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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바른 양심을 가지고... / あくまでも良心に従って...。(2022년 8월 28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23:1-5
행 23:1 바울이 의회원들을 주목하고 말하였다. "동포 여러분, 나는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2 이 말을 듣고,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3 그러자 바울이 그에게 말하였다. "회칠한 벽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당신이 율법대로 나를 재판한다고 거기에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서, 나를 치라고 명령하시오?" 4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말하였다. "그대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모욕하오?" 5 바울이 말하였다. "동포 여러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소. 성경에 기록하기를 '너의 백성의 지도자를 욕하지 말아라' 하였소."
1. そこで、パウロは最高法院の議員たちを見つめて言った。「兄弟たち、わたしは今日に至るまで、あくまでも良心に従って神の前で生きてきました。」2. すると、大祭司アナニアは、パウロの近くに立っていた者たちに、彼の口を打つように命じた。3. パウロは大祭司に向かって言った。「白く塗った壁よ、神があなたをお打ちになる。あなたは、律法に従ってわたしを裁くためにそこに座っていながら、律法に背いて、わたしを打て、と命令するのですか。」4. 近くに立っていた者たちが、「神の大祭司をののしる気か」と言った。5. パウロは言った。「兄弟たち、その人が大祭司だとは知りませんでした。確かに『あなたの民の指導者を悪く言うな』と書かれています。」。
지난 주일 말씀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사는 은혜와 권한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증인으로 서 있는 공회의 자리는 이전에 예수님께서 서서 정죄를 받으셨던 자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던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들이 섰던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정죄하고 심판하여 처벌까지 하려고 모인 공회 회원들 앞에서 전혀 주눅 들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자세히 주시하면서 용감하고 담대하게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합니다.
증인에게 필요한 덕목은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설득이나 설명이 아닌 고백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경험(체험)을 그저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그대로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특별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체험과 복음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여 방해하는 영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탄 마귀라는 존재이지요. 사탄 마귀는 우리의 증언을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유혹하고 미혹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의 정죄를 받게 하려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옥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많이 착각하듯이 사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지옥을 만드시고, 그 지옥을 관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눅 12:5)
지옥에 던져 넣을 권세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 권세로 사탄마귀, 그리고 귀신들이 심판을 받고 정죄 받아, 온전한 처벌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고 사탄 마귀가 박해하고 실족하게 하던 성도들... 또한 온갖 감언이설과 육신적인 것들로 유혹하고 미혹하려고 했던 성도들...은 악한 세력에 대한 심판을 통해 영원한 복과 기쁨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소망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지옥의 본질인 것이지요.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계 18:20)
따라서 궁극적으로 지옥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시려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미혹하고 속여 죄 짓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방해하는 범죄를 저질러 타락한 천사, 즉 사탄을 가두어 두시기 위한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벧후 2:4)
그럼, 죄를 지은 인간은 왜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일까요?
사탄은 자신의 결론적인 운명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숨결을 불어 넣으신 인간을 마귀의 멸망에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지옥에서 멸망하도록 유혹하고 함정을 이용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오늘 다룰 초점이 아니기에 다음 기회에 다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여하튼 멸망의 지옥조차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옥에 떨어질 사탄은 우리가 복음을 증언하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증인들은 이 점을 기억하며 성도라는 분명한 영적인 자의식과 함께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고백할 수 있는 내면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바울은 수많은 칼과 같은 시선을 느끼면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공의회에 모인 당대 최고의 권세자들과 권력자들을 향해 담대하게 말합니다. 자기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이지요.
...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행 23:1)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여기서 양심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악을 구별하는 선천적인 의식(인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 지식적으로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내면에 심겨있는 일종의 능력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부끄럽거나, 마음에 거리끼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말은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이방인인 로마의 성도들에게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여러분, 복음을 믿는 것은 인간의 양심에 가장 합당한 일이며, 또한 전혀 부끄럽거나 감추어도 되는 일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양심도 복음을 믿고 예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옳게 여기고 있습니다.
바울은 또한 이 양심이 믿지 않은 이들에게도 이미 하나님께서 마음 깊은 속에 심어 놓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4-15)
그러나 유대인들은 양심보다는 율법에 기록된 문자를 어떻게 육신의 행동으로 지킬 수 있느냐의 여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살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에 좋게 보이려는 욕심, 즉 외식하는 마음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7)
마 23장의 내용은 이런 회칠한 무덤과 같이 외식하는 마음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댁에서 꼭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성령님께서 함께 임재하셔서 동거하시는 마음에서 작용하는 양심을 따라 복음을 전하고, 증인으로 살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율법의 행위와 조문, 그리고 율법의 지식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음과 구원에 대한 절실함과 갈급함을 분명히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0)
이 말씀은 율법을 통해 이제까지 범죄로 여기지 않던 것을 범죄라고 인식하게 되어, 실제로 범죄가 더하여 졌다기보다는, 범죄를 인식하는 생각(지식)이 더하여 진 것이라고 해석해 옳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우리 안에 죄가 상주하고 있는 것을 밝혀 주는 역할을 하지만, 율법의 항목들과 문자들을 지키는 것으로는 온전한 구원의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체중조절을 하려는 사람이 정기적으로 자신의 몸무게를 재기 위한 체중계가 반드시 있어야 하겠지만, 체중계가 몸무게를 줄여 주는 것은 아니지요. 운동과 식이요법(다이어트)를 겸해야 체중감량을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이처럼 우리에게 율법의 역할은 체중감량을 원하는 이에게 체중계가 감당하는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님께서 함께 동거하시는 마음에서 들리는 양심의 소리, 즉 성령님의 명령과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공의회의 원로들은 양심이 아닌, 욕심과 탐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척을 하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다.
