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서>
군자가 나라를 창설하고 대를 이을 때는, 만세에 무너지지 않을 터전을 세우지 않는 이가 없어, 주공이 노를 다스리고, 태공이 제를 다스리던 것과 같았으나, 또한 말손이 불초하고 본즉, 그들 둘은 일찍이 이에 대하여 의론이 있었고, 그 자손의 일이 이미 백 세 앞서 변천될 줄을 알고, 음악에서도 역시 변천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상은 가세를 논한 것이다.
풍속에 이르러서는 사방이 각각 달라서, 소위 백 리에 풍이 같지 않고 천 리에 속이 같지 않다는 것이 곧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정으로도 미치지 못하고, 언어로도 달랠 수 없는 처지라도, 오직 음악만은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 신기와 묘용이야말로 바람처럼 움직이고 햇빛처럼 비치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고무시켜서 그 공화의 빠름이 우 춤을 두 뜰에서 춘 지 70일 만에 오랑캐가 감화되었다 하니, 비록 이것을 일러 풍속을 바꾸어 단번에 도에 이르렀다 하여도 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남방의 부드러움과 북방의 강한 것을 바꿀 수 없을 것이요, 정성의 음란한 것과 진성의 거센 것은 변할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은 제각기 향토의 소리를 기품으로 타고 났으므로 성인도 역시 풍속의 다른 바를 어쩌지 못한다 하여, 정의 음탕한 소리를 내쳐 버리라 하였을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이상은 풍속을 논한 것이다.
성인도 능히 어쩌지 못하는 것은 운수입니다. 영휴와 소장은 하늘의 운수요, 고허니 왕상이니 하는 것은 땅의 운수입니다. 오래되면 변화를 생각하고, 묵으면 새것을 찾고, 궁하면 통하고 싶어하는 것은 운수의 기회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칠일겁(찰나의 반대로 가장 오랜 세월)은, 우리 유교에서 말하는 5백 년의 일기인데, 이 기회에 성인이 탄생하면 시운이 잘 조화되어 천지간의 모든 일을 이룩할 따름입니다. 하가 충성을 숭상한 것이라든지, 은이 질박함을 숭상한 것이라든지, 주가 문화를 숭상한 것이라든지, 영씨(진의 성)가 봉건을 파하고 정전법을 없애어서 천고에 죄안이 된 것은, 실상 시운의 어쩔 수 없었던 바였습니다.
기름진 고기는 사람마다 즐기는 바이지만, 오랫동안 앓는 사람에게는 비록 한 솥의 고깃국이나마 냄새만 맡아도 구역이 날 수 있고, 비록 풀 뿌리와 나무 열매라도 흔연히 입맛에 맞을 수 있습니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자라도, 한 곡조만 항상 부르면 듣던 좌중도 자리에서 일어설 것이요,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법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고칠 줄 모르는 자를 교주고슬이라 이르는 것이니, 이것은 인정이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ㆍ순의 정치가 없이는, 비록 소무가 있더라도 찬성하고 반대하는 틈에서 귀신과 사람이 화합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이것은 성인도 세상 운수의 순환에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은 운수를 논한 것이다.
