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往五 Silk Road 國傳(8) / Silk Road 사막 이야기
*. 회왕릉(回王陵, 후이왕링)
청(淸) 나라 시절 앞에서 하미과(哈密瓜)에서 하미과를 진상하던 회왕 어베이두라 1세와 연관된 이야기다.
회왕(回王)이란 그 위구르족을 투르크계의 회흘(回紇)· 회골(回骨)· 웨이우얼[維吾爾(유오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1967년에 청(靑) 나라는 하미 지역의 반란을 청을 도와 평정시킨 공으로 하미 지역을 회왕(回王)에게 위탁하여 통치하게 하였고, 봉건 영주(封建領主)가 된 회왕은 자손대대로 하미를 233년 간 통치하였는데, 이 능은 이곳을 통치하던 왕과 왕비와 그들 가족의 40개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 왕릉 중에 복숭아 같은 하트형은 남자의 무덤이고, 정방형正方形)은 여자의 무덤이다.
회왕릉에서의 볼거리로 왕릉 앞에 예배를 볼 수 있는 1688년부터 21년간 지었다는 지붕이 녹색유리로 된 높이 17m의 이슬람사원이다.
회왕릉은 돈황 가는 중에 하미 시내에 있어서 그것만 돌아보고 종일 버스만 타고 가는 것이지만, 마음먹고 하미를 둘러본다면 가봐야 할 곳이 더 있다.
그 중에는 죽기 전에 가봐야 할 33곳 중에 하나라는 목장 지대 빠리쿤 초원(巴里坤草原)도 있고, 둔황에 있는 명사산(鳴沙山)이 여기에도 있다.
*. 옛 사람들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제대로 여행하려면 다음과 같은 책을 적어도 한 권만이라고 읽고 가라는 고마운 충고를 하는 분이 있다.
-헤딘의 ‘아시아의 사막을 넘어서’/ 프르제바르스키의 ‘황하 원류에서 롭노르로’, /프란시스 영허즈번드의 ‘카라코람을 넘어서’,/ 라티모어의 ‘서역에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넘은 옛사람으로는 장건 (張騫, 한), 법현(法顯, 東晉), 현장(玄裝), 당(唐)의 혜초(慧超, 신라 ), 마르코 폴로(이탈리아) 등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아무 표지도 이정표도 없는 사막 길을 어떻게 갔을까?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머리 위로는 새 한 마리 없고 발밑으로는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물 한 줌,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다.'
7세기 무렵 사막을 넘어가던 현장 스님의 한탄하던 글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보인다.
그때는 낙타나 말을 이용하여 대상(隊商)을 따라 가는 실크로드는 위험한 길이라서 대상은 많은 사람들과 떼를 지어 이루어졌는데 많을 때는 수천 명 이상까지 어울려서 다녔다 한다.
그 많은 사람들과 가축의 이동은 사막에 없던 길을 새로 만들어 주었고, 그러다가 도중에 죽은 시체는 사막 가운데에 그대로 버리고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길을 잃었을 때는 죽은 시체를 묻은 돌무덤이나 해골을 만나면 그것이 이정표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때 더 분명한 것이 있었다면 위급을 알려주던 봉화(熢火) 터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때는 신발도 그렇듯이 여행 장비도 오늘 날과 같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준비도 완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옛날 대상 (隊商, caravan)들은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하루 30~40km씩만 갔기 때문에 장안(현 西安)에서 출발하여 인도나 서구를 왕복하는 데에는 보통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 길에는 사막을 셋이나 넘어야 했기 때문에 목숨 걸고 다녀야 했고 그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낙타였다.
*. 사막의 배 낙타(駱駝) 이야기
사막이나 초원에서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서 먼 곳으로 다니면서 성지순례(聖地巡禮)를 하거나 특산물을 교역하는 상인의 집단을 대상 (隊商) 이라고 한다.
이를 영어로 캐러밴 (隊商, caravan)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묵어가는 오아시스에 이 대상들을 위한 숙소가 있어서 거기서 많은 문물 교환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오늘날의 투루판이나 선선, 하미, 돈황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발전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들 대상들이 그 짐을 운반하거나 승용(乘用)하는 데에는 말· 노새· 개 등도 있었지만 주로 낙타가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낙타(駱駝)는 포유동물로 키 2m 가량이나 되는 크고 온순한 동물이다. 등에 큰 혹이 하나 있는 것이 북아프리카에 사는 단봉낙타이고, 두개가 있는 것이 우리가 온 신강지역(新疆地域)에 사는 쌍봉낙타다.
그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물을 저장하여 두는 것이 아니라 분해하여 물을 만들 수 있는 지방을 저장해 두기 때문에 며칠 동안 먹이를 먹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동물이 낙타다.
그러나 며칠 동안 먹이를 섭취하지 않게 되면 혹이 점점 작아지다가 없어지기까지 한다고 한다.
2개의 발가락은 커서 모래 길에 빠지지 않고 걷기에 모래 길에 알맞다.
불쌍하게도 코뚜레를 하고 줄에 매어 주인에게 끌려 다니지만, 그 콧구멍은 자유로이 여닫을 수가 있어서 사막의 모래 폭풍을 막기에 적당하다. 속눈썹이 빽빽이 나 있고 긴 것이나, 귀 주위에도 털이 길어서 사막의 무서운 모래 바람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진 초식(草食)하는 가축이다.
사막에는 무진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낙타초(駱駝草)'는 아침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는데 낙타의 중요한 먹이가 되는 식물이다.
낙타초(駱駝草)는 예리한 가시가 많은 풀이지만, 낙타는 사슴처럼 긴 혀를 이용하여 가시를 발라내고 먹을 수 는 신비로운 동물이기도 하다.
낙타는 이렇게 타거나 짐수레를 운반하는데 쓰이기도 하지만 그 젖은 음료로, 고기는 식용으로, 털은 직물용으로 쓰이는 사막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다.
우리들의 실크로드 여행 투어에서 우리는 ‘낙타 발 요리’까지 먹을 수가 있었다.
*. 우리들의 사막 여행
중국 28개 성중 가장 큰 신강성에는 사막이 세 개나 있다. 동쪽에 고비사막, 북쪽에 걸반 퉁구트 사막, 그 중앙에 세계에서 2번째로 크다는 타크라마칸 사막의 남북을 관통하는 530km의 고속도로 '沙漠公路'(사막공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오아시스 근처에는 나무를 심고 우물을 파서 주민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관리 보완하도록 하고 있다.
그 고속도로 312번을 에어컨을 단 현대식 관광버스로 우리들은 우루무치에서 돈황까지 3,000km인 750 리를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
서울서 부산까지가 300km이니 그 부산을 왕복하고도 150리를 더 가는 이 기나긴 아무것도 없는 고비 사막에 나는 왜 왔을까?
왜 구도자(求道者)도 아니면서 이 멀고 먼 사막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가보고 싶은 곳이 아직도 세계 곳곳에 수없이 많은데,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뿐인 이곳에 무엇 하러 온 것인가.
오늘은 하미서부터 둔황까지 420km를 별로 볼 것도 없는 회왕릉 하나를 잠깐 동안 동안 보고 온종일 달리기만 하고 있다.
중국에는 황산(黃山)이나 장가계(張家界)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하는 구채구(九寨溝)도 있고, 몇 년 동안 벼르고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메만 높다고 하는' 태산(泰山)도 있는데….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는 돈황(敦煌, 둔황)의 막고굴(莫古窟)을 보고자 고비사막을 넘고 있는 것이리라.
고비사막의 '고비(Gobi)는 황무지를 뜻하는 말이다.
고비란 몽골어로 '모래와 잔돌뿐인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할 때에 그것이 '고비사막을 넘었다'는 뜻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경지'를 '고비'라고 한다.
우리 민족이 중앙아시아에서 몽고를 거쳐서 한반도에 정착한 민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고비'의 어원 이야기를 황당한 이야기로만 돌릴 수도 없다. 우리말이 우랄알타이어계인데, 그 우랄산맥이 신강성과 몽고 사이에 있는 산맥이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는 오늘 하미서 돈황까지 내내 버스 여행이다. 도중에 휴게소도 없으니 따라서 화장실도 없다.
312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약간의 언덕이 있으면 거기가 바로 화장실이 되곤 했다. 남정네는 서서 사막 지평선을 바라 보며 '쉬-'를 하고, 여자들은 언덕 뒤로 몸을 숨긴다. 그때를 위해서도 여성들은 양산을 준비할 일이다.
그러나 실크로드 여행에서는 서구나 인도 여행 등처럼, 화장실마다 요금을 챙기는 곳이 없어서 외화(外貨)가 아까워서 화장실을 생략하는 경우는 다행히 없었다.
도로는 쭉 뻗은 4차선 고속도로로 언제나 추월할 수 있도록 모든 차선은 점선이었지만 올 봄에 다녀온 네팔, 인도의 기사들처럼 위험한 난폭 곡예 운전을 하는 기사는 중국에는 없었다.
그 도로를 자세히 보면 양쪽에 약간의 구릉을 만들어 놓았거나 낙타초를 심어놓으 것은 사막에 바람이 불어올 때 모래가 길에 쌓이지 않게 한 배려 같았다.
그 고속도로에 곡선으로 되어있는 곳은 직선으로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석유 굴착기들의 모습이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나오는 가스관을 상해나 홍콩까지 연결한다는 고속도로의 좌 혹은 우측에 계속되는 하얀 팻말은 우리로 하여금 중국의 무서운 저력에 부러움과 함께 놀람을 금할 수 없게 하였다.
고속도로 곳곳에 강은 없는데 다리가 있는 곳도 있었다. 만약에 홍수가 날 때를 고려하여 고속도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낸 다리로 평상시그 주위는 물 없는 건천(乾川)이었다.
좁은 우리나라에도 휴대 전화가 불통인 지역이 많은데 우리나라의 16배나 되는 신강자치구를 가로지르는 이 드넓은 사막의 긴 고속도로 길에도 이동통신탑이 곳곳에 서 있어 전화 연락이 어디서나 가능했다.
그래도 만약 도중에 차가 고장 나기만 한다면 한 이틀은 이 사막 가운데서 있어야 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차를 몰고 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이들에게는 '사막 탐험 주의 사항'을 알고 떠나야 할 것 같다.
다음은 어제 하미의 '마귀성'을 갔을 때 그 입장권'에 쓰인 사막 탐험에 대한 주의 사항이다.
1. 물을 절약한다는 것은 사막 탐험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2. 사막 가운데에는 도로는 없고 방향만 있습니다. 차로 길을 가다가 물이 천천히 흐르고 있을 때에는 왼쪽으로 돌아가십시오. 달릴 때에는 주의를 요합니다.
3. 방향을 잃었을 때는 함부로 이동하지 마시고 차량 곁을 떠나지 마시고, 구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어두워지면 차를 몰지 말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대로 그 자리에서 기다리세요.
4. 만약에 물이 떨어졌을 때에는 큰 사막을 등 뒤에 두고 구멍을 파고 엎드려서 그 구덩이 속에서 더위나 탈수를 방지하세요.
*. 아, 말로만 듣던 신기루(蜃氣樓)여!
이곳 시간은 광활한 중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이 신강지역을 한국 시간보다 1시간 빠른 북경시간을 표준으로 쓰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북경보다는 2시간 더 빠른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가을로 8시도 훨씬 넘은 밤인데도 해가 지지 않는다.
하늘을 건너서 구름은 가고
들을 넘어서 바람은 간다.
