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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입문] 다음 시간 자료입니다.
제 11강
(1958. 7. 1.)
역할 개념의 전문용어적 수정·183 | 전체와 부분에는 서로 우선성이 없다·184 | 제일원리의 과학인 형이상학·186 | 단순한 시작으로서의 근원(헤겔)·188 | 존재론적 헤겔 점유·190 | 헤겔의 ‘추상’·191 | 변증법은 역동화된 존재론이 아니다·192 | 헤겔의 ‘존재’·194 | 신화로의 회귀인 직접성 철학·195 | 변증법과 실증주의·195 | 사물화된 세계의 자연스러움이라는 가상·197
전체는 부분들과 대조되어 전체로서 나타나는데, 우리는 이 부분들에 대한 관계 속에서 이 전체를 지각하거나 지적으로 인식하는 한에서만 실제로 어떤 전체를 전체로서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역으로 부분들을 어떤 전체와, 예컨대 시야(視野)와 관련지을 수 있는 한에서만 또한 이 부분들을 부분들로 압니다. 대립항들의 이러한 상호관계 없이는 실제로 전체와 부분의 개념은 그 엄밀한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기서 전체의 개념과 부분의 개념이 그러하듯이 서로 모순을 이루는 범주들이 서로에 의해 상호 매개되어 있다는 변증법적 명제의 진리를 아주 기본적인 의미에서 검증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내가^ 지난 시간에 강조하려고 한 사실은 아마 좀 더 엄격하고 적합하게 이렇게 특징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153) 즉 우리는 우선 전체도 아니고 부분도 아닌 제삼의 어떤 것, 말로 파악하기 지극히 어려운 어떤 것을 지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입문184-185)
전체도, 부분들도 우선은 그러한 것으로 명료하게 지각되지 않으며, 우리가 일차로 지각하는 것은 ‘어떤 것 일반’입니다. 즉 그러한 구분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물론 일반적인 지식논리에 의해 실현되는, 전체−이를 향해 우리는 올라가야 한다고 하는데−에 대한 부분들의 우선성은, 부분들에 대한 의식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기에, 우리가 지각할 수 있어야 할 자체 내에서 전적으로 명료해진 형태들이라는 독단적 관념과 마찬가지로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입문185)
오늘 이제 내가 다루고 싶은 것은 아마 여러분 자신은 그다지 어려움이라고 의식하지 않을 테지만, 그럴수록 더 끈질기게 우리의 모든 사유습관들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어려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혀 철학자가 아닐 경우에도, 즉 우리가 철학에 의해 전혀 타락하지 않았을 경우에도, 물론 우리는 온갖 가능한 철학적 관념들을 받아들인 상태이며, 바로 이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사물들에 적용하는 이 철학적 관념들이야말로 오히려 지양하여 바로잡으려면 우리가 흔히 얻는 이른바 직접적 경험들 혹은 순진한 경험들보다 더 비판적 반성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154) 이 위장된 철학과 함께 우리는 성장했고, 또 그것은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과학적인 삶 속에서 되풀이하여 주입되고 있는 셈입니다. 다름 아니라 구속력 있는 인식은 본래 어떤 절대적 제일원리에 근거를 두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이 경우 그러한 인식이 근거로 삼아야 할 제일원리가 단순히 주어진 상태이며 이른바 생각으로 지워버릴 수 없고 그 이면으로 소급할 수 없는 감성적 자료이어야 하느냐, 아니면 그 절대적 제일원리가 모든 개별자를 매개하고 그 가능성 일반을 비로소 구성하기에 그와 같은 절대적 우위를 얻게 되는 순수한 사고, 이념, 정신 혹은 그밖에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하는 것은 그다지 결정적이지 않습니다.(입문186)
내 생각에 여러분이 이 절대적 제일원리에 대한 테제를, −그런데 사실 이는 철학에 대한 전통적 관념 전체와 동일한데, 그것이 프로테 필로소피아(πρώτη φιλοσοφία), 프리마 필로소피아(prima philosophia), 그러니까 ‘제일철학’이라고 불린 것은 공연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추구하는 처리방식들을 돌아볼 경우, 여러분은 되풀이하여 본의 아니게 이제 그 궁극적인 것을 진리에 대한 절대적이고 확고하며 의심의 여지없는 보증물로서 손에 넣었다고 믿게 된다는 사실에 부딪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손에 넣는 어떤 궁극적인 것에 대한 이 욕구는 우리 인식 전체와 얽혀 있는(verschränkt) 확실성에 대한 욕구와 극히 강력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입문186-187)
이는 사실 계통발생적으로 보자면 전반적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대립하는 낯선 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어느 정도 우리 자신의 일부로 이해함으로써, 태곳적에 자연의 막강한 힘 앞에서 우리를 지배했던 불안을 극복하려고 시도한다는 데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155) 이러한 의도는 모든 형태의 근원철학 속에 살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 즉 우리가 어떤 궁극적인 것으로서 근거로 삼는 우리 의식의 사실들은 사실상 언제나 우리 의식의 사실들이며 이로써 우리 자신의 것,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어야 하며, 역으로 모든 존재자의 궁극적인 권리원천인 정신 혹은 의식 또한 엄밀히 말해서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념이고, 다만 형이상학적으로 어느 정도 과장되고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 부풀려졌을 뿐인 자아의 관념이기 때문입니다.(입문187)