무릇 글자가 생긴 지 오랜지라, 공자가 산정하여 기술한 것이 곧 천지ㆍ시운의 한 개 커다란 변화라 할 것이니, 공자도 부득이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공자가 돌아가신 뒤로부터, 백가의 말이 분분히 그 사이에 섞여 나와, 그 책들도 몹시 많아서 사람마다 제각기 마음대로 하여, 조그마한 아이들까지도 함부로 천성이니 인명이니 하는 이굴 속으로 데려가곤 해서 육예를 헌 갓처럼 보았기 때문에, 드디어 사도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가 없어지매, 옛날 사도의 직분과 전악의 관직은 헛된 자리만을 그대로 두고는 구차한 헛소리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음악은 천한 광대에게 돌아가고, 귀인 자제로서 총명하고 준수한 자는 헛되이 무작ㆍ무상의 나이를 지내고 보니, 비록 상현과 하관에 팔음이 잘 맞는다 하더라도, 어떤 것이 궁성ㆍ우성이 되고, 어떤 것이 종과 여가 되는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음률을 좋아하여, 여염집에서 거문고를 타고 젓대를 부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 부랑자나 파락호를 면하지 못하고 보니, 자제들의 치욕으로 여기고, 부모들의 금하는 바가 되며, 향당이 천히 여기는 바가 되어, 옛 성인들이 교육과 정치를 잘하는 데는 신기ㆍ묘용으로 알던 것이 오로지 광대나 천인들의 책임으로 되어 버렸으니, 만에 하나라도 이런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한다. 형산은,
“옳은 말씀입니다. 주의 시절에는 국자에게 춤을 가르치는 데 대서를 시켜서 춤추는 자리를 바로잡고 소서를 시켜서 춤추는 항렬을 바로잡았으니, 이 법이 한의 시대까지 있었습니다. 천하고 낮은 자의 자식들은 종묘의 제사 때 춤을 추는 데 참가하지 못했고, 무릇 무생은 모두 2천 석으로부터 6백 석에 이르는 관내후나 대부의 적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은 옛날이었으나, 그 선택하는 것이 일정했고, 교육을 위한 준비가 이 같았습니다.”
한다. 나는,
“7균(균)이니 12균이니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였더니, 형산은,
“균이란 것은 가지런하고 고른 것으로, 말하자면 운 자와 같습니다. 시를 짓는 자가 말하는 4운이니 8운이니 10운이니 하는 것과 같습니다. 7균이란 것은 7성의 한 운이요, 12균이란 것은 12율의 한 운입니다. 옛날에는 운이란 글자가 없었으므로 균이라 했습니다.”
한다. 형산은 다시,
“귀국에는 《악경》이 있다더니 참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이것은 떠돌아다니는 말입니다. 중국에도 없는 것이 어찌 외국에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이것은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세상에서는 악경도 진의 불 속에 들어갔다고 한탄하지만, 제 생각은 중국에도 처음부터 악경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다. 나는,
“사전(사마천의 《사기》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피해 올 적에 시ㆍ서ㆍ예ㆍ악과 의ㆍ무ㆍ복서ㆍ공기의 무리 5천 명을 데리고 함께 동쪽으로 나왔다 하였으니, 6예는 모두 진 시황의 화염 속에 타지 않고 우리나라에 유전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웃으면서,
“이것은 본래 중국에서 호기하는 인사가 꾸며서 만든 말입니다. 풍희의 《고서세본》도 이런 것으로, 소위 《기자조선본》이란 본래 기자를 조선에 봉할 때부터 전해 오던 고문 《서경》이라 하여 제전(《서경》의 요전과 순전)으로부터 미자(《서경》의 편명)까지에 그쳤고, 그 끝에는 다만 홍범(《서경》의 편명) 한 편을 붙였는데, 팔정(홍범 중에 있는 말) 밑에는 52자를 더했습니다. 고정림의 《일지록》에서, 왕추간의 《중당사기》에 의거하여 이미 위찬이란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한다. 나는,
“제가 심양에 들어온 뒤부터, 수재를 만나면 문득 우리나라에 《고문상서》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대개 기자가 조선으로 나올 때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혹은 위만이 가지고 나왔다고 하는데, 위만은 비록 저 스스로 상투를 묶고 오랑캐 옷을 입었다지만, 역시 저대로는 호걸로 자처하였을뿐더러, 그 무리 수천 명 중에는 역시 선비로서 경서를 안고 진을 피하여 따라 나온 자가 없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인즉, 이치에 괴이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본래 무력을 숭상하여 다만 약탈을 좋아하고 보니, 설사 끼쳐진 경서가 있었더라도 이것을 받들어 소중히 여길 줄 몰랐을 것이고, 또 여러 차례 난리를 치른 나머지 우리나라에서 1천여 년 이래로 《고문상서》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선배 주석창이 이미 변증한 바입니다. 주서(《서경》의 편명) 공안국의 서문에, 성왕이 동쪽 이 한 점은 이 자인데, 그가 나를 대하였으므로 이를 피했다. 대체 그는 호ㆍ노ㆍ이ㆍ적 등 글자는 모두 기휘하였다. 을 이미 치자 숙신이 와서 축하하니, 성왕은 영백(주의 종실이요, 정치가)을 시켜 숙신에게 보내는 칙서를 썼다고 했습니다.
