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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제주 역사 기행
저- 이영권(참고 문헌: 380여종)
출- 한겨레신문사(2005.12.9.350쪽)
독정-2019.7. 8.
·구석기인의 하루 이동거리가 보통 50km는 되었다고 하니 제주도의 독자적 구석기 문화를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하루는 제주도에서 잠자고 다음날은 일본 열도에서 사냥, 며칠후 한반도에서 열매를 따먹고, 한 달 뒤 황하 근처에서 노는 게 당시 상황이었다. 그 시절엔 섬, 반도, 황하도 아니었겠지만
<엉> 글감 1
엉 혹은 엉덕은 제주 고유어로서 화산으로 형성된 거대 바위 밑부분이 떨어져 나가 마치 깊지 않는 동굴 비슷한 형상을 이룬 지형을 말한다. 발굴 전 이곳에는 신석기 말기 유물에서부터 동네 청년들이 먹다버린 깨진 한일소주 병까지 층위별로 남아 았었다. 하지만 발굴이 끝난 지금은 신석기 유물을 하나도 볼 수 없다. 본래 선사시대 답사가 이렇다.
·북촌바위그늘 유적지는 기원전 1만년에서 6천년 정도로 추정되는 제주도 고산리 유적지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유적지로, 사진까지 등장했다. 제주 서쪽 끝 차귀도 맞은편이다. 수거된 유물은 모두 박물관으로 갔고 현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흔적조차 없아. 안내판만 설치되었다. 대신 박물관에서 고산리를 흠뼉 느껴보자. 고산리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니 고산리에 가서 배추포기만 보고 오는 것보다 교육 효과가 크다. 그래서 신석기 후기 흔적인 북촌 바위그늘 유적지, 속칭 고두기 엉덕을 먼저 찾아간다. 출토된 유물 역시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잇는데 이곳을 찾는 이유는 신석기인들이 생활했음직한 그럴듯한 공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가장 대표적 유물은 삼각점렬문 토기, 이중구연 토기(겹아가리 토기) 골각기, 불에 탄 산야초 열매 등이다. 불에 타서 남은 물건이 곡식이 아닌 산야초 열매인 것은 그 당시 시석기 시대 농경생활이 아니었고 여전히 채집과 수렵이 주종을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그러고보면 이곳 고두기 엉덕을 신석기인들의 영구 거주지가 아니라 이동 생활 중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장소였다. 동굴 바닥에서 출토된 조개껍질을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으로 검사한 결과 약 3천 년 전의 유적으로 판명되었다. 그 무렵이면 신석기 말기다. 그대까지도 농경생활이 시작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제주도 토양이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화산토양이라는 특성 때문이다.-북촌고두기 엉덕:제주도 시석기인들이 생활했던 바위그늘 집자리
<삼양동 마을 유적>
신석기 시대 다음 단계(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의 유적지로 삼양동 유적을 착기 앞서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 유적지를 찾아간다. 상모리 유적지는 기원전 600년경 제주도에 처음으로 청동기인들이 들어와 생활했던 흔적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상모리 사람들이 남긴 유물 중에는 공렬(구멍무늬)토기가 가장 유명한데, 이 토기는 나중에 탐라국 형성과 관게 깊은 용담동 무덤 유적까지 확산되었기 때문에 더욱 중요 의미가 있다. 상모리 역시 고산리 유적지처럼 현장가면 눈으로 확인할 게 없다. 단지 송악산에서 산방산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해안 경치만 구경하고 올 뿐이다. 예전에는 패총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보호를 위해 큰 돌로 막아 놓아 볼 수 없다. 그래서 5400년을 건너 뛰어 탐라국 형성이 점차 준비되어 가던 시기의 한 마을 유적지인 삼양동으로 코스를 잡았다. 물론 박물관에 가서 상모리 출토 공렬무늬 토기를 꼭 확인하라. 삼양동 유적지는 1996년 토지구획 정리 사업을 하다가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면서 주목 받게 된 곳으로 지금은 이곳에 선사 유적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기원전 300 년 무렵부터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되나 중심 시기는 기원전 100 년경으로 추정된다. 전체 약 3만 평 정도가 당시 마을터로 추정. 이중 4천 평 정도가 현재 국가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이곳에서 확인된 집 자리만 하더라고 무려 236기나 된다. 거대 규모다. 긴 네모꼴도 있지만 대부분은 중앙에 타원형 작업 ㄱ4ㅜ멍이 있는 원형 집자리 즉 송굴리식 집 자리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금강유역에서 출발하여 영산강과 영암을 거쳐 제주지역으로 전파된 문화로 생각된다. 마을 규모가 상당한 걸로 봐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을 것이다. 마을 규모가 상당해 대규모 인구 이었겠다. 집 자리는 지름 6미터의 대형 주거지 1기에 12~15기의 소형 거주지가 둘러싸고 있는 형태다. 특이하게 단위 주거군을 이룬 것이다. 출토유물 중 눈여겨 볼 것은 삼양동식 토기라는 제주 고유의 토기다. 이 역시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그 외 점토띠 토기가 있다. 재질로 보면 이것 역시 제주산이다. 제작 기법은 외부 한반도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외부와 교역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옥으로 만든 링(옥환) 역시 교역의 산물이다. 분만 아니라 옥환의 출토는 권력자의 존재를 ㄹ확인시켜준다. 옥환 같은 고급 위신재는 권력의 상징이다. 그런데 기원후 100년경 이 마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불엔 탄 흔적도 없이, 유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에서 폐허가 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이곳에 살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전염병이 마을을 덮쳤을까? 그게 아니면 탐라국 건국 핵심 세력인 용담동 사람들이 이들에게 압박을 가했던 것일까? 최근 제주 동쪽 마을인 종달리에서 삼양동의 것과 유사한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용담동 사람들에게 밀린 삼양동 사람들이 동쪽 종달리로 쫓겨났다고 상상해본다. 삼양동 고인돌은 현재 4기가 남아 있고 상석길이가 219미터. 용담동 고인돌은 9기가 남아 있고 6호 상석 길이가 315미터다.
