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감리회 조선연회 컨 감독과 조선감리회
1929년 제12회 남감리회 조선연회를 주재한 에인스워스 감독은 4년의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뒤를 이어 컨 감독이 바통을 이었다. 폴 벤틀리 컨(Paul Bentley Kern) 감독은 1882년 6월 16일에 존 애덤스 컨(John Adams Kern) 박사와 마가레트 컨(Margaret Virginia Eskridge Kern)의 4남매 중 세 번째 아들로 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랜돌프 매이슨 대학(Randolph-Macon College)의 영어성경 교수였으며 그 대학의 임시 총장을 맡은 후 나중에 밴더빌트 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의 교수가 되었다. 컨은 1897년부터 1899년까지 랜돌프 매이슨 대학에 다녔고 1905년에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졸업했다. 1907년 컨은 남감리회 엘리야 호스(Elijah E. Hoss) 감독에게 집사 및 장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컨 목사는 선교사로서 훈련받을 목적으로 밴더빌트 대학교 종교학교의 통신교육학교에서 조교가 되었다. 그해 컨은 내쉬빌 출신의 루시 캠벨(Lucy Goodall Campbell)과 결혼하고 슬하에 존 캠벨(John Campbell), 버지니아(Virginia)와 캐서린( Katherine)를 두었다. 컨 목사는 1910년부터 1915년 동안 테네시 주의 내쉬빌(Nashville), 벨버클(Bellbuckle), 머프리보로(Murfreesboro)에서 성공적으로 목회 임무를 수행했다. 그 후 5년 동안은 남감리교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의 효율적 목회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하였고 1920년부터 1926년까지 그 대학교의 신학교 교장으로 봉직했다. 1926년에 샌안토니오 교회 담임목사로 5년 동안 열심히 목회했던 중 1930년 5월에 댈러스에서 열린 남감리회 총회에서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감독으로 취임한 후 곧바로 그는 4년을 임기로 동양지역을 관할하는 감독으로 파송받았다. 이때 컨 감독은 에인스워스 감독 후임으로 남감리회 조선연회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컨 감독이 조선연회를 담당하던 1930년은 조선 감리교회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해였다. 1930년 12월에 미국 남북감리교회가 본토 미국에서도 이루지 못한 남북감리교회를 통합하여 조선에서는 하나의 감리교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1884년 미국 북감리회가 조선에 선교를 시작한 지 46년 만이고, 1897년 미국 남감리회가 조선에 선교한 지 33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이때 기독교 조선감리회 자치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미국 남북 감리교회는 각각 조선에 선교를 시작하여 그 시간을 열심히 달려왔지만 사실 조선에서도 둘로 나누어진 감리교회의 모습은 보기 좋지 않았다. 미국 본토의 상황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쉽게 합동하기가 어려웠지만 조선의 경우는 달라야 했다. 둘로 나누어지기보다는 하나로 선교정책을 펼치는 것이 더 유리했고 보기도 좋았다. 그래서 두 감리교회는 하나 됨을 위하여 끊임없이 물밑 작업을 시도했다. 마침내 남북감리회가 조선에서 선교한 지 40년과 27년 되는 되는 해 1924년 3월 5~6일에 남북 감리교회의 합동을 위하여 진흥방침연구위원회가 구성되어 첫 모임을 가졌다. 이 회에서는 5개 사항을 결의했다. 가장 두드러진 사항은 제1항에 명시된 대로 조선에 있는 남북의 두 감리교회 합동하여 단일 감리교회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세부적으로 명칭, 예문과 장정, 교역자 파송 문제와 모든 사업은 조선 감리회 감독의 관할 아래에 둔다는 사항을 합의했다.
이와 같은 5개의 결의 사항은 1927년 9월에 남북 감리회 조선연회가 합동하여 미국 남북감리회에 청원하였다. 먼저 1928년 5월에 개최되는 미국(북) 감리회 총회에 상정되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남감리회는 1930년 5월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비록 북감리회보다 2년이 늦었지만 남감리회 총회 역시 이 안건을 기쁘게 통과시켰다. 조선에서의 남북 감리교회의 합동 안건이 모두 통과 되자 두 감리회 총회에서는 전권위원을 선출하여 조선에 파견했는데 미국과 조선의 남북 감리교회에서 위원을 보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미북감리회의 총회 전권위원은 웰치 감독(Bishop H. Welch), 쇼 박사(Dr. W. Shaw), 애밴 부인(Mrs. T.M. Avan), 니콜슨 감독(Bishop T. Nicolson), 서덜랜드 박사(Dr. G.F. Sutherland)였다. 남감리회 총회의 전권위원은 컨 감독(Bishop Paul B. Kern), 크램 감독(Bishop W.G Cram), 무어 박사(Dr. T.W. Moore), 매딘 박사(Dr. P.D Maddin), 하웰 양(Miss. M.K. Hawell)이었다. 미감리회의 조선연회 전권위원으로는 신흥우(申興雨), 변성옥(邊成玉), 오기선(吳基善), 김종우(金鐘宇), 노보을(魯普乙, William Arthur Noble)이었다. 남감리회 조선연회 전권원의원은 양주삼(梁柱三), 윤치호(尹致昊), 정춘수(鄭春洙), 위임세(魏任世, Clarence Norwood Weems), 왕래 양(Miss Wagner)이었다. 이때 당연히 미감리회 조선주재 베이커 감독(Bishop J.C. Baker)과 남감리회 조선주재 컨 감독(Bishop Paul B. Kern)이 포함되었다. 컨 감독은 그가 조선연회로 오기 전 6년 전부터 준비했던 남북감리교회 합동에 관한 계획이 마침내 결실을 보는 1930년에 조선연회를 관리하는 감독이 되어 결정적으로 남북 감리회의 합동에 관한 사항의 종지부를 찍는 일에 공헌하게 된 것이다. 컨 감독은 동양지역 관할 감독으로 1934년까지 직무를 담당했다. 조선감리회는 조선인 감독의 관할 하에 두었기 때문에 컨 감독은 연회를 주관할 수 없게 되었지만 조선감리회가 독립이 아닌 자치 시대를 맞이하였기에 미국 감리교회와 긴밀한 소통이 중요했으므로 그 역할을 잘 담당하여 조선감리회가 조선 땅에서 깊이 뿌리내리고 든든하게 서가는 데 힘썼다.