그 전기에 의하면, 해동의 여러 종족들로서 구려(고구려의 약칭)ㆍ부여ㆍ간맥 등은 무왕이 상을 쳐서 이겼을 때부터 교통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주는 주서의 왕회편에, 직ㆍ신ㆍ예ㆍ양 같은 나라는 처음으로 보이지만 구려니 부여 같은 이름은 없다 하여 동국사에서 인용하기를, ‘구려의 건국이 한 원제 (유석) 건소 2년(B.C.37)이라면, 공안국이 황제의 명령을 받고 이 글을 쓸 때는, 구려와 부여는 중국과 아직 교통이 없었을 때이거늘, 더구나 주가 상을 처음 이겼을 때일까보냐.’ 했습니다.
주자는 사람이 8세가 되어서 모두 소학에 들어가면,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에 관한 글을 가르쳤다고 했지만, 이 이야기는 옛날 세상의 학교를 말한 것으로서 고대에야 이런 글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소위 쇄소하고 응대하는 것은 예라는 것이요, 노래 부르며 춤추는 것은 악이요, 사ㆍ어ㆍ서ㆍ수도 이런 것으로 미루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니, 6예를 가르쳤다는 것은 옳지만 6예의 글을 가르쳤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억설일 것입니다.
옛날 세상에는 과녁으로 밝히고 채찍으로 가르쳤을 따름이니, 공자가 말한 학예에 논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열다섯 살이 되면 천자의 맏자식과 중자들을 비롯하여 공경대부의 적자들과 민간의 준수한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들어갔다.”
하였으니, 이는 옳은 말입니다. 또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바로잡고, 자기 몸을 닦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를 가르쳤다는 말은 후세의 억설일 것입니다. 6예를 강습하는 것이 곧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실증이므로, 옛날 사람은 실천궁행에 힘쓰고 보니 이런 것은 저절로 터득했을 것인데, 어쩌자고 15세 전에는 서둘러서 6예에 관한 글을 배우고, 15세 후에는 6예는 버리고 먼저 자기 몸을 닦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를 알아야만 했겠습니까.
알지 못하겠습니다. 상세에 어느 도학선생이 고을에 있는 학교나 서당마다 앉아서, 무슨 이학전서를 펴놓고 이것은 형이상의 이론이요, 이것은 형이하의 실천이라고 가르쳤겠습니까.
13세에 작춤을 추고 15세에 상춤을 추며, 20세에 대하(우 때의 무악)춤을 춘다고 한 것은, 아마도 상고 세상에 있었던 소학ㆍ대학의 과목 순서가 이러하였음에 불과했을 터인데, 후세 선비들은 상세에는 6예에 관한 글이 본래 없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입만 열면 제각기 진시황을 욕하면서 불태우기 전에 있었던 완전한 경서가 모두 해외로 유락되었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구구가 지었다는 일본도가 같은 것은 더구나 가소로운 일입니다. 대체 천지간에 가득 차 있는 사물이란, 형상과 동작과 정리와 환경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시험 삼아 이것을 6예에서 따져 본다면, 예란 것은 실천을 해야 되는 것으로, 무엇이나 실천을 할 때는 반드시 자취가 있는 법입니다.
활을 쏠 때도 제 몸을 바로잡은 후에야 화살을 놓는 법이니, 이것이 활 쏘는 형식입니다. 말고삐를 깍지 끼듯 잡고 두 마리의 말이 춤추듯 뛰는 것은 말을 타는 법식이요, 하나에 둘을 더하면 셋이 되는바, 이로부터 1천 년을 가도록 이렇게 계산하면 이것은 수학의 기술이요, 글씨의 육의에는 형상을 본뜻 상형이 가장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음악만은 내용은 있지만 형체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무릇 형체가 있다는 것은 굵직한 형적을 보인 것으로, 모두 언어로 형용할 수 있고 문자로 기록할 수 있지만, 형체가 없다고 한 것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멀고 아득한 사이에서 깨우쳐 교양시킬 수 있고, 황홀한 속에서 활동을 합니다. 감추면 조용하고, 소리를 내면 화하고, 소리가 아름답게 모일 때는 예절에 맞고, 소리가 적중하는 것은 활쏘기와 같고, 고르기는 말타기와 같고, 빌려 쓰기는 글씨와 같고, 숫자를 더하는 것은 수학과 같아서, 털끝 사이에서 감돌고 핏줄처럼 퍼집니다. 올 때에는 어렴풋하여 마중하고 싶고, 갈 때에는 묘연하여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더듬어도 얻을 것이 없고, 보아도 눈에 띄는 것이 없이, 사람으로 하여금 뼈까지 비통하도록 하고 내장까지 즐겁도록 하여, 가다가도 되돌아서서 못 잊는 것만 같고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질 때는 갑자기 딴 생각이 나는 듯합니다.