국립박물관은 과람객에게 불친절한 전시구조다. 어두운 조명, 작은 글씨, 전문가만 알 수 있는 단어의 나열, 2001년 개관한 제주국립박물관도 마찬가지다. 그저 쑥 지나가며 구경하면 그만이다. 남는 게 없다. 박물관 가서 욕심 부리지 말고 다리 아프고 골 아프고 본 것조차 소화되지 않는다. 한 번 갈 때마다 테마를 정해 사전에 조금이라고 공부한 다음 가서 그것만 집중적으로 봐야 한다. 기본 전시공간 5개 실이다. 선사 유적 전시실만 집중적으로 보자. 고산리 출토 화산촉, 북촌 바위그늘 출토 삼각점렬문 토기, 대정 상모리의 공렬(구멍무늬)토기, 삼양동 출토 옥환, 삼양동, 곽지리, 고산리 토기의 비교, 제주시 산지항 출토 중국화페, 종달리 출토 한국식 동검, 용담동 출토 항아리무덤, 용담리 출토 철제 장검만큼은 놓치지 말고 꼭 확인해야 한다.
제주도 고산리가 갑작스레 주목을 끈 것은 1700여 점의 화살촉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화살촉은 구석기 시대와는 다른 도구로 인간 지혜의 발달과 환경 변화를 말해준다. 영화에서 보던 빙하와 맘모스, 그리고 맘모스를 때려잡던 원시인, 그의 손에는 둔탁한 돌도끼가 들려져 있었다. 그러나 2만 년 전부터 이런 장면은 점차 사라져 갔다. 빙하가 서서히 물러가고 해수면 상승. 기후 온난화라는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이에 적응하지 못한 맘모스 등 거대 동물이 자취를 감췄다. 대신 여우, 토끼, 노루 같은 발빠른 짐승이 들판을 뛰어다녔다. 그에 따라 사냥도구도 변해갈 수밖에 없었다. 묵직한 돌도끼 대신 빠른 속도와 날카로움이 구비된 도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활과 화살촉의 발명. 이것은 빙하의 쇠퇴라는 변화된 환경이 던진 도전에 대한 인간의 응전이었다. 학자들은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이 시대를 굳이 구분하여 중석기 시대라 한다. 작은 화살촉을 주로 사용했다가 세자를 써서 세석기 시대라고도 한다. 빙하가 완전히 물러가 오늘날 같은 자연환경이 된 약 1만 년 전이 바로 그 시기다. 제주도 고산리는 바로 이 시기, 즉 구석기 시대가 끝나고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던 1만 년 전의 유적지다. 새시대의 출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중석기 시대 주인공은 드넓은 벌판에서 발빠른 짐승을 사냥하던 사람들인데 오늘날 학자들은 그 들판을 지금 물에 잠긴 황해 바닥으로 추정. 황해는 수심 120미터에 불과하지만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화살촉 등이 다량 출토될 지도.
<관전동 바닷가 고인돌(고여 놓은 돌:지석묘-돌을 지탱하여 만든 무덤. 돌무덤)이다 간혹 제단으로 쓰인 고인돌도 있으나 밀물 때면 잠겨버리는 고인돌은 해상안전을 기원했던가?
