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익숙해서 생소한 사람>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보고 나서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는 거식증 진단을 받은 채영이 나온다. 극단적인 식사 거부로 체중이 빠지는 여자를 떠올리는 순간 영화 <서브스턴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생각났다. 더 젊고 아름답고 완벽한 내가 되고 싶어서 사람들의 갈채와 환호를 받는 내가 되고 싶어서 몸을 가르고 시간을 쪼개고 나를 없애는 상황까지 받아들인 여자였다. 하지만 채영과 그의 엄마 상옥은 거식증으로 시작한 이야기를 서브스턴스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나갔다. 남들 눈에 비치는 나보다도 중요한 무언가를 찾아 나선 것 같았다. 내가 가진 ‘병’ 혹은 내 딸이 가진 ‘병’을 쉽게 단정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화면에 비칠 때마다 숨을 죽이게 되었다. 그들은 가장 아팠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이야기하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깊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나 마음쯤이야 보이지도 않는 건데.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묻어버리고 나면 삶이 한결 ‘무난’하게 여겨질 수도 있었을 텐데.
거실 TV 앞에 캠핑 의자를 놓고 대학 졸업을 앞둔 첫째 딸과 이제 막 수능시험을 마친 둘째 딸과 함께 한 시간반 남짓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온 집안에 불이 다 꺼진 것도 잊고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밑도 끝도 없이 울거나 웃거나 하며 주절거리게 되었다. 영화 속 두 사람의 대화에 전염된 것 같았다. 몇 시간이고 곁에 앉아 함께 영화도 보고 대화도 나누는 딸들이 고마웠다. 그러나 그때 나눴던 말 중에 갈고리처럼 살아남은 몇몇은 몇 주째 들러붙어서 나를 괴롭히는 중이다.
“엄마는 나를 정말 불안하게 만들었어.”
“그때 내 옆에 있어준 건 아빠뿐이었어.”
“그때 난 정말 엄마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았어.”
커리어를 모조리 포기할 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아이들의 전 생애를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했다고 자부해 왔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그 시간을 경험했다고 뒤늦게 고백하는 딸들이 당혹스러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딸만큼은 그때 그 시간, 내 마음을 제 마음처럼 이해해 줄 줄 알았다. 나의 가장 취약한 감정까지도 자기 것처럼 받아들여 줄줄 알았다. 그러나……. 그날 밤 느꼈던 아이들에 대한 고마움이나 뿌듯함 같은 선명한 감정들은 차치하고. 아이들을 향한 미안함과 죄책감이라고 하기에는, 서운한 감정이 너무 진하게 묻어버렸고, 설명하기 힘든 억울함이 멍울처럼 엉겨 붙은, 정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감정을 끼고 몇 주째 쩔쩔매는 중이다.
‘거식증’을 알기 위해 본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거식증이라는 증상을 설명하기보다는 거식증을 가진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의 일상을, 몸을 괴롭혀야만 생존할 수 있는 한 사람의 간절한 시간을 어떤 잣대에도 가두지 않고 이야기해 보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엄마’라고 불리며 함께 앓던, 그 한 사람 옆의 한 사람, 또 그 한 사람 옆의 한 사람까지도. 아이러니하게도 채영과 상옥의 이야기가 화면 밖 우리 세 모녀를 건드리면서, 은혜와 하연과 지나의 이야기를, 우리 세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아야 할 시간이 아니냐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또 묻어버릴 거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서너 시간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떤 깊고 복잡한 질문이었다.
"낳기나 했지.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있나?" 우리 엄마가 공공연하게 듣던 소리였다. 약국에서 조제한 진통제를 하루 세 번 한 움큼씩 들이키고도 엄마는 자리에 누워 일어나질 못했다. 뇌성마비 장애 때문에 몸은 물론이고 얼굴 근육까지 마구 움직였다가 경직되었다가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집안에서 형용하기 힘든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스무 살에 만난 남자친구와 스물넷에 결혼했다. 시어머니에게 매일 전화하지 않으면 “본데없이 자라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스물여섯에 첫아이를 낳았다. 본데없이 자라서 정말 ‘엄마다운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스스로도 의심하게 되었다. 꼭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낳기나 했지.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있나?" 더 이상 누군가 ‘우리’에게 손가락질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오늘은 설 명절 인사드린다고 시댁에 다녀왔다. 동서네 아이들과 줄줄이 서서 세배를 하며 근황을 나누다가 첫아이는 이제 스물네 살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스무 살이 되었다는 말을 꺼내게 되었다. 마냥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각각 남편을 만났던 때와 남편과 결혼했던 때와 같은 나이의 여자가 되었다는 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어머니가 모든 욕구를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듯 척척 해소시켜줄 때 아이는 필사적으로 욕구와 욕망을 떼어내려고 한다. 그 결과 아이는 불만 자체를 겨냥하는 히스테리적 욕망을 갖게 된다. 욕망이 결핍에 근거하는 한에서,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되찾기 위해 결핍의 공간을 필사적으로 수호한다. 거식증 주체는 음식을 거부하는 한편 ‘무’를 먹는다. 즉, 욕망을 구성하는 기표(철저한 식단, 계산된 칼로리, 변화하는 체중 등)를 먹는다. (...) 무를 먹고 음식을 거부하면서 그녀와 엘라는 어머니라는 자애로운 타자의 위협적인 배려를 거부한다.’ (박영진, 「거식증」,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고).