몹시 맑고 향내도 없으며 지극히 가늘고 보니 그림자도 없으며, 매양 빽빽하게 틈도 없고, 몹시 크고 보니 바깥이 없으며, 화목하니 흩어지지 않고, 아담하니 빛깔도 없으며, 신비스러우니 마음도 없고, 현묘하니 말도 없는바, 대개 가볍고 민첩한 말로써도 이것을 형용할 수 없거늘, 하물며 문자의 조박으로써 될 것이겠습니까. 이러므로, 저의 생각에는 삼대 이래로 당초에 《악경》이 없었다고 여깁니다.”
한다. 형산은 수없이 권주를 치고는,
“먼저 사람들이 알지 못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악기 한 편은 도리어 추솔함에 족할 것입니다. 악기란, 본래 한의 선비들의 부랑한 글입니다.”
한다. 나는,
“성인이 지은 책들은, 전성의 도를 계승하고 뒤에 오는 학자들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공자가 위로부터 노에 돌아와 시를 정리하고 예를 바로잡을 때에, 어찌 홀로 음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저술한 것이 없을까요.”
하였더니, 혹정은 아무 말 없이 한참 있다가,
“그런 저술은 없습니다. 공자가 시를 정리하고 예를 바로잡았다는 것이 곧 악학입니다. 음악의 본질은 시에 딸려 있는 것이요, 음악의 이용 역시 여기에 속합니다. 언어로 사람을 가르칠 때는 그 물정이 그릇되기 쉽고, 문자로 사람을 가르칠 때는 그 천기가 얕은 것입니다.
무릇 음악이란 것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빠르지만 촉박하지 않고, 나타나지만 드러나지 않고, 깊지만 어둡지 않고, 완곡하지만 굳셀 수 있으며, 곧으나 굽힐 수 있으며, 부앙하고, 감개하고, 희희하고 간절해서, 그것을 사람이 들으면 두렵고, 떨리도록 놀랍고, 죽은 듯이 텅 비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언어와 문자 밖에 따로 말하기 어려운 말과 글자 아닌 글자를 빌려서, 높게는 하늘에 배합하고 낮게는 땅에 배합하며, 굴신하기는 귀신과 배합하고, 순환하기는 세시와 배합하며, 만물을 윤택하게 함에는 우로의 덕택을 빌리지 않고, 사람을 일깨움에는 일월의 빛을 기다릴 것이 없으며, 사람을 고동시킴에는 바람과 우레처럼 급하지 않고, 점차 스며들되 강물의 범람과는 달라서, 금ㆍ석ㆍ사ㆍ죽ㆍ포ㆍ토ㆍ혁ㆍ목의 소리가 효제ㆍ충신ㆍ예의ㆍ염치의 행실이 아니건만, 입으로 불고 손가락으로 타고 팔로 춤추고 발로 뛰는 것도 모두 사단이 유연하고 칠정이 한연한 것은, 이 누가 시킨 것이겠습니까.
사람의 사지와 백체를 말없이 깨우쳐 준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개 상세에는 문서가 넓지 못하여, 항간에서 부르는 노래를 나라에서 세운 학교로 끌어들여 글자를 맞추어 구절을 만들고 이것을 악기에 맞추었으므로, 옛적에는 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 반드시 책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이 곧 학문으로 되었었습니다.