<공항 주차장 고인돌>
은 이곳이 탐라국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공항 할주로 주변 광활한 토지. 지금은 활주로지만 당시 대규모 경작지였다. 주변에 있는 한천, 이 정도라면 고대 탐라국 중심지의 입지로서 충분했을 것이다. 최근 활주로 확장 공사로 인한 구제 발굴에서 탐라국 이전 시기인 신석기 유물마저 출토된 적이 있는데 이것을 봐도 이곳이 선사인들의 주 활동무대였다. 공항 고인돌에서 눈여겨 볼 것은 덮개돌 위에 남아 있는 성혈과 치석 흔적이다 성혈은 여성 성기 모양이 돌에 새겨진 건데 다산화 풍요를 기원하는 선사인의 신앙이 반영된 것. 다산은 노동력 확보와 직결되어 중요. 고인돌에 새겨진 성혈은 죽은 권력자의 음덕에 기대어 풍요를 기원했던 마음의 표식이다. 선사인들이 큰 바위를 자를 땐 먼저 일렬로 홈을 낸 후 거기에 바짝 마른 대추나무 쐐기를 박아 물을 끼얹는다. 마른나무가 물기를 머금어 팽창하게 되면, 큰 바위는 홈을 따라 썩 벌어진다. 고인돌은 애초엔 지금의 것보다 작은 크기로 계획되었던 것. 상석 위에 난 일련의 홈이 처음의 계획선. 효성 지극한 아들이 아버지를 추모하는 마음에서 더 크게 만들려고 했을까? 아니면 죽은 아버지의 무덤 조성을 기회로 자기 권력을 강화하려 했을까? 고인돌 크기는 권력 세기와 비례했을 터, 축조된 고인돌은 망자보다 계승자의 권위를 높이는데 이용되었을 것이다.
<용담동 고인돌 발굴 당시 재미있는 사연>
1980년대 덮개돌 밑에서 바닥을 긁던 대학생이 잠간 목을 축이기 위해 밖으로나와 물을 마시는 순간 고인돌이 무너졌다. 그대 물 마시라고 권한 사람은 발굴지 바로 옆집에 살던 사학과 여자 후배다.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 대학생은 현제 제주도 최고의 고고학자가 되었다.
· 제주도 신화는 1만 8천 싣르의 내력담이 남아 있다. 천지창조 신화를 갖추고 있다. 제주도 창조 여신 설문할망은 옥황상제 셋째 딸로 덩치가 어마했다. 흙을 몇 번 날라 마든 것이 한라산. 이 흙을 나를 때 터진 치마 사이로 떨어진 흙덩이가 제주도 전역에 퍼져 오름이다. 한라산을 베개로 삼고 서귀포 고산에 엉덩이를 걸치고 서귀포 앞 바다 범섬에 다리를 걸쳐 물장구를 쳤다. 고군산 정상에 분화구가 패인 건 그녀의 엉덩이 때문이다. 빨래 할 때 성산 일출봉을 빨래 바구니로 삼았으며 우도를 빨래판으로 썼다. 일출봉 등산로 한 편에 보이는 겹쳐진 기암괴석은 그녀가 길쌈할 대 불 밝혔던 등경돌이다. 한쪽 다리는 오조리 석산봉에, 또 한쪽 다리는 일출봉에 걸쳐 오줌 누다 오줌이 바다가 되어 우도를 분리시켰다. 옷이 한 벌 뿐이라 매일 빨래하고 바느질 했는데 제주도민에게 속옷 하나 지어주면 육지와 다리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는데 할망의 속옷 만드는데 필요한 명주 100동이 없어 99동만 모았다. 키 자랑을 하던 할망이 가장 깊다는 용연에 가서 그 깊이를 재니 겨우 발등에 닿았다. 더 깊다는 서귀포 서홍리 홍릿물에 들어가니 무릎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곳이 한라산 물장올인데 물장올은 밑이 터진 물이어서 설문대 할망도 나올 수 없었다. 예로부터 신성이하는 것이 물장올 오름이다. 죽 쏘다 죽은 어머니를 찾던 막내 아들이 차귀도(혹은 비양도) 바위로 굳어졌다는 전설이 있어 차귀도를 볼 때마다 왠지 가슴이 아려온다. 제주 사람들은 이처럼 거대 여신을 왜 만들어냈을까? 제주는 여자의 섬으로 단순히 여성이 수적으로 많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강한 생활력을 의미. 척박했던 환경조건에서 여성 노동력에 적극 의존. 이것이 신화에 반영된 것이다. 이곳 일출봉 가가운 곳에 1932년 제주해녀항일투쟁의 현장이 있다. 연인원 1만 7천명이 참가했던 투쟁이다.
<할망의 의미>
설문대 할망과 해녀 투쟁. 신화와 역사는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할망은 할머니의 제주어이다. 할망은 성인, 연장자. 창조의 에너지를 갖춘 여성을 뜻한다. 늙은이가 아닌 영적 능력과 탁월 지도력, 싱싱한 젊음을 갖춘 매력 여신을 의미한다.
· 무당이 계속 건국신화를 당굿을 통해 구전시켜 왔다.
<혼인지>의 동굴은 선사시대의 집자리로 추정. 신혼 살림방으로 추정하나 무리다. 신화와 고고학의 결합? 소설같다.
· 송담천을 현재의 화북천으로보는 것이 홀ㄹ다. 바로 여기가 제주도를 장악하기 위해 삼별초와 정부군이 처절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화북 환해장성>
은 120킬로미터로 해안선 길이의 절반이다. 절벽을 제외하고 배가 닿기 쉬운 곳이면 모두 성벽을 쌓았던 것 간ㅌ다. 에초에 환해장성은 삼별초의 진입을 사전에 차단하려던 고려 정부가 축조했다. 1270년 9월. 고여림의 군대가 제주에 온 게 그 무렵이라. 군사 정권의 허약한 정당성을 보완하기 위해 역사 속 훌륭한 무인들을 끌어내다 보니 제대로 발군조차 못하소 사ㅣ적지 정비를 강행했다. 그 바람에 많은 유물들이 작살. 삼별초 군인의 자주적 기개가 천황주위자 박정희에게 중요했던 건 삼별초가 아니라 자신의 군사정권이었다. 삼별초는 단지 군사정권 유지를 위한 도구에 불과. 1977~1978년에 정비되어 자신의 군사독재를 합리화하는 데 매달려 유신체제 반발을 이런 상징물 건설로 막았다.
