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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가져야 하는 바른 관심
2015. 8. 30(주일낮예배) 요한복음 1:35-42
의자빼앗기 게임이 있다. 노래를 부르며 의자주위를 돌다가 진행자의 스톱이라는 소리와 함께 의자에 앉는 사람이 이기는 그런 게임이다. 10명이 게임을 하면 의자는 8개나 9개를 놓는다. 그리고 스톱할 때 의자를 차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떨어지는 게임이다. 그런데 이어령교수의 딸이 이민아씨가 의자빼앗기게임을 정말 잘했다고 한다. 그래서 의자빼앗기게임을 하면 늘 1등을 하였는데, 한번은 2등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의자빼앗기게임에서 1등을 하지 못한 것은 친구때문이었다. 친한 친구와 제일 마지막에 남았는데, 이민아씨는 그 친구가 쉽게 의자에 앉을 수 있도록 양보를 한 것이다. 그래서 떨어진 것이다. 이어령교수가 이 사실을 알고 어린 이민아씨에게 왜 의자에 빨리 앉지 않았는지를 물었을 때 이민아씨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을 했다.
걔는 내 친구잖아
이민아씨의 이 말을 들은 이어령교수는 잠깐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왜냐하면 칭찬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경기는 자신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할 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이어령교수였다면 뭐라고 말하겠는가? 사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어느 것이 정답인지 몰라서 갈등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러한 때에 정답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고 있는가? 창세기 4장에는 가인의 계보가 나오고,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계보가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 바른 제사도 드리지 못했고, 또 하나님이 유리하는 자가 되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에덴의 동편에서 에녹성을 짓고 정착한 가인의 계보는 망하는 계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가인의 계보를 보면 망하는 계보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가인의 계보에 라멕이라는 사람은 아내가 2명이나 되고, 또 자기를 해한 사람을 죽였다는 강포함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강포함을 가진 가인의 계보에 장막에 거주하면서 가축을 치는 조상인 야발이 있고, 또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는 유발이 있다. 그리고 기구를 만들어서 사용하는 최초의 조상인 두발가인도 가인의 계보에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자였고, 또 그의 후손은 강포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들에서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목축을 하여서 부요함을 누릴 수 있었고, 또 그 부요함 속에 문화를 즐기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문화를 만들어서 즐길 수 있었고, 기구를 사용하여서 일을 쉽게 하는 방법도 터득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의 계보에는 이런 특이한 점이 나오지 않는다. 꼭 독특한 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969세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가 나오고, 또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신 에녹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명을 더 말한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써 심판할 때 구원을 받은 노아가 나온다. 이들의 삶에는 가인의 계보에서 나오는 것처럼 화려함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담의 계보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의 계보와 가인의 계보에 나오는 큰 차이가 하나있다. 그것은 가인의 계보는 죽는 나이가 기록되어져 있지 않고, 아담의 계보에만 나이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왜 가인의 계보에는 그 사람이 몇 년을 향수하였는지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아담의 계보에는 그들이 몇 년을 살았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인가? 어떤 신학자는 그 이유를 하나님의 기억하심으로 해석을 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떠난 사람은 자기 원하는대로 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죽음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하나님이 눈여겨보고 있지만, 이들의 삶에는 화려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가인의 계보와 아담의 계보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싶은가? 유고슬라비아는 내전으로 7개 공화국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 가장 끔찍한 전쟁이 있었던 곳이 세라예보이다. 세라예보는 산으로 둘러싸여져 있었기 때문에 저격수들이 산위에서 무차별로 사람들을 쏘아서 죽이는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 가운데 살았다. 거기다 전쟁 중이었기에 전기와 음식과 물을 공급받지 못하였다. 그렇게 어렵게 사는 세라예보에 폭탄이 떨어져서 14명의 사람이 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폭탄이 떨어진 그 곳을 지나가는 것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장을 하고 모자를 쓴 신사가 큰 가방을 포탄이 떨어진 그곳에 놓았다. 그리고 그 가방에서 첼로를 꺼내어 연주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신사의 첼로연주를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신사는 다음날에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첼로를 연주하였다. 그렇게 14명의 죽음을 기념하면서 14일을 연주하였는데, 마지막 14일째 되는 날에는 세라예보에 많은 사람들이 그 장소에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음악을 듣고 위로를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폭탄이 떨어져 14명의 사람이 죽어서 낙심한 사람들에게 첼로를 연주하여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이 사람의 첼로연주 실력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신사가 포탄이 떨어진 자리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연장에서 연주를 했다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 앞에서 큰 박수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사는 왜 공연장이 아니라, 포탄이 떨어진 그 곳에서 연주를 했겠는가? 신사의 관심은 자신이 박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심이 다르면 행동과 결정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교회는 아름다운 꽃밭을 가지고 있다. 저는 한번씩 머리가 복잡하면 마당에 가서 꽃들을 본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진다. 제가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꽃밭을 보면 우리교회 집사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그 모습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전에 그 자리는 풀들이 무성해서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이 되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빌라사람들이 벌레 때문에 문을 열어놓지 못하도록 할 때가 있었다. 그때 화단을 볼 때마다 미안하고, 마음이 힘들었는데, 그곳을 예쁜 꽃밭으로 바꾸고 나니 볼 때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강대상의 화분도 마찬가지다. 올 여름에 무더운 날씨로 인하여 강대상의 화분이 다 시들어 버렸다. 제가 예배당 문을 좀 열어서 환기를 시켜 주었으면 시들지 않았을텐데 제가 문을 열어놓지 않아서 화분의 나무들이 다 시들어 버렸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에 생각지도 않았는데, 집사님 한분이 무거운 화분을 들고 오셔서 살아있는 나무로 다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화단에 잡초가 보이고, 또 강대상 나무가 시들었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다 보이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교회에 떨어져 있는 휴지와 또 쓰레기통이 가득차 있는 것이 보이는 사람은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교회에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하고 호소하고 싶다.
