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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약력(음1833.12.5.~음1906.11.17. 양력1907.1.1.)
○아명(兒名) 기남(奇男).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菴),
○1833년 음력 12월 5일,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 가채리(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抱川市 新北面 加采里)
-경주 최씨 집성촌 父 최대(崔岱)와 母 李氏(李哲晉의 딸)
○4세 때 충청도 단양군 금수산 자락 이사,
○6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
○9세 때 시골 선비 김기현(金琦鉉)에게 수학
○1843년 11세 경기도 양근현 후곡(厚谷, 현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 후곡) 이사
○14세 때 이항로 문하에 들어감.
-후곡으로 부터 멀지 않은 벽계(蘗溪)에서 강학하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가 인생의 전기를 마련
○1852년 10월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혼인.
○1854년 22세 봄, 경기도 포천 가채리(加采里) 고향으로 돌아옴.
○1855년, 23세 춘도기(春到記) 명경과(明經科)에 합격.
※1855년(철종 6) 정시(庭試) 문과 병과 11위 급제-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 출사
○1856년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임명-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 주서(注書)로서 기주(記注)의 일을 대신하기도 했다.
○1859년 27세 사헌부 지평(언론, 감찰), 사간원 정언에 임명.
○1860년 서울의 남촌(南村)으로 이거-6월 이조 정랑(인사권 담당).
○1862년 충청도 신창현감(新昌縣監) 부임,(외직 1년간 봉직)
○1864년 성균관 전적과 예조 좌랑.
○1865년 성균관 직강,
○1866년 사헌부 지평에 임명.
-5월 모친상을 당해 3년 동안 향리에 물러나 지냄.
-그동안 병인양요(丙寅洋擾)와 병인사옥(丙寅史獄) 등이 일어남.
○1868년 사헌부 장령에 임명.
〈국정 개혁 상소〉
첫째, 대규모 토목공사를 중지할 것,
둘째 가렴주구를 그만둘 것,
셋째, 당백전(當百錢)을 혁파할 것,
넷째, 사대문세(四大門稅)를 금지할 것.
-흥선대원군의 왕실 권위회복 명분 정책을 견지하는 상소. ‘봉명조양(鳳鳴朝陽, 아침볕에 봉이 울었다)’
대원군 탄핵 상소로 삭직.
-고종의 특지로 정3품 당상관의 통정대부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에 제수.
○1873년 대원군을 탄핵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부상.
-10월 시무를 논하는 상소에서 대원군의 국내정책에 비판을 가함으로써 10년 세도의 굳건한 대원군의 아성에 타격을 가함.
※이 상소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스승 이항로가 올린 상소의 뒤를 이어 1868년 10월에 시무개혁을 주장하면서 올렸던 상소의 논지와 주장을 계승,
-고종-“너의 이 상소는 실로 충심에서 나왔고 또 나를 경계시킨 말이 지극히 가상하다. 감히 열성조(列聖朝)의 성대한 일을 계술하여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제수한다. 이와 같은 정직한 말에 만약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자는 소인을 면치 못할 것이다.”
-11월 3일 상소하여 앞의 소에서 다하지 못한 생각과 주장을 5조의 대의(大義)를 들어 분명하게 제시하여 萬東廟 毁撤, 서원 혁파 등 대원군 정권의 폐단을 시정 요구, 고종의 친정(親政) 촉구, 종친의 정치 간여 금지 요구, 대원군의 퇴진을 직접 촉구하기에 이른다. 대원군은 하야하고 고종 친정이 시작되었다.
-1875년 3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대원군 탄핵으로 골육 간에 이간을 부추겼다는 죄목
○1876년 1월 개항 절대 불가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림,
-1월 22일 도끼를 메고 경복궁 뜰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한다는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를 올려 개항 반대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개항 반대 이유 다섯 가지〉
첫째,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야욕은 그 속성이 무한정하므로 개항 후 그 야욕을 모두 채워줄 수 없다.
둘째, 개항 후 우리의 유한한 토산품과 일제의 무한한 공산품 양자 간에 교역이 이루어지게 되면, 한국의 재정은 파탄에 빠져 일제에 철저하게 예속되고 말 것이다.
셋째, 왜(倭)는 금수와 다름없는 서양과 일체한 몸이기에, 개항 후 서양의 천주교가 조선 전토에 범람, 유교의 윤리․도덕적 질서가 붕괴될 것이다.