들을 넘어서 가는 길손은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
지금은 지은이도 잊어버린 대학시절부터 암송해 오던 나의 애송 시를 읊조리며 시흥에 겨웠는데-.
그런데 보라, 저 앞 지평선 끝에 보이는 강과 그 위에 있는 저 긴 다리를.
강이 없어서 사막이라고 하는 건데, 우리는 그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인데, 사막에 저렇게 큰 강과 저렇게 큰 다리가 있다니-.
신기루(蜃氣樓)였다.
신기루(蜃氣樓)란 공기의 밀도가 층층이 서로 다를 때에 땅에 있는 집이나 산이나 그밖의 모든 물건의 형상이 빛살의 굴절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주로 사막 위에서 볼 수 있는데, 바다에서는 공중에, 모래 위에서는 지평선 아래에, 혹은 거꾸로 혹은 바로 비취어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신기루(蜃氣樓)가 한 개인에게만 보이는 착시 현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이렇게 내 카메라에도 잡히다니- . '오래 살고 볼이다'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그래서 여행 중 보고, 듣고, 만나서 알게 되는 견문은 살아있는 지식이요, 그래서 여행은 사실을 통하여 진실을 알게 하여주는 사전과 같은 것이다.
신기루를 보니 시 한 수가 입가에 맴돈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쓰여지는 것인 줄을 이제야 깨닫겠다.
혜초(慧超) 스님 마음으로
한 마리 버스 몰고
끝없는 고비사막 지평선 넘는 에뜨랑제.
신기루(蜃氣樓)
저 다리 건너
둔황 막고굴(莫古窟) 향하네.
-돈황(敦煌) 가는 길
-다음 '往五 Silk Road 國傳(9)/둔황의 명사산과 월아천
往五 Silk Road 國傳(8) / Silk Road 사막 이야기
*. 회왕릉(回王陵, 후이왕링)
청(淸) 나라 시절 앞에서 하미과(哈密瓜)에서 하미과를 진상하던 회왕 어베이두라 1세와 연관된 이야기다.
회왕(回王)이란 그 위구르족을 투르크계의 회흘(回紇)· 회골(回骨)· 웨이우얼[維吾爾(유오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1967년에 청(靑) 나라는 하미 지역의 반란을 청을 도와 평정시킨 공으로 하미 지역을 회왕(回王)에게 위탁하여 통치하게 하였고, 봉건 영주(封建領主)가 된 회왕은 자손대대로 하미를 233년 간 통치하였는데, 이 능은 이곳을 통치하던 왕과 왕비와 그들 가족의 40개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 왕릉 중에 복숭아 같은 하트형은 남자의 무덤이고, 정방형正方形)은 여자의 무덤이다.
회왕릉에서의 볼거리로 왕릉 앞에 예배를 볼 수 있는 1688년부터 21년간 지었다는 지붕이 녹색유리로 된 높이 17m의 이슬람사원이다.
회왕릉은 돈황 가는 중에 하미 시내에 있어서 그것만 돌아보고 종일 버스만 타고 가는 것이지만, 마음먹고 하미를 둘러본다면 가봐야 할 곳이 더 있다.
그 중에는 죽기 전에 가봐야 할 33곳 중에 하나라는 목장 지대 빠리쿤 초원(巴里坤草原)도 있고, 둔황에 있는 명사산(鳴沙山)이 여기에도 있다.
*. 옛 사람들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제대로 여행하려면 다음과 같은 책을 적어도 한 권만이라고 읽고 가라는 고마운 충고를 하는 분이 있다.
-헤딘의 ‘아시아의 사막을 넘어서’/ 프르제바르스키의 ‘황하 원류에서 롭노르로’, /프란시스 영허즈번드의 ‘카라코람을 넘어서’,/ 라티모어의 ‘서역에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넘은 옛사람으로는 장건 (張騫, 한), 법현(法顯, 東晉), 현장(玄裝), 당(唐)의 혜초(慧超, 신라 ), 마르코 폴로(이탈리아) 등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아무 표지도 이정표도 없는 사막 길을 어떻게 갔을까?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머리 위로는 새 한 마리 없고 발밑으로는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물 한 줌,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다.'
7세기 무렵 사막을 넘어가던 현장 스님의 한탄하던 글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보인다.
그때는 낙타나 말을 이용하여 대상(隊商)을 따라 가는 실크로드는 위험한 길이라서 대상은 많은 사람들과 떼를 지어 이루어졌는데 많을 때는 수천 명 이상까지 어울려서 다녔다 한다.
그 많은 사람들과 가축의 이동은 사막에 없던 길을 새로 만들어 주었고, 그러다가 도중에 죽은 시체는 사막 가운데에 그대로 버리고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길을 잃었을 때는 죽은 시체를 묻은 돌무덤이나 해골을 만나면 그것이 이정표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때 더 분명한 것이 있었다면 위급을 알려주던 봉화(熢火) 터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때는 신발도 그렇듯이 여행 장비도 오늘 날과 같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준비도 완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옛날 대상 (隊商, caravan)들은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하루 30~40km씩만 갔기 때문에 장안(현 西安)에서 출발하여 인도나 서구를 왕복하는 데에는 보통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 길에는 사막을 셋이나 넘어야 했기 때문에 목숨 걸고 다녀야 했고 그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낙타였다.
*. 사막의 배 낙타(駱駝) 이야기
사막이나 초원에서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서 먼 곳으로 다니면서 성지순례(聖地巡禮)를 하거나 특산물을 교역하는 상인의 집단을 대상 (隊商) 이라고 한다.
이를 영어로 캐러밴 (隊商, caravan)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묵어가는 오아시스에 이 대상들을 위한 숙소가 있어서 거기서 많은 문물 교환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오늘날의 투루판이나 선선, 하미, 돈황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발전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들 대상들이 그 짐을 운반하거나 승용(乘用)하는 데에는 말· 노새· 개 등도 있었지만 주로 낙타가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낙타(駱駝)는 포유동물로 키 2m 가량이나 되는 크고 온순한 동물이다. 등에 큰 혹이 하나 있는 것이 북아프리카에 사는 단봉낙타이고, 두개가 있는 것이 우리가 온 신강지역(新疆地域)에 사는 쌍봉낙타다.
그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물을 저장하여 두는 것이 아니라 분해하여 물을 만들 수 있는 지방을 저장해 두기 때문에 며칠 동안 먹이를 먹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동물이 낙타다.
그러나 며칠 동안 먹이를 섭취하지 않게 되면 혹이 점점 작아지다가 없어지기까지 한다고 한다.
2개의 발가락은 커서 모래 길에 빠지지 않고 걷기에 모래 길에 알맞다.
불쌍하게도 코뚜레를 하고 줄에 매어 주인에게 끌려 다니지만, 그 콧구멍은 자유로이 여닫을 수가 있어서 사막의 모래 폭풍을 막기에 적당하다. 속눈썹이 빽빽이 나 있고 긴 것이나, 귀 주위에도 털이 길어서 사막의 무서운 모래 바람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진 초식(草食)하는 가축이다.
사막에는 무진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낙타초(駱駝草)'는 아침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는데 낙타의 중요한 먹이가 되는 식물이다.
낙타초(駱駝草)는 예리한 가시가 많은 풀이지만, 낙타는 사슴처럼 긴 혀를 이용하여 가시를 발라내고 먹을 수 는 신비로운 동물이기도 하다.
낙타는 이렇게 타거나 짐수레를 운반하는데 쓰이기도 하지만 그 젖은 음료로, 고기는 식용으로, 털은 직물용으로 쓰이는 사막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다.
우리들의 실크로드 여행 투어에서 우리는 ‘낙타 발 요리’까지 먹을 수가 있었다.
*. 우리들의 사막 여행
중국 28개 성중 가장 큰 신강성에는 사막이 세 개나 있다. 동쪽에 고비사막, 북쪽에 걸반 퉁구트 사막, 그 중앙에 세계에서 2번째로 크다는 타크라마칸 사막의 남북을 관통하는 530km의 고속도로 '沙漠公路'(사막공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오아시스 근처에는 나무를 심고 우물을 파서 주민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관리 보완하도록 하고 있다.
그 고속도로 312번을 에어컨을 단 현대식 관광버스로 우리들은 우루무치에서 돈황까지 3,000km인 750 리를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
서울서 부산까지가 300km이니 그 부산을 왕복하고도 150리를 더 가는 이 기나긴 아무것도 없는 고비 사막에 나는 왜 왔을까?
왜 구도자(求道者)도 아니면서 이 멀고 먼 사막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가보고 싶은 곳이 아직도 세계 곳곳에 수없이 많은데,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뿐인 이곳에 무엇 하러 온 것인가.
오늘은 하미서부터 둔황까지 420km를 별로 볼 것도 없는 회왕릉 하나를 잠깐 동안 동안 보고 온종일 달리기만 하고 있다.
중국에는 황산(黃山)이나 장가계(張家界)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하는 구채구(九寨溝)도 있고, 몇 년 동안 벼르고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메만 높다고 하는' 태산(泰山)도 있는데….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는 돈황(敦煌, 둔황)의 막고굴(莫古窟)을 보고자 고비사막을 넘고 있는 것이리라.
고비사막의 '고비(Gobi)는 황무지를 뜻하는 말이다.
고비란 몽골어로 '모래와 잔돌뿐인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할 때에 그것이 '고비사막을 넘었다'는 뜻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경지'를 '고비'라고 한다.
우리 민족이 중앙아시아에서 몽고를 거쳐서 한반도에 정착한 민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고비'의 어원 이야기를 황당한 이야기로만 돌릴 수도 없다. 우리말이 우랄알타이어계인데, 그 우랄산맥이 신강성과 몽고 사이에 있는 산맥이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는 오늘 하미서 돈황까지 내내 버스 여행이다. 도중에 휴게소도 없으니 따라서 화장실도 없다.
312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약간의 언덕이 있으면 거기가 바로 화장실이 되곤 했다. 남정네는 서서 사막 지평선을 바라 보며 '쉬-'를 하고, 여자들은 언덕 뒤로 몸을 숨긴다. 그때를 위해서도 여성들은 양산을 준비할 일이다.
그러나 실크로드 여행에서는 서구나 인도 여행 등처럼, 화장실마다 요금을 챙기는 곳이 없어서 외화(外貨)가 아까워서 화장실을 생략하는 경우는 다행히 없었다.
도로는 쭉 뻗은 4차선 고속도로로 언제나 추월할 수 있도록 모든 차선은 점선이었지만 올 봄에 다녀온 네팔, 인도의 기사들처럼 위험한 난폭 곡예 운전을 하는 기사는 중국에는 없었다.
그 도로를 자세히 보면 양쪽에 약간의 구릉을 만들어 놓았거나 낙타초를 심어놓으 것은 사막에 바람이 불어올 때 모래가 길에 쌓이지 않게 한 배려 같았다.
그 고속도로에 곡선으로 되어있는 곳은 직선으로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석유 굴착기들의 모습이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나오는 가스관을 상해나 홍콩까지 연결한다는 고속도로의 좌 혹은 우측에 계속되는 하얀 팻말은 우리로 하여금 중국의 무서운 저력에 부러움과 함께 놀람을 금할 수 없게 하였다.
고속도로 곳곳에 강은 없는데 다리가 있는 곳도 있었다. 만약에 홍수가 날 때를 고려하여 고속도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낸 다리로 평상시그 주위는 물 없는 건천(乾川)이었다.
좁은 우리나라에도 휴대 전화가 불통인 지역이 많은데 우리나라의 16배나 되는 신강자치구를 가로지르는 이 드넓은 사막의 긴 고속도로 길에도 이동통신탑이 곳곳에 서 있어 전화 연락이 어디서나 가능했다.