남북감리교회가 마침내 통합을 하고 조선감리회 자치 시대를 열게 된 1930년 12월 총회가 개최되기 전 남감리회는 9월 24일부터 30일까지 제13회 조선연회를 경성 종교교회에서 개최했다. 이 조선연회는 당시 남북 감리교회 합동이 결정된 시기였으므로 사실상 미국 남감리회 마지막 조선연회였다. 그런데 이 연회는 당연히 컨 감독이 주재해야 했지만 그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임시 의장으로 양주삼 목사를 투료로 결정하여 그에게 회무를 맡겼다. 9월 30일 오전 11시 30분에 속개된 제6차 회집은 미북감리회 베이커(J.C. Baker) 감독이 참석하여 미북감리회와 연합 집회를 개최하였고 베이커 감독은 남북감리회의 합동에 대해서 설교했다.
1931년 2월 16일~17일 합동 이후 남북 감리교회 선교부 대표자들로 구성된 기독교 조선감리회 중앙협의회 제1차 회의에 참석하여 선교정책 사업 내용을 협의한 후 귀국했다. 그해 12월에 다시 조선에 들어와 16일에 열린 중앙협의회 제4차 회의에 참석했다. 1932년에는 조선에 오지 못했고 이듬 해 1933년 11월에 아내와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 이때 한 달 간 있으면서 중앙협의회, 감리교 선교사협회를 주재했다. ‘기독교와 세계 정황’이란 제하로 기독교인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영능회(靈能會)를 조직하여 노블 선교사를 회장에 세웠다. 영능회는 선교사들의 영성을 위하여 찬송과 기도, 성경연구 모임으로 영어로만 하는 모임이다.
컨 감독은 1934년까지 동양지역의 관리 감독으로서 임무를 마치고 1938년까지 다시 임기 4년의 감독 직무를 미국 캐롤라이나(Carolinas)에서 열리는 4번의 연회에서 수행했다. 그 외에도 그는 은퇴하던 1952년까지 쿠바, 플로리다, 테네시 연회를 맡아서 감독 직무를 수행했다. 또한 컨 감독은 감독으로 피선 되었던 1930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남감리교대학교, 밴더빌트 대학교, 에모리 대학교에 강사로 빈번하게 출강하기도 했다.
1948년 컨 감독은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WCC) 대표로 참석했다. 1952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총회에서 감독 설교를 통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서 예리하고 포괄적인 발표로 폭넓은 관심을 끌기도 했다. 7개 대학과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활발하고 진보적이며 역동적인 지도자”란 평을 받았다. 컨 감독은 1952년에 은퇴하고 여러 활동을 이어갔다. 1952년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주날루스카 호수 의회 광장(the Lake Junaluska Assembly Grounds)에서 청년 센터 건립 기금을 모금했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이 호숫가에 짓고 이 기금을 오랫동안 관리하는 수탁자로 있었다. 거기에서 그와 하빈( E. O. Harbin)은 감리교회의 청년들의 순례 여행을 돕는 “청년 크라반 운동(Youth Caravan Movement)” 설립에 도움을 주었다. 그 외에도 강연과 집필할동에 전념하다가 컨 감독은 1953년 12월 16일에 밴더빌트 대학 병원에서 별세하여 테네시 주 내슈빌에 있는 마운트올리벳(Mount Olivet)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컨 감독이 평생 남긴 저서는 다음과 같다. ①《A Methodist and its Works (감리교회와 그 사역)》이 책은 티피(Worth M. Tippy)와 공저했다. ②《The Miracle of the Galilean: Methodism Has a Message(갈릴리 사람의 기적: 감리교회는 그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③《예수에 대한 기본 신앙: 삶의 뒤편에 있는 가설(The Basic Beliefs of Jesus: A Story of the Assumptions Behind Life)》이다.
컨 감독은 미국 본토의 감리교회도 해결하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열된 감리교회가 조선에서만큼은 분열의 끝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통합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대 명제를 실천하는데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 시기에 미감리회 조선연회를 담당했던 베이커 감독과 상호 협력 관계를 가지고 조선에서 하나의 감리교회를 만들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조선에서 진행된 남북 감리교회의 합동에 대한 큰 계획이 결실을 보고 1930년에 조선감리회의 닻을 올리게 되었다. 한국 감리교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이다. 한국감리교회 자치시대를 열고 그 이후 독립시대를 맞이하여 한국 내에서 감리교회가 든든하게 자리를 잡고 부흥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산파 역할을 잘 해준 미국 감독들의 숨은 공로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