점의 슬과 회(안회)의 거문고가 있는 데는 유상(공자의 초상)이 홀로 남아 있고, 청묘(주문왕의 사당)에서 세 번 읊으면 문왕을 보는 듯하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5음이란 것이 소리의 문리라면, 6률이란 소리의 뜻일 것입니다.
몸은 각각인데, 똑같이 맞는 것은 소리의 덕행이요, 잡티 없이 순수하여 드러내는 것은 아하다는 것으로, 아하다는 것은 소리의 광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특히 이 같은 저작하지도 않은 책과 말도 없는 뜻에 유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해서, 성격이 좋은 자는 덕을 알게 되고, 성격이 나쁜 자는 음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인이 과거의 학문을 계승하고 뒤에 오는 후진들을 계시하는 뜻일 것입니다. 이래서 저는 《악경》이란 처음부터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6예에, 음악에 관한 저서가 없었다는 것은 이미 들은 말입니다. 그러나 악보는 있는가요?”
하였더니, 형산은,
“가석하게도 고보는 모두 타버리고 지금은 전하지 않습니다.”
한다. 나는 또,
“그것도 진의 불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아닙니다. 수의 만보상은 《악보》 64권을 지어, 8음이 저마다 궁에서 기조가 되는 법을 함께 말하면서, 줄을 갈고 지주를 바꾸어 84조 1백 44율로 변하여 8천 1백 소리에 맞도록 했더니, 당시의 사대부들이 이를 배척하여, 보상은 마침내 굶어죽으면서 격분한 나머지 그 책을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명의 가정 때, 태복승 장악이 지은 《악서》에는, 첫째로 대성악도보라 하여 거문고 종류로부터 이하 여러 악기들의 보를 하나씩 지었고, 둘째로 《고아심담》을 지었으며, 같은 시대에 요주 동지 요문찰이 저작한 악서로서 《사성도해》ㆍ《악기보설》ㆍ《율려신서보주》ㆍ《흥악요론》 등이 있었고, 그 후에도 《율려정의》ㆍ《오음정의》ㆍ《악학대성지결》 등과 같은 책은 모두 성기의 도수를 강론한 것입니다.
금보에는 조현ㆍ농현ㆍ수법ㆍ수세 등이 있고, 당랑포선이니, 평사낙안이니, 일간명월이니, 감군은이니 하는 법은 모두 금사의 구결입니다.”
한다. 혹정은,
“대개 음악이란 보(보)가 없을 수도 있으니, 귀신이 통할 만큼 조화가 붙으면 《역경(역경)》한 부가 곧 악보라 할 수 있을 것이요, 음악이란 것은 비결이 없을 수도 없으니, 사물에 따라서 뜻을 붙여 늘이면 우소 한 편도 저절로 천지 사이에 있게 될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글자를 포개어 써서 모두 음악의 비결로 삼았던바, 바람의 습습함과 비의 처처함과 사슴의 유유함과 새의 영영함과 기러기의 옹옹함과 여우의 유유함과 저구의 관관함과 벌레의 훙훙함과 날개의 숙숙함과 사냥개의 영영함과 방울의 장장함과 얼음 뜨는 충충함과 나무 베는 정정함이 모두 인용하여 비결을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중국의 악성은 한 글자가 한 율이 됩니까?”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아닙니다. 한 글자에도 청탁과 억양의 법이 있고 평ㆍ상ㆍ거ㆍ하의 다름이 있거늘, 하물며 노래란 영언이요, 영언을 읊는 것이겠습니까.”
한다. 나는,
“공자가 백어(공자의 아들 공리)에게 말한 주남ㆍ소남을 하였느냐는 것도, 후세에서 논한다면 하루아침에 가히 욀 수 있을 것이요, 반드시 어진이에게 물어 볼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가 읽었느냐고 묻지 않고 했느냐고 물었으니, ‘한다’는 것은 음악을 노래한다는 말입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것은 먼저 사람들이 하지 못한 말을 하신 것입니다. 옛적의 노래는 후세의 독서나 다름이 없습니다. 상세의 서적은 《역경》ㆍ《서경》ㆍ《시경》ㆍ《예기》에 불과하여 모두 천자의 도읍에 감추어 두었던 것이므로, 공자가 주에 가서 노담(하의 후손)에게 예를 물었다는 것도 이 까닭입니다.
