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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노의 하나님? / 사 66:18-23, 히 12:4-13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물품을 보면 대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독일 사람은 튼튼하고 실용적인 물건을 만들지만 그리 본때 있게 만들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일본 전자제품이 아무리 좋다고 해고 써보면 미국이나 독일에서 만든 것처럼 튼튼하고 믿음직스럽제 못하다. 그즈거 깜찍하고 예쁘고 가지고 다니기에 편하다. 그러데 우리나라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겉모양만 좋다는 평이 나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집을 가보면 제일 먼저 그 집 안주인의 품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어떤 집에 가면 먼지 하나없고 깔끔한 집이 있다. 대개 이런 집 주인은 틀림없이 자기 일을 잘 해낸다. 그러나 그렇게 인성이 너그럽고 여유있지 못하다. 그런데 털털하고 정돈이 잘 안되었다 하는 집에 가면 또 성격이 무던해서 어지간한 가시는 잘 넘어가는 성격을 가졌다. 이와 같이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생의 열매로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격은 그가 만드신 자연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자연은 저 북극 얼음 뿐인 에스키모가 사는 곳을 봐도 아름답다. 1년 내내 눈 덮인 산을 봐도 아름답다. 넓은 바다를 볼 때나, 봄에 찬란한 꽃,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 그 어느 것도 자연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정말 아름답고 볼수록 신비한 것 뿐이다. 그렇듯이 하나님은 정말 아름답고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저 밝은 해를 지으시고 밤과 낮을 구별해 놓으시고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물과 흙을 나누고 바다라 하시고 육지라 하시며 좋았다 하셧다. 또 바다와 육지에 수많은 고기와 수초와 공중에 나는 것과 땅의 짐승들을 지으시고 나무를 만들어 과일을 많이 맺게하고 사람을 만들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심히 좋았다 하셨다. 정말 하나님은 아름답고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종족을 유지하겠다는 기본적인 인권마저 유린될 때 모세처럼 물에 던져버린 쓸모없는 어린 아기를 건져내어 그 백성을 구원하여 자유와 독립을 얻게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또한 이들의 앞에 홍해가 가로놓여 갈 길이 막혔는데 배 한척 없고 등에는 이삿짐을 지고 아들과 딸 어린 것을 등에 없고 걸어가는 그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대견해서 그 홍해를 갈라주어 육지같이 건너가게 하셨다. 그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멀리 사막에서 메추라기라는 새들이 날아와 떨어지게 하시고, 이들이 잠든 천막 주위에 가루를 이슬내리듯 내려 거두어 먹게 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이들이 사막에서 목말라 헤맬 때 반석을 지팡이로 치니 그 속에서 생수가 터져 나와 먹게 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들이 광야를 걸어갈 때 독사들이 나와 이들의 정강이를 물어 이곳저곳에서 죽어가는 비참한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라. 그리고 그 장대에 달린 뱀을 본 자는 살리라’ 하시는 등 하나님은 그때그때 그들이 필요할 때마다 그 필요를 풍족하게 채워서 넘치게 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자. 그분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돌로 맞아 죽어야 하는 죄인인데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고 용서해 주신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몸에 귀신이 들어서 물 속에도 들어가고 불 속에도 들어가면서 밤에는 돌로 된 무덤 속에 들어가 송장들과 함게 사는 불쌍한 청년의 귀신을 내어쫓아 평화롭고 다란한 가정으로 돌려보재주신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저 성문 밖으로 쫓겨나 죽는 날까지 가족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모래밭 위에 뒹글다가 발가락이 빠지고 코가 달아나고 귀가 달아나고 손가락이 빠져나가 급기야 그 형체도 모르게 죽어가면 독수리 밥이 되는, 정말 저주를 받았다는 무서운 죄인의 병, 나병을 고쳐주셔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신 하나님, 하나 밖에 없는 무남독녀 외딸이 열병으로 죽었을 때 우리 주님은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간절히 기도하신 다음 ‘덜리다굼’ 하시며 이 회당장의 딸을 부활시켜 사랑하는 아버지이 품에 도로 안겨주신 고맙고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탕자였던 아들이 돌아오자 살찐 송아지를 잡고 새 옷을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동네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을 예수님은 보여주셨다. 그러기에 그 분은 마 7:9-11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시면서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인 것을 예수님은 수없이 강조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전부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 뿐이냐?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여인에게는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셔서 여인들만이 아는 그 지긋지긋한 해산하는 고통을 주셨다. 남자들에게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함으로써 그 지긋지긋한 노동, 그리고 꿈에도 생각하기 싫은 죽음과 이별이라는 쓰디 쓴 잔을 인간에게 주셨다. 마지막에는 에덴이라는 낙원에서 인간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가득한 저주의 땅으로 쫓아내셨다.
여호와께서 세상의 사람들을 보실 때 그들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악한 것으러 가득하였다. 곧 창 6:5절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여 결국 그 인간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고 심지어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멸망시키기 위하여 150일동안 아라랏산 꼭대기까지 물이 차서 지상의 모든 생물이 다 물에 빠져 죽게 한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종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이 더디어지니 그동안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한 신은 어디 갔느냐? 그 신은 없어졌으니 이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 하여 여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금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길 때 하나님의 종 모세는 ‘아론 지파가 차고 있었던 검을 뽑으라 하여 3청명을 죽이니 그들이 다시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고 다시 복을 내리셨다’는 기사가 출 32장에 나온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비둘기를 팔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회초리로 때리고 내어쫓으시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고 극히 흥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이 성령받은 다음 한 것이 무엇인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를 다 팔아 교회에 바치고 믿는 형제와 함께 물건을 통용하고 모이기를 힘쓰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체적인 분위기에도 이단자는 있었던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기의 재산 중 일부를 감추고 일부만 손에 들고 나와 사도들이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바쳤다. 이때 베드로가 성령으로 이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하니 이 말을 듣자마자 아나니아의 혼이 그 몸에서 떠나니 젊은 사람들이 그 시신을 메고 나가 장사하였다. 이럴 때 아나니아의 부인 삽비라가 들어오니 베드로가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고 물으니 남편의 일을 모르는 삽비라가 ‘예 이것뿐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을 때 베드로는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할 때 그의 혼도 그 몸에서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로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저주하여 낙원에서 쫓아내셨고, 죄지은 사람들은 불과 유황으로 멸망시키셨으며,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칼로 쳐서 죽게 하셨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비둘기와 돈 바꾸는 자들을 회초리로 때리면서 내어쫓으셨으며, 베드로가 아니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된 욕심을 저주하니 그들이 그 자리에서 혼이 떠나가 버리는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한없이 좋으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한없는 기쁨과 영광과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인가 하면, 한편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으로 죄지은 인간을 사정없이 그의 진노의 채찍으로 내리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을 섬기다보면 한없이 어려운 매를 맞은 경함을 여러분은 하였을 줄 안다. 갑자기 하는 일마다 잘 안되어 실패를 해서 하루도 편하게 잘 수 없는 나날을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갑자기 남편이 심한 병에 걸려 고생을 한다던지, 자녀들이 속을 썩인다든지 여러 가지의 경험을 했을 줄로 안다. 정말 욥처럼 ‘내 고난이 내 몸에 가득하였고, 내 슬픔이 내 몸에 가득하다’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다. 마치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을 떠날 때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었으나, 식량 때문에 이방에 가서 살다보니 남편과 아들은 다 죽고 이방에서 얻은 며느리 하나와 함께 초라한 노인으로 돌아온다. 이때 베들레헴의 옛날 동네 사람들이 돌아온 나오미를 기쁨으로 맞아줄 때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을 향하여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하고 대답하고 있다. 나오미라는 말은 ‘희락, 기쁨’이라는 말이지만 ‘마라’는 ‘쓰다, 괴롭다, 쓰라리다, 고통’이라는 뜻이다. 정말 나는 요즘 살기가 마라와 같이 괴롭고 쓰라리다, 이 어인일인고 하며 탄식하는 분이 있을 줄로 믿는다.
오늘 읽은 본문 히브리서는 누가 썼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문장과 사상을 보면 바울 사도의 제자들이 썼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아마 사도 바울의 제자들이 세계 방방곡곡에 흩어지기 시작한 히브리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사장으로 구약에서 양을 잡아서 죄를 사하듯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시는 속죄의 양으로, 또 대제사장과 왕으로 오셨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구약에 있는 구절을 74회나 직접 응용하면서 그동안 구약만 읽어오고 또 유대교의 전통에 젖어온 히브리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데 오늘 읽은 히 12장을 보면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라.’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하면서 징계니 째찍질이니 하는 말이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그들은 어느 백성 그 누구보다 더 잘살고 편안한 줄로 믿고 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오래 전에는 헬라 사람들에게 매를 맞으면서 살아야 했다. 이제는 로마의 칼날 밑에서 살다가 견디지 못하여 집을 버리고 모국인 이스라엘 땅을 버리고 보따리 하나만을 싸들고 이웃나라로 이민을 떠났다. 떠나보니 그곳 민족들의 천대도 대단했다. 당장 먹고 살려니 모든 것이 막연하고 견딜 수가 없는 배고픔과 고독 속에서 그들은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고생을 하면서 살고 있을 때 우리가 당하는 현재의 이 배고픔, 이 쓰라림, 이 고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더구나 우리처럼 예수 잘 믿고 진실하게 살아보려고 하건만, 악한 사람들은 호의호식하고 사는데, 우리의 삶은 보잘 것 없고 억눌려 있어 억울하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낙심할 수밖에 없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교훈과 위로로써 주시는 말씀이다. 5하-6절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우리 부모님은 우리가 헐벗었을 때 입혀주시고, 잠들었을 때 따뜻한 곳에 눕혀주시고, 우리가 병들었을 때 우리의 병을 치료해 주시는 좋으신 부모님이다. 그러나 늘 좋은 것만 있는 부모는 좋은 부모가 아니다. 이런 일도 있다. 어느 도시에 참 행복하고 단란한 부부가 있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시들시들 앓아 병원에 가니 처음에는 맹장이라 해서 수술을 받았는데 별로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큰 병원에서 진찰을 하니 자궁암이었다. 그러런 일찍 손을 썼으면 치료가 가능한데 너무나 늦어서 결국 죽고 말았다. 남편되는 분은 이제 중학교, 초등학교 다니는 삼남매와 자기를 위하여 선을 보고 좋은 집안에서 공부도 많이한 처녀와 결혼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이 새엄마는 정말 좋은 엄마였다. 옛날 계모가 아이들을 학대한다는데 이 새엄마는 절대로 욕도 안한다. 꾸지람도 안한다. 돈도 달라는대로 다 준다. 얼마동안은 정말 훌륭한 여자다, 장가 잘 갓다, 자기가 낳지도 않은 아이들인데도 정말 잘 보고 사랑하는 좋은 엄마다 했다. 그러나 이 삼남매는 이상하게도 전부 문제아가 되고 말았다. 왜 그랬나? 이 새엄마는 자기가 시집와서 낳은 자식은 때리고 화내고 하면서 교육했으나, 그들은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욕이나 안먹으려고 해달라는대로 다 그 뜻을 받고 보니 모두 문제아가 되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과 건강을 주셨다. 그러나 오늘 말씀대로 7-8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했다. 나는 이 말씀 하나로 우리 의문이 사실상 다 풀린다고 생각한다. 왜 저 악독한 사람이 잘먹고 잘사느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아들의 명부에서 버렸다. 그것은 사생아이다. 그러니 때릴 것 없이 주라는 대로 다 주어 제 스스로 죄지어 교도소가고 제 스스로 돈과 재산에 치어 죽게 만드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참으로 사랑하는 아들이 잘못할 때는 사랑의 채찍으로 때린다. 또 너의 허리나 어깨를 보니 그 재산 짊어지고 가다가는 간이 녹아 죽든지 아니면 허리가 부러지든지 하겠다 생각하면 그 재산을 빼앗아 버리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징계를 통하여 우리를 잘못된 길에서 바로 잡아 주시고 또 그 징계를 통하여 우리를 연단하고 훈련하시는 것이다. 11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결국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과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이미한다. 인간은 흔히 신경질이 날 때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분풀이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풀이로 우리는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다. 그의 채찍의 징계는 오로지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이다. 9절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결국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때도 좋으신 하나님, 채찍과 징계를 주실 때도 좋으신 하나님이다. 여러분에게 시험이 왔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그릇 만드는데 비유하셨다. 바로 그릇은 흙을 떠서 공장에 들어가면 부서지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내 고집, 내 자존심, 내 욕심 이것 부서지라고 하나님은 채찍과 매로 두들기고 있다. 그러나 결국 성령의 불 같은 가마에서 고운 유약을 바르고 구워져 나올 때 여러분은 번쩍번쩍 하고 빛나는 그릇이 된다. 이렇듯 보잘 것 없는 흙덩이가 값비싼 귀한 청자, 백자가 되듯이 하나님의 용광로 안에서 귀한 그릇으로 축복될 것을 믿는 성도가 되자. (1996-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