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를 가치있게 하는 사람
2024. 9. 8(주일낮예배) 빌립보서 3:4-14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가? 한 리서치 기관에서 17개국 1만 9천명을 대상으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물었다. 이 질문에 14개국 국민들은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고 대답하였다.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고 대답하지 않은 3개국은 스페인, 대만, 한국이었는데, 스페인은 가족과 건강을 중첩하여 선택하였고, 대만은 사회를 가장 소중하다고 말했다. 중국과 갈등관계에 있는 대만은 사회가 없으면 가정을 지킬 수 없다는 생각에 사회를 가장 소중하다고 답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가장 소중하다고 하였겠는가? 한국은 가족과 아이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17개국 중에 꼴찌였고, 오직 돈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돈이었다.
혹시 저와 여러분도 돈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 이상순 이효리 부부가 자기 집 마당에서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이상순 무릎에 앉은 이효리가 오빠는 결혼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지? 하고 묻는다. 그때 이상순은 나는 군대만 제대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하고 대답한다. 그때 이효리는 나는 성공한 가수만 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라고 대답한다. 이상순과 이효리는 무엇인가?를 이루거나 지금의 고통의 순간이 지나가면 행복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 중에 이상순이 군대를 제대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가난만 지나가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효리가 성공한 가수가 되면 행복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부자가 되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돈때문에 낙심하고, 돈 때문에 열심히 산다.
혹시 저와 여러분도 이러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느헤미야 2장을 보면 근심이 가득한 2명의 사람을 찾을 수 있다. 한 명은 아닥사스다 왕이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2절)하고 묻는 느헤미야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은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함으로 크게 근심하였다(10절)고 기록한다. 그런데 2절의 수심과 10절의 근심은 같은 원어이다.
무슨 말인가? 느헤미야는 성벽과 성문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고난과 수치를 당한다는 것이 근심이었는데, 산발랏과 친구들은 이스라엘이 흥왕해지는 것으로 근심한다.
왜 이런 차이가 나겠는가? 느헤미야 2장 18-19절을 읽기 바란다.
(느 2:18-19)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19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은 아닥사스다 왕을 기억한 것이다. 그래서 유다가 성벽을 재건하고 강성해지면 아닥사스다 왕의 미움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느헤미야와 산발랏의 근심이 대조를 이루는 이유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가장 소중하였다면 산발랏은 그 당시 전세계를 통치하는 아닥사스다 왕이 가장 소중했었다. 이렇게 가장 소중한 것이 달랐던 느헤미야와 산발랏은 근심하는 이유가 대조되고, 또 성벽재건에 대한 수고도 달랐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고, 산발랏은 성벽을 무너뜨리려 한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고,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 본토 아비집을 떠났다. 그리고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는 위험이 있어도 정해진 시간이 창의 문을 열고 기도한 것은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은 모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았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았을 증거한다. 그래서 노아는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어서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써 심판할 때 구원을 받아 믿음의 대를 이어갈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기에 믿음의 조상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가문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니엘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함으로 결국 사자굴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자굴에서도 지켜주심으로 인하여 다리오 왕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였느냐?(단 6:20)는 그 물음에 나의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었다고 증거하는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목숨걸고 지키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였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말씀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 지난 7월 28일 주일오후예배 시간에 이은미 선생의 바이올린 연주가 있었다. 독일 뭔헨글라드바흐시립교향악단 2바이올린 부수석으로 활동하는 이은미 선생이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를 연주할 때 저는 바이올린의 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의 제일 끝에서 소리가 날 때 그 갸날픈 소리가 끊어질 것같아 가슴이 쪼여들고, 또 두 개의 현으로 화음을 넣으며 연주할 때는 제 마음 가득히 바이올린 소리로 가득찼다. 정말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린 후 그 연주자와 제 방에서 잠깐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연주자의 왼쪽 턱이었다. 하얀 피부를 가진 그 연주자의 왼쪽 턱은 검은 멍이 들어있었다.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으면 턱에 검은 멍이 들어 있겠는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는 타이틀을 치면 발레리나 강수진 씨의 발이 나온다. 강수진 씨는 얼마나 연습을 많이 하는지 토슈즈가 1년에 천여켤레가 떨어진다고 한다. 수학적으로 계산을 하면 하루에 3켤레 정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연습하다 토슈즈가 닳아서 떨어지면 갈아신고, 또 갈아 신으면서 연습을 하는 것이다.
왜 이은미 선생은 턱에 멍이 들 정도로 연습하고, 또 강수진 씨는 토슈즈가 매일 토슈즈를 갈아 신으면서 연습을 하겠는가? 이은미 선생은 바이올린의 소리의 가치를 알고 있는 분이다. 그리고 그 가치를 가장 가치있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연습한 것이다. 강수진 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또 그 가치있는 일에 열심을 다하며 사는 사람을 우리는 멋진 사람이다고 한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멋진 사람인가? 이제 오늘 본문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서술한다. 그래서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4절)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자랑거리를 말한다.
(빌 3:5-6)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 이스라엘 족속이다 베냐민 지파다는 말을 통하여 나는 정통유대인이다는 것에 대한 자랑이다. 유대교를 믿어 유대인이 된 것이 아니라,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어릴 때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말이다. 이것은 유대인으로 최고의 자랑거리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8절)고 하였다.
왜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는가? 바울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 순간 바울의 최고의 가치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나, 내가 열심을 가지고 살았다는 내용이 아니라, 복음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이전에 자랑거리였고, 누려왔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자신이 발견한 최고의 가치인 복음을 위하여 살았다. 이러한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억울하게 갇혔지만, 바울은 그곳에서 기도하고 찬송하여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는 역사를 통하여 간수를 전도한다. 아니 바울은 유라굴라 광풍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배에 탄 사람들에게 소망을 준다.
이것이 바울의 삶이었다. 이러한 바울은 복음의 가치를 증거하기 위하여 어떤 삶을 살았는지 빌립보서 3장 14절을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최고의 가치를 알게 된 바울은 이제 그 복음의 가치를 전하기 위하여 이전에 가진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이제 그 가치가 온전히 드러나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열정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삶이 멋있고, 또 부럽지 않는가? 제 3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1969년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이 뉴욕의 거리 한복판에서 이상한 실험을 하였다. 그런데 그 실험을 오래전 ebs에서 그 실험을 재현했다. 지하철 역 근처 횡단보도에서 한 사람이 길을 건너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는 사람들은 힐끗 처다볼 뿐 아무도 그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2명의 사람이 건널목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게 하였다. 그러자 출근시간에 직장에 가야 하는 사람들은 하늘에 뭐가 있을까? 하고 잠깐 하늘을 쳐다 보았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3명의 사람이 건널목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게 하였다. 그러자 한명 두명의 사람이 하늘을 쳐다보면서 멈추어 서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결국 그 근처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다 멈추어 서서 하늘을 쳐다보게 되었다. 이것이 제 3의 법칙이다.
제가 설교를 마무리 하면서 왜 제 3의 법칙을 말하겠는가? 우리 중에 누군가가 참된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데, 한 명이면 아무런 효력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가치를 발견하여 함께하는 3명의 사람이 있으면 이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3명이 바로 여러분이 되어서 복음의 능력을 자여마을과 창원과 경남 땅에 증거하는 자여교회로 일어날 수 있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