비록 공자 같은 성인으로서도 50세에 비로소 《역경》을 읽었다고 하여, 70명 제자들이 한번도 《역경》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고 언제나 시ㆍ예를 논함에 불과했는데, 이것도 모두 입으로 전한 것으로 후세에서 날로 늘어가는 번문과는 달라서, 당시에 배운다는 것은 제사지내고 인사하는 동안에 문관은 깃을 꽂고 무관은 도끼를 들고, 아침에는 거문고를 타고 저녁에는 노래를 했을 따름입니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하의 예를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으나 기(은의 후손)로써 증험삼기 부족하고 은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송을 증험하기 부족한 것은 문헌이 부족한 탓이다.’ 한 것을 보아, 이런 예절도 흘러온 내력이 입으로 전해온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이미 배운 것을 때로 복습한다는 말도 곧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백어에게 말씀한 다음 장에는 예라 악이라 일렀지마는, 이 구절도 실상은 제사지내고 노래 부르는 것 이외에 예악의 근본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의미를 일깨워 이르는 말투입니다.
관저장 같은 시는 그 시가 된 품이 친절하게 재삼 번복하여 지성에서 우러나오고, 애끊는 동정의 표정이 마음의 덕성과 사람의 도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대체로 가사의 뜻이 그러함이요, 즐거워도 음탕하지 않고 슬퍼도 몸을 상하지 않는 것은 대체로 그 성음이 그러했던 탓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태사 지(태사의 이름)가 처음 음악을 지도하게 되자, 관저의 조리 있는 음률이 귀에 출렁출렁 넘친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후세에는 시를 공부할 때 악기와 노래를 없애고는 네모난 책만 마주 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소리와 시가 둘로 갈리고 보면, 주자가 《시경》을 주석하면서 정풍ㆍ위풍과 같은 시를 아주 음탕한 것으로 돌려 버렸으니, 이는 시의 음탕한 뜻만 깨닫고, 음곡은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 남녀 간의 사사로운 즐거움은 남이 알까 두려워하는 바인데, 어찌 길가에서 자신들의 음탕한 행실을 큰 소리로 나타내겠습니까.
그렇다면, 공자가 안연에게 대답할 제, 왜 정의 시를 멀리하라 하지 않고 다만 정의 소리를 멀리하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약 정의 소리로써 노래를 부르면, 표매니 야균이니 하는 것도 응당 음탕한 시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소리를 눈으로 감상할 것인가, 귀로 감상할 것인가. 학사나 대부들이 그 근원을 따져 음악을 만드는 원리만 찾아내려고 헤매다가 드디어 음률을 눈으로 찾게 되었습니다. 중세의 성인들은 귀로 익히는 데 힘썼으나, 오늘의 선비들은 일조에 이것을 눈으로 배우려 하여, 실지로 아침에는 줄을 타고 저녁에는 노래 부르고 하는 데는 아무런 공부도 없이, 소리와 음률은 그만두고 한갖 책만 읽게 되었습니다.
이는 송의 시절에 모든 대유들이 입만 열면 음률을 말하였으나 실상 소리를 감상할 줄 모르고 보니, 도리어 악공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필경에는 고루한 데 그치는 것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한다. 나는,
“진ㆍ한 이래로 옛날 음악을 회복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좋은 시운이 돌아오더라도 음악을 지을 만한 사람이 나지 못할까요.”
하였더니, 혹정은,
“어찌 그렇겠습니까. 주가 쇠할 때에, 문치의 폐단은 극심해지고 제후들은 강대해져서 서로 다투어 가면서 무력을 숭상함에 이르러, 태학관을 비워 놓고 제각기 자리를 깔고 장소를 나누어 기세를 높인 자들은 모두가 모사나 술객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백가의 학설이 종횡잡답하여 저마다 자기 학설을 옳다 하고 있었으니, 그 뜻인즉 필경 인ㆍ의에 근본을 두고 유교의 학설을 빌려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학교를 떠나 한갓 분요하게 되고, 예ㆍ악은 함부로 입으로 떠들 뿐 몸으로는 익히지 않아, 의례에 관한 모습은 점차 눈앞에서 사라지고, 음악 소리는 날로 귀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잠시라도 몸에서 떨어질 수 없는 실물이 쓸데없는 도구가 되어 다시는 익힐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쓸데없는 학문으로써 이치만 밝히려는 자들의 탓입니다.
