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의 추억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술기운이 서서히 올라오자 바닷가 모래밭으로 자리를 옮긴 일행이 캠프 화이어를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누군가 어느새 장작을 구해오고 다른 일행들은 일사분란하게 장작을 쌓아서 불을 붙였다. 작은 불씨는 점점 커지면서 주변을 밝혔고, 불꽃의 향연은 서서히 시작되었다. 불꽃이 경포 밤바다의 야경과 어울려 환상의 예술을 만들어 내고 밤바다의 파도소리가 탭댄스 구두 소리처럼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 하고 한데 어울려 장엄한 오케스트라 선율처럼 퍼졌다. 장작에서는 불꽃
아지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춤을 추다 사라진다.
젊은이들은 불꽃을 보며 흥이 절로 난다. 그들 젊은 청춘들이 멀어져 가는 여름의 끝자락을 붙잡은 채 한껏 즐기고 있었다. 당연히 빠져서는 안 되는 음주와 가무가 곁들여지고 흥겨운 노래 소리가 주변을 들뜨게 만들었다.
젊은이들의 애창가 ‘연가’를 시작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도 아름답지만 사랑스런 그대 눈은 더욱 아름다워라’
‘그대만을 기다리리 내 사랑 영원히 기다리리 그대만을 기다리리 내 사랑 영원히 기다리리,,,,,’
이어서 윤형주노래 ‘라라라’도 빠질 수 없었고, 누군가의 시작으로 함께 불렀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저 멀리 달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질 않네,,,,,’
영우가 흥겨움 속에서 조용히 마음속 소망을 빌어본다.
“오빠 나, 아까 불꽃 보면서 기도했다.”
“무슨 기도”
“맞혀봐”
“글쎄 무슨 기도 했을까”
“우리들 부푼 가슴 사랑의 열매 움트게 해 주세요. 어둠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풍요로운 우리 사랑의 결실 맺게 해 주세요. 뜨거운 불꽃처럼 우리의 사랑도 식지 않는 열기만 가득 담아주세요,,,”
“나도 기도했는데 영우랑 같은 마음,,,”
꺼져가는 불꽃을 뒤로하고 일행이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젊은 청춘들은 이대로
흩어질 기미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의 활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동료들이 자리를 이동하는 동안 영우와 병휘가 남아서 뒷정리를 끝내고 그들을 따라 걸었다.
깊은 밤 바닷가 모래밭에 영우일행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숙소로 들어갔거나 마지막 여흥을 즐기려고 장소를 옮겼을 것이다. 모두들 떠난 바닷가는 금세 쓸쓸해졌다. 다음 행선지를 어디로 정할지 우왕좌왕 망설이다 여자들에게 맡기기로 했는데, 모아진 여자들의 의견은 나이트로 가서 밤이 새도록 달리는 거였다.
상점들의 불빛은 하나둘 꺼져가고 있는데, 그들이 가려고 하는 나이트 불빛만 유독 화려하게 빛나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웅장하게 퍼지는
음악 소리가 밖에까지 흘러나왔다. 영우일행은 해변나이트를 들어갔다. 안에는 이미 자리를 가득 메운 청춘들이 유행하는 팝송음악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은 일행이 자리를 잡고, 이미 전작에 술기운이 올라와 있던 병휘오빠와 동료들이 한 명 두 명씩 무대 앞으로 나가자 그들의 애인들도 함께 따라 나가서 춤을 추었다.
정아 씨는 어디서 배웠는지 몸을 흔들 줄 아는 것 같기는 한데 어딘가 어설퍼 보였고 선미 씨나 은정 씨 춤 솜씨는 젬병이었다. 군인들의 춤은 하나같이 뻣뻣하고 촌스럽다고 느끼며 영우도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인천의 유흥가에서 요즘 유행하는 허슬 춤을 선보이자 그곳의 사람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춤은
인천에서 가장 먼저 유행한다는 말이 실감났다.
부대 생활의 억압된 규율에서 벗어난 군인오빠들도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려는 듯
지칠 줄 모른 채 몸을 흔들며 술을 마셨고, 그들의 애인과 영우도 지금 마냥 좋아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며 즐거워하는 사이에 어느덧 엔딩 음악이 나왔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헤어지는 마음이야 아쉬웁지만 우리 이제 헤어져요’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이트를 나섰다. 불빛 하나 없는 밤하늘에 별들은 더욱 밝게 빛났고 고요한 해변가에 파도 소리만 철렁거렸다.
새벽이 돼서야 숙소로 돌아온 영우가 오늘 처음 본 여자가 궁금해서 병휘오빠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처음 본 단발머리 여자 있잖아. 오빠도 많이 아는 여자야? 오빠한테 반갑게 인사 하던데,,,?
병휘가 조금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산에서 부터 서중사 하고 사귀는 사이인데, 서중사가 이번에 나하고 같이 이곳으로 오게 되자 여자도 직장을 강릉으로 옮겼데”
“무슨일을 하는데 그렇게 직장을 쉽게 옮길 수 있지?”
“고속버스 안내양이래”
“어쩐지 말 하는게 또박또박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세련되 보이더라”
“그런데 일은 힘든가봐. 그래도 수익이 좋아서 여자들한테 인기 직종이래, 군인중사 월급보다 훨씬 많다고 하던데, 영우도 버스안내양 한번 해보지 않을래? ㅎㅎ”
“그럼 오빠하고 같이 못 있는데 그래도 돼?”