그래도 만약 도중에 차가 고장 나기만 한다면 한 이틀은 이 사막 가운데서 있어야 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차를 몰고 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이들에게는 '사막 탐험 주의 사항'을 알고 떠나야 할 것 같다.
다음은 어제 하미의 '마귀성'을 갔을 때 그 입장권'에 쓰인 사막 탐험에 대한 주의 사항이다.
1. 물을 절약한다는 것은 사막 탐험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2. 사막 가운데에는 도로는 없고 방향만 있습니다. 차로 길을 가다가 물이 천천히 흐르고 있을 때에는 왼쪽으로 돌아가십시오. 달릴 때에는 주의를 요합니다.
3. 방향을 잃었을 때는 함부로 이동하지 마시고 차량 곁을 떠나지 마시고, 구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어두워지면 차를 몰지 말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대로 그 자리에서 기다리세요.
4. 만약에 물이 떨어졌을 때에는 큰 사막을 등 뒤에 두고 구멍을 파고 엎드려서 그 구덩이 속에서 더위나 탈수를 방지하세요.
*. 아, 말로만 듣던 신기루(蜃氣樓)여!
이곳 시간은 광활한 중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이 신강지역을 한국 시간보다 1시간 빠른 북경시간을 표준으로 쓰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북경보다는 2시간 더 빠른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가을로 8시도 훨씬 넘은 밤인데도 해가 지지 않는다.
하늘을 건너서 구름은 가고
들을 넘어서 바람은 간다.
들을 넘어서 가는 길손은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
지금은 지은이도 잊어버린 대학시절부터 암송해 오던 나의 애송 시를 읊조리며 시흥에 겨웠는데-.
그런데 보라, 저 앞 지평선 끝에 보이는 강과 그 위에 있는 저 긴 다리를.
강이 없어서 사막이라고 하는 건데, 우리는 그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인데, 사막에 저렇게 큰 강과 저렇게 큰 다리가 있다니-.
신기루(蜃氣樓)였다.
신기루(蜃氣樓)란 공기의 밀도가 층층이 서로 다를 때에 땅에 있는 집이나 산이나 그밖의 모든 물건의 형상이 빛살의 굴절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주로 사막 위에서 볼 수 있는데, 바다에서는 공중에, 모래 위에서는 지평선 아래에, 혹은 거꾸로 혹은 바로 비취어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신기루(蜃氣樓)가 한 개인에게만 보이는 착시 현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이렇게 내 카메라에도 잡히다니- . '오래 살고 볼이다'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그래서 여행 중 보고, 듣고, 만나서 알게 되는 견문은 살아있는 지식이요, 그래서 여행은 사실을 통하여 진실을 알게 하여주는 사전과 같은 것이다.
신기루를 보니 시 한 수가 입가에 맴돈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쓰여지는 것인 줄을 이제야 깨닫겠다.
혜초(慧超) 스님 마음으로
한 마리 버스 몰고
끝없는 고비사막 지평선 넘는 에뜨랑제.
신기루(蜃氣樓)
저 다리 건너
둔황 막고굴(莫古窟) 향하네.
-돈황(敦煌) 가는 길
-다음 '往五 Silk Road 國傳(9)/둔황의 명사산과 월아천
往五 Silk Road 國傳(8) / Silk Road 사막 이야기
*. 회왕릉(回王陵, 후이왕링)
청(淸) 나라 시절 앞에서 하미과(哈密瓜)에서 하미과를 진상하던 회왕 어베이두라 1세와 연관된 이야기다.
회왕(回王)이란 그 위구르족을 투르크계의 회흘(回紇)· 회골(回骨)· 웨이우얼[維吾爾(유오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1967년에 청(靑) 나라는 하미 지역의 반란을 청을 도와 평정시킨 공으로 하미 지역을 회왕(回王)에게 위탁하여 통치하게 하였고, 봉건 영주(封建領主)가 된 회왕은 자손대대로 하미를 233년 간 통치하였는데, 이 능은 이곳을 통치하던 왕과 왕비와 그들 가족의 40개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 왕릉 중에 복숭아 같은 하트형은 남자의 무덤이고, 정방형正方形)은 여자의 무덤이다.
회왕릉에서의 볼거리로 왕릉 앞에 예배를 볼 수 있는 1688년부터 21년간 지었다는 지붕이 녹색유리로 된 높이 17m의 이슬람사원이다.
회왕릉은 돈황 가는 중에 하미 시내에 있어서 그것만 돌아보고 종일 버스만 타고 가는 것이지만, 마음먹고 하미를 둘러본다면 가봐야 할 곳이 더 있다.
그 중에는 죽기 전에 가봐야 할 33곳 중에 하나라는 목장 지대 빠리쿤 초원(巴里坤草原)도 있고, 둔황에 있는 명사산(鳴沙山)이 여기에도 있다.
*. 옛 사람들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제대로 여행하려면 다음과 같은 책을 적어도 한 권만이라고 읽고 가라는 고마운 충고를 하는 분이 있다.
-헤딘의 ‘아시아의 사막을 넘어서’/ 프르제바르스키의 ‘황하 원류에서 롭노르로’, /프란시스 영허즈번드의 ‘카라코람을 넘어서’,/ 라티모어의 ‘서역에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넘은 옛사람으로는 장건 (張騫, 한), 법현(法顯, 東晉), 현장(玄裝), 당(唐)의 혜초(慧超, 신라 ), 마르코 폴로(이탈리아) 등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아무 표지도 이정표도 없는 사막 길을 어떻게 갔을까?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머리 위로는 새 한 마리 없고 발밑으로는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물 한 줌,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다.'
7세기 무렵 사막을 넘어가던 현장 스님의 한탄하던 글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보인다.
그때는 낙타나 말을 이용하여 대상(隊商)을 따라 가는 실크로드는 위험한 길이라서 대상은 많은 사람들과 떼를 지어 이루어졌는데 많을 때는 수천 명 이상까지 어울려서 다녔다 한다.
그 많은 사람들과 가축의 이동은 사막에 없던 길을 새로 만들어 주었고, 그러다가 도중에 죽은 시체는 사막 가운데에 그대로 버리고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길을 잃었을 때는 죽은 시체를 묻은 돌무덤이나 해골을 만나면 그것이 이정표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때 더 분명한 것이 있었다면 위급을 알려주던 봉화(熢火) 터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때는 신발도 그렇듯이 여행 장비도 오늘 날과 같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준비도 완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옛날 대상 (隊商, caravan)들은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하루 30~40km씩만 갔기 때문에 장안(현 西安)에서 출발하여 인도나 서구를 왕복하는 데에는 보통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 길에는 사막을 셋이나 넘어야 했기 때문에 목숨 걸고 다녀야 했고 그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낙타였다.
*. 사막의 배 낙타(駱駝) 이야기
사막이나 초원에서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서 먼 곳으로 다니면서 성지순례(聖地巡禮)를 하거나 특산물을 교역하는 상인의 집단을 대상 (隊商) 이라고 한다.
이를 영어로 캐러밴 (隊商, caravan)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묵어가는 오아시스에 이 대상들을 위한 숙소가 있어서 거기서 많은 문물 교환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오늘날의 투루판이나 선선, 하미, 돈황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발전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들 대상들이 그 짐을 운반하거나 승용(乘用)하는 데에는 말· 노새· 개 등도 있었지만 주로 낙타가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낙타(駱駝)는 포유동물로 키 2m 가량이나 되는 크고 온순한 동물이다. 등에 큰 혹이 하나 있는 것이 북아프리카에 사는 단봉낙타이고, 두개가 있는 것이 우리가 온 신강지역(新疆地域)에 사는 쌍봉낙타다.
그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물을 저장하여 두는 것이 아니라 분해하여 물을 만들 수 있는 지방을 저장해 두기 때문에 며칠 동안 먹이를 먹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동물이 낙타다.
그러나 며칠 동안 먹이를 섭취하지 않게 되면 혹이 점점 작아지다가 없어지기까지 한다고 한다.
2개의 발가락은 커서 모래 길에 빠지지 않고 걷기에 모래 길에 알맞다.
불쌍하게도 코뚜레를 하고 줄에 매어 주인에게 끌려 다니지만, 그 콧구멍은 자유로이 여닫을 수가 있어서 사막의 모래 폭풍을 막기에 적당하다. 속눈썹이 빽빽이 나 있고 긴 것이나, 귀 주위에도 털이 길어서 사막의 무서운 모래 바람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진 초식(草食)하는 가축이다.
사막에는 무진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낙타초(駱駝草)'는 아침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는데 낙타의 중요한 먹이가 되는 식물이다.
낙타초(駱駝草)는 예리한 가시가 많은 풀이지만, 낙타는 사슴처럼 긴 혀를 이용하여 가시를 발라내고 먹을 수 는 신비로운 동물이기도 하다.
낙타는 이렇게 타거나 짐수레를 운반하는데 쓰이기도 하지만 그 젖은 음료로, 고기는 식용으로, 털은 직물용으로 쓰이는 사막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다.
우리들의 실크로드 여행 투어에서 우리는 ‘낙타 발 요리’까지 먹을 수가 있었다.
*. 우리들의 사막 여행
중국 28개 성중 가장 큰 신강성에는 사막이 세 개나 있다. 동쪽에 고비사막, 북쪽에 걸반 퉁구트 사막, 그 중앙에 세계에서 2번째로 크다는 타크라마칸 사막의 남북을 관통하는 530km의 고속도로 '沙漠公路'(사막공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오아시스 근처에는 나무를 심고 우물을 파서 주민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관리 보완하도록 하고 있다.
그 고속도로 312번을 에어컨을 단 현대식 관광버스로 우리들은 우루무치에서 돈황까지 3,000km인 750 리를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
서울서 부산까지가 300km이니 그 부산을 왕복하고도 150리를 더 가는 이 기나긴 아무것도 없는 고비 사막에 나는 왜 왔을까?
왜 구도자(求道者)도 아니면서 이 멀고 먼 사막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가보고 싶은 곳이 아직도 세계 곳곳에 수없이 많은데,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뿐인 이곳에 무엇 하러 온 것인가.
오늘은 하미서부터 둔황까지 420km를 별로 볼 것도 없는 회왕릉 하나를 잠깐 동안 동안 보고 온종일 달리기만 하고 있다.
중국에는 황산(黃山)이나 장가계(張家界)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하는 구채구(九寨溝)도 있고, 몇 년 동안 벼르고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메만 높다고 하는' 태산(泰山)도 있는데….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는 돈황(敦煌, 둔황)의 막고굴(莫古窟)을 보고자 고비사막을 넘고 있는 것이리라.
고비사막의 '고비(Gobi)는 황무지를 뜻하는 말이다.
고비란 몽골어로 '모래와 잔돌뿐인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할 때에 그것이 '고비사막을 넘었다'는 뜻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경지'를 '고비'라고 한다.
우리 민족이 중앙아시아에서 몽고를 거쳐서 한반도에 정착한 민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고비'의 어원 이야기를 황당한 이야기로만 돌릴 수도 없다. 우리말이 우랄알타이어계인데, 그 우랄산맥이 신강성과 몽고 사이에 있는 산맥이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는 오늘 하미서 돈황까지 내내 버스 여행이다. 도중에 휴게소도 없으니 따라서 화장실도 없다.
