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시절 의미도 없이 불렀던 동요가 새삼 의미를 더하곤 한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데요". 이것은 가정마다 선풍기를 놓은 식으로 과학이 발전했고, 더운 바람보다 시원한 바람을 원하기에 이젠 에어컨 바람을 선호한다.
이번 여름은 지난여름과 달리 무더웠다. 그래서 에어컨 바람에 의존하며 지냈다. 골짜기마다, 높은 건물이 가린 그늘이 그리운 무더운 여름도 이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이 됐다. 바람이 무서우면 태풍, 폭풍, 광풍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미국에 살던 시절 육지에서 부른 폭풍을 터네이도(Tornado)라고 부르고, 바다에서 불면 허리케인(Hurricane)이라 부른다. 일 년에 몇 차례씩 한국으로 불어오는 허리케인을 맞이할 때마다 그 무서운 광풍을 인간으론 어찌할지 모를 정도이고, 그저 맞이할 뿐이고, 막을 수 없으니 피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 살면서 허리케인을 직접 맞이하진 않았지만 나무뿌리가 들리는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지붕과 담벼락이 넘어지고 