아나니아는 당시 대제사장으로서 이 회의를 주관하는 자리에 있었는데요. 이 사람은 사도행전의 다른 구절에 등장하는 두 명의 아나니아와 함께 동명삼인 중의 한 명입니다. 첫 번째 아나니아는 거짓된 헌신으로 인해 베드로 앞에서 즉사한 사람이구요. 두 번째는 다마스쿠스에 살던, 믿음이 좋은 제자로서 사울이었던 바울을 찾아가 주님의 명령을 전달하고 눈을 뜰 수 있도록 기도해 주었던 사람이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는 당시의 유대지역 정치권력의 핵심이었던 분봉왕 헤롯의 측근으로서 정치적인 수단을 통해 대제사장의 자리에 임명을 받은 종교정치인이었던 사람입니다.
아나니아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자비하시다는 뜻입니다. 자비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고백하는 너무도 아름다운 뜻을 가진 이름인데요. 이처럼 같은 ‘아나니아’라는 귀하고 복된 이름을 가졌지만, 어떤 사람은 거짓 믿음으로 탐욕에 속아 돈을 숨겼다가 정죄를 받고, 어떤 사람은 그 이름에 걸맞는 순종의 본이 되고, 어떤 이는 그 이름의 가치와는 정반대인 정치적인 욕심에 휘둘린 삶을 살다가 정적들에 의해서 암살을 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바울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고백을 들은 정치종교인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의 입을 치라고 위법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바울은 곧바로 그가 회칠한 벽과 같다고 말하지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과 결이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9-23절에도 예수님께서 바울과 비슷한 대우를 받으시는 장면이 있는데요. 대제사장 앞에서 함부로 말을 했다는 이유로 뺨(입술)을 맞으시는 것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희게 꾸미고, 아름답게 치장을 하고, 율법의 항목들을 몸으로 지키려고 애를 쓴다고 하여도... 결국 내면의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겉모습은 나날이 지치고, 낡아서 헐어버리고, 아름답게 꾸미지도, 멋진 행실의 자랑거리나 결과물이 빈약하더라도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살아있는 것입니다.
혹시 성령의 말씀으로 양심의 소리가 들려와 마음이 아프고 쓰라리십니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의 행실을 비추어보면 너무도 비참한 생각이 들어서 주님 앞에 더욱 낮아지게 되십니까? 그렇다면 틀림없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진심으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세리의 기도 중에 세리의 기도에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귀 기울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공의회에서 유대인들의 외식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종교인으로서 자기의 이름값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욕심을 따라 살던 아나니아에 대하여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했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잘 알고 있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바울과 아나니아의 모습은 이렇게 비교가 되었습니다.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 바울은 율법을 범한 죄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수많은 공격적인 눈들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정하심을 듣고 알았기에 너무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욕심을 따라 살던 한 사람, 아나니아는 자신의 이름값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그저 정치적인 야욕과 인맥의 도움에 연연하며 살았습니다. 그로 인해 재판을 주관하는 자리에는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께는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그저 정치권력과 폭력을 사용하여 정적을 제거하려는 탐욕에 불타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은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치사한 욕망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종교인 아나니아의 길이 아니라, 성령님의 목소리인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좁지만 아름다운 바울의 길을 선택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양심을 따라 주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죄인으로 취급 받는 자리에 있어서도 여유롭고, 당당하며 아름다운 증인의 모습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반면 아나니아는 권모술수와 비열하고 치사한 방법으로라도 자신의 육신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외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깨끗하나 속은 죽음의 흔적으로 불결하기 짝이 없는 위태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과연 사람답고 아름다운 인간이기를 원하는 우리는 어떤 삶의 자리를 소망하며 지향해야 할까요? 어떻게든 편하고, 능력있고,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성도의 이름에 합당하지 않더라도 욕심을 탐하는 자리에 있어야 할까요? 아니면 조금 불편하고, 지금 당장은 힘겹고, 자랑할 것이 없지만,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좁고 험한 문으로 가는 길을 따라야 할까요?
선택은 우리 각자의 자유에 있지만, 저는 감히 후자를 선택하기를 소망하고, 여러분에게도 조심스레 권면합니다. 사망과 멸망으로 끝나는 겉으로는 멋지고 화려한 지옥문을 향하는 길이 아닌, 구불구불 덜컹거리고 더디고 느리며,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생명의 문을 향하는 길로 매일 주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일상을 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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