312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약간의 언덕이 있으면 거기가 바로 화장실이 되곤 했다. 남정네는 서서 사막 지평선을 바라 보며 '쉬-'를 하고, 여자들은 언덕 뒤로 몸을 숨긴다. 그때를 위해서도 여성들은 양산을 준비할 일이다.
그러나 실크로드 여행에서는 서구나 인도 여행 등처럼, 화장실마다 요금을 챙기는 곳이 없어서 외화(外貨)가 아까워서 화장실을 생략하는 경우는 다행히 없었다.
도로는 쭉 뻗은 4차선 고속도로로 언제나 추월할 수 있도록 모든 차선은 점선이었지만 올 봄에 다녀온 네팔, 인도의 기사들처럼 위험한 난폭 곡예 운전을 하는 기사는 중국에는 없었다.
그 도로를 자세히 보면 양쪽에 약간의 구릉을 만들어 놓았거나 낙타초를 심어놓으 것은 사막에 바람이 불어올 때 모래가 길에 쌓이지 않게 한 배려 같았다.
그 고속도로에 곡선으로 되어있는 곳은 직선으로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석유 굴착기들의 모습이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나오는 가스관을 상해나 홍콩까지 연결한다는 고속도로의 좌 혹은 우측에 계속되는 하얀 팻말은 우리로 하여금 중국의 무서운 저력에 부러움과 함께 놀람을 금할 수 없게 하였다.
고속도로 곳곳에 강은 없는데 다리가 있는 곳도 있었다. 만약에 홍수가 날 때를 고려하여 고속도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낸 다리로 평상시그 주위는 물 없는 건천(乾川)이었다.
좁은 우리나라에도 휴대 전화가 불통인 지역이 많은데 우리나라의 16배나 되는 신강자치구를 가로지르는 이 드넓은 사막의 긴 고속도로 길에도 이동통신탑이 곳곳에 서 있어 전화 연락이 어디서나 가능했다.
그래도 만약 도중에 차가 고장 나기만 한다면 한 이틀은 이 사막 가운데서 있어야 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차를 몰고 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이들에게는 '사막 탐험 주의 사항'을 알고 떠나야 할 것 같다.
다음은 어제 하미의 '마귀성'을 갔을 때 그 입장권'에 쓰인 사막 탐험에 대한 주의 사항이다.
1. 물을 절약한다는 것은 사막 탐험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2. 사막 가운데에는 도로는 없고 방향만 있습니다. 차로 길을 가다가 물이 천천히 흐르고 있을 때에는 왼쪽으로 돌아가십시오. 달릴 때에는 주의를 요합니다.
3. 방향을 잃었을 때는 함부로 이동하지 마시고 차량 곁을 떠나지 마시고, 구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어두워지면 차를 몰지 말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대로 그 자리에서 기다리세요.
4. 만약에 물이 떨어졌을 때에는 큰 사막을 등 뒤에 두고 구멍을 파고 엎드려서 그 구덩이 속에서 더위나 탈수를 방지하세요.
*. 아, 말로만 듣던 신기루(蜃氣樓)여!
이곳 시간은 광활한 중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이 신강지역을 한국 시간보다 1시간 빠른 북경시간을 표준으로 쓰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북경보다는 2시간 더 빠른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가을로 8시도 훨씬 넘은 밤인데도 해가 지지 않는다.
하늘을 건너서 구름은 가고
들을 넘어서 바람은 간다.
들을 넘어서 가는 길손은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
지금은 지은이도 잊어버린 대학시절부터 암송해 오던 나의 애송 시를 읊조리며 시흥에 겨웠는데-.
그런데 보라, 저 앞 지평선 끝에 보이는 강과 그 위에 있는 저 긴 다리를.
강이 없어서 사막이라고 하는 건데, 우리는 그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인데, 사막에 저렇게 큰 강과 저렇게 큰 다리가 있다니-.
신기루(蜃氣樓)였다.
신기루(蜃氣樓)란 공기의 밀도가 층층이 서로 다를 때에 땅에 있는 집이나 산이나 그밖의 모든 물건의 형상이 빛살의 굴절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주로 사막 위에서 볼 수 있는데, 바다에서는 공중에, 모래 위에서는 지평선 아래에, 혹은 거꾸로 혹은 바로 비취어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신기루(蜃氣樓)가 한 개인에게만 보이는 착시 현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이렇게 내 카메라에도 잡히다니- . '오래 살고 볼이다'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그래서 여행 중 보고, 듣고, 만나서 알게 되는 견문은 살아있는 지식이요, 그래서 여행은 사실을 통하여 진실을 알게 하여주는 사전과 같은 것이다.
신기루를 보니 시 한 수가 입가에 맴돈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쓰여지는 것인 줄을 이제야 깨닫겠다.
혜초(慧超) 스님 마음으로
한 마리 버스 몰고
끝없는 고비사막 지평선 넘는 에뜨랑제.
신기루(蜃氣樓)
저 다리 건너
둔황 막고굴(莫古窟) 향하네.
-돈황(敦煌) 가는 길
-다음 '往五 Silk Road 國傳(9)/둔황의 명사산과 월아천
往五 Silk Road 國傳(8) / Silk Road 사막 이야기
*. 회왕릉(回王陵, 후이왕링)
청(淸) 나라 시절 앞에서 하미과(哈密瓜)에서 하미과를 진상하던 회왕 어베이두라 1세와 연관된 이야기다.
회왕(回王)이란 그 위구르족을 투르크계의 회흘(回紇)· 회골(回骨)· 웨이우얼[維吾爾(유오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1967년에 청(靑) 나라는 하미 지역의 반란을 청을 도와 평정시킨 공으로 하미 지역을 회왕(回王)에게 위탁하여 통치하게 하였고, 봉건 영주(封建領主)가 된 회왕은 자손대대로 하미를 233년 간 통치하였는데, 이 능은 이곳을 통치하던 왕과 왕비와 그들 가족의 40개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 왕릉 중에 복숭아 같은 하트형은 남자의 무덤이고, 정방형正方形)은 여자의 무덤이다.
회왕릉에서의 볼거리로 왕릉 앞에 예배를 볼 수 있는 1688년부터 21년간 지었다는 지붕이 녹색유리로 된 높이 17m의 이슬람사원이다.
회왕릉은 돈황 가는 중에 하미 시내에 있어서 그것만 돌아보고 종일 버스만 타고 가는 것이지만, 마음먹고 하미를 둘러본다면 가봐야 할 곳이 더 있다.
그 중에는 죽기 전에 가봐야 할 33곳 중에 하나라는 목장 지대 빠리쿤 초원(巴里坤草原)도 있고, 둔황에 있는 명사산(鳴沙山)이 여기에도 있다.
*. 옛 사람들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제대로 여행하려면 다음과 같은 책을 적어도 한 권만이라고 읽고 가라는 고마운 충고를 하는 분이 있다.
-헤딘의 ‘아시아의 사막을 넘어서’/ 프르제바르스키의 ‘황하 원류에서 롭노르로’, /프란시스 영허즈번드의 ‘카라코람을 넘어서’,/ 라티모어의 ‘서역에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넘은 옛사람으로는 장건 (張騫, 한), 법현(法顯, 東晉), 현장(玄裝), 당(唐)의 혜초(慧超, 신라 ), 마르코 폴로(이탈리아) 등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아무 표지도 이정표도 없는 사막 길을 어떻게 갔을까?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머리 위로는 새 한 마리 없고 발밑으로는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물 한 줌,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다.'
7세기 무렵 사막을 넘어가던 현장 스님의 한탄하던 글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보인다.
그때는 낙타나 말을 이용하여 대상(隊商)을 따라 가는 실크로드는 위험한 길이라서 대상은 많은 사람들과 떼를 지어 이루어졌는데 많을 때는 수천 명 이상까지 어울려서 다녔다 한다.
그 많은 사람들과 가축의 이동은 사막에 없던 길을 새로 만들어 주었고, 그러다가 도중에 죽은 시체는 사막 가운데에 그대로 버리고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길을 잃었을 때는 죽은 시체를 묻은 돌무덤이나 해골을 만나면 그것이 이정표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때 더 분명한 것이 있었다면 위급을 알려주던 봉화(熢火) 터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때는 신발도 그렇듯이 여행 장비도 오늘 날과 같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준비도 완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옛날 대상 (隊商, caravan)들은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하루 30~40km씩만 갔기 때문에 장안(현 西安)에서 출발하여 인도나 서구를 왕복하는 데에는 보통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 길에는 사막을 셋이나 넘어야 했기 때문에 목숨 걸고 다녀야 했고 그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낙타였다.
*. 사막의 배 낙타(駱駝) 이야기
사막이나 초원에서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서 먼 곳으로 다니면서 성지순례(聖地巡禮)를 하거나 특산물을 교역하는 상인의 집단을 대상 (隊商) 이라고 한다.
이를 영어로 캐러밴 (隊商, caravan)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묵어가는 오아시스에 이 대상들을 위한 숙소가 있어서 거기서 많은 문물 교환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오늘날의 투루판이나 선선, 하미, 돈황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발전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들 대상들이 그 짐을 운반하거나 승용(乘用)하는 데에는 말· 노새· 개 등도 있었지만 주로 낙타가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낙타(駱駝)는 포유동물로 키 2m 가량이나 되는 크고 온순한 동물이다. 등에 큰 혹이 하나 있는 것이 북아프리카에 사는 단봉낙타이고, 두개가 있는 것이 우리가 온 신강지역(新疆地域)에 사는 쌍봉낙타다.
그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물을 저장하여 두는 것이 아니라 분해하여 물을 만들 수 있는 지방을 저장해 두기 때문에 며칠 동안 먹이를 먹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동물이 낙타다.
그러나 며칠 동안 먹이를 섭취하지 않게 되면 혹이 점점 작아지다가 없어지기까지 한다고 한다.
2개의 발가락은 커서 모래 길에 빠지지 않고 걷기에 모래 길에 알맞다.
불쌍하게도 코뚜레를 하고 줄에 매어 주인에게 끌려 다니지만, 그 콧구멍은 자유로이 여닫을 수가 있어서 사막의 모래 폭풍을 막기에 적당하다. 속눈썹이 빽빽이 나 있고 긴 것이나, 귀 주위에도 털이 길어서 사막의 무서운 모래 바람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진 초식(草食)하는 가축이다.
사막에는 무진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낙타초(駱駝草)'는 아침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는데 낙타의 중요한 먹이가 되는 식물이다.
낙타초(駱駝草)는 예리한 가시가 많은 풀이지만, 낙타는 사슴처럼 긴 혀를 이용하여 가시를 발라내고 먹을 수 는 신비로운 동물이기도 하다.
낙타는 이렇게 타거나 짐수레를 운반하는데 쓰이기도 하지만 그 젖은 음료로, 고기는 식용으로, 털은 직물용으로 쓰이는 사막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다.
우리들의 실크로드 여행 투어에서 우리는 ‘낙타 발 요리’까지 먹을 수가 있었다.
*. 우리들의 사막 여행
중국 28개 성중 가장 큰 신강성에는 사막이 세 개나 있다. 동쪽에 고비사막, 북쪽에 걸반 퉁구트 사막, 그 중앙에 세계에서 2번째로 크다는 타크라마칸 사막의 남북을 관통하는 530km의 고속도로 '沙漠公路'(사막공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오아시스 근처에는 나무를 심고 우물을 파서 주민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관리 보완하도록 하고 있다.
그 고속도로 312번을 에어컨을 단 현대식 관광버스로 우리들은 우루무치에서 돈황까지 3,000km인 750 리를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
서울서 부산까지가 300km이니 그 부산을 왕복하고도 150리를 더 가는 이 기나긴 아무것도 없는 고비 사막에 나는 왜 왔을까?