한편 우리는 그로부터 형이상학의 다양한 기본유형들−예컨대 유물론과 유심론, 관념론과 경험론, 혹은 관념론과 실재론,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에 대해 판정하기 위한 어떤 결론들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즉 그런 부류의 어떤 제일원리, 그런 부류의 절대적 근원적 원칙을 주장하는 곳에는 일반적으로 어디에나 실제로 관념론적 사유가 존재한다는 점, 이때 거론되는 이론들이 스스로를 관념론적인 것이라고 알고 그렇다고 표명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와 전혀 상관없이 그렇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확실히 [우리는]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의 원인으로 삼을 바로 그 제일원리를, 그것이 그러한 절대적 제일원리가 되려면, 언제나 동시에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 자신을 우리가 경험적 인격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선험적 형식이라고 생각하느냐, 혹은 궁극적으로 사변적 관념론적 형이상학에서처럼 우리 자신을 절대 정신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전적으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와 같은 부류의 근원적 원칙, 그처럼 궁극적인 것을 진술하자마자, 사실상 그 속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정신의 요구가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궁극적인 것은 언제나 정신이 생각한 것이며, 그런 한에서 독단론적 유물론, 즉 비-변증법적 유물론에서조차, 그것이 순수한 사고에 근거해 그러한 절대적 근원의 원칙을 갖고 있다고 믿는 한에서, 어떤 관념론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56)(입문187-188)
이 절대적 근원의 원칙이야말로 실제로 어떤 부류의 것이든 변증법적 철학 전체의 파토스가 대립하는 바입니다. 또 그런 원칙을 포기하라는 것, 그러니까 진리란 우리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궁극적인 것이라는 관념을 무시하고, 그 대신 근원철학적인 의미에서 실제로 이차, 삼차적인 것, 단순히 파생된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하고 또 경시되는 것에 만족하는 일이야말로 분명히 성장기에 우리 몸에 밴 사유습관들에 제기되는 가장 엄격한 요구입니다. 그러한 가치질서는 이제 변증법적 사유에 의해, 더욱이 이미 헤겔의 사유에 의해서도 전반적으로 뒤집히게 됩니다.(입문188)
헤겔은 관념론적이면서 동시에 관념론적이지 않기도 한 한에서 최상의 의미에서 여전히 변증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여러분에게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헤겔 철학에 대해 분석한 바를 여러분이 잠시 떠올린다면, 즉 그의 철학은 어떤 하나의 단언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는 점, 헤겔 철학의 출발점을 이루고 헤겔의 다양한 저술들에서 변형되고 있는, 단초를 진리와 동일시하지 않고 진리를 실제로 그의 철학이 말하듯이 전체에서, 과정에서, 계기들의 연관에서 찾으며, 그에 비할 때 그 근원, 그 절대자라는 것을 우리가 아무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빈곤하고, 가장 어리석은 것이라고 파악하는 점 등을 떠올리면, 여러분은 변증법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요구란 실제로 진리를 그런 하나의 근원적 원칙으로 환원하는 데에서가 아니라, 과정에서, 연관에서, 계기들의 짜임관계에서 간파하라는 요구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입문188)(157)
변증법은 이중의 전선을 설정합니다. 즉 한편으로는 존재론에 맞서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증주의에 맞서는 것입니다.(입문189)(158)
헤겔 철학이, 아무튼 그의 저술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한 저술, 즉 논리학에서 존재 개념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헤겔의 경우 논리학과 형이상학이 동일한 것이어야 하는 한에서 우리가 헤겔 철학을 어느 정도 정당하게 존재 전체에 대한 해석으로서 고찰해도 된다는 것 또한 맞는 말입니다. 나의 친구인 허버트 마르쿠제가 헤겔과 존재론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 존재는 헤겔의 경우 바로 역동적 존재, 삶이라고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그러한 성격규정이 형식상으로는 타당해도 엄밀한 의미에서 헤겔 철학의 본질과 결합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는 아직 필연적으로 헤겔의 사유가 비판하는 추상성, 그러니까 일반성 및 부분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입문190)
