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대하는 법
2023. 8. 20.(주일오전예배) 역대상 21:18-19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중국 만주땅에 731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40년-1945년 전쟁에서 패전하기까지 한국 독립운동가와 중국의 전쟁포로를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하였다. 그때 일본이 생체실험대상자를 부른 이름이 마루타였다.
혹시 마루타의 뜻을 아는가? 껍질이 벗겨졌거나 잘라져 있는 상태의 나무토막을 마루타라고 한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독립운동가와 중국의 전쟁포로를 나무토막라 부르며 잔혹한 실험을 하였다. 그래서 탄저균을 피부, 음식물, 호흡을 통하여 투입하여서 그 세균에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폈다. 또 고속원심기에 넣어서 사람을 빙글빙글 돌려서 온 몸에 물과 피가 몸에서 빠져나가게 했는데, 그러한 고통 가운데 사람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있는가? 또 연기를 다량으로 마시면 어떻게 되는가?를 실험하였다. 그래서 3천명 이상이 이 잔혹한 실험대상으로 죽어갔다.
그런데 이 잔인한 실험이 왜 악하고 나쁜 것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나무토막으로 본 것부터 잘못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사람의 인권을 멸시한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본이 731부대를 조직하여 마루타 생체실험을 한 이유는 전쟁에 승리하고 싶은 욕망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생화학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생체실험을 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사람을 자기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삼는 것이 731부대가 죄악에 빠지게 된 이유인 것이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에게도 사람과 수단과 방법으로 보는 악한 모습이 없는가? 역대상 21장은 다윗의 인구조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다윗은 군대장관이었던 요압에게 명령하여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였는데, 그 수가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자가 110만명이고, 유다 사람이 47만명이었다고 기록한다. 이것이 요압이 보고한 인구조사의 결과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인구조사를 미워하였다.
왜 하나님은 다윗의 인구조사를 미워하였는가? 사실 모세는 출애굽을 한 후에 인구조사를 하였다. 그리고 가나안에 도착한 후에도 역시 인구조사를 하였다. 그래서 제사장 엘르아살을 중심으로 인구조사를 하였다. 그렇게 인구조사가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윗의 인구조사를 두고 하나님은 진노하신 것이다.
왜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인가? 모세의 인구조사는 제사장 엘르아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말의 의미는 전쟁에 나갈 사람의 수도 되지만, 또한 하나님께 나아와서 제사드릴 수 있는 사람의 수도 된다. 그래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사람의 수를 모세는 헤아렸던 것이다.
그런데 다윗의 인구조사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강대한 나라를 가지게 된 다윗은 내가 얼마나 강력한 왕이 되었는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랬던 다윗은 군대장관 요압에게 명령하여 인구를 조사한다. 그래서 계수된 사람의 수를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도구와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에 대하여 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는가? 이찬수 목사님이 개척할 때 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막내가 3살이었다고 한다. 그 어린 아이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교회는 급성장하였다. 그렇게 교회가 급성장할 때 목사님은 초등학교 1학년, 3살 된 아이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아빠가 설교를 잘하고, 목회를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야!
그런데 만약 요즘 같으면 목사님은 아이들이 아니라, 강아지를 불렀을 것이다고 한다. 그래서 강아지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강아지 세계에서는 모르겠지만, 분당우리교회가 이런 상황인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런거야! 알아들었으면 손!
그 어린 아이들이 아니 강아지가 목사님의 말을 알아들었겠는가? 그런데도 목사님이 거듭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 이유는 내가 목회를 잘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하는 순간 그 사람들은 모두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며, 그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 앞에 더욱 충성된 종으로 살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C.S. 루이스가 쓴 나니아연대기는 2차 대전 때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는 부모님에 의하여 한 시골의 교수님 집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 짐을 푼 아이들은 심심하다는 루시의 말에 숨바꼭질을 하였는데, 그때 루시는 천으로 덮혀 져 있는 장롱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숨었다. 그런데 그 장롱이 나니아 숲으로 들어가는 통로였다. 그래서 루시는 눈덮힌 나니아 숲에 서 헤매다가 반은 인간이고, 또 반은 짐승인 툼누스를 만난다.