왜 구도자(求道者)도 아니면서 이 멀고 먼 사막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가보고 싶은 곳이 아직도 세계 곳곳에 수없이 많은데,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뿐인 이곳에 무엇 하러 온 것인가.
오늘은 하미서부터 둔황까지 420km를 별로 볼 것도 없는 회왕릉 하나를 잠깐 동안 동안 보고 온종일 달리기만 하고 있다.
중국에는 황산(黃山)이나 장가계(張家界)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하는 구채구(九寨溝)도 있고, 몇 년 동안 벼르고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메만 높다고 하는' 태산(泰山)도 있는데….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는 돈황(敦煌, 둔황)의 막고굴(莫古窟)을 보고자 고비사막을 넘고 있는 것이리라.
고비사막의 '고비(Gobi)는 황무지를 뜻하는 말이다.
고비란 몽골어로 '모래와 잔돌뿐인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할 때에 그것이 '고비사막을 넘었다'는 뜻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경지'를 '고비'라고 한다.
우리 민족이 중앙아시아에서 몽고를 거쳐서 한반도에 정착한 민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고비'의 어원 이야기를 황당한 이야기로만 돌릴 수도 없다. 우리말이 우랄알타이어계인데, 그 우랄산맥이 신강성과 몽고 사이에 있는 산맥이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는 오늘 하미서 돈황까지 내내 버스 여행이다. 도중에 휴게소도 없으니 따라서 화장실도 없다.
312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약간의 언덕이 있으면 거기가 바로 화장실이 되곤 했다. 남정네는 서서 사막 지평선을 바라 보며 '쉬-'를 하고, 여자들은 언덕 뒤로 몸을 숨긴다. 그때를 위해서도 여성들은 양산을 준비할 일이다.
그러나 실크로드 여행에서는 서구나 인도 여행 등처럼, 화장실마다 요금을 챙기는 곳이 없어서 외화(外貨)가 아까워서 화장실을 생략하는 경우는 다행히 없었다.
도로는 쭉 뻗은 4차선 고속도로로 언제나 추월할 수 있도록 모든 차선은 점선이었지만 올 봄에 다녀온 네팔, 인도의 기사들처럼 위험한 난폭 곡예 운전을 하는 기사는 중국에는 없었다.
그 도로를 자세히 보면 양쪽에 약간의 구릉을 만들어 놓았거나 낙타초를 심어놓으 것은 사막에 바람이 불어올 때 모래가 길에 쌓이지 않게 한 배려 같았다.
그 고속도로에 곡선으로 되어있는 곳은 직선으로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석유 굴착기들의 모습이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나오는 가스관을 상해나 홍콩까지 연결한다는 고속도로의 좌 혹은 우측에 계속되는 하얀 팻말은 우리로 하여금 중국의 무서운 저력에 부러움과 함께 놀람을 금할 수 없게 하였다.
고속도로 곳곳에 강은 없는데 다리가 있는 곳도 있었다. 만약에 홍수가 날 때를 고려하여 고속도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낸 다리로 평상시그 주위는 물 없는 건천(乾川)이었다.
좁은 우리나라에도 휴대 전화가 불통인 지역이 많은데 우리나라의 16배나 되는 신강자치구를 가로지르는 이 드넓은 사막의 긴 고속도로 길에도 이동통신탑이 곳곳에 서 있어 전화 연락이 어디서나 가능했다.
그래도 만약 도중에 차가 고장 나기만 한다면 한 이틀은 이 사막 가운데서 있어야 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차를 몰고 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이들에게는 '사막 탐험 주의 사항'을 알고 떠나야 할 것 같다.
다음은 어제 하미의 '마귀성'을 갔을 때 그 입장권'에 쓰인 사막 탐험에 대한 주의 사항이다.
1. 물을 절약한다는 것은 사막 탐험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2. 사막 가운데에는 도로는 없고 방향만 있습니다. 차로 길을 가다가 물이 천천히 흐르고 있을 때에는 왼쪽으로 돌아가십시오. 달릴 때에는 주의를 요합니다.
3. 방향을 잃었을 때는 함부로 이동하지 마시고 차량 곁을 떠나지 마시고, 구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어두워지면 차를 몰지 말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대로 그 자리에서 기다리세요.
4. 만약에 물이 떨어졌을 때에는 큰 사막을 등 뒤에 두고 구멍을 파고 엎드려서 그 구덩이 속에서 더위나 탈수를 방지하세요.
*. 아, 말로만 듣던 신기루(蜃氣樓)여!
이곳 시간은 광활한 중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이 신강지역을 한국 시간보다 1시간 빠른 북경시간을 표준으로 쓰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북경보다는 2시간 더 빠른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가을로 8시도 훨씬 넘은 밤인데도 해가 지지 않는다.
하늘을 건너서 구름은 가고
들을 넘어서 바람은 간다.
들을 넘어서 가는 길손은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
지금은 지은이도 잊어버린 대학시절부터 암송해 오던 나의 애송 시를 읊조리며 시흥에 겨웠는데-.
그런데 보라, 저 앞 지평선 끝에 보이는 강과 그 위에 있는 저 긴 다리를.
강이 없어서 사막이라고 하는 건데, 우리는 그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인데, 사막에 저렇게 큰 강과 저렇게 큰 다리가 있다니-.
신기루(蜃氣樓)였다.
신기루(蜃氣樓)란 공기의 밀도가 층층이 서로 다를 때에 땅에 있는 집이나 산이나 그밖의 모든 물건의 형상이 빛살의 굴절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주로 사막 위에서 볼 수 있는데, 바다에서는 공중에, 모래 위에서는 지평선 아래에, 혹은 거꾸로 혹은 바로 비취어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신기루(蜃氣樓)가 한 개인에게만 보이는 착시 현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이렇게 내 카메라에도 잡히다니- . '오래 살고 볼이다'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그래서 여행 중 보고, 듣고, 만나서 알게 되는 견문은 살아있는 지식이요, 그래서 여행은 사실을 통하여 진실을 알게 하여주는 사전과 같은 것이다.
신기루를 보니 시 한 수가 입가에 맴돈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쓰여지는 것인 줄을 이제야 깨닫겠다.
혜초(慧超) 스님 마음으로
한 마리 버스 몰고
끝없는 고비사막 지평선 넘는 에뜨랑제.
신기루(蜃氣樓)
저 다리 건너
둔황 막고굴(莫古窟) 향하네.
-돈황(敦煌) 가는 길
-다음 '往五 Silk Road 國傳(9)/둔황의 명사산과 월아천
往五 Silk Road 國傳(8) / Silk Road 사막 이야기
*. 회왕릉(回王陵, 후이왕링)
청(淸) 나라 시절 앞에서 하미과(哈密瓜)에서 하미과를 진상하던 회왕 어베이두라 1세와 연관된 이야기다.
회왕(回王)이란 그 위구르족을 투르크계의 회흘(回紇)· 회골(回骨)· 웨이우얼[維吾爾(유오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1967년에 청(靑) 나라는 하미 지역의 반란을 청을 도와 평정시킨 공으로 하미 지역을 회왕(回王)에게 위탁하여 통치하게 하였고, 봉건 영주(封建領主)가 된 회왕은 자손대대로 하미를 233년 간 통치하였는데, 이 능은 이곳을 통치하던 왕과 왕비와 그들 가족의 40개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 왕릉 중에 복숭아 같은 하트형은 남자의 무덤이고, 정방형正方形)은 여자의 무덤이다.
회왕릉에서의 볼거리로 왕릉 앞에 예배를 볼 수 있는 1688년부터 21년간 지었다는 지붕이 녹색유리로 된 높이 17m의 이슬람사원이다.
회왕릉은 돈황 가는 중에 하미 시내에 있어서 그것만 돌아보고 종일 버스만 타고 가는 것이지만, 마음먹고 하미를 둘러본다면 가봐야 할 곳이 더 있다.
그 중에는 죽기 전에 가봐야 할 33곳 중에 하나라는 목장 지대 빠리쿤 초원(巴里坤草原)도 있고, 둔황에 있는 명사산(鳴沙山)이 여기에도 있다.
*. 옛 사람들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제대로 여행하려면 다음과 같은 책을 적어도 한 권만이라고 읽고 가라는 고마운 충고를 하는 분이 있다.
-헤딘의 ‘아시아의 사막을 넘어서’/ 프르제바르스키의 ‘황하 원류에서 롭노르로’, /프란시스 영허즈번드의 ‘카라코람을 넘어서’,/ 라티모어의 ‘서역에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넘은 옛사람으로는 장건 (張騫, 한), 법현(法顯, 東晉), 현장(玄裝), 당(唐)의 혜초(慧超, 신라 ), 마르코 폴로(이탈리아) 등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아무 표지도 이정표도 없는 사막 길을 어떻게 갔을까?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머리 위로는 새 한 마리 없고 발밑으로는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물 한 줌,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다.'
7세기 무렵 사막을 넘어가던 현장 스님의 한탄하던 글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보인다.
그때는 낙타나 말을 이용하여 대상(隊商)을 따라 가는 실크로드는 위험한 길이라서 대상은 많은 사람들과 떼를 지어 이루어졌는데 많을 때는 수천 명 이상까지 어울려서 다녔다 한다.
그 많은 사람들과 가축의 이동은 사막에 없던 길을 새로 만들어 주었고, 그러다가 도중에 죽은 시체는 사막 가운데에 그대로 버리고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길을 잃었을 때는 죽은 시체를 묻은 돌무덤이나 해골을 만나면 그것이 이정표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때 더 분명한 것이 있었다면 위급을 알려주던 봉화(熢火) 터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때는 신발도 그렇듯이 여행 장비도 오늘 날과 같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준비도 완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옛날 대상 (隊商, caravan)들은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하루 30~40km씩만 갔기 때문에 장안(현 西安)에서 출발하여 인도나 서구를 왕복하는 데에는 보통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 길에는 사막을 셋이나 넘어야 했기 때문에 목숨 걸고 다녀야 했고 그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낙타였다.
*. 사막의 배 낙타(駱駝) 이야기
사막이나 초원에서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서 먼 곳으로 다니면서 성지순례(聖地巡禮)를 하거나 특산물을 교역하는 상인의 집단을 대상 (隊商) 이라고 한다.
이를 영어로 캐러밴 (隊商, caravan)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묵어가는 오아시스에 이 대상들을 위한 숙소가 있어서 거기서 많은 문물 교환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오늘날의 투루판이나 선선, 하미, 돈황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발전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들 대상들이 그 짐을 운반하거나 승용(乘用)하는 데에는 말· 노새· 개 등도 있었지만 주로 낙타가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낙타(駱駝)는 포유동물로 키 2m 가량이나 되는 크고 온순한 동물이다. 등에 큰 혹이 하나 있는 것이 북아프리카에 사는 단봉낙타이고, 두개가 있는 것이 우리가 온 신강지역(新疆地域)에 사는 쌍봉낙타다.
그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물을 저장하여 두는 것이 아니라 분해하여 물을 만들 수 있는 지방을 저장해 두기 때문에 며칠 동안 먹이를 먹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동물이 낙타다.
그러나 며칠 동안 먹이를 섭취하지 않게 되면 혹이 점점 작아지다가 없어지기까지 한다고 한다.
2개의 발가락은 커서 모래 길에 빠지지 않고 걷기에 모래 길에 알맞다.