<샛별(새별) 오름>
말굽형 분화구 여럿 겹쳐 봉우리가 5개라 별처럼 보인다해서 샛별이라 했다. 멀리 비양도는 어린왕자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 구렁이 모습으로 가만히 놓여 있다. 그지없이 평온한 광경이다. 반원 자주정책을 폈던 공민왕은 제주도 탈환을 위해 군사를 파견했으나 제주에 살던 원나라 목호들이 반발해 실패했다. 본격 전쟁은 명나라 개입과 탐라에 있는 원나라의 말 2천 필을 고려에 보내라 했는데 고작 300필만 보내 공민왕은 탐라 공략을 경정. 전함 314척 정예병 2만 605명을 최영에게 주어 목호 토벌을 명령. 토벌에 나선 고려군의 병력은 요동 정벌군 3만 8830명과 비교하면 그 규모가 컸다. 최영이 끌고 온 2만 5천 토벌군의 상육을 지지하기 위해 목호 기병 3천 명이 집결, 그곳이 바로 새별오름 위에서 바라보이는 비양도 앞 벌판이다. 토벌군은 처음에는 상륙조차 힘들었다. 11척 배에 나눠 탄 선발대가 모두 목호 기병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전쟁의 승리로 고려는 원나라 세력을 완전히 우리 당에서 몰아내고 탐라 역시 이 전쟁으로 100년간의 몽골 지배를 끝장내었다. 기록에 삼별초 패배 후 1400~1700명 정도 몽골군이 제주에 주둔. 무려 백년 지배였으니 몽골군과 탐라 여인 사이에 혼인이 이뤄졌던 건 당연한 일이다. 삼별초 항쟁이 1270년의 일이면 그 이전부터 이미 몽골은 탐라를 매우 중시했다. 남송과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다.
·역사는 그 시대 그 지역민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최영은 제주사람에게 민족의 영웅이 아니라 학살의 책임자이며 묵호 난은 4.3 이전에 욎2ㅣ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최대 희생 사건이었다. 새별 오름은 둔중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이 일품이다. 주변 경관은 매우 아름답고 목장 지대라 평온하다. 그런데 요새는 정우러 대보름 들불축제의 장소로 쓰여 시끄럽다.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질러대는 인간 소음이 600여 년 전 이곳 역사를 묻어버리는 것 같아 아쉽다. 들불축제와 대학살, 어울리지 않는다. 새별오름이 전쟁을 기억하며 반성하는 공간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공간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 존자암을 찾아 산길을 오르노라면 무릎을 스치는 조릿대의 사각거리는 소리, 알사한 산기운이 산사의 신성함을 더해주었다. 산 안개 끼이면 무여욕의 경지로 드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폭 1미터 이상의 진입로가 휗 하니 뚫려 진입로 곳곳에 베어진 나무 밑동(백개가 넘는)이 인간의 탐욕을 꾸짓으며 아파하고 있다.
·관음사는 1908년에 창건되어 현재 제주도 모든 조계종 사찰을 거느리는 제주도 조계종의 본사다. 정부의 억불정책 때문에 17세기에 오면 황폐화 상태. 관음사를 지은 사람은 제주 출신 비구니 봉려관 스님이다. 안씨 성을 가진 그는 1남 4녀를 둔 다. 전남 해남의 대둔사로 출가하여 이곳에서 계를 받고 고양에서 포교를 사며 관음사를 창건했다. 기존 신앙과 충돌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 수행했던 동굴이 현재 관음사에 남아 답사객의 발길을 진지하게 만든다. 사천왕문 조금 지나 오른쪽에 있다.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근처 냇가에 가면 기왓장으로 쓸 만한 돌들이 있으니 그것을 가져다가 불전을 지어라.’는 계시를 받아 지었다.
·<원당사지 석탑>
은 제주 유일의 고래시대 석탑이다. 사찰 이름에 원元자가 들어있는 것은 원나라와 연계성이 분명 있다. 제주 현무암을 사용한 독특한 맛이 있다. 슬데없이 큰 규모로 허세 부리지 않는 모습이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에 제주도에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크고강한 것 보다 정결하고 단아해서 좋다. 크지 ㅇ낳는 숲이나 구역을 나눈 돌담장 하나하나가 수행자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세월의 무게를 실은 석탑 하나가 소박하게 놓여 있어 좋다.
<수산진성 안의 진안 할망당> 글감 2.
