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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환경
지은이;벌마로(김윤식)
부산에서의 늦은 아침을 맞은 영우와 미경이 낮 시간 동안 부산 시내를 여행하기로 했다.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부산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영우자신만 할 일없이 한가롭다고 느껴졌다. 미경이와 시장구경을 하며 길거리음식으로 배를 채우기도 하고, 지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기분을 전환하기도 했다.
영우가 부산에 도착해서 한 가지 신기하게 느낀 것은 미경이의 말투다. 평소에 서울에서는 미경이의 사투리를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미경이의 사투리는 생소하게 들렸다. ‘이렇게 사투리를 많이 쓰는 애가 어떻게 서울에서는 한 번도 안 쓰고 표준말만 했을까?’
두 사람은 저녁 무렵 해운대로 향했다. 영우는 부산을 처음으로 왔다. 당연히 해운대도 처음이다. 바닷가 모래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아직은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눈에 띄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모래를 밟으며 속절없이 병휘오빠와 함께
걷던 강릉 경포대의 추억을 떠올렸다. 잠시 행복한 설레임이 마음속에 머물더니
이내 무언지 알 수 없는 쓸쓸함과 불안감이 온몸을 덮쳤다. 그토록 슬픈 생각은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여행을 왔건만 불안한 예감을 지우기에는 영우의 마음이
아직 여렸다.
붉게 물든 석양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저 멀리 유난히 통통해 보이는 한 마리 갈매기가 아무도 없는 황량한 바다 위를 힘없는 소리로 울며 홀로 날고 있다.
해는 지고 어두운데 무슨 사연 있길래, 머물 곳을 못 찾고 왜 이리 정처 없이 맴돌고 있을까. 친구들은 모두 어디 가고 혼자 헤매는 걸까.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 남아서 갈 곳을 잃었나 보다. 아니면 어쩌다가 짝을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영우의 마음을 아는지 아니면 외로움을 달래려는지 하염없이 허공을 맴돌고 있다. ‘너도 나처럼 마음 둘 곳 없어서 방황하고 있는거니’
옆에서 영우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미경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고 있어?”
“응? 갈매기가 혼자 날고 있길래,,,”
잠시 미경이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영우는 외로운 심정을 들킨 것 같아서 아무렇게나 둘러대며 미경이에게 눈을 돌렸다.
“기차에서는 남자애들 때문에 못 물어봤는데,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말해봐 내가 다 들어줄게”
“,,,,,,”
영우가 잠시 머뭇거리자 말 못할 고민거리가 있다는 것을 간파한 미경이는 영우가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의도로 불쑥 옛날 일을 꺼냈다.
“너 기억나니. 우리 중학교 때, 현충일 전날 학교 전체가 국립묘지 가서 청소하고
묘비 앞에 꽃송이 놓던 일”
“기억나지”
“그때 너는 묘비 앞에 꽃송이를 놓다 말고 목 부러진 할미꽃을 보고는 불쌍하다고 슬퍼하면서 눈물을 글썽였잖아. 그때 친구들이 너보고 감수성이 너무 예민해서 걱정이라고 핀잔주고 그랬지”
“맞아. 내가 좀 그랬었지”
영우도 중학교 시절이 문득 떠올라 미경이의 일화를 꺼냈다.
“우리 2학년 때인가,,, 너는 미국 포드 대통령 방한했을 때 카퍼레이드 거리 환영식에 동원돼서 태극기 흔들다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대신 손수건을 흔들었다가 나중에 선생님한테 야단맞았잖아”
“맞아 그랬었어, 내가 뭘 잘 떨어뜨리잖아. 게다가 날씨는 춥지, 한참을 기다려도
대통령 차는 오지 않지, 그러다 보니 그런 실수를 한 거지. 하필 너는 그런 걸 기억 하고 있니 창피하게“
“우리 학창시절은 여기저기 참 많이도 불려 다녔어”
“그러게 말이야”
화제를 잠시 바꾸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 영우가 병휘오빠에 대해서 입을 열기 시작 하면서 그동안 병휘오빠를 만나서 있었던 일들을 마치 친언니에게 고백하듯
하나하나 이야기를 풀어놨다. 자신의 철없는 행동으로 식구들한테 신뢰를 잃고만
현재의 상황, 서로 사랑하고 있는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볼 수가 없는 안타까운 심정, 그동안 병휘오빠를 만나서 있었던 일들을 전부 다 미경이에게 털어놨다.