그런데 저와 다른 목사님이 있다. 이웃과 함께하는 도시교회2라는 책에 보면 서울에서 노지훈목사님이 사역하는 익산 꿈이 있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노지훈목사님은 개척하여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았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에 정류장에 나가서 우산을 빌려주는 일을 하고, 또 독거노인과 소년소녀 가장의 집에 쌀과 김치를 담아주는 일도 하였다. 또 모기와 벌레가 많은 여름에는 지역주민들의 신청을 받아서 가정에 방역도 해 주었다. 그리고 상습쓰레기 투기지역에는 꽃밭을 만들어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지만, 지속적으로 그런 일을 하니 지역사회에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지역사회에 함께하던 꿈이 있는 교회는 8주간의 주부를 대상으로 기적 프로젝트를 하였다. 교회는 주민들이 가지는 고민을 분석하여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베란다에 채소를 키우는 방법, 아토피자녀 치료법, 약밥만들기와 같이 주제로 강의를 하였다. 그 중에 가장 인기있는 것이 어린이 유괴와 성폭력 예방교육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내용을 가르쳐 주고, 또 유괴상황을 재현하여 실습도 하였다. 이렇게 강의를 했더니 주부들이 남편들을 위한 8주 프로젝트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아이와 노는 법,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법과 같은 주제를 만들어 훈련을 했다. 그랬더니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그러면 노지훈목사님과 꿈이 있는 교회의 관심은 무엇인가? 아마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은 우리 목사님은 교회만 생각하는데 노지훈목사님은 폭이 넓은 목회를 하는구나! 노목사님이 목사답다 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교회도 아니고, 지역사회도 아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곳은 어디인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요 1:37-38)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세례 요한의 제자 2사람 중에 한 사람은 안드레이다. 그리고 주석가들에 의하면 다른 한 사람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일 것이다고 추측한다. 그래서 저는 그냥 안드레와 요한이다고 말씀을 드리겠다. 안드레와 요한은 자기의 스승이었던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또 다음날에 그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요한과 안드레는 세례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을 구하느냐? 였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는가? 아프리카 내전으로 한 아이가 두 다리를 잃었다. 그 아이가 바닥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의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낙서이다. 그 사진을 한번 보기 바란다.
내전이 있었다면 그 나라는 부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리를 잃어버렸으니 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막막하기만 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 어린아이이므로 친구들과 뛰어놀고 싶은데 다리가 없으니 놀 수 없어서 많이 외롭고 힘들 것이다. 이런 아이가 지금 바닥에 앉아서 그린 그림은 자기 다리였다. 그래서 마음껏 친구들과 뛰어놀고, 또 열심히 일을 하여서 건강한 삶을 만들어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전으로 인하여 포탄에 이 아이는 다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만약 이 아이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다면 이 아이는 두 다리를 주십시오 하고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는 두 다리를 얻어서 기뻐뛰며 춤을 추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성경에도 나오고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고함을 쳤다. 그랬던 바디매오를 예수님께서 불러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고 물으셨다. 그때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한다고 하여서 눈을 뜨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바디매오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본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늘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런데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예수님께서 안드레와 요한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면 안드레와 요한은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안드레와 요한도 삶에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많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드레와 요한은 자신들이 삶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랍비여 어디계십니까?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왜 이들은 무엇을 구하지 않고, 랍비여 어디계십니까? 하고 묻고 있는가? 그렇게 묻고 있는 안드레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10시까지 예수님은 안드레와 요한과 함께하였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하였던 안드레는 이제 자기의 형제 베드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가 베드로에게 한 말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를 데리고 다시 예수님께로 달려온 것이다.
그러면 안드레와 요한과 안드레와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께로 달려온 베드로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이들의 관심은 세상에서 얼마나 부요하게 사느냐?에 있지 않았다. 또 내가 다니는 교회에 성도가 몇 명이 모이는가?에 있지도 않았다. 이들의 관심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야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 사람들을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은 나를 구원하시는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저와 여러분은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대한 선교적 전략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심 이전에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나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일반적으로 애플의 창업자는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스티브잡스가 21살이고, 워즈니악이 26살에 창고에서 창업을 할 때 함께한 또 다른 사람이로널드 웨인이다. 당시 42살의 로널드 웨인은 어린 잡스와 워즈니악이 분쟁이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명목으로 함께 동역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애플사의 최초 마크인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의 그림을 만든 사람이다. 그렇게해서 지분을 잡스와 워즈니악이 45%를 가지고, 웨인은 10%만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웨인은 애플사가 창업한지 11일만에 그 지분을 800달러(한화 83만원)에 팔아버렸다. 그때 웨인이 그 지분을 판 것은 잡스와 워즈니악이 밤을 새며 일을 하는데, 그들을 따라다니다가는 자신이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분 10%를 83만원에 팔아버린 웨인은 지금 네바다주에서 주는 연금으로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다.
그런데 만약 웨인이 그때 그 지분을 팔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자산이 220억불(25조원)을 가진 재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열심히 일하는 청년들을 보면서 그들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은 없고, 혹시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하나 하는 자기자신만 생각했던 웨인은 결국 최악의 결정을 한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또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와 여러분의 관심이 여호와의 구원에 있기를 원한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좋은 신앙인으로 교회봉사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과 지역사회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나타내는 제자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참된 제자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