넷째, 제국주의의 야수적 침략 속성으로 인해 개항 후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를 겁탈하는 등 반인륜적 침탈행위가 자행될 것이다.
다섯째, 일제와 화친은 사람으로 남느냐 짐승으로 전락하느냐 하는 이른바 ‘인수(人獸)’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에, 과거 청나라의 침략으로 야기된 중화와 오랑캐, 곧 ‘화이(華夷)’의 문제였던 병자호란과는 그 본질이 다른 것이다.
-이때 도끼를 지니고 어가(御駕)가 지나는 길목에 엎드려 상소한 것은 국왕에 대해 불손한 행위를 한 것으로 문제가 되어 개항 반대 상소로 인해
○1월 25일 전라도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흑산도 유배생활 기간은 만 3년간, 1876년 2월~1879년 2월 귀양살이에서 풀려날 때까지 소흑산도와 대흑산도 두 곳을 내왕하며 각기 1년 반 동안 지냈다.
○1876년 2월 3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가 체결됨.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대조선 침략정책을 노골화한 일제는 김홍집 친일내각을 급조하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내세워 개혁이란 미명하에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경을 단행하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추진.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 공포-단발령 반발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을 때, 그 투쟁의 선봉에 섰다.
○1896년 1월 1일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을 바꿈과 동시에 단발령을 선포했다.
-유교 윤리가 일반 백성의 생활에 뿌리 깊이 자리매김하고 있던 조선 사회에서는 단발령은 살아 있는 신체에 가해지는 심각한 박해로 받아들였고 이를 계기로 정부에 대한 반감은 절정에 달하였다.
-단발에 반대하여 절규한 최익현의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는 한 토막의 어록이 당시 극도의 반감을 불러일으킨 민심을 대변해주고 있다.
○1896년 1월 17일(이하 양력 표기) 단발 거부로 포천의 동문 후배 유기일(柳基一)과 서울로 압송되어 전동(典洞, 현 종로구 견지동 일대)의 사관(私館)에 갇힘.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이 단발을 명한 임금의 조칙을 보이며 국왕의 명을 따르지 않은 데 대해 준엄하게 문책하자, ‘금수에게 예의를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하고, 유기일과 연명으로 유길준에게 답신을 보내어 그를 질책하였다.
○2월 11일 단발령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철회되었다.
○2월 20일 선유대원 임명-민간에서 우국충의로 일어난 의병의 해산을 권유할 명분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함.
※선유대원-단발령을 계기로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나자, 정부는 이를 해산하기 위해 선유대원을 임명하여 각지로 파견하였다.
○1898년 의정부 찬정, 궁내부 특진관 등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거듭 상소를 올려 모두 사직하다.
○1900년에는 68세의 노구를 이끌고 포천을 떠나 충청도 정산(定山) 장구동(藏龜洞)으로 이사.
-그해 가을 인근의 선비들을 구동정사(龜洞精舍)에 모아 학문 토론 명분으로 강회를 열다. 위태로운 국운과 도학의 앞날을 걱정하고 그 대책을 토론하는 모임이었다. 이어 항일지사들과 교유하면서 구체적 회합을 갖게 되는 계기는 역시 정산 이거였다.
○1901년 임피(臨陂)의 낙영당(樂英堂, 현 군산시 성산면 고봉산 소재) 강회에 참석.
-강회 주인은 후일 을사늑약에 반대해 순국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었다. 낙영당 강회는 인근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후일 호남의병을 선도하게 되는 전해산(全海山)과 이석용(李錫庸) 등의 지사들도 참석하였다. 곧 이 강회는 지사, 유생들이 상호 결속을 다지고 일제의 침략상을 성토하면서 후일 거사를 도모하고 기약하는 모임이 되었다.
○1902년 재차 궁내부 특진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였다.
-그해 70세 때 5개월 동안 서부 영남지방을 두루 여행하고 지리산에도 올랐다.
○1904년 8월 궁내부 특진관과 의정부 찬정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상경하지 않고 사직 상소만 올린 채 계속 정산에 머물렀다.
-그해 가을에는 정산 향교에서 인근의 유생들을 모아 향음례(鄕飮禮)를 거행하였다.
○1905년 1월 소명을 받고 상경해 수옥헌(漱玉軒, 경운궁 중명전)에서 고종을 배알하였으며, 이때 5개 조의 차자(箚子)를 올려 명분을 밝히는 정사에 매진해줄 것을 간언하였다.