헤겔의 경우 추상의 개념은 우리가 이 말로 이해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헤겔의 경우 추상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특수한 개별내용들에 대립하는 공허한 보편성일 뿐인 것이 아닙니다. 비록 헤겔의 경우 이러한 추상성의 개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 여러분은 추상의 개념이 헤겔의 경우 때때로 그것이 일상어에서 본래 말하는 바의 정 반대를 의미한다는 점, 즉 고립된 것, 아직 자체 내적 반성을 통해, 자체에 내재하는 모순들의 이러한 전개를 통해, 전체에 대한 자신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알 정도로 자체 내적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이해할 것입니다.(159) 개념 없는 고립된 개별자, 예컨대 실증과학들의 내용을 본질적으로 형성하는 분리된 개별자는 공허한 보편개념과 꼭 마찬가지로 단순한 추상이라는 판결을 받습니다. 또 이로써 이를 알지 못하는 비전문가 독자들에게는 아주 빈번히 바로 우리가 구체라고 보는 것, 즉 우리 인식의 출발점이 되는 개별 자료, 개별 사실들이 추상으로 나타나고, 특별히 헤겔적인 의미에서 개념, 즉 이 철학의 의미에서 스스로를 파악하는 개별자는 실제로 구체화의 강세를 띤다는 놀라운 역설이 생겨납니다.(입문190-191)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는 존재에 대한 그와 같은 일반적 성격규정은 −설혹 그것이 형식적으로 타당할지라도, 예컨대 헤겔이 전체적으로 존재란 자체 내적으로, 더욱이 내재적 모순의 의미에서, 요동하는 총체성이라고 본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그처럼 고립된 명제 혹은 그처럼 고립된 단언 모두가 엄밀히 말해 허위인 한에서, 허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헤겔이 원론적으로 존재론에 −그러니까 존재의 개념 혹은 존재 속에 절대자를 갖고 있다고 믿는 존재철학에− 맞서 제기할 반론은 그것이 실제로 틀렸다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단지 그러한 존재 규정은 전개되지 않은 한에서, 명료하지 않은 한에서 일면적이라고만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명료화, 개념들의 자기-자신-의식하기(Seiner-selbst-Bewußtwerden)는 헤겔의 경우 그 나름으로 개념들 자체의 진리의 한 요소이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그와 같은 추상적 규정은 일단 타당한 것처럼 보이고, 또 즉자적으로는 타당할지라도, 대자적으로는, 그러니까 그 자체 내 반성이라는 척도에 따르면 불충분하고 바로 허위인 것입니다.(입문191)
“불확정적 직접성 속에서 그것은 단지 자체와 동일할 뿐이다(…).” 달리 말하면 존재는 그 직접적인 상태에서 언급되자마자 비동일성의 계기를 전혀 지니지 않습니다. “존재는 순수한 불확정성이자 공허함이다. − 이 경우 직관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그 속에서는 아무것도 직관할 수 없다. 혹은 그것은 단지 이 순수한, 공허한, 직관 자체일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속에서는 무엇인가를 사유할 수 없다. 혹은 그것은 바로 이 공허한 사유일 뿐이다. 불확정적이고 직접적인 존재는 사실상 무이며, 또 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61) ‘존재는 무다’라는 진술은 헤겔의 경우 양면성을 띱^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앞에서 암시한 바, 즉 존재 개념의 추상성이란 그것이 무의 개념과 구분될 수 없고 그 자체의 대립물로 이행한다는 성격을 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이 개념의 논리적-형이상학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헤겔 철학은 논리학이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이라는 유명한 테제는 아마 어디서도 이보다 더 분명하게 파악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러분은 ‘존재는 무다’라는 명제가 또한 비판적 명제이기도 하다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즉 그 속에는 우리가 존재에 대해 언급하면서 실제로 이 개념을 그 자체의 생명, 그 자체의 의미 속에서 전개하지 않는 한에서, 그런 한에서 존재에 대한 우리의 언급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장악했다고 믿는 절대적인 것은 단순한 허상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입문192-193)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이 학설이 존재의 존재론적 질을 서술하기보다, 오히려 철학적 사고가 단지 존재로 귀결되는 한에서 그러한 사고의 결함을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존재가 절대자의 술어로서 이야기될 경우, 이는 절대자에 대한 최초의 정의를 제공한다.” − 즉 시원철학, 혹은 제일철학의 의미에서 절대적 시초를 제공합니다− “절대자는” −혹은 단적으로 제일원리는−“존재이다. 그것은 (사고 속에서) 단적으로 시초의 가장 추상적인” −따라서 과정을 통한 그 충족이 결여된− “그리고 가장 빈곤한 정의이다.” 또한 헤겔은 이제 이 대목에서 빈곤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동시에 존재 개념이 변증법적 전개를 위해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그 개념의 사용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즉 그는 “절대자는 존재다”라는 명제를 허위라고 간주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162) 하지만 이 명제는 실제로 모든 존재론적 의도에 필연적으로 기초가 되는 근원철학의 형식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명제는 오늘날 그토록 빈번히 그와 관련지어지는 존재론의 가능성을 그가 거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입문193-194)