성산 일출봉은 식수가 없어 고립되면 매우 위험하다는 게 성윤문의 판단이었다. 2년 뒤 제주에 안무어사로 왔던 김상헌도 이경록이 성을 옮긴 것을 ‘스스로 포로가 되는 최하의 계책’이라 비판했다. 성은 현재 수산초등학교 담장으로 스이고 있다. 그래도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했다. 본래 동문과 서문을 가진 정사각형의 진성이었는데 현제 동문 지역에는 과수원이. 서문 지역에는 학교 관사가 있다.
글감 2.-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만나는 지점의 성벽 안쪽에 진안 할망당이라는 신당이 있다. 수산진성 축성과 관련된 전설의 당이다. 성을 쌓는 과정에 자꾸만 성이 무너져 지나가던 중이 기이한 방책을 제시. 13세 어린 처녀를 묻고 쌓으라 해서 그대로 해서 성이 무너지지 않았다-그 후, 처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당을 만든 것이 진안 할망당이다. 관운을 도와주는 영험이 있다 해서 입시철만 되면 사람이 몰려든다. 소녀의 원귀가 어쩌다가 입시 도우미가 되었는지.
·<연북정>
연북정은 조천 포구의 조천진성 위에 있는 정자다. 본래 성 밖에 있던 객사다. 조천은 화북 포구와 함께 조선시대 제주도 2대 포구인데 관이 설치 되었을 정도로 사람의 왈래가 빈번했다. 부임하는 지방관이나 절망 속에 내려온 유배인들 역시 주로 이 포구를 이용했다. 조천이라는 지명이 ‘보다. 살피다’를 의미하는 조朝와 날씨를 뜻하는 天이 햡쳐진 말이다. 육지로 가는 사라들이 기후를 관측하는 곳이 바로 조천의 지명 유래다. 불로초를 구하러 나선 진시황의사자가 도착했다는 금당지도 이곳 조천이라는 설이 있다. 여기에 연북정이 있다. 선조 23년 11590년 이옥 목사 때 기록 속 첫 사건. 이옥 목사는 “도적들이 다니는 길목이며 왕명을 받은 사신들이 왕래하는 곳이라서 관들 둔 것인데 지금 이처럼 성이 좁고 건물이 노후해서 되겠는가?라며 성을 동북쪽으로 더 넓혀 쌓고 그 위에 망루를 안치하고 이를 쌍벽이라 했다. 쌍벽은 한라산과 푸른 바다다 즉 청산녹수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후 선조 32년 1599년 성윤문 목사가 이 건물을 중수하고 연북정이라 했다., 사모할 연자에 북녘 북, 임금 계신 북쪽을 사모하는 충성이 드러난 이름이다.
제주 목사가 근무하던 관청은 아예 서울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의 망경루가 있어 관청 건물 중에 규모가 제일 컸다. 북쪽 임금을 사모하는 정자. 그만큼 그들에게 제주도는 하루라도 발리 더나고 싶은 미개의 땅이었다. 권력 다툼의 결과 좌천보다 더 심한 퇴출로 밀려난 유배객이 그들이라서. 조선은 유교적 명문이 앞서던 사회다. 속네보다 겉치장을 중시. 연북정의 ‘북’이 군왕을 상징하는 것도 명분이다. 사실은 자신의 정치적 고얗인 서울울 듯한다. 왕에 대한 충섬심은 그저 겁데기분, 자신의 정치 복귀를 위해 왕을 흠모했다. 유비 개간은 종신이었다. 정국이 변하지 않는 한 섬을 벗어날 방법은 없어 그들에게 북의 의미는 절대적이었다. 처지는 다를지라도 서울에서 온 양반들은 누구나 북쪽을 바라보며 살았다. 연북정은 그들에게 희망의 등대였다. 수평선 멀리 배 한 척 나타나도 발끝을 세우고 미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혹시 좋은 소식 가지고 오는 배 아닐까 싶어. 연북정. 어쩌면 이들의 가장 솔직한 심사가 투영된 이름이기도 하다.
<조천 비석거리>
조선시대 비것에는 비문을 지은 사름의 이름이 들어간다, 더 정성을 기울일 대눈 ㅂ문을 새긴 석공의 이륾가지 쓰여 있다. 이름을 밝힌다는 것은 그 비문에 대한 책임감표시이자 자부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떳떳하지 못할 때는 비문 지은 사람 이름이 없다, 혹 집단의 이름 속에 불행한 사연을 숨길 경우다. 탐관오리에게 수탈당한 것도 서러운데 주민의 비용을 추렴하여 그 놈의 송덕비까지 만들어야했다면? 현재 제주에 남았는 산정비 대부분이 19세기 것이다. 조선이 망해갈 때다. 그 시절 지방관의 선정비라면? 식민지로 가는 길목의 나라 일을 맡은 사람들 이름이라서.
·화북포구- 추사도 떠나면서 해신제를 올려 무사 육지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다. 9년 유배생활을 무사히 맟였는데 그만 바다에 짜지면 허망하고 두려울 때 공자님보다 용왕님께 빌었다.