-1904년 결성된 친일 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국기(國紀)를 문란케 한 죄상을 성토하고, 정부의 무능과 안일을 지적하면서 그 각성도 아울러 촉구했다. 또, 어진 인재를 선발하여 정부 직책(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고)을 맡기고, 세금을 과도하게 거두는 일을 금지해서 백성을 보전할 것이며, 학교를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고, 신의로서 이웃 나라와 교섭하며, 나라의 예법을 바로잡아 말세의 폐단을 구제할 것 등 다섯 가지를 건의하고 정책에 반영할 것을 요구하였다.
○1905년 봄까지 서울에 머물며 개혁과 항일을 주장하는 연속적인 상소 투쟁을 벌였다.
○1905년 2월 17일 경기도 관찰사에 제수되자, 즉시 사직소를 올려 그 동안 줄기차게 건의한 시무책을 정부에서 무마 호도하기 위해 이처럼 관직을 제수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강력히 성토했다. 이어 정국을 수습하고 국권을 회복할 방안으로 부일 매국적을 단죄할 것을 주장했다.
○3월 11일 이러한 상소 투쟁으로 인해 일제의 한국주차헌병대 사령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왕산(旺山) 허위(許蔿) 김학진(金鶴鎭)도 반일 인물로 지목되어 동시에 그곳으로 끌려왔다. 일반 민심을 심하게 동요시켜 이른바 치안을 어지럽힐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명분으로 사전 예방 차원에서 이들을 전격적으로 구금한 것이다.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 공사가 한국을 침략한 일본군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한국주차군 사령관과 긴밀히 협의하여 내린 조치였다.
○3월 13일 포천 본가로 강제 축출되었다.
-포천 본가에서 10여 일을 머문 뒤 다시 상경해 서울 교외의 서강(西江)에 머물며 다시 상소를 올려 반일과 개혁에 성력(誠力)을 모아 나라의 자존을 수호해줄 것을 고종에게 간곡히 건의하였다.
○3월 23일 재차 일제의 헌병대사령부로 끌려가 이틀간 구금되었다가 25일 풀려났다.
○1905년 11월 17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의 자주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 전국적으로 을사조약 반대투쟁이 거세게 벌어졌다.
○11월 29일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려 고종 이하 조정 대신들의 무능 유약함을 강력하게 성토하고 아울러 조약 파기와 매국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을사오적(乙巳五賊)-이완용(李完用, 學部大臣), 이근택(李根澤, 軍部大臣), 이지용(李址鎔, 內部大臣),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권중현(權重顯, 農商工部大臣)
○12월 10일에도 다시 상소를 올려 조약 파기와 매국적 단죄를 거듭 주장하다.
○1906년 1월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 강회(講會)를 열다.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을사조약 늑결로 절박해진 시국상황을 전 국민이 일치단결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포고문을 짓고, 유생 수백 명을 모아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
-「노성궐리사강회시서고조약(魯城闕里祠講會時誓告條約)」-유생과 함께 29명의 연명으로 구국투쟁에 매진할 것을 결의한 약문(約文)을 발표.
-궐리사 강회에는 1896년 진주의병에 가담한 경남 합천 명유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도 10여 명의 지사들과 함께 참석.
※ 1906년 1월19일~2월9일 최제학을 통하여 면암의 편지와 태인의 豚軒 林炳贊간 답서가 오고 감
2월30일 勉巖과 豚軒 첫 대면, 돈헌은 면암을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올림.
3월8일 면암, 진안 최제학의 집에서 묵다
3월15일 면암, 돈헌 구체적 거사 논의
4월8일(양5.30) 면암, 담양 용추사(潭陽 龍湫寺), 기우만(奇宇萬) 등 남도 50여 명 만남.
-임병찬 최제학 등 의병에 동참하기로 한 112명의 지사들이 연명한 「동맹록(同盟錄)」을 작성해 항일전에 매진할 결의를 다졌다.
-고종에게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렸다.
○1906년 6월 4일(윤4월13일) 면암 74세에 진안의 최제학(崔濟學)을 통하여 태인에 거주하던 전 낙안군수 임병찬(林炳瓚)과 호남의병을 결성, 전북 태인 무성서원(武成城書院)에서 강회를 열고, 의병을 일으켰다.
