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생명의 양식 / 출 16:4-12, 요 6:22-40
영국에 컨글튼 경이라는 유명한 그리스도인 부호가 있었다. 하루는 컨글튼 경이 자기 집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 말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 ‘내게 만약 5파운드만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 이 말을 들은 컨글튼 경은 하녀에게 다가가 ‘정말 그런가?’ 하고 물었다. ‘주인님, 정말 그렇고 말고요.’ 그래서 컨글튼 경은 하녀의 등을 다독거려 주면서 ‘내가 5파운드를 줄테니 이제부터는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렴’ 하고 말했다. 이게 웬 횡재인가? 그런데 컨글튼 경이 정원으로 나가는데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아이 참, 이럴줄 알았으면 10파운드라고 말하는 건데, 아유 아까워.’ 또 다시 불평이 시작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만족할 줄 모르고 끝없이 불평하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러분은 어떤가? 항상 만족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오늘 본문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필요와 그 필요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필요한 것이 많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는 무엇인가?
1. 가장 근본적인 필요는 무엇인가?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심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브라함 머슬로우는 ‘인간이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필요는 육체적인 것’이라고 했다. 먹고 사는 것, 곧 생존을 위한 필요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최고의 필요는 자아실현이다’라고 했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육체적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그분도 자기 생존을 위한 필요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아셨던 것이다. 그 예로 요한 6장 앞부분을 보겠다. 벳세다 들판에 모인 배고픈 군중들을 위해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그 자체가 예수께서 배고픔의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으셨다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지구촌의 빈곤에 대하여 무관심해서는 안되지 않겠나?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극도의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제 먹고 사는 문제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나라의 요즘 세대에게는 이 ‘절대빈곤’이라는 말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이 지구촌에는 10억에 해당하는 인류가 아직도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곧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구촌에 10억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이웃의 빈곤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문제를 책임져야 할 윤리적인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빵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빵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본문은 그것이 근본적인 해답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그날 그 벳세다의 들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다. 그러나 주님의 기적을 통하여 배고픔을 면했던 군중들은 어떻게 달라졌나? 그들의 삶이 변화되었나? 좀 심한 말인지 모르지만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배고파하는 군중들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아직도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필요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근본적인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 인간은 결코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또 한가지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은 기적을 체험한 후의 이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그 기적 때문에 감격한 흔적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30절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그들은 이미 표적을 보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더 큰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31-32절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지만 당시의 민중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주님, 그 정도의 기적가지고는 안됩니다. 아직 당신은 모세보다 못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내리게 하여 그들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루 분의 양식을 채워주는 이 정도의 기적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적어도 40년간은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이런 식이다. 이 엄청난 기적을 맛보고도 주님 앞에 더 커다란 기적을 요구하며 끝없이 불평하는 그 당시 민중들의 얼굴을 지켜보라. 그러면 모세 당시에 있었던 민중들은 만나를 내리시는 그 기적으로 만족했는가? 그들도 만족한 흔적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 왜 항상 만나만 주십니까?’라고 투정하던 구약의 백성들의 얼굴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백성들은 아직도 그들에게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진정한 필요, 그리고 근원적인 필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근원적인 필요 두 가지를 지적해 주고 계신다.
첫 번째 필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이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앞에 오는 것, 그것이 근본적인 필요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음식, 직장, 더 넓은 집, 더 많은 물질도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것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너희들의 근본적인 필요는 하나님이다.’ 시편 기자는 이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다. 42: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인생의 근본적인 필요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없이는 제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도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시편기자는 알았다. 성 어거스틴도 오래 전에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고백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 내 영혼이 당신의 품에 돌아가 쉬기까지는 결코 평안함이 없었나이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필요가 해결되었다는 고백을 할 수 있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고,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단신은 아직도 굶주린 사람이다.
두 번째 필요는 영생이다.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내가 무언가 성취했다고 해도 그 기쁨은 순간이다. 그 다음 우리는 인생의 또 다른 불안과 두려움 앞에 서야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질문이 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일까?’ 그 다음에는 무엇일까요? 결국 사람이 마지막에 직면해야 할 것은 차디찬 무덤이다. 이 무덤을 생각하면 쓸쓸하다. ‘나도 죽어야 한다. 그리고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사실 앞에서 여러분의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가 인생을 향락한다고 하지만 그 쾌락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의 자유, 삶의 보람, 그것이 차디찬 한줌의 흙 앞에서 가지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중세 로마의 한 대학 정문 앞에 이런 큰 간판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로마에 살고 있는 한 젊은이가 청운의 꿈을 품고서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가난해서 뜻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자선 사업을 하는 유명한 할머니 한 분을 찾아갔다. ‘할머니, 저는 꿈이 있는 젊은이입니다. 학창 시절에만 저를 도와주시면 반드시 그 은혜를 갚겠습니다.’ 이 청년의 고백을 들으면서 할머니가 물었다. ‘청년이 하려는 계획은 무엇이오?’ ‘예, 우선 법과대학에 들어가면 열심히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변호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정의구현에 힘쓰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변호사 사업을 좀더 확장해서 더 많은 사람들의 공익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할머니가 또 묻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늙겠죠. 늙으면 제자들을 육성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과 편리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머리를 긁던 청년이 대답한다. ‘죽겠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 이 청년은 할 말이 없었다. 이때 할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인생의 마지막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는 단 한푼도 투자할 수없소.’ 그 할머니와의 만남이 청년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이 사건 이후에 자기 인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 앞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자기가 세운 대학 정문에 이 간판을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삶의 궁극적인 문제, 영생의 문제,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문제 앞에 할 말이 없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오늘의 성취도, 성공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가? 영생의 문제, 이것이 여러분의 근원적인 필요라는 사실을 아는가?