그리고 툼누스의 집으로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오두막 집에 불이 꺼지는 일이 생긴다. 그렇게 불이 꺼졌을 때 툼누스는 하얀 마녀의 협박 때문에 루시를 데리고 온 것이라고 말하고, 착한 툼누스는 루시를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래서 현실로 다시 돌아온 루시는 오빠들에게 나니아 숲을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날 밤 루시는 다시 장롱으로 들어가는데, 애드먼드가 그 루시를 따라 나니아 장롱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나니아 숲에 도착한 루시는 툼누스의 집을 찾아가고, 애드먼드는 숲을 방황하다가 하얀 마녀를 만난다. 그때 하얀 마녀는 애드먼드에게 터키쉬 딜라이트를 줘서 맛있게 먹게 한다. 그리고 형제들을 데리고 오면 터키쉬 딜라이트를 또 먹게 해 주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나니아 숲에서 각각 다른 사람을 만난 애드먼드와 루시는 현실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다음 날 야구놀이를 하다 유리창을 깬 형제들은 도망을 쳐서 모두 장롱 안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모두 나니아 숲에 들어왔을 때 루시는 형제들을 툼누스의 집으로 인도하였는데, 애드먼드는 하얀 마녀를 찾아간다. 그리고 하얀 마녀에게 형제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 말하고 터키쉬 딜라이트를 먹게 해 달라고 손을 내민다.
애드먼드가 왜 마녀에게 터키쉬 딜라이트를 달라고 하였겠는가? 애드먼드는 나의 형제라는 관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드먼드에게 중요한 것은 터키쉬 딜라이트를 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기의 필요에 얽매였을 때 형제는 자기 필요를 채우는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악한 마귀의 전략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악한 마귀의 전략에 다 무너지고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씩 자녀가 부모가 필요한 돈을 주지 않는다고 살인했다는 기사를 볼 때가 있다. 어떻게 자녀가 부모를 죽일 수 있는가? 가족이라는 관계를 깨뜨리고 내 필요의 도구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주 안에서 형제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사람은 자주 만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만나기를 꺼려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이 편하고 싶다는 그 욕망에 도구와 수단으로 사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인구조사 이후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방편으로 인구조사를 한 다윗에게 진노하여서 전염병으로 7만명이 죽게 하였다. 그런데 그 재앙이 너무 잔혹하여서 후회하신 하나님은 다윗에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신다.
왜 하나님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였겠는가? 오늘 본문 제일 마지막에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에 기브온 산당에 모세가 지은 여호와의 성막과 번제단이 있었다(29-30절).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라면 번제단이 있는 기브온 산당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브온 산당이 아니라,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왜 오르난의 타작마당이겠는가? 오르난의 뜻은 강한 자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강한 자인 오르난이 거저 주는 밭을 받아서 자신이 더 강한 자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데 다윗은 오르난에게 금 600세겔을 주고 그 밭을 산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다윗은 높은 댓가를 치루고 그 밭을 사므로 자신의 겸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다윗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을 때 하나님은 응답하심으로 불로써 응답하고 재앙이 떠나가게 하여 주었다.
놀랍지 않는가? 악한 마귀는 사람을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도록 한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범죄하여 재앙가운데 있는 다윗에게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다윗이 그 타작마당을 사서 제단을 쌓았을 때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여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받은 그 은혜를 저와 여러분이 받은 것을 아는가? 다윗이 죽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그 장소를 역대기 3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린 곳이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말씀하시고,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고, 또 네 자손이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고, 네 자손으로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는 엄청난 복을 약속하여 주신다.
그런데 그 모리아 산에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모여 예배할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시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이 언약하신 놀라운 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이다.
그런데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된 그 땅은 오르난 타작마당에 대한 역사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다윗이 속죄를 위하여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금 600세겔을 주고 산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그 값을 치루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고, 또 우리를 재앙에서 건져주시는 것이다.
악한 마귀는 자기를 위하여 사람을 필요로 사용하는데,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버리신 것이다.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십자가 앞으로 나아와서 예배할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아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오는 사람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겠는가? 사람은 나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가 아니라, 내가 희생하고 헌신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야 할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자리에 나온 우리 모두는 서로를 바라볼 때 희생하고 헌신함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서로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그 시각으로 바라보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는 그 모습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사람을 세우는 그런 자여교회 성도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