불쌍하게도 코뚜레를 하고 줄에 매어 주인에게 끌려 다니지만, 그 콧구멍은 자유로이 여닫을 수가 있어서 사막의 모래 폭풍을 막기에 적당하다. 속눈썹이 빽빽이 나 있고 긴 것이나, 귀 주위에도 털이 길어서 사막의 무서운 모래 바람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진 초식(草食)하는 가축이다.
사막에는 무진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낙타초(駱駝草)'는 아침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는데 낙타의 중요한 먹이가 되는 식물이다.
낙타초(駱駝草)는 예리한 가시가 많은 풀이지만, 낙타는 사슴처럼 긴 혀를 이용하여 가시를 발라내고 먹을 수 는 신비로운 동물이기도 하다.
낙타는 이렇게 타거나 짐수레를 운반하는데 쓰이기도 하지만 그 젖은 음료로, 고기는 식용으로, 털은 직물용으로 쓰이는 사막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다.
우리들의 실크로드 여행 투어에서 우리는 ‘낙타 발 요리’까지 먹을 수가 있었다.
*. 우리들의 사막 여행
중국 28개 성중 가장 큰 신강성에는 사막이 세 개나 있다. 동쪽에 고비사막, 북쪽에 걸반 퉁구트 사막, 그 중앙에 세계에서 2번째로 크다는 타크라마칸 사막의 남북을 관통하는 530km의 고속도로 '沙漠公路'(사막공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오아시스 근처에는 나무를 심고 우물을 파서 주민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관리 보완하도록 하고 있다.
그 고속도로 312번을 에어컨을 단 현대식 관광버스로 우리들은 우루무치에서 돈황까지 3,000km인 750 리를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
서울서 부산까지가 300km이니 그 부산을 왕복하고도 150리를 더 가는 이 기나긴 아무것도 없는 고비 사막에 나는 왜 왔을까?
왜 구도자(求道者)도 아니면서 이 멀고 먼 사막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가보고 싶은 곳이 아직도 세계 곳곳에 수없이 많은데,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뿐인 이곳에 무엇 하러 온 것인가.
오늘은 하미서부터 둔황까지 420km를 별로 볼 것도 없는 회왕릉 하나를 잠깐 동안 동안 보고 온종일 달리기만 하고 있다.
중국에는 황산(黃山)이나 장가계(張家界)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하는 구채구(九寨溝)도 있고, 몇 년 동안 벼르고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메만 높다고 하는' 태산(泰山)도 있는데….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는 돈황(敦煌, 둔황)의 막고굴(莫古窟)을 보고자 고비사막을 넘고 있는 것이리라.
고비사막의 '고비(Gobi)는 황무지를 뜻하는 말이다.
고비란 몽골어로 '모래와 잔돌뿐인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할 때에 그것이 '고비사막을 넘었다'는 뜻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경지'를 '고비'라고 한다.
우리 민족이 중앙아시아에서 몽고를 거쳐서 한반도에 정착한 민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고비'의 어원 이야기를 황당한 이야기로만 돌릴 수도 없다. 우리말이 우랄알타이어계인데, 그 우랄산맥이 신강성과 몽고 사이에 있는 산맥이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는 오늘 하미서 돈황까지 내내 버스 여행이다. 도중에 휴게소도 없으니 따라서 화장실도 없다.
312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약간의 언덕이 있으면 거기가 바로 화장실이 되곤 했다. 남정네는 서서 사막 지평선을 바라 보며 '쉬-'를 하고, 여자들은 언덕 뒤로 몸을 숨긴다. 그때를 위해서도 여성들은 양산을 준비할 일이다.
그러나 실크로드 여행에서는 서구나 인도 여행 등처럼, 화장실마다 요금을 챙기는 곳이 없어서 외화(外貨)가 아까워서 화장실을 생략하는 경우는 다행히 없었다.
도로는 쭉 뻗은 4차선 고속도로로 언제나 추월할 수 있도록 모든 차선은 점선이었지만 올 봄에 다녀온 네팔, 인도의 기사들처럼 위험한 난폭 곡예 운전을 하는 기사는 중국에는 없었다.
그 도로를 자세히 보면 양쪽에 약간의 구릉을 만들어 놓았거나 낙타초를 심어놓으 것은 사막에 바람이 불어올 때 모래가 길에 쌓이지 않게 한 배려 같았다.
그 고속도로에 곡선으로 되어있는 곳은 직선으로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석유 굴착기들의 모습이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나오는 가스관을 상해나 홍콩까지 연결한다는 고속도로의 좌 혹은 우측에 계속되는 하얀 팻말은 우리로 하여금 중국의 무서운 저력에 부러움과 함께 놀람을 금할 수 없게 하였다.
고속도로 곳곳에 강은 없는데 다리가 있는 곳도 있었다. 만약에 홍수가 날 때를 고려하여 고속도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낸 다리로 평상시그 주위는 물 없는 건천(乾川)이었다.
좁은 우리나라에도 휴대 전화가 불통인 지역이 많은데 우리나라의 16배나 되는 신강자치구를 가로지르는 이 드넓은 사막의 긴 고속도로 길에도 이동통신탑이 곳곳에 서 있어 전화 연락이 어디서나 가능했다.
그래도 만약 도중에 차가 고장 나기만 한다면 한 이틀은 이 사막 가운데서 있어야 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차를 몰고 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이들에게는 '사막 탐험 주의 사항'을 알고 떠나야 할 것 같다.
다음은 어제 하미의 '마귀성'을 갔을 때 그 입장권'에 쓰인 사막 탐험에 대한 주의 사항이다.
1. 물을 절약한다는 것은 사막 탐험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2. 사막 가운데에는 도로는 없고 방향만 있습니다. 차로 길을 가다가 물이 천천히 흐르고 있을 때에는 왼쪽으로 돌아가십시오. 달릴 때에는 주의를 요합니다.
3. 방향을 잃었을 때는 함부로 이동하지 마시고 차량 곁을 떠나지 마시고, 구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어두워지면 차를 몰지 말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대로 그 자리에서 기다리세요.
4. 만약에 물이 떨어졌을 때에는 큰 사막을 등 뒤에 두고 구멍을 파고 엎드려서 그 구덩이 속에서 더위나 탈수를 방지하세요.
*. 아, 말로만 듣던 신기루(蜃氣樓)여!
이곳 시간은 광활한 중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이 신강지역을 한국 시간보다 1시간 빠른 북경시간을 표준으로 쓰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북경보다는 2시간 더 빠른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가을로 8시도 훨씬 넘은 밤인데도 해가 지지 않는다.
하늘을 건너서 구름은 가고
들을 넘어서 바람은 간다.
들을 넘어서 가는 길손은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
지금은 지은이도 잊어버린 대학시절부터 암송해 오던 나의 애송 시를 읊조리며 시흥에 겨웠는데-.
그런데 보라, 저 앞 지평선 끝에 보이는 강과 그 위에 있는 저 긴 다리를.
강이 없어서 사막이라고 하는 건데, 우리는 그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인데, 사막에 저렇게 큰 강과 저렇게 큰 다리가 있다니-.
신기루(蜃氣樓)였다.
신기루(蜃氣樓)란 공기의 밀도가 층층이 서로 다를 때에 땅에 있는 집이나 산이나 그밖의 모든 물건의 형상이 빛살의 굴절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주로 사막 위에서 볼 수 있는데, 바다에서는 공중에, 모래 위에서는 지평선 아래에, 혹은 거꾸로 혹은 바로 비취어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신기루(蜃氣樓)가 한 개인에게만 보이는 착시 현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이렇게 내 카메라에도 잡히다니- . '오래 살고 볼이다'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그래서 여행 중 보고, 듣고, 만나서 알게 되는 견문은 살아있는 지식이요, 그래서 여행은 사실을 통하여 진실을 알게 하여주는 사전과 같은 것이다.
신기루를 보니 시 한 수가 입가에 맴돈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쓰여지는 것인 줄을 이제야 깨닫겠다.
혜초(慧超) 스님 마음으로
한 마리 버스 몰고
끝없는 고비사막 지평선 넘는 에뜨랑제.
신기루(蜃氣樓)
저 다리 건너
둔황 막고굴(莫古窟) 향하네.
-돈황(敦煌) 가는 길
-다음 '往五 Silk Road 國傳(9)/둔황의 명사산과 월아천
往五 Silk Road 國傳(8) / Silk Road 사막 이야기
*. 회왕릉(回王陵, 후이왕링)
청(淸) 나라 시절 앞에서 하미과(哈密瓜)에서 하미과를 진상하던 회왕 어베이두라 1세와 연관된 이야기다.
회왕(回王)이란 그 위구르족을 투르크계의 회흘(回紇)· 회골(回骨)· 웨이우얼[維吾爾(유오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1967년에 청(靑) 나라는 하미 지역의 반란을 청을 도와 평정시킨 공으로 하미 지역을 회왕(回王)에게 위탁하여 통치하게 하였고, 봉건 영주(封建領主)가 된 회왕은 자손대대로 하미를 233년 간 통치하였는데, 이 능은 이곳을 통치하던 왕과 왕비와 그들 가족의 40개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 왕릉 중에 복숭아 같은 하트형은 남자의 무덤이고, 정방형正方形)은 여자의 무덤이다.
회왕릉에서의 볼거리로 왕릉 앞에 예배를 볼 수 있는 1688년부터 21년간 지었다는 지붕이 녹색유리로 된 높이 17m의 이슬람사원이다.
회왕릉은 돈황 가는 중에 하미 시내에 있어서 그것만 돌아보고 종일 버스만 타고 가는 것이지만, 마음먹고 하미를 둘러본다면 가봐야 할 곳이 더 있다.
그 중에는 죽기 전에 가봐야 할 33곳 중에 하나라는 목장 지대 빠리쿤 초원(巴里坤草原)도 있고, 둔황에 있는 명사산(鳴沙山)이 여기에도 있다.
*. 옛 사람들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제대로 여행하려면 다음과 같은 책을 적어도 한 권만이라고 읽고 가라는 고마운 충고를 하는 분이 있다.
-헤딘의 ‘아시아의 사막을 넘어서’/ 프르제바르스키의 ‘황하 원류에서 롭노르로’, /프란시스 영허즈번드의 ‘카라코람을 넘어서’,/ 라티모어의 ‘서역에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넘은 옛사람으로는 장건 (張騫, 한), 법현(法顯, 東晉), 현장(玄裝), 당(唐)의 혜초(慧超, 신라 ), 마르코 폴로(이탈리아) 등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아무 표지도 이정표도 없는 사막 길을 어떻게 갔을까?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머리 위로는 새 한 마리 없고 발밑으로는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물 한 줌,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다.'
7세기 무렵 사막을 넘어가던 현장 스님의 한탄하던 글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보인다.
그때는 낙타나 말을 이용하여 대상(隊商)을 따라 가는 실크로드는 위험한 길이라서 대상은 많은 사람들과 떼를 지어 이루어졌는데 많을 때는 수천 명 이상까지 어울려서 다녔다 한다.
그 많은 사람들과 가축의 이동은 사막에 없던 길을 새로 만들어 주었고, 그러다가 도중에 죽은 시체는 사막 가운데에 그대로 버리고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길을 잃었을 때는 죽은 시체를 묻은 돌무덤이나 해골을 만나면 그것이 이정표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때 더 분명한 것이 있었다면 위급을 알려주던 봉화(熢火) 터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때는 신발도 그렇듯이 여행 장비도 오늘 날과 같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준비도 완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옛날 대상 (隊商, caravan)들은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하루 30~40km씩만 갔기 때문에 장안(현 西安)에서 출발하여 인도나 서구를 왕복하는 데에는 보통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 길에는 사막을 셋이나 넘어야 했기 때문에 목숨 걸고 다녀야 했고 그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낙타였다.