「오백 년 종사가 드디어 망하니 어찌 한번 싸우지 않겠는가?」-의병을 일으키며
-거의(擧義) 당시 구상했던 항일전의 방략은 삼남의 여러 우국지사들과 연계하여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상호 연합전선을 구축함으로써 항일전을 극대화한다는 것이었다. 곽한일(郭漢一)과 남규진(南奎振)에게 호서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남・호남과 더불어 의각(犄角)의 형세를 이루어 항일전을 전개할 것을 권유, 화서학파 동문 후배인 유인석에게는 남북에서 협력하여 함께 항일전을 벌여 줄 것을 요청. 영남의 문인 조재학(曺在學)과 이양호(李養浩)에게도 지사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도록 지시, 영남 각지 인사들에게도 편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켜 항일전에 동참해 줄 것을 독려. 이처럼 원대한 전략하에 호서에서 민종식이 홍주의병을 도모하게 되자, 즉시 호남으로 내려가 그곳의 항일세력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창의 당시 의병의 규모는 80여 명.
-무성서원을 떠난 의진은 태인 관아로 행군했고 군수 손병호(孫秉浩)는 그 기세에 눌려 도망쳤다. 무혈입성 직후 향교로 들어가 명륜당에 좌정하고 향장과 수서기를 불러 관아의 무기를 접수하는 한편, 군사들을 모아 전력을 강화시켰다.
- 「기일본정부서(奇日本政府書)」를 일제 통감부에 보냈다. 이 글은 창의에 즈음하여 주민들에게 포고한 격문과 고종에게 올린 상소에 뒤이어, 거의의 명분을 천명하고 일제 침략상을 성토하기 위해 작성된 중요한 문건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성정(性情)과 국가 간의 도의를 상실한 일제의 야만성을 지적한 뒤, 강화도조약 이래 일제가 그들이 한국에 대해 배신과 기만을 자행하면서 국권침탈을 일삼아 온 실상을 폭로함으로써 일제의 야만성과 침략성을 규탄.
○6월 5일 아침 일찍 정읍으로 들어갔다. 정읍군수 송종면(宋鍾冕)이 항복하여 정읍도 무혈 입성.
-군총・화승・탄환 등의 무기를 확보, 1백 명의 장정을 더 모아 의진의 전력을 강화.
-의진은 다시 30리를 행군하여 내장사에 들어가 유진. 고창의 고석진(高石鎭)이 김재구(金在龜)ㆍ강종회(姜鍾會) 등과 함께 포군 30명 가세 전력 보강. 의진의 군세는 3백 명 규모로 늘어남.
○6월 6일 내장사를 떠나 순창의 구암사(龜岩寺)로 들어가 1박.
-소년 김병로가 구암사로 찾아와 의진에 합류.
○6월 7일 순창관아 진격, 순창군수 이건용(李建鎔) 항복함, 순창 관아에 의진 본부 설치.
-채영찬・황균창・김갑술・양윤숙 등이 각기 수십 명의 포군을 데리고 합류.
○6월 8일 남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곡성으로 행군. 곡성군수 송진옥(宋振玉) 항복.
○곡성에서 남원으로 진출하는 길이 차단. 순창으로 회군.
-김송현(金松鉉) 엄덕조(嚴德祚)가 포군 수십 명을 거느리고 합류.
○淳昌客館에 집결, 9백 여명 규모로 불어남.(절반이 유생이고, 총포를 지닌 의병은 3백여 명.)
○6월 11일 순창에 유진한 의진은 전주와 남원에서 출동한 진위대(鎭衛隊)의 공격을 받다.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의병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조칙과 관찰사 고시문을 보내 해산을 종용.
-순창읍 북쪽 금산(錦山)엔 전주 진위대가, 동쪽 대동산(大同山)엔 남원 진위대가 포진, 읍내 관아 객관을 중심으로 유진한 그의 의진을 압박.
-진위대 군인을 상대로 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의진의 해산을 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1백여 명이 남아 주변을 호위하였다.
○진위대 관군은 11일 오후 6시경 일제히 의병을 공격해 왔다. 이에 주위를 돌아보며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제군은 모두 떠나라.”고 하며 지휘부가 있던 객관 연청(椽廳)에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래도 이때 끝까지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은 22명을 헤아렸다.
-중군장 정시해(鄭時海, 1872~1906)가 전사. 이에 진위대는 사격을 중지하고 지휘소를 포위한 채 그대로 밤을 지샛다.
