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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고정관념 / 시 15:1-5, 요 5:2-18
손 깍지하기, 바꿔서 하라 - 어색하다. 습관(고정관념)도 마찬가지이다. 한번 익숙해지면 바꾸기가 어렵다. ‘자살’을 오른쪽부터 읽으면 ‘살자’이다.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은 고정관념 때문에 사물이나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선입관, 편견을 버리고 사물, 실상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교정해야 한다.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냉장고를 보라. 오른손으로 열고, 왼손으로 꺼내도록 되었다. 무거운 것은 오른손으로. 지금까지 그래왔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원점에서 생각하라. 시간이 걸리겠지만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어느 것이든 고정관념은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아주 놀라운 신앙체험까지도 그럴 수 있다. 신앙체험도 어디까지나 이 물질세상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세상에서 볼 때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본체가 바뀌면 그림자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과거체험에 집착하는 것은 신앙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말씀은 살아있기에 언제나 변화를 준다. 자녀들을 잘 보라. 분명히 아이들 같지만 계속 달라진다. 신앙도 그렇다. 같은 신앙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변해간다. 본질은 같지만 깊이와 너비가 몰라보게 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면 그것을 가지고 영적인 시야를 한없이 넓혀 적용해 보라. 그러면 말할 수 없이 큰 힘이 일어날 것이다. 세상을 보고 과거의 신앙경험을 적용시키려 하지 말라. 세상을 향해서 말씀을 놓고 그 말씀의 최대한 가능성을 기대하라. 이 훈련이 안되면 절대로 깊은 영적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말씀을 영적으로 받아 명상하고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말씀만이 진리이다. 그 외에는 모두 보조역할일 뿐이다. 아이들은 자기 속의 생명력으로 자란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내 삶의 모습을 바꾸어간다.
베데스다 못 가에는 각종 병자들이 모여서 물이 흔들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풍설에 의하면 천사가 내려와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이 흔들리기만 하면 서로들 물 속에 들어가려고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다. 이것이 무슨 근거 있는 말인가? 무슨 진리인가? 거기 38년이나 된 병자가 있었다. 예수는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의 대답은 ‘그렇습니다.’ 해야 옳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물이 흔들릴 때 나는 못에 놓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무엇 때문에 있는가?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으니 그냥 그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그의 삶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신화나 전설을 진리로 믿고 있다. 경험이나 세상의 통설이 진실로 되어 있다. 그런 식으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변화는 오지 않는다. 주의 말씀을 받을 때 병자는 그 말씀대로 움직였다. 이것이 그를 상황에서 빼온다. 그를 그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화의 능력이 있다.
교회를 베데스다 못에 비교할 수 있다. 나오면 영혼이 살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오래 기도하고 금식하면 무슨 수가 생기리라 생각하고 들어왔다. 그러나 오래 교회를 다녀도 아무런 신앙의 확신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나면 사람들과의 의리 관계로 또한 습관으로 다니게 된다. 막연히 기도를 하면 깊은 신앙의 경지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기도원이나 특별 부흥회에 가면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막상 갔다오면 여전히 전과 같다는 것을 느낀다. 기도를 해도 어떤 느낌이나 체험이 나타나지 않는다. 막연히 기도할 뿐이다. 그러다가 문제가 좀 나아지면 해결되었다고 믿는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병자는 전혀 그럴 입장이 아니었다. 일어날 수 있다면 물에도 뛰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일어날 수도 없는데 어찌 자리를 들고 가겠는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생각해 보면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 없는 말씀이다. 이 사람이 보통 환자가 아니다. 38년이나 누워서 지낸 사람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이 사람,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법도 하다. ‘누구는 누워있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시오? 쓸데없는 소리는 작작하시고 일없으면 나 심심하지 않게 옆에서 놀아주거나, 물이 흔들릴 때 나를 넣어주기나 하시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 무려 38년이나 누워지낸 사람을 보고 거두절미하고 일어나라고 한다. 환자의 소원은 아랑곳없이 말이다. 여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바로 믿음이다. 어떤 믿음인가 보자. 먼저, 네가 가졌던 소원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연못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 소원은 잘못된 것이니 포기하라는 암시가 있다. 둘째로, 내가 누구냐고 묻지 말라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알고서 믿겠다, 생각해보고 믿겠다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누군지 모른다. 누구냐고 묻지 마라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셋째로, 지금까지 경험에 없었던 일이다. 내 경험에도, 다른 사람의 경험에도 없었던 일이다. 창조적인 사건이다. 경험에 없었던 것은 믿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일어나라 하신다고 일어날 수 있겠나?