*. 사막의 배 낙타(駱駝) 이야기
사막이나 초원에서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서 먼 곳으로 다니면서 성지순례(聖地巡禮)를 하거나 특산물을 교역하는 상인의 집단을 대상 (隊商) 이라고 한다.
이를 영어로 캐러밴 (隊商, caravan)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묵어가는 오아시스에 이 대상들을 위한 숙소가 있어서 거기서 많은 문물 교환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오늘날의 투루판이나 선선, 하미, 돈황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발전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들 대상들이 그 짐을 운반하거나 승용(乘用)하는 데에는 말· 노새· 개 등도 있었지만 주로 낙타가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낙타(駱駝)는 포유동물로 키 2m 가량이나 되는 크고 온순한 동물이다. 등에 큰 혹이 하나 있는 것이 북아프리카에 사는 단봉낙타이고, 두개가 있는 것이 우리가 온 신강지역(新疆地域)에 사는 쌍봉낙타다.
그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물을 저장하여 두는 것이 아니라 분해하여 물을 만들 수 있는 지방을 저장해 두기 때문에 며칠 동안 먹이를 먹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동물이 낙타다.
그러나 며칠 동안 먹이를 섭취하지 않게 되면 혹이 점점 작아지다가 없어지기까지 한다고 한다.
2개의 발가락은 커서 모래 길에 빠지지 않고 걷기에 모래 길에 알맞다.
불쌍하게도 코뚜레를 하고 줄에 매어 주인에게 끌려 다니지만, 그 콧구멍은 자유로이 여닫을 수가 있어서 사막의 모래 폭풍을 막기에 적당하다. 속눈썹이 빽빽이 나 있고 긴 것이나, 귀 주위에도 털이 길어서 사막의 무서운 모래 바람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진 초식(草食)하는 가축이다.
사막에는 무진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낙타초(駱駝草)'는 아침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는데 낙타의 중요한 먹이가 되는 식물이다.
낙타초(駱駝草)는 예리한 가시가 많은 풀이지만, 낙타는 사슴처럼 긴 혀를 이용하여 가시를 발라내고 먹을 수 는 신비로운 동물이기도 하다.
낙타는 이렇게 타거나 짐수레를 운반하는데 쓰이기도 하지만 그 젖은 음료로, 고기는 식용으로, 털은 직물용으로 쓰이는 사막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다.
우리들의 실크로드 여행 투어에서 우리는 ‘낙타 발 요리’까지 먹을 수가 있었다.
*. 우리들의 사막 여행
중국 28개 성중 가장 큰 신강성에는 사막이 세 개나 있다. 동쪽에 고비사막, 북쪽에 걸반 퉁구트 사막, 그 중앙에 세계에서 2번째로 크다는 타크라마칸 사막의 남북을 관통하는 530km의 고속도로 '沙漠公路'(사막공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오아시스 근처에는 나무를 심고 우물을 파서 주민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관리 보완하도록 하고 있다.
그 고속도로 312번을 에어컨을 단 현대식 관광버스로 우리들은 우루무치에서 돈황까지 3,000km인 750 리를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
서울서 부산까지가 300km이니 그 부산을 왕복하고도 150리를 더 가는 이 기나긴 아무것도 없는 고비 사막에 나는 왜 왔을까?
왜 구도자(求道者)도 아니면서 이 멀고 먼 사막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가보고 싶은 곳이 아직도 세계 곳곳에 수없이 많은데,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뿐인 이곳에 무엇 하러 온 것인가.
오늘은 하미서부터 둔황까지 420km를 별로 볼 것도 없는 회왕릉 하나를 잠깐 동안 동안 보고 온종일 달리기만 하고 있다.
중국에는 황산(黃山)이나 장가계(張家界)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하는 구채구(九寨溝)도 있고, 몇 년 동안 벼르고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메만 높다고 하는' 태산(泰山)도 있는데….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는 돈황(敦煌, 둔황)의 막고굴(莫古窟)을 보고자 고비사막을 넘고 있는 것이리라.
고비사막의 '고비(Gobi)는 황무지를 뜻하는 말이다.
고비란 몽골어로 '모래와 잔돌뿐인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할 때에 그것이 '고비사막을 넘었다'는 뜻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경지'를 '고비'라고 한다.
우리 민족이 중앙아시아에서 몽고를 거쳐서 한반도에 정착한 민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고비'의 어원 이야기를 황당한 이야기로만 돌릴 수도 없다. 우리말이 우랄알타이어계인데, 그 우랄산맥이 신강성과 몽고 사이에 있는 산맥이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는 오늘 하미서 돈황까지 내내 버스 여행이다. 도중에 휴게소도 없으니 따라서 화장실도 없다.
312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약간의 언덕이 있으면 거기가 바로 화장실이 되곤 했다. 남정네는 서서 사막 지평선을 바라 보며 '쉬-'를 하고, 여자들은 언덕 뒤로 몸을 숨긴다. 그때를 위해서도 여성들은 양산을 준비할 일이다.
그러나 실크로드 여행에서는 서구나 인도 여행 등처럼, 화장실마다 요금을 챙기는 곳이 없어서 외화(外貨)가 아까워서 화장실을 생략하는 경우는 다행히 없었다.
도로는 쭉 뻗은 4차선 고속도로로 언제나 추월할 수 있도록 모든 차선은 점선이었지만 올 봄에 다녀온 네팔, 인도의 기사들처럼 위험한 난폭 곡예 운전을 하는 기사는 중국에는 없었다.
그 도로를 자세히 보면 양쪽에 약간의 구릉을 만들어 놓았거나 낙타초를 심어놓으 것은 사막에 바람이 불어올 때 모래가 길에 쌓이지 않게 한 배려 같았다.
그 고속도로에 곡선으로 되어있는 곳은 직선으로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석유 굴착기들의 모습이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나오는 가스관을 상해나 홍콩까지 연결한다는 고속도로의 좌 혹은 우측에 계속되는 하얀 팻말은 우리로 하여금 중국의 무서운 저력에 부러움과 함께 놀람을 금할 수 없게 하였다.
고속도로 곳곳에 강은 없는데 다리가 있는 곳도 있었다. 만약에 홍수가 날 때를 고려하여 고속도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낸 다리로 평상시그 주위는 물 없는 건천(乾川)이었다.
좁은 우리나라에도 휴대 전화가 불통인 지역이 많은데 우리나라의 16배나 되는 신강자치구를 가로지르는 이 드넓은 사막의 긴 고속도로 길에도 이동통신탑이 곳곳에 서 있어 전화 연락이 어디서나 가능했다.
그래도 만약 도중에 차가 고장 나기만 한다면 한 이틀은 이 사막 가운데서 있어야 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차를 몰고 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이들에게는 '사막 탐험 주의 사항'을 알고 떠나야 할 것 같다.
다음은 어제 하미의 '마귀성'을 갔을 때 그 입장권'에 쓰인 사막 탐험에 대한 주의 사항이다.
1. 물을 절약한다는 것은 사막 탐험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2. 사막 가운데에는 도로는 없고 방향만 있습니다. 차로 길을 가다가 물이 천천히 흐르고 있을 때에는 왼쪽으로 돌아가십시오. 달릴 때에는 주의를 요합니다.
3. 방향을 잃었을 때는 함부로 이동하지 마시고 차량 곁을 떠나지 마시고, 구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어두워지면 차를 몰지 말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대로 그 자리에서 기다리세요.
4. 만약에 물이 떨어졌을 때에는 큰 사막을 등 뒤에 두고 구멍을 파고 엎드려서 그 구덩이 속에서 더위나 탈수를 방지하세요.
*. 아, 말로만 듣던 신기루(蜃氣樓)여!
이곳 시간은 광활한 중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이 신강지역을 한국 시간보다 1시간 빠른 북경시간을 표준으로 쓰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북경보다는 2시간 더 빠른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가을로 8시도 훨씬 넘은 밤인데도 해가 지지 않는다.
하늘을 건너서 구름은 가고
들을 넘어서 바람은 간다.
들을 넘어서 가는 길손은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
지금은 지은이도 잊어버린 대학시절부터 암송해 오던 나의 애송 시를 읊조리며 시흥에 겨웠는데-.
그런데 보라, 저 앞 지평선 끝에 보이는 강과 그 위에 있는 저 긴 다리를.
강이 없어서 사막이라고 하는 건데, 우리는 그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인데, 사막에 저렇게 큰 강과 저렇게 큰 다리가 있다니-.
신기루(蜃氣樓)였다.
신기루(蜃氣樓)란 공기의 밀도가 층층이 서로 다를 때에 땅에 있는 집이나 산이나 그밖의 모든 물건의 형상이 빛살의 굴절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주로 사막 위에서 볼 수 있는데, 바다에서는 공중에, 모래 위에서는 지평선 아래에, 혹은 거꾸로 혹은 바로 비취어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신기루(蜃氣樓)가 한 개인에게만 보이는 착시 현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이렇게 내 카메라에도 잡히다니- . '오래 살고 볼이다'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그래서 여행 중 보고, 듣고, 만나서 알게 되는 견문은 살아있는 지식이요, 그래서 여행은 사실을 통하여 진실을 알게 하여주는 사전과 같은 것이다.
신기루를 보니 시 한 수가 입가에 맴돈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쓰여지는 것인 줄을 이제야 깨닫겠다.
혜초(慧超) 스님 마음으로
한 마리 버스 몰고
끝없는 고비사막 지평선 넘는 에뜨랑제.
신기루(蜃氣樓)
저 다리 건너
둔황 막고굴(莫古窟) 향하네.
-돈황(敦煌) 가는 길
-다음 '往五 Silk Road 國傳(9)/둔황의 명사산과 월아천
往五 Silk Road 國傳(8) / Silk Road 사막 이야기
*. 회왕릉(回王陵, 후이왕링)
청(淸) 나라 시절 앞에서 하미과(哈密瓜)에서 하미과를 진상하던 회왕 어베이두라 1세와 연관된 이야기다.
회왕(回王)이란 그 위구르족을 투르크계의 회흘(回紇)· 회골(回骨)· 웨이우얼[維吾爾(유오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1967년에 청(靑) 나라는 하미 지역의 반란을 청을 도와 평정시킨 공으로 하미 지역을 회왕(回王)에게 위탁하여 통치하게 하였고, 봉건 영주(封建領主)가 된 회왕은 자손대대로 하미를 233년 간 통치하였는데, 이 능은 이곳을 통치하던 왕과 왕비와 그들 가족의 40개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 왕릉 중에 복숭아 같은 하트형은 남자의 무덤이고, 정방형正方形)은 여자의 무덤이다.
회왕릉에서의 볼거리로 왕릉 앞에 예배를 볼 수 있는 1688년부터 21년간 지었다는 지붕이 녹색유리로 된 높이 17m의 이슬람사원이다.
회왕릉은 돈황 가는 중에 하미 시내에 있어서 그것만 돌아보고 종일 버스만 타고 가는 것이지만, 마음먹고 하미를 둘러본다면 가봐야 할 곳이 더 있다.
그 중에는 죽기 전에 가봐야 할 33곳 중에 하나라는 목장 지대 빠리쿤 초원(巴里坤草原)도 있고, 둔황에 있는 명사산(鳴沙山)이 여기에도 있다.