추사의 무사 귀환을 용왕께 비는 내용 ‘탈 없이 잘 건너가는 오직 바다에 달렸사옵기 감히 엷은 정성 올리오니 신이여 강림하여 주옵소서,’ 나약한 인간이라 짚신의 끈이라도 잡고 싶었을 터. 추사가 울타리를 벗어나 자주 찾았던 곳 중 하나는 산방산이다. 가슴이 탁 트여 답답한 심사 달래기에 적격있다. 유배객 추사의 마음으로 산방굴사까지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좋겠다. 덕수리 쪽에서 오르면 산 정상까지 갈 수 있다. 정상에 서면 태평양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서귀포 앞 바다의 여러 섬들이 오른쪽으로는 제주도 서쪽 끝 차귀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도두포 제단>
당은 무속을 포제단은 유교문화를 상징한다. 도도 포제단은 도두 1동의 유교식 마을제를 지내는 재단이다. 제를 지내기 전 일주일 간 정성 들여 엄숙주의였다. 최근엔 3일 정성으로 마을 입구에 금줄을 치고 외부 출입을 금했다. 제를 지내는 날짜도 정월이 아닌 음력 6월 첫 저일이나 해일을 택했다. 본래 제주도에는 유교식 마을제가 없어 오직 무속 당굿만 있었다. 포제는 가부장적 귄위주의로 거들먹거리는 남성 주지들이 주관. 포제를 통해 그들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했다. 뒤늦게 등장한 가짜 양반들이 더욱 매달려 정당성을 채워 넣기 위한 이벤트로 필요했다. 포제는 졸부와 같은 신분 상승자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해주는 중요 도구였다. 남녀군취의 신명나는 마을제가 복원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축제의 부활이었다. 도두봉에서 내려와 오랫물로 가면 용천 냉수욕을 하게 된다. 1분이 채 지나기 전에 피로가 확 풀린다.
<대정 알뜨르 비행장>
알뜨르는 아래쪽에 있는 들. 즉 모슬포마을보다 낮은 지대에 있는 들판이란 뜻이다. 이곳에 비행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1926년부터다. 1930년대 중반까지 약 10년 공사로 20만 평 규모의 비행장이 완서이. 전쟁에 활욛된 것은 1937년 중일전댕때다 이곳에서 잘진한 폭격기가 바다 건너 상하이까지 날아가 작전을 수행했다. 2차 확장 공사는 중일전쟁이 진행되더 1937년. 공사 끝나기는 일제 패망 1945년부터다. 이때 규모는 80만 평으로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이곳에 비행장이 들기 전에는 알오름동, 저근개, 골못, 광대원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주민은 졸지에 생활터를 빼앗겼다. 송악산 해안동굴은 미군 항륙 저지를 위해 만들어진 일제 군사 시설이다. 가이텐 특공대는 곳곳에 뚫린 해안동굴 속에 어뢰와 폭탄을 실은 소형 보트들을 숨겨두고 미군 함대가 나타나면 그대로 바다로 나가 미군 군함에 부딪쳐 자폭하라는 작전으로 일본 군국주의 체제였다.
<산산공원 4.3 해원방사탑>
방사탑은 사악한 기운을 방어하는 탑이란 뜻이다. 외부 침입하는 살과 부정 막기 위해 주로 마을 입구나 마을 안 지기가 허한 ㄱ돗에 새웠다. 솟대나 장승, 성황당이 그것이다. 기능은 비슷하지만 제주 경우 하산 제주의 특징으로 잔돌을 이용했다. 돌무더기 안에 무쇠솥이나 밥주걱을 놓는 게 보편적이다 무쇠솥은 그 어떤 불에도 견딘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가장 무서운 재앙인 화제에 대항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밥주걱은 부를 긁어온다는 의미에서 차용되었다. 꼭대기에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시지로 새모양의 돌을 얹는다. 이 점은 한반도의 솟대와 같다. 줄론 제주도 안에서도 마을마다 다르다. 새 아닌 돌하르방을 얹기도 한다. 방사탑이 최근 만들어진 건 신산공원에 있다. 4.3사건 50주년 1998년에 만들어져 억울함을 풀고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기를 기원하는 탑이라 이름 붙였다. 둥근 돌을 얹은 것은 화합을 상징 돌무더기 속에는 무쇠솥이 아니라 4.3 희생자 명단 등 4.3과 관련된 자료들을 묻었다.
<관덕정 광장>
4.3 도화선-1947. 3.1절 발포 사건은 말도 다르고 풍습도 다른 제주섬에 온 육지 경찰이 제주도민 90%가 빵갱이란 교육을 사전에 받았다. 게다가 경찰은 일 년 전 대구를 중심으로 일어난 10월 폭동에서 민중의 위새를 경험한 바 있었다. 외딴 섬 제주에 와서 필요 이상으로 긴장했다. 모두 해산하고 구경꾼만 남아 있을 때, 무차별 총격을 해서 어린애를 업은 아낙과 초등학생이 있었다. 6명 죽고 8명 부상자 대부분이 등 뒤에 총을 맞았다. 기마 경관이 자신의 말에 깔린 어린앨르 제대로 보살피지 ㅇ낳고 방치한 채 지나가자 그를 욕하며 돌팔매를 가하자 곧바로 총성이 울렸다. 총격은 관덕정 앞과 경찰서 망루에서 동시에 가해진 것으로 추정. 관덕정 광장은 1`949년 6월 7일 전사한 유격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전시됐던 곳으로 유명하다. 망루 앞에서 이덕구는 십자형 나무틀에 묶여 늘어져 있었다. 낡은 군복 위 호주머니에는 숟가락이 꽂혀 있고, 입 주위에는 핏자국을 남긴채. 거슬러 가면 관덕정 광장은 1901년 애재수 난 당시 이재수 민군이 재수성에 들어와 원망의 상징이던 천주교도들을 처형했던 장소이기고 하다. 이래저래 관덕정 광장은 제주 역사의 중심지였다.
