다.예수님은 들의 백합화를 보시며 감탄의 관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백합화를 보면서 염려해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백합화를 밟고 지나가면 어떻게 하지? 홍수가 나서 백합이 물에 차 죽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백합은 왜 하필이면 저곳에 피었을까? 왜 하필이면 저 큰 나무 아래서 싹이 났을까? 저 큰 나무 때문에 백합이 죽게 되면 어떻게 하지?’ 이처럼 얼마든지 들판의 백합을 보며 걱정하고 염려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에 핀 백합화를 보시며 염려 대신 감탄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그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않구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멋진가? 이 자체로 얼마나 존귀한가!”
‘우리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하지?’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어머니를 미리부터 치매 환자로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웃으셨구나!’라고 환호하면 되는 것입니다. “멋지시네요. 아직 몸이 움직이시네요. 잘 걸으시네요. 하나님, 오늘 어머니와 아버지와 이렇게 좋은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이렇게 감탄하는 것입니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 공부 못해서 좋은 학교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하지?’걱정과 염려를 미리 앞당겨 불행한 삶을 살지 말고, 웃으며 천진난만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며 감탄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예쁜 아이를 나에게 허락해 주셨지? 공부가 문제냐? 지금 네 모습 자체로 참 아름답구나!”이렇게 감탄하는 것입니다. 감탄은 감사로 이어집니다. 또 감사는 찬송으로 이어집니다.
31~32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네 번째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염려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니 하나님께 다 맡기라’는 것입니다.육신의 아버지도 자녀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압니다. 특히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자녀의 필요가 무엇인지 더 잘 압니다. 때를 따라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잘 공급해 줍니다. 특히 며칠이라도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할 때면 정말 챙기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챙깁니까? 자기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식이 걱정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잘 아십니다. 그리고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잘 아시고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양식, 옷, 신발, 식수 등등.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지 못하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입니다. 그러나 주의 약속하심을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그 심령 속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염려가 가장 없는 시절은 언제였나요? 돈이 많을 때입니까? 건강할 때입니까? 언제입니까? 아마 어린아이 시절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린아이 때에 염려거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 만큼 염려거리가 많은 때는 없을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는 목숨을 위해 스스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구할 수 없는 때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때가 가장 염려가 없고 행복한 시절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있는 염려거리를 부모에게 모두 맡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염려할 것을 부모들이 대신 염려합니다. 사랑하는 우리아이에게 무엇을 먹이고 입힐까를 부모가 정성껏 준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속에 있는 이들도 이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염려거리가 생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책임져주실 것을 믿고 맡겨드려야 합니다. 내 자녀, 직장, 사람들과의 관계, 미래의 일들이, 염려하고 내가 붙들고 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결되지 못한 일들을 붙잡고 마음과 육신이 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그분께 모든 염려를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이 이 세상의 염려속에서 마음과 육신이 상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염려에 빠져서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리고 재물이 이 염려를 해결해 줄 것처럼, 거짓으로 속여서 재물을 섬기는 종으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세상 사람과 같이 이 세상에서 썩어질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위해 구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거룩한 일을 위해서 택함받았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썩어질 것을 구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있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그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굶주리고 박해를 받을 때에, 그것이 염려거리가 아니라, 도리어 감사가 되고, 주의 평안을 누리는 축복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염려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지 않는 것입니다. 염려거리가 많은 이 세상을 살지만,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에 충만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할 때, 나머지는 덤으로 하나님께서 주심을 믿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항상 우리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게 하옵소서. 모든 근심, 걱정 염려는 주님께 맡기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의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참 된 믿음의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