*. 옛 사람들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제대로 여행하려면 다음과 같은 책을 적어도 한 권만이라고 읽고 가라는 고마운 충고를 하는 분이 있다.
-헤딘의 ‘아시아의 사막을 넘어서’/ 프르제바르스키의 ‘황하 원류에서 롭노르로’, /프란시스 영허즈번드의 ‘카라코람을 넘어서’,/ 라티모어의 ‘서역에의 사막 여행’
실크로드를 넘은 옛사람으로는 장건 (張騫, 한), 법현(法顯, 東晉), 현장(玄裝), 당(唐)의 혜초(慧超, 신라 ), 마르코 폴로(이탈리아) 등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아무 표지도 이정표도 없는 사막 길을 어떻게 갔을까?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머리 위로는 새 한 마리 없고 발밑으로는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물 한 줌,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다.'
7세기 무렵 사막을 넘어가던 현장 스님의 한탄하던 글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보인다.
그때는 낙타나 말을 이용하여 대상(隊商)을 따라 가는 실크로드는 위험한 길이라서 대상은 많은 사람들과 떼를 지어 이루어졌는데 많을 때는 수천 명 이상까지 어울려서 다녔다 한다.
그 많은 사람들과 가축의 이동은 사막에 없던 길을 새로 만들어 주었고, 그러다가 도중에 죽은 시체는 사막 가운데에 그대로 버리고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길을 잃었을 때는 죽은 시체를 묻은 돌무덤이나 해골을 만나면 그것이 이정표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때 더 분명한 것이 있었다면 위급을 알려주던 봉화(熢火) 터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때는 신발도 그렇듯이 여행 장비도 오늘 날과 같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준비도 완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옛날 대상 (隊商, caravan)들은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하루 30~40km씩만 갔기 때문에 장안(현 西安)에서 출발하여 인도나 서구를 왕복하는 데에는 보통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 길에는 사막을 셋이나 넘어야 했기 때문에 목숨 걸고 다녀야 했고 그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낙타였다.
*. 사막의 배 낙타(駱駝) 이야기
사막이나 초원에서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서 먼 곳으로 다니면서 성지순례(聖地巡禮)를 하거나 특산물을 교역하는 상인의 집단을 대상 (隊商) 이라고 한다.
이를 영어로 캐러밴 (隊商, caravan)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묵어가는 오아시스에 이 대상들을 위한 숙소가 있어서 거기서 많은 문물 교환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오늘날의 투루판이나 선선, 하미, 돈황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발전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들 대상들이 그 짐을 운반하거나 승용(乘用)하는 데에는 말· 노새· 개 등도 있었지만 주로 낙타가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낙타(駱駝)는 포유동물로 키 2m 가량이나 되는 크고 온순한 동물이다. 등에 큰 혹이 하나 있는 것이 북아프리카에 사는 단봉낙타이고, 두개가 있는 것이 우리가 온 신강지역(新疆地域)에 사는 쌍봉낙타다.
그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물을 저장하여 두는 것이 아니라 분해하여 물을 만들 수 있는 지방을 저장해 두기 때문에 며칠 동안 먹이를 먹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동물이 낙타다.
그러나 며칠 동안 먹이를 섭취하지 않게 되면 혹이 점점 작아지다가 없어지기까지 한다고 한다.
2개의 발가락은 커서 모래 길에 빠지지 않고 걷기에 모래 길에 알맞다.
불쌍하게도 코뚜레를 하고 줄에 매어 주인에게 끌려 다니지만, 그 콧구멍은 자유로이 여닫을 수가 있어서 사막의 모래 폭풍을 막기에 적당하다. 속눈썹이 빽빽이 나 있고 긴 것이나, 귀 주위에도 털이 길어서 사막의 무서운 모래 바람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진 초식(草食)하는 가축이다.
사막에는 무진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낙타초(駱駝草)'는 아침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는데 낙타의 중요한 먹이가 되는 식물이다.
낙타초(駱駝草)는 예리한 가시가 많은 풀이지만, 낙타는 사슴처럼 긴 혀를 이용하여 가시를 발라내고 먹을 수 는 신비로운 동물이기도 하다.
낙타는 이렇게 타거나 짐수레를 운반하는데 쓰이기도 하지만 그 젖은 음료로, 고기는 식용으로, 털은 직물용으로 쓰이는 사막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다.
우리들의 실크로드 여행 투어에서 우리는 ‘낙타 발 요리’까지 먹을 수가 있었다.
*. 우리들의 사막 여행
중국 28개 성중 가장 큰 신강성에는 사막이 세 개나 있다. 동쪽에 고비사막, 북쪽에 걸반 퉁구트 사막, 그 중앙에 세계에서 2번째로 크다는 타크라마칸 사막의 남북을 관통하는 530km의 고속도로 '沙漠公路'(사막공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오아시스 근처에는 나무를 심고 우물을 파서 주민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관리 보완하도록 하고 있다.
그 고속도로 312번을 에어컨을 단 현대식 관광버스로 우리들은 우루무치에서 돈황까지 3,000km인 750 리를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
서울서 부산까지가 300km이니 그 부산을 왕복하고도 150리를 더 가는 이 기나긴 아무것도 없는 고비 사막에 나는 왜 왔을까?
왜 구도자(求道者)도 아니면서 이 멀고 먼 사막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가보고 싶은 곳이 아직도 세계 곳곳에 수없이 많은데,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뿐인 이곳에 무엇 하러 온 것인가.
오늘은 하미서부터 둔황까지 420km를 별로 볼 것도 없는 회왕릉 하나를 잠깐 동안 동안 보고 온종일 달리기만 하고 있다.
중국에는 황산(黃山)이나 장가계(張家界)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하는 구채구(九寨溝)도 있고, 몇 년 동안 벼르고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메만 높다고 하는' 태산(泰山)도 있는데….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는 돈황(敦煌, 둔황)의 막고굴(莫古窟)을 보고자 고비사막을 넘고 있는 것이리라.
고비사막의 '고비(Gobi)는 황무지를 뜻하는 말이다.
고비란 몽골어로 '모래와 잔돌뿐인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할 때에 그것이 '고비사막을 넘었다'는 뜻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경지'를 '고비'라고 한다.
우리 민족이 중앙아시아에서 몽고를 거쳐서 한반도에 정착한 민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고비'의 어원 이야기를 황당한 이야기로만 돌릴 수도 없다. 우리말이 우랄알타이어계인데, 그 우랄산맥이 신강성과 몽고 사이에 있는 산맥이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는 오늘 하미서 돈황까지 내내 버스 여행이다. 도중에 휴게소도 없으니 따라서 화장실도 없다.
312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약간의 언덕이 있으면 거기가 바로 화장실이 되곤 했다. 남정네는 서서 사막 지평선을 바라 보며 '쉬-'를 하고, 여자들은 언덕 뒤로 몸을 숨긴다. 그때를 위해서도 여성들은 양산을 준비할 일이다.
그러나 실크로드 여행에서는 서구나 인도 여행 등처럼, 화장실마다 요금을 챙기는 곳이 없어서 외화(外貨)가 아까워서 화장실을 생략하는 경우는 다행히 없었다.
도로는 쭉 뻗은 4차선 고속도로로 언제나 추월할 수 있도록 모든 차선은 점선이었지만 올 봄에 다녀온 네팔, 인도의 기사들처럼 위험한 난폭 곡예 운전을 하는 기사는 중국에는 없었다.
그 도로를 자세히 보면 양쪽에 약간의 구릉을 만들어 놓았거나 낙타초를 심어놓으 것은 사막에 바람이 불어올 때 모래가 길에 쌓이지 않게 한 배려 같았다.
그 고속도로에 곡선으로 되어있는 곳은 직선으로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석유 굴착기들의 모습이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나오는 가스관을 상해나 홍콩까지 연결한다는 고속도로의 좌 혹은 우측에 계속되는 하얀 팻말은 우리로 하여금 중국의 무서운 저력에 부러움과 함께 놀람을 금할 수 없게 하였다.
고속도로 곳곳에 강은 없는데 다리가 있는 곳도 있었다. 만약에 홍수가 날 때를 고려하여 고속도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낸 다리로 평상시그 주위는 물 없는 건천(乾川)이었다.
좁은 우리나라에도 휴대 전화가 불통인 지역이 많은데 우리나라의 16배나 되는 신강자치구를 가로지르는 이 드넓은 사막의 긴 고속도로 길에도 이동통신탑이 곳곳에 서 있어 전화 연락이 어디서나 가능했다.
그래도 만약 도중에 차가 고장 나기만 한다면 한 이틀은 이 사막 가운데서 있어야 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차를 몰고 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이들에게는 '사막 탐험 주의 사항'을 알고 떠나야 할 것 같다.
다음은 어제 하미의 '마귀성'을 갔을 때 그 입장권'에 쓰인 사막 탐험에 대한 주의 사항이다.
1. 물을 절약한다는 것은 사막 탐험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2. 사막 가운데에는 도로는 없고 방향만 있습니다. 차로 길을 가다가 물이 천천히 흐르고 있을 때에는 왼쪽으로 돌아가십시오. 달릴 때에는 주의를 요합니다.
3. 방향을 잃었을 때는 함부로 이동하지 마시고 차량 곁을 떠나지 마시고, 구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어두워지면 차를 몰지 말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대로 그 자리에서 기다리세요.
4. 만약에 물이 떨어졌을 때에는 큰 사막을 등 뒤에 두고 구멍을 파고 엎드려서 그 구덩이 속에서 더위나 탈수를 방지하세요.
*. 아, 말로만 듣던 신기루(蜃氣樓)여!
이곳 시간은 광활한 중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이 신강지역을 한국 시간보다 1시간 빠른 북경시간을 표준으로 쓰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북경보다는 2시간 더 빠른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가을로 8시도 훨씬 넘은 밤인데도 해가 지지 않는다.
하늘을 건너서 구름은 가고
들을 넘어서 바람은 간다.
들을 넘어서 가는 길손은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
지금은 지은이도 잊어버린 대학시절부터 암송해 오던 나의 애송 시를 읊조리며 시흥에 겨웠는데-.
그런데 보라, 저 앞 지평선 끝에 보이는 강과 그 위에 있는 저 긴 다리를.
강이 없어서 사막이라고 하는 건데, 우리는 그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인데, 사막에 저렇게 큰 강과 저렇게 큰 다리가 있다니-.
신기루(蜃氣樓)였다.
신기루(蜃氣樓)란 공기의 밀도가 층층이 서로 다를 때에 땅에 있는 집이나 산이나 그밖의 모든 물건의 형상이 빛살의 굴절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주로 사막 위에서 볼 수 있는데, 바다에서는 공중에, 모래 위에서는 지평선 아래에, 혹은 거꾸로 혹은 바로 비취어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신기루(蜃氣樓)가 한 개인에게만 보이는 착시 현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이렇게 내 카메라에도 잡히다니- . '오래 살고 볼이다'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그래서 여행 중 보고, 듣고, 만나서 알게 되는 견문은 살아있는 지식이요, 그래서 여행은 사실을 통하여 진실을 알게 하여주는 사전과 같은 것이다.
신기루를 보니 시 한 수가 입가에 맴돈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쓰여지는 것인 줄을 이제야 깨닫겠다.
혜초(慧超) 스님 마음으로
한 마리 버스 몰고
끝없는 고비사막 지평선 넘는 에뜨랑제.
신기루(蜃氣樓)
저 다리 건너
둔황 막고굴(莫古窟) 향하네.
-돈황(敦煌) 가는 길
-다음 '往五 Silk Road 國傳(9)/둔황의 명사산과 월아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