<기가 막힌 동창회-제주농업학교 터>
누구 누구 대석방이라 불려가면 교수형 처형이라는 뜻이었다. 박석대가 4.3 때에는 학살터로 이용. 주로 농업학교에 수감된 사람들이 이곳에서 비밀리에 죽었다. 이들 시신은 학살된 후 불에 태워졌기 때문에 가족이 확인할 수 없어 이상희의 부인은 꿈에서 ‘지금 가져온 시신은 내가 아니다’는 남편의 말을 듣고 다시 시신을 찾다가 타다 남은 내복 조각이 있어 겨우 시신을 수습했다. 지수사건이란 토벌대가 ‘털끝만큼이라도 유격대에 협조한 일이 있는 사람은 자수해야 살고 발각되면 처형된다. 이미 명단 확보했다고 해서 자수자에게 양민증을 준다고 해서 무관한 사람이 자수한 경우도 있었다. 수감된 지 보름 뒤 12월 21일, 토벌간다며 트럭에 타라는 말을 듣고 토벌 갔다 오면 결백이 증명될 거
라 믿어 희망을 가지고 서둘러 트럭에 탔는데 200명 중 동작이 느린 50명을 빼고 150명이 운명의 트럭에 올랐는데 농업학교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철사줄이었다. 철사줄에 묶여 박석내로 옮겨서 사살됐다. 교체를 앞둔 9연대가 실적 올리기를 위해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
<낙선동 성터>는 단지 중산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정든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되었다. 선흘 사람들은 최소 120명이 희생되었다. 생계 대책 없이 해안마을로 내려가 겨울에 굶주렸고 입산자 가족이라는 낙인도 무서웠다. 1949년 성벽을 축조해서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서였다. 불타버린 선흘 본동보다 아래쪽 알(아래)선흘에 전략촌이 들어섰다. 성 외벽 앞에 가시덤불로 채워진 2미터 깊이 구덩이가 있었다. 물이 고이지 않는 제주도의 화산토양 때문에 정통적 해자를 만들 수 없어 물 대신 가시덤불을 활용했던 것이다ㅣ 성 안에는 짐승 우리와 같은 함바집을 지어 사람이 짐승처럼 살았다. 이 석성은 마을 주민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유격대가 1950년 가을까지 식량 확보와 정치선전을 위해 이 성을 습격했으나 번번히 피해만 입고 퇴각했다 선흘 지역은 1948년 11월 21일부터 소개가 시작. 주민들은 해안마을인 함덕과 북촌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대부분 마을 주변에 남았다. 수확할 농산물을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어 잠시 피해 있으면 사태가 진정되겠지하고 낙관했다. 나흘 뒤 48.11.25일. 함덕 주둔 군인들이 불타버린 마을 주변을 수색하다 발견된 노인에게 마을사람 숨은 곳을 추궁하자 살해 협박 때문에 안내한 곳이 도틀굴이었다. 현장에서 15명을 처형한 후 나머지는 함덕 주둔지로 연행했다. 마을민은 밤새 혹독 고문에 시달렸다. 26일 목시물굴에 숨었던 주민이 체포되어 젊은 사람 70명만 추려내어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27일 남쪽 밴뱅디굴에 숨은 사람들 학살. 28일 함덕 수용서 주민 무차별 집단학살, 단지 해안마을로 소개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다랑쉬 마을 터-1948면 12월 18일 함덕 주둔 9연대 2대대가 동굴 입구에 불을 피워 모두 질식사시켰다. 1992년 다랑쉬 동굴 발굴은 노태우 정권기라 극우세력의 파워가 막강, 정권은 이 유골들이 양지바른 곳에 묻히는 걸 허락 못하고 유골을 화장하여 바다에 뿌렸다. 동굴 입구는 콘크리트로 페쇄. 망각을 강요하는 뒤틀린 현대사를 세우려는 사람들의 순례자가 되는 걸 막으려는 의도다. 2002년 발굴 10주년을 기념. 큰 굿도 하고 표ㅗ석도 세웠다. 그날의 확약 냄새, 피 냄새!
<성산 일출봉 터진 목>
수미포 해안에는 일제가 뚫어 놓은 인공동굴 24개가 있다. 미군 군함을 행해 돌진할 자살공격용 보트를 숨겼던 동굴이다. 동굴이 해녀 탈의정으로 쓰이고 있다. 전쟁 후 평화다.