미경이는 영우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말없이 들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지금
만나는 남자가 있어서 연애를 하는 중인데, 상대가 미덥지 못해서 고민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는데 영우가 부산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해서 흔쾌히 받아 들였다는 거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슨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냥 마음이 편해졌다.
영우는 미경이와 부산여행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미경이도 그렇게 생각 했다. 두 사람이 각자의 답답함을 토로하며 모래밭을 걷는 사이 석양은 사라
지고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이미 어둠이 시작된 지 오래 되었는데 그것을 두 사람이 모르고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영우가 회사에 첫 출근을 했다. 첫 출근이라 늦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예상 시각보다 조금 일찍 집에서 나왔다. 집에서 회사까지 거리는 멀어도
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버스에서 내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걷다보니 어느새 그녀가 다니게 될 회사 정문 앞까지 다 왔다. 산뜻한 느낌의 연보라색으로 페인트칠 되어있는 수위실이 있고 옆으로 길게 담장이 쳐져있다. 담장 길을 따라 길게 벚꽃이 피어 있는
게 눈에 들어 왔다. 올해는 봄 날씨가 유난히 따뜻하더니 벚꽃이 일찍 피기 시작한 모양이다. 회사에 곧바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인 거 같아서 벚꽃을
보면서 담장 길을 걷기로 했다.
일찍 핀 꽃잎이 땅으로 떨어져, 달리는 자동차 바람에 흩어져 휘날리며 이리저리
뒹굴렀다. 그것은 마치 눈보라를 연상하게 했다. 지난날 병휘오빠와 팔달산을 오를 때 기억이 떠올랐다. 고작 일 년 전 일이건만 마치 십 년은 지난 일인 냥 오래전 추억처럼 아련하게 그려지고 행복했던 영상이 눈앞에 아른 거린다.
담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정문 앞에 섰다. 이곳이 사회 생활의 첫 시작을 하게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어쩔 수없이 긴장이 됐다.
회사 내의 첫인상이 기대했던 것만큼 밝고 환한 느낌은 아니었다. 낯설고 어색해
하는 영우의 입장은 아랑곳없이 회사선배들이 기쁘게 환영해 주었다. 덕분에 영우도 긴장을 풀어놓을 수 있었다. 회사선배들이 먼저 회사소개와 간단한 자기소개를 끝내고 영우의 개인 신상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었다. 선배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질문을 하는데 그 중에서 얼핏 봐도 경륜이 묻어나 보이는 미스김 언니는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묵직했다. 배려심도 깊었고 따뜻한 심성도 느껴졌다. 영우는 선배들의 질문에 찬찬히 그리고 명료하게 대답했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고 멍한 상태로 퇴근을 했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한동안
영우는 어리둥절 갈팡질팡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그러나 센스 있고 눈썰미가 좋은 영우가 업무에 익숙해지고 동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회사는 작지만 탄탄한 중견 기업이다. 직원이 200여 명 정도 되는데 영우는 여직원 4명이 근무하는 총무과에서 일을 했다. 일도 어렵지 않았지만 월급도 다른 직장보다 좀 더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영우는 회사에 만족하며 빠르게 적응해 갔다.
오늘은 첫 월급날, 월급봉투를 받아 든 영우는 자신의 현재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시작하는 첫 단계일 수 도 있다. 그렇다고 영우자신의 용돈이 부족하거나 해서 어려움을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영우네 집은 경제적으로 풍요했고 영우가 원하는 만큼의 소비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자신이 일을 해서 번 돈은 느낌이 달랐다. 영우는 동료들의 저녁모임도 거부하고 집으로 향했다.