“그건 안 되지 영우는 안 되겠다.”
“나는 손힘이 약해서 하라고 해도 못해. 그런데 두 사람 어떻게 만났데,,,”
“주간잡지 선데이서울 펜팔란에서 서로 편지를 주고받다가 인연이 돼서 애인이
됐다나 봐”
영우도 선데이서울을 몇 번 들춰 봤지만 펜팔로 인연이 돼서 연인이 된 커플을
실제로 보니 신기했다. 영우 생각에 펜팔은 펜팔로 끝나고 말지 직접 만나서 연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거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벽이 다 될 때쯤 잠이 들었다. 죽은 듯이 깊은 잠에 빠진 두 사람은 해가 중천에 떴을 때야 잠에서 깼다. 점심때가 다 돼 갈 때쯤 경포대 모래밭에 동료들이 모였다. 군인 체력이라서 그런지 오늘 새벽까지 술 마시고 춤추고 놀았건만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일행들은 해변에서 씨름판을 벌였고, 병휘오빠는 한번도 못 이기고 꼴찌를 했다.
영우는 창피했다. 평소 단단한 체질이라고 믿고 있던 병휘오빠다. 그런데 오늘 동료 군인들에게 맥없이 지는 걸 보고 조금은 실망했고 의아했다. 병휘도 부끄러운지 쑥스런 표정으로 영우를 바라봤다. 영우가 얼른 표정을 바꿔 괜찮다는 표정으로 위로했다. 동료들은 병휘의 예상치 못한 패배를 기뻐하며 소리를 질렀다. 평소 부대 내에서 씨름판을 벌일 때는 그렇게 힘없이 주저앉는 경우가 없었는데 오늘은 예상 밖으로 약했다. 병휘는 동료애인들 체면을 생각해서 일부러 져 준거라며
너스레를 떨며 변명을 했다.
모두들 경포대의 열정적인 추억을 뒤로하고 다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횡계행 버스에는 강릉에서 볼일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차 안이 붐볐다. 원래 일요일 이 시간쯤에 강릉에서 버스를 타면 사람들로 만원인데 병휘일행 10여명이 한꺼번에 타는 바람에 버스가 더욱 비좁았다. 어제 구불구불 넘어오던 대관령 고갯길을 반대로 넘어가는 버스에서 좌석에 앉지 못한
사람들은 서서 버텨야 했는데 앉았을 때 하고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차가 한
번 코너를 돌면서 휘청거릴 때면 한쪽으로 쏠리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몸이 밀착
됐다.
여자들은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고 남자들은 즐거워서 큰소리로 웃었다. 왁자지껄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동안 어느새 버스는 횡계에 도착했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난 뒤 영우는 TV를 보고 있고 병휘는 영우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영우가 TV에 눈을 고정한 채 병휘에게 물었다.
“오빠 아까 씨름할 때 한 번도 못 이기고 왜 다 졌어,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 줄
알아?”
병휘오빠가 대답이 없다.
‘고단 했었나 보구나, 금세 잠이 들었네’
베개를 받쳐주고 영우도 옆에 누웠다. 그리고 어느새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는데 두 사람은 일어날 기미가 없다. 창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영우가 깜짝 놀라 깼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병휘오빠 군대 동료들이다. 시간이 돼도 나오지를 않아서 집으로 찾아 왔덴다. 시계를 봤다. 시계 바늘은 일어나야 할 시각을 넘어가 있었다. 황급히 병휘오빠를 흔들었다. 그런데 끙끙 알고 있었다.
이마에 손을 올려 보니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영우의 손길에 병휘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걱정스런 마음에 오늘 집에서 쉬면 안 되냐고 물었다. 병휘가 고개를
저으며 옷을 갈아입는다. ‘군인은 아파도 쉴 수가 없나 보다. 어쩌면 아파도 안 되는 게 군인인지도 모를 일이다’ 영우는 그사이 따뜻하게 물을 데워서 가져왔다.
그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병휘오빠는 아픈 몸으로 출근을 했다. 뒷모습이 안쓰러워 볼 수가 없다.
하루 종일 병휘오빠가 걱정돼서 밥도 먹을 수 없었다. 도무지 방안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어서 큰길까지 들락날락 안절부절 하루를 보내다가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대문 앞에 나가 병휘오빠를 기다렸다. 몸에서 열이 펄펄 났었는데 하루
종일 별 무리는 없었는지 걱정이 돼서 조바심이 났다.
골목 입구에 병휘오빠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다. 걸음걸이가 그리 힘들어 보이지는 않아 보여서 다행이다.
“오늘 괜찮았어?”
“응 부대에 감기약이 있어서 먹었더니 조금 좋아진 거 같아,,,”
“강릉 갔을 때 무리해서 그렇지, 씨름할 때 한 번도 못 이기고 기운이 없어 보이더라고?”
“그러게 나도 그렇게 맥없이 질 줄은 몰랐는데 전날부터 감기증상이 있었던 거
같아”
“그럼 미리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었어야지”
“동료들도 있고 여자들도 있는데 약국에 들어가기엔,,,”
“그게 뭐 어때서, 그게 그렇게 창피하면 나한테라도 살짝 말했으면 내가 약을 사 왔지”
“앞으론 그렇게 할게”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