<북촌 옴팡밭>
현기영 소설집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된 곳 북촌초 운동장에 주민을 모아놓고 우선 마을 전체를 불리 300여 채가 잿더미 되었다. 주민 7~800ㅁㅇ 중 군경 기족만 분리시킨 뒤, 먼저 민보단 책임자를 불러 마을 보초를 잘못 섰다는 이류로 현장에서 즉결 총살. 주민들이 동요하며 군경 가족이 모인 쪽으로 달려가자 또다시 총성. 젖먹이 어린애를 안은 여인이 죽가 어린애가 옷고름 속을 파고들며 젖을 빨던 장면, 옴팡밭(옴푹 패인 밭)으로 끌려가 학살- 이 학살은 사병들의 사격 연습용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학교 동쪽 언덕 작은 공원인 너븐숭이에는 어린애 무덤이 남아 있다. 아이들 영혼은 저승에 가지 않고 까마귀가 갖고 간다하여 정식 무덤을 쓰지 않는 게 제주도 풍습이다.
<아이고 사건>
1954년 북촌 아이고 사건은 초등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걸궁(농악놀이)을 하 던 주민이 마지막으로 북촌초등하교 운동장에 모였을 대 한 주민이 “이 곳은 4,3때 우리 부모형재들이 죽은 곳인데 억울한 영혼들에게 잔이라도 올립시다.”라고 한 게 발단이었다. 그동안 4.3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할 수 없다가 이날 잔을 올리며 슬픔이 북받쳐 모두가 그 자리에 퍼져 앉아 “아이고 아이고” 피울음을 토했다. 이 일이 즉각 경찰에 보고. 주민 대표 10여 명을 다시 공포 속에서 조사 받으며 다시는 이런 행동을 않겠다는 갓서를 쓰고 풀려나 오랫동안 벙어리처럼 살았다.
<무등이왓>
무등이왓을 폐촌 시킨 건 4.3발발 일 년 전 1947년 여름 공출 문제로 중간산 사람들 반발이 심하자 보리 수매를 독려하기 위해 군청 직원 4~5명이 마을에 들어 청년들에게 집단 구타를 했다. 마을 청년을 연행. 4,3 전 과정에 걸쳐 무등이왓 사람들 중 희생자는 최소 100명 이상이다. 그중 끔직 사건을 12. 12 잠복학살 사건이다. 시신을 수습하러 몰래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을 토벌대가 붙잡아 산 채로 화장시켰다. 그 뒤로 시신을 수습하는 자가 없었다. 시신이 널려져 굶주린 돼지가 그것을 ?뜯어먹고 돼지는 토벌대 눈에 띄어 사람 잡아 먹은 돼지를 그들이 잡아먹었다.
<동광 큰 넓궤>
궤는 자그마한 자연동굴을 의미하는 제주말이다. 이 궤는 입구가 좁아 겨우 한 사람이 기어 들어가야 한다. 10미터 들어가면 2~3미처 높이의 절벽이 있고 절벽을 내려가면 작은 광장. 앞쪽으로 동굴이 수십미터 계속 이어진다. 동굴 입구에는 돌로 샇은 바리케이드와 개진 항아리가 있다.
<정방폭포 소남머리>
이곳은 4,3대 서귀포 일대의 최대 학살터였다. 이곳에서 저릴러진 학살 중 1949.1월 22일. 볼래오름까지 피해갔던 무등이왓 사람들을 처형했던 학살. 한꺼번에 86명이 죽었는데 그중 20여 명이 무등이왓 사람들이었다. 학살 전에 입우 어린애는 살려주겠다는 아량을 보이기도 했지만 무등이왓 사람들은 가족이 함께 죽기를 택했다. 한 살배기에서 70대 노인까지 그렇게 죽어갔다.
<동광 헛묘>‘음력 8월 초하루면 일가 친척들이 모여 모듬 합동 벌초를 하는데 이 날은 제주도 내 모든 학교가 벌초방학을 한다. 조상의 묘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헛묘를 만들어 생전에 입었던 옷가지를 묻었다.
지수사건이란 토벌대가 ‘털끝만큼이라도 ㄴ비문 내용에선 갈등을 서둘러 봉합하고 진실 은폐하려는 음모로 4.3 진상규명이 활발하던 1993년 극우 세력들은 진실이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해 선심 쓰듯 먼저 비석을 세워줬다. 진실이 새겨진 비석이 들어서기 전에. 이건 기억을 둘러싼 사움에서 유위를 점하기 위해 선수 친 거다. 반명 정 중앙의 개진 비석과 그 안내문에서 유족의 힘겨운 싸움을 읽을 수 있다. 본래 비석은 1959년 건립, 하지만 1961년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며 비석은 박살, 강제 철거. 그래도 유족의 기지로 깨진 비석을 잘 보존 묘역의 정 중앙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제자리를 찾았다. 5.16년 쿠데타는 군사 정부의 학살 주역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범죄를 은폐하려고 4.19의 흐름이 자신의 목을 죄는 형국처럼 다가와 5.16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