“엄마 나 월급 탔어”
엄마는 대견한 듯 월급봉투를 받아 들고 한참을 보시더니 다시 영우에게 건네주며
“그래 고생했다. 돈 아껴 쓰고 저축했다가 이담에 시집갈 때 보태 쓰거라”
엄마는 간단하게 덕담만 남기고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직장을 다니는 영우 또래의 친구들은 월급을 타면 집안 살림을 보태느라 자신의
결혼 비용을 모으는 것은 고사하고 한 달 용돈도 아껴 써야하기 때문에 늘 부족하게 지내야 할 때가 많이 있다. 하지만 영우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영우의 월급은 다음 달 월급 때까지 다 쓰고 모자라면 집에서 더 타서 써도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우는 월급을 아껴서 모아야 한다는 무슨 신념 같은 것이 마음속에 싹트고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이유인지 확실하지는 않아도 예전과 다르게 그녀의 마음가짐에 변화가 일고 있었다. 영우의 속마음을 알았는지 엄마는
지금 아껴서 시집갈 때 쓰라고 말씀하신다. 아니면 그냥 첫 월급을 타 와서 엄마에게 자랑하는 막내딸의 모습이 대견해서 덕담으로 하는말일 수 도 있겠지만,,,
그렇게 짐작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영우의 지난 일 년은 부모님이 보시기에 매우
걱정스럽고 실망스러운 일들만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갖 스물 지난 어린 딸이 한번 집을 나가면 며칠씩 소식도 없이 있다가 어느 날 불쑥 들어 와서는
하라는 입시 공부는 하지 않고 있다가 며칠 만에 또 나가서 보름씩 안 들어오고,
외박을 밥 먹듯 했으니, 어느 부모님인들 맘이 편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돈 모아 시집이나 가라는 것 일 수도 있겠다.
직장을 다니면서 병휘오빠와는 전화로 안부를 전했다., 병휘오빠는 군에서 제대하고 사회에 적응하며 통신회사에 열심히 다니고 있다는 사연과 시간이 없어서 만나러 올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영우도 직장 재미있게 잘 다니고 있으니까 걱정 말라는 말을 했고 서로가 보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직장을 다니게 된 사회초년생이라 회사얘기를 많이 했고 각자의
신상에 관한 대화가 주된 통화내용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애절한 마음은 예전 같지 않음을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두 사람이 한때는 자석 같았던 사이인데, 조금만 등을 돌리면 멀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운 감정이 식어간다는 것을 영우 스스로 느낄 무렵 몸에 이상반응이 생겼다. 임신이다. 아마 지난번 병휘가 집에
찾아왔을 때 그렇게 된 모양이다. 그 보다 전에 횡계에서 함께 지낼 때도 임신이 안됬었는데, 어떻게 하룻밤일로 임신이 됐는지 알 수가 없다. 영우인생이 또 한 번의 난관에 부딪쳤다. 여러 날을 어찌해야 할지 갈팡질팡 고뇌와 번민을 거듭했다. 그녀에게 병휘는 첫사랑이고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다지만 이 상태로
만남을 이어가기에는 장애물이 많았고 부족한 것도 너무 많았다. 하물며 아이를
낳아서 키우기에는 두 사람 모두 너무 어렸고 부모님의 경제적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는데 병휘오빠네 집도 그다지 넉넉한 형편이 못 되었다.
고민 끝에 병휘오빠한테 임신소식을 알렸다. 한참을 말이 없던 병휘오빠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아직은 아니라는 대답을 했다. 영우도 병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상은 했지만 조금은 서운했다. 병휘도 고민과 갈등이 많았을 거다. 병휘도 아이를 낳아서 예쁘게 키우고 싶은 욕망은 있었겠지만 그러나 녹록지
않은 현실을 가벼이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의 월급으로 아이를 낳아서
기르며 드는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울 테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으면 부딪혀야 할 여러 가지 난관을 헤쳐 나가기엔 병휘도 그 무게감을
굉장히 벅차게 느꼈을 것이다.
병휘는 몇 년 지나고 자리가 잡히면 그때 가서 떳떳하게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아도 늦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병휘는 처음부터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난 일을 가만 생각해 보면 병휘오빠는 임신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늘 콘돔을 준비했고 영우가 아이얘기를 꺼낼라치면 제대하고 자리 잡힌 연후에 당당하게 결혼식 올리고 보란 듯이 아이 낳아서 살고 싶다고 했었다. 그럴 때 마다 영우는 과정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지금 병휘오빠의 마음을 알 것 같으면서도 막상 직접 대답을 들으니 실망스러운
감정은 어쩔 수 없다.
병휘오빠 뜻대로 낙태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영우 혼자 견디기에는 너무 아픈 시련이었다. 하지만 영우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병휘오빠가 올라와서 함께 가자고 했지만 영우는 혼자 처리하기로 했다.