여러분은 존재 개념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사실상 모든 부류의 존재론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이제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관념의 연속성이 지니는 이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순수성, 즉 불확정성과 공허함을 보면, 이러한 추상을 공간이라고 칭하든, 아니면 순수한 직관 혹은 순수한 사유라고 칭하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 이 모두는 인도인이 외견상 움직이지 않고 또한 마찬가지로 감각, 표상, 환상, 욕망 등등의 차원에서도 수년간 아무 동요 없이 단지 자기 코끝만을 보고 마음속으로 단지 옴, 옴, 옴이라는 말만 하거나 아예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때, 그가 브라마(Brahma)라고 칭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 둔탁하고 공허한 의식이, 의식으로서 파악된, 존재(Seyn)이다.”(…) 확신컨대 헤겔이 이러한 ‘존재(Seyn)’를 ‘옴, 옴, 옴’이라는 말 말고 다른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즉 그는 실제로 ‘존재’에서 단순한 신화로의 퇴행 내지 서구문명이 그 의식의 진행과정에서 아무튼 쟁취한 모든 것에 대한 배반 내지 포기 이외의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163) 또한 헤겔 철학을 그러한 옴-철학들과 일치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한 사상가의 권위를 통해 자체의 수상쩍은 조작들을 은폐하려는 궤변적 시도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사상가의 실체는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실체인데, 그들은 여기서 다름 아니라 이성 자체의 부정을 실체로 하는 철학적 목적들을^ 위해 이 철학자를 끌어들여도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입문194-195)
내가 이 강의 전체를 통해 추구하는 것의 가장 본질적인 목적은 이러한 양자택일이, 즉 형이상학이나 −그리고 형이상학은 존재 및 불변적이고 영원한 가치들에 대한 경직된 학설과 같은 것입니다− 아니면 단순히 사실을 지향하는 것인 과학이 있을 뿐 제삼의 길은 없다는 생각, 바로 이 경직된 양자택일이 나름으로 오늘날의 사물화된 의식의 표현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에 있습니다]. (…)(164) 나는 이 강의에서 여러분의 머릿속에 있는 이 관념을 흔들어놓는 데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습니다. 또 존재를 지향하지 않아도 과학적 사실들에 대한 완고한 숭배에 빠^질 필요 없도록 하고, 역으로 과학에 대한 권태(taedium scientae)에 사로잡히고 사실들에 대한 단순한 확인에 만족하지 않을 경우에도 필연적으로 또 무조건 이때 제공되는 지시된 존재의 형이상학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데에 기여하고 싶습니다.(입문195-196)
변증법이 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존재론들이 보여주는 저 빈곤한 형이상학 패러디와도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마치 변증법은 개별 과학들이 제공하는 사실들의 형태로 우리에게 제공되는 불고기에 이제 어떤 신앙이나 의미 혹은 어떤 고차원적 원칙의 소스를 첨가함으로써 실증주의와 본질적으로 구분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내가 보기에는 단순한 사실을 넘어서는 사고가 당장 “그래, 모든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지. 모든 것은 최상의 것을 향해 정리되어 있고, 우리는 본래 위안 받고 만족해야 해” 라는 식으로 말하게 된다고 상상한다면, 이 또한 단순한 사실들에 만족하지 않는 모든 의식의 엄청난 오해라고 여겨집니다.(165) 오히려 반대로, 변증법에서 단순한 사실성(Faktizität)을 넘어서고, 변증법에 그 형이상학적 생존권을 부여하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얽혀 있는, 무한히 무의미한 사실들의 세계가 우리 실존의 궁극적인 상태이어야 한다는 데에 대한 저항입니다. 또한 변증법은 바로 우리를 지배하는 이 사실들의 세계에 대한 비판을 통해, 결코 이 사실들의 세계 자체를 우리가 이제 조금도 미화하지 않으면서, 어떤 다른 상태의 가능성을 감지하려는 시도입니다.(입문196)
변증법적 사유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님으로써 실증주의적 사유와 구분됩니다. (…) 여러분은 여러분과 친숙한 전래적 사유관습들을 포기해야 하며, 사실상 개념의 노동과 노고를 떠맡아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가 의심하지 않도록 자연스러운 것으로 일단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자체 내적으로 반성된 것 혹은 −유물론적으로 말하면− 자체 내에서 이미 사회적으로 매개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 우리에게 자연으로 맞서는 것이 실은 이차적 자연이며 일차적 자연은 아니라는 점, 또 손상되고 억압된 자연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관습들로 경직된 세계가 어디서나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연적인 것이라는 가상에 우리가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여러분이 간파한다는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 그렇습니다.(166)(입문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