거식증까지는 아니지만 큰 아이가 먹은 걸 몰래 토하고 있다는 걸 알고 막막해하던 때가 있었다. 아이가 어떤 ‘증상’을 보일 때마다 막연히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원인과 책임이 하나둘 정도만 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그냥 다 내 책임이다, 하고 말면 ‘아주 나쁜 년’만큼은 면할 것 같았다. 적어도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내 책임을 인정할 줄 아는 엄마는 될 수 있으니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막연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을 주는 엄마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다다를 수 있는 최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요리도 잘하고 대화도 잘하고 책도 잘 읽어 주고 공부도 잘 봐 주고……. 우리 엄마가 그토록 원했지만 이루지 못한 그것을, 엄마가 물려준 성한 몸으로 꼭 해내고 싶었다. ‘엄마’라는 역할을 꼭 제대로 해내고 싶었다. 될 수 있으면 내 품의 아이가 결핍이라는 목마름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딸을 통해 내 결핍을 해결하는 동안 딸이 자기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내가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아픈 엄마와 어린 나를 돕기 위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찾아온 사람들이 쉽게 혀를 차고 탄식하고 비난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필시 세상에는 ‘좋은 엄마’라는 존재가 있을 것이라 확신해 마지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엄마처럼 모든 것을 걸고 나만 사랑했던 사람이 내내 나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렇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엄마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그렇게 확신이 가득할 수는 없었다.
내가 바라 마지 않았던 그것들을 주면 딸들의 삶은 나보다 나은 것이 될 것이라 내내 바래 왔다. 와중에 나보다 더 나은 돌봄과 환경에서 자라면서 그것밖에 다다르지 못하느냐 은밀하게 채근했던 내 안의 목소리를 아이들은 전혀 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입 밖에 낸 적은 없었으니까. 나만큼이나 엄마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증오로 앓아오던 하연이와 지나가 그 이상으로 내뱉지 못한 목소리들은 애당초 없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이다. 어쩌면 그토록 바라왔던 ‘좋은 엄마’ 되기는, 삶이 너무 버거워서 딸이 외롭도록 둘 수밖에 없었다는 상옥의 고백만큼이나, 나 하나 버티기에도 버거워서 버둥거렸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더 잘 알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였다. 각각 스무 살과 스물네 살의 두 딸이 6주 동안 그 공부를 같이하게 되었다. 아직 3주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그간의 시도만으로도 또 다른 나와 딸들을 조금씩 직면하게 되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낯설고 생소한 세 사람이었다. 더 이상 내 몸이나 내 마음과 같지 않은 딸들과 누군가에게 어떻게 보이기 위한 환상이나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모면해 보려는 환상에 시달리는 나의 모습 같은 것들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좋은 엄마’라는 꼭두각시놀음이 실은 내 살풀이춤인 줄도 모르고 하연이라는 여자와 지나라는 여자에게 또 다른 속박과 족쇄를 채우려고 할 때마다 몇 번은 자각하며 브레이크 걸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쉽게 자책하거나 왜? 하고 닦달하며 책임을 방기하기보다, 곁에서 홀로서기를 응원하며 내 삶의 책임을 다하는 주체가 되어보고 싶다.
첫댓글 "좋은 엄마"라는 말이 듣고 싶다. 왜일까? 양육의 대가일까, 아니면 단순한 욕심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기할 수 없다. 은혜님의 엄마, 지나. 하연의 엄마인 은혜님..여성은 딸이 되고, 엄마가 되고, 언젠가는 할머니가 된다. 하지만 나는 ‘나’로 살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러다 폭식과 거식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려 한다. 상옥의 세대를 살아가는 엄마로서, 워킹맘의 딸인 채영,지나,하연, 나의 딸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희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은혜님의 발제문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두 사람만의 식탁은 거식증을 넘어선 이야기들이 많을 것 같아 수업시간 기대됩니다. 발제문 잘 읽었습니다.
발제문 하나하나 깊게 읽고 글로 후기를 일일이 작성해주시는 박연옥 선생님의 응원이 참 큽니다. 덕분에 행간 카페에 들어올 때마다 박연옥 선생님 지나가신 발자취 덕분에 훈기가 돌고 애정이 생깁니다. ^^
누구나 쓰는 발제문인데 일일이 찾아, 미리 읽고 깊이 나눠주시는 그 수고에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