오늘도 말씀은 우리에게 명령한다. ‘일어나서 네 문제를 해결하라.’ 현재 문제에 짓눌려 있는 사람에게 말로 해서야 무슨 해결이 나오겠나? 하지만 오늘도 같은 명령이 주어진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대로 움직여 보라. 신기하게도 힘이 나올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려면, 1) 지금 이대로가 좋은가? 2) 다른 쪽에서 보면 어떤가? 3) 왜 그럴까? 4) 꼭 이래야 하나?를 생각하고 행하라.
병자는 주의 말씀대로 하였다. 말씀은 그냥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실려오는 살아있는 마차이다. 거기 생명이 있다. 마음에 받아 품어라, 열매가 맺어진다. 절대로 소홀히 여기지 말라. 말씀대로 하라. 하라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힘이 나를 통해서 움직여진다.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병자는 병을 생각하지 않았다. 병을 따라서 생각하기를 중단했다. 지금까지 ‘누가 나를 저 연못에 데려갈꼬’ 했지만 지금은 말씀을 따라서 생각하고 움직였다. 삶의 근거가 바뀐 것이다. 전에는 병이 내 생각을 지배했다. 이제는 말씀이 행동의 근거였다. 그래서 그대로 했다. 말씀은 다른 모든 진리체계에 우선한다. 그래서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세계에 들어가는 특권을 부여해 준다. 병자는 말씀대로 움직여 새사람이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된다. 말씀이 하는대로 생각하고 움직이라. 가난이 나를 누르는가? 병이 그러는가? 아니면 어떤 환경이 그러는가? 말씀은 그것들을 보고 거기에 따라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따라서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라고 한다.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라.’ 더 높은 진리에게 낮은 진리는 복종해야 한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하나님과 말씀은 모든 것 위에 있다. 그대로 따르라.
후에 예수님은 병자였던 사람에게 말한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사람은 38년된 병이 낫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러나 더 큰 기적은 죄가 사함받아 영이 새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인 세계에서 보면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없다. 이제 그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되었다. 그것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자녀가 되어 그와 교제하는 사람은 세상의 법칙을 뛰어넘는다. 만약 하나님의 인도를 버리고 세상의 법칙에 집착하면 그것이 바로 죄이다.
오늘 본문은 그날이 안식일이었다고 하면서 유대인들의 시비거리를 예상하게 한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율법적 주장이다. 병자의 아픔과 회복의 멸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율법의 조문만을 적용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사랑을 위해 율법을 극복하는 예수님이 계신다. 이 일로 인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었다고 해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니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의 법은 땅의 법을 포함한다. 하지만 땅의 것은 그림자일 뿐이다. 안식일에 하나님은 쉬셨다. 그러나 선한 일도 쉬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온 우주를 계속 다스렸던 것이다. 세상의 기준이나 경험이나 통계, 심지어는 과학적 자료까지도 말씀보다 앞설 수 없다. 하물며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율례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내세워야 하겠나? 세상의 법도를 잘 지켜야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는 한도에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더 마음을 쓰라. 참으로 행복하게 되리라. 말씀을 마음에 적용하라. 그러면 고정관념을 깬다. 고정관념은 깨져도 아프지 않다.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보인다. 말씀은 새로운 삶을 만든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말씀에는 우리들의 삶의 정신과 봉사의 방향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인간존재는 ‘일하는자’란 뜻이다. 그것이 노동이든 봉사든 책임이행이든, 인간은 누구나 다 일해야 할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근거와 원인은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우리도 일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이것이 오늘 본문의 중요한 내용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병자 구원이었다. ‘하나님이 하시니 나도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아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인간구원이라고 보아도 옳을 것이다. 타락한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자유와 정의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다. 이 일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구원사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바로 이런 하나님의 구원사업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파송하신 것이고, 우리가 교회를 이곳에 새롭게 지은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위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있다. 사명자로 부름 받았고, 직분자로 세움을 받은 것이다. 이 일이 사람에 의해서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이고, 이 일이 기관에서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 교회의 일이다. 우리 모두는 나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성별의 차이에, 재산의 다소간에,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받은 하나님 교회의 일꾼이다. 따라서 명심할 사항은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자세와 의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사람들임을 꼭 명심하자.
모세는 출 3:11절에서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불만에 찬 말을 했다. ‘나는 못한다’는 생각이나 ‘내가 한다’는 생각은 둘다 금물이다. 나는 오직 나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용기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바울 사도도 고전 1:26-27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부르시고, 새로운 일들을 맡기시며, 새로운 교회,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를 원하신다. 부름에 아멘하고 충성을 다하자. 우리 모두 신실한 양심과 깨끗한 믿음으로 충성하고 헌신하자. 지금 오늘 우리는 주의 일에 더욱 힘써 일해야 할 부름받은 갈보리교회의 사명자들이다. (200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