○윤4월23일 임병찬(林炳瓚)・고석진(高石鎭)・최제학(崔濟學)・양재해(梁在海) 이길용 임현주 김기술 문달환 조두석 조영선 유해용 나기덕등 세칭 13의사와 함께 그는 진위대에 체포, 전주 鎭衛隊 소대장 金熙鎭이 서울로 압송하라고 통보, 일본군이 이들을 모두 압송하여 전주 鎭衛營에 도착 4일 후
○6월 18일(윤4.27) 명동에 있는 일본군 사령부 도착, 주차헌병대 사령부에 세 번째로 구금.
-홍주의진의 중심인물 9명이 먼저 헌병대 사령부에 구금되어 있어, 이들과 같은 장소에 구금.
○6월 25일 최익현과 순창12의사를 결박해 진고개(泥峴) 사령부로 끌고 가 심문(군율위반죄).
○8월 14일 한국주차군 사령부로 끌려가 일제의 육군이사(陸軍理事)로부터 대마도 감금 3년 선고받다.
-임병찬 대마도 감금 2년, 고석진 최재학은 본서 감금 4개월, 양재해 이길용 임현주 김기술 문달환 조두석 조영선 유해용 나기덕은 모두 장형(杖刑) 100대에 처하고 석방한다,
○8월 28일(윤7월 8일) 최익현 임병찬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에 소재한 일본군 위무영(衛戊營)으로 압송
-앞서 도착해 있던 홍주 9의사와 합류해 감금 생활에 들어갔다.
-대마도 도착 직후 감금소에서 모진 수난을 당하였다. 감금소를 책임지고 있던 대마경비 보병대대장 소에지마(副島以辰) 소좌가 관을 벗고 경례를 하도록 명령한 뒤 억지로 관과 건을 벗기려고, 총검을 들이대고 위협까지 가했다. 이에 죽을 결심으로 도착 당일 저녁부터 단식에 들어갔다,
-고종에게 올릴 유소(遺疏)를 임병찬에게 구술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소에지마 대대장이 단식 3일째 되던 날 사과하고 단발과 변복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고, 그날 저녁부터 죽을 먹었다. 노구에 3일간의 단식은 건강에 큰 타격을 가져와 이후 늘 병고에 시달리게 된다.
○1907년 1월 1일(음1906.11.17.) 새벽 4시에 대마도에서 풍토병으로 74세로 옥중 순국.
-장례집행위원 도집례 임병찬 부집례 이칙 사서 문석환 사화 신현두 호상 노병희.
-고석진 최제학은 9일 이미 부산으로 나아가 치상준비를 하였다.
-그의 유해는 이즈하라(嚴原) 시내에 있는 슈젠지(修善寺)에 이틀간 안치되었다가
-약진환(藥津丸) 배편으로 5일 아침 부산 초량 앞바다 도착(초량항구를 떠난 지 132일 만에 유해로 환국.)
○ 1907년 1월 5일(음11월 21일) 최익현의 영구가 부산 초량(草梁)에 도착. 최재학과 최익현의 제자 문인들이 운구(運柩)하여 부산 商務社에 안치하고 최익현의 종질 최영설(崔永卨)은 執禮를 후손 최만식(崔萬植)은 재무를 노병희는 護喪을 최재학 곽한소(郭漢紹)는 司書를 맡아 치상물품을 마련 22일 성복(成服)하고 23일 정오 무렵 발인, 장지 충남 定山, 14일의 운구행렬 12월 7일 定山 장구동(長龜洞)에 도착, 12월 17일 최재학이 제문을 올려 최익현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였다.
○1907년 5월 12일 사림장(士林葬)으로 논산의 무동산(舞童山, 상월면 지경리 소재) 기슭에 안장(安葬)
○1909년 예산군 광시로 이장(移葬).
○1914년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 모덕사(영정봉안) 사당. 그 옆엔 그가 최후에 머무르던 고택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황성신문』 1907년 1월 14일 논설 「조고찬정최익현씨(弔故贊政崔益鉉氏)」-“젊어서도 최익현씨며 늙어서도 또한 최익현씨요, 살아서도 최익현씨며 죽어서도 또한 최익현씨로다” 추모,
○『대한매일신보』-「우리 동방의 부자 면암 최선생」 찬양, 그 이후에도 수회에 걸쳐 「곡(哭)면암최선생문」, 「최면암소본(疏本)」, 「제(祭)면암최선생문」 등 면암 추모 글을 연이어 게재.
○1908년 46권 23책 문집을 간행(戊申本), 일제에 압수당함.
○1931년 48권 24책으로 2차 간행(辛未本).
정리
서양화가, 문화관광해설사 김성실
첫댓글 "일제와 화친은 인수의 문제"
최익현선생님 대단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