산부인과 간판이 크게 보였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원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녀가 낙태를 했다. 병원 문을 나서는 그녀의 가슴에 서늘한 빗물이 내리고 있었다.
한동안 많은 날들을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지내야 했고, 회사에 출근을 해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긴 시간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과 번민을 거듭하다가 병휘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낙태를 알렸고 이별이란 단어를 꺼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아무 반응 없다. 아마도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병휘오빠도 극복해야 할 현실이 너무 벅차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끈을 꼭 붙들고 매달릴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얼굴은 보지 못해도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우리의 사랑은 이렇게 끝나는 건가?’
“오빠 울고 있구나”
이렇게 말하는 영우도 어느새 울고 있었다.
“영우야 미안해”
“오빠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해, 그랬으면 좋겠어”
“영우야,,,”
“오빠 행복해야 돼”
영우는 구구절절 왜 헤어지자고 했는지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슬플 거 같아서 괜찮아질 때까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줄줄 흐르는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분명 그녀가 먼저 이별을 말해 놓고 이렇게 슬퍼질 줄은 몰랐었다. 영우보다 병휘오빠가 몇 배는 더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영우는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병휘오빠의 아픔은 영우와의 이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주위의 다른 모든 현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우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병휘오빠의 처지를 깊이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 원망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간절하게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한번 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이별의 아픔은 생각보다 오래갔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병휘오빠의 애절한 전화가 걸려올 때는 영우도 괴로웠다. 영우도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에 아픔의 시간을 가까스로 버티며 지내고 있는데, 잊고 살기로 약속해
놓고 왜 전화를 하는지 병휘오빠의 전화는 오히려 원망스러웠다.
잠시라도 그리움과 이별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서 영우가 할 수 있는 일은 회사에서 최대한 바쁘게 일하면서 이별의 순간은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거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마지막 인사는 얼굴을
마주보고 해야 할 것 같아서 당장이라도 전화해서 대구로 달려갈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엔 너무 먼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세 생각을 바꾼다.
현실의 거리가 마음의 거리까지 결정을 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역시 안 보는 게 좋겠지,,, 어떻게 끝냈든 끝난 건 끝난 거니까.’ 이렇게 다짐하다가도 ‘그래도 슬픈 걸 어떡해’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오락가락할 때가 그녀는 가장 괴로운 시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로 병휘의 전화가 또 걸려왔다. 그녀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다짐을 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다시는 전화도 받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가도, 그 결심이 번번히 무너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수화기 너머로 병휘오빠의 흐느낌이 들렸다. 영우는 냉정함을 지키려 애쓰면서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 매몰차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영우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소리 없이 울먹였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병휘오빠는 대책도
없이 무작정 영우에게 전화를 해서는 막상 통화를 할 때는 아무 말도 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군인이던 때의 자신감이나 의연함은 모두 어디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한탄 만 하는 거 같았다. 어찌 보면 영우에게도 대책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결혼할 준비도 없었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능력도 없었다. 그러기에 냉정하게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거다. 어른들이 보면 어린애 불장난처럼 보이겠지만 두 사람에겐 지금이 가장 어렵고 힘든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시련의 시기일 것이다.
아마 영우는 이 모든 것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을 하늘 구름처럼 쉽게 형상이 바뀌고 겨울바람처럼 회오리치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슬픔과 허전함을 누구에게 어떻게 말할 것인가.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책방에 들렀다. 마음을 달랠만한 책을 고르던 중
영우의 눈에 작은 크기의 시집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책을 펼쳤다. 그리고 영우는 그리움을 달래 보려는 듯 어느 시인의 시를 읽는다.
사무치도록 그리운 사람에게 한줄기 빗물이 되어 내리고 싶다.
그의 따뜻한 가슴을 적시며 그의 고운 숨결을 느끼며 내가 그의 마음속 진실이고 싶다.
어두운 밤 갈대숲을 휘돌아 그의 가슴을 두드리는 바람이고 싶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가 나의 인생이 되어주지 않아도 섣달 그믐날 밤 달빛의 은은함이고 싶다.
사무치도록 그리운 사람 앞에 서걱거리는 바람과 내리고 사라져 버리는 빗물일지라도 사랑함으로써 행복해 죽어 가는 그의 따뜻한 목숨이고 싶다.
첫댓글 그 극적인 상황도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필력이 놀랍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