이러고 보니, 인정은 문식을 싫어하고 질박한 것을 생각하며, 화려한 것을 미워하고 실지를 취하고, 사치를 버리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번거로운 것을 두고서 간략한 것을 찾게 되어, 천하를 다스린다는 자는 백성들로 하여금 암흑과 어리석은 구덩이로 몰아넣었으니, 이는 반드시 옛날 성인의 정치의 요령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파묻는 짓이 진에 있어서는 진실로 실책을 면할 수 없었으나, 한으로 보아서는 그대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또 유방과 항적이 싸우던 사이에는, 천하의 젊은이들은 도탄 속에 시달리다가 다행히 칼끝에서 벗어나게 되어, 비로소 자기의 총명을 가지고 타고난 천품을 발휘하게 되었으니, 이는 곧 시운이 한번 돌아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형벌이란 세 가지 약법에 지나지 않고 보니, 법률이 가혹하지 못하여 자기 공로를 주장하던 장수들이 기둥을 치면서 취해 떠들었으므로, 신하들을 그다지 억제하지 않았던 터이요,
조정의 위에는 소박하고 말을 가벼이 하지 않는 장자들이 많아서 남의 과오를 말하기 부끄러워했으니, 풍속도 그다지 박하지는 않았고, 큰 부호들이 죽고 유리하게 되어 농토는 일정한 주인이 없어졌은즉, 천하의 밭을 비로소 한 번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ㆍ경제 사이에는 이미 한이 일어난 지 40여 년이 되어 숨을 돌린 때라, 들에는 말을 길러 떼를 이루었고, 창고에는 곡식이 썩을 정도로 쌓이고 보니, 각 지방에는 학교를 세울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학사나 대부들은 박사의 집에 와서 머리를 숙이게 되매, 넉넉히 교육을 실시할 처지가 되었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의 초년에는 책 끼고 다니는 것을 금하는 법률이 오히려 풀리지 않아 천하의 서적은 모두 정부에 몰려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관리만 믿을 뿐이요, 처사들은 감히 함부로 정치에 관한 일을 의논하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이것은 단사가 강을 곤륜으로 보내서 10년을 두고 악기를 만지지 못하게 하여 음악의 본령을 잊어버리도록 한 것이군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렇습니다. 세상에 드문 숙손통 같은 이는 아첨배 속에 끼어 멀리 배척당했고, 나이 젊고 총명한 조조(한 무제 때 신진 정치가)와 가의 등 1백 10여 명은 눈을 막아 다른 책은 못 보게 해서, 음악으로써 문학을 대신 삼고 노래와 악기로써 행실을 깨우쳐, 멀리는 임금에게, 가까이는 부모에게 수족을 놀리며 춤을 추어서 섬기게 한 후에, 노의 두 선비를 사도의 벼슬에 임명하였다면, 반드시 예악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또 다시 두 마씨와 같은 이들을 학교에 벌여 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찬송의 노래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 없음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그들은 무슨 공을 기록하고 무슨 덕을 찬양할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당ㆍ송의 제작이 전혀 공덕으로 표현할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두 마씨는 그들의 문사만 취한 것일까요. 가의나 조조도 또한 두 마에게 견주어 어찌 못하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비단 그 문장만 취한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는 음악과 역학이 모두 태사에게 속하여, 한의 율서에는 음악을 먼저 말하지 않고 군사를 말했으며, 군사 쓰는 법을 말한 것이 아니라 군사를 쉬게 하는 법을 말했으니, 음악과 군사와는 그 거리가 멀지마는, 그러나 천하가 부유하고 백성이 즐겁게 놀 만하면 이것은 평화로운 근본이니, 대개 음악을 제정할 뜻을 깊이 알았다 할 것입니다.”
한다. 나는,
“한이 천하를 차지한 때가 그렇게도 성했던가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