2. 가장 근본적인 필요에 대한 대답이다.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신다. 3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유명한 선언이다. 요한복음 전체에 ‘나는 무엇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일곱가지가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는 선언이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선언 속에 담겨진 의미를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에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신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내가’라는 말은 흔히 우리가 친구와 대화하면서 ‘내가 말이야, 내가 있잖아’ 하는 식으로 말하는 ‘내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내가’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되는 말이다. 구약에서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THAT I AM)’라고 대답하셨다. 이 ‘I AM’이라는 말은 신적인 명칭이다. 예수님은 동일한 의미를 여기에서 사용했다. 구약에서 사용되었던 그 의미와 전적으로 동일한 선언! 여기에서 ‘내가’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선언이다.
왜 그리스도가 인생의 문제에 대한 대답인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나를 지으신 분이시요, 나의 섭리자시요, 나의 구속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분이 내 문제의 해답이 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만나를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고픔을 해결하신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32절하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늘에서 내린 떡, 사실 그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이 말씀은 ‘내가 하나님이다’라는 선언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영접했다’라고 할 때 그것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그 말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면 무슨 부족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분이 해답이시다.
둘째로 예수님 자신이 해답이시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날 때 그의 필요는 무엇이었는가? 그의 필요가 많았다. 우선 그에게는 독립이 필요했다. 마음대로 살고 싶었다. ‘아버지, 제게 자유를 주십시오. 제 마음대호 여행도 하고, 하고 싶은 일도 하게 해주세요. 아버지 밑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죽치고 있어야만 합니까?’ 그에게는 많은 필요가 쌓여 있었다. 그러나 탕자가 먼 나라에서 모든 것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던 그날, 그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그 필요는 아버지였다. ‘오, 아버지께서 나를 영접해 주신다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시 한번 회복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돌아오는 탕자, 그리고 그 아들을 끌어안은 그 아버지의 음성을 기억하는가? ‘얘들아, 살진 송아지를 잡자. 잔치를 벌이자. 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내 아들이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라. 발에는 신을 신겨라. 그리고 새 옷을 입혀라.’ 이제 이 아들의 모든 외적인 필요가 채워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를 만남으로써 자연히 따라오게 된 것들이다. 문제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렇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얼마나 주실 수 있는 분 정도가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궁극적 필요 자체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예수님 자신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실제로 깨닫는 데에 우리는 왜 이렇게도 더딘가?
셋째로 예수님 안에 참된 영원한 만족이 있다.
3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인류 역사상 누가 이런 엄청난 약속을 한 적이 있는가? ‘내게 오는 자, 나를 믿는 자, 나를 소유하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리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아니, 예수를 믿으면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간증일 수 있는가? 예수님을 믿긴 믿지만, 오늘 우리의 삶속에 아직도 많은 문제들이 쌓여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이 말씀의 약속들을 어디까지가 진실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항상 이 말씀을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크고 작은 수많은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직장, 사업, 결혼, 진학, 재물, 성공, 성취 등 수많은 문제들과 싸우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신뢰했을 때, 적어도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시다. 무덤 저 전너편에는 영원한 본향에 대한 소망이 있다. 이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소한 필요 때문에 나쁜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감히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다. ‘나는 결코 목마르지 않습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필요한 것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내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주실 줄 믿는다. 또 내 필요가 바뀌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면, 주께서 내 시선을 조정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내 것이다. 주께서 나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셨기에 나도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처럼 고백한다. ‘내게는 배고픔이 없습니다. 내게는 목마름이 없습니다.’시편기자처럼 고백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가 나의 생명의 떡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서 저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이 얼마나 복되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내거가 생명의 떡이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이제 이 약속을 더욱 확신있게 주장하라. 하늘과 땅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그분께서 나의 아버지시라면 두려워하지 마라. 불안에 싸일 필요가 없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고통과 갈등을 안겨주는 많은 필요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당당히 이 행복한 고백을 할 수 있다. ‘배고픔이 없습니다. 목마름이 없습니다. 주님 때문입니다. 주께서 주님 자신을 저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찬송하라. 그러면 우리 생애의 모든 갈등과 고통을 넘어서서 이 참된 기쁨과 만족을 되찾는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참된 영원한 만족은 예수께만 있기 때문이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저희는 생존경쟁 가운데 숨막히게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필요로 인해, 우리는 부족한 한계를 느끼며 고뇌와 고독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참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사업에 대한 해결도, 저를 괴롭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단순한 해답도 아닙니다. 저의 진정한 필요는 오직 아버지이심을 항상 깨닫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므로 아버지께서 저와 함게 하시면 전 두렵지 않습니다. 절망도 외로움도 겁나지 않습니다. 이제 주어진 삶의 마지막 날들을, 주님과 더불어 도전해 나가게 하옵소서. 자신을 주시기 위해서 저희에게 다가오신 그리스도를 향해 제 몸과 마음을 다 드립니다. 생명이 떡이신 주님의 은혜 안에서, 늘 행복한 찬양을 부르며 인생의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게 하옵소서. 오 주님, 저의 시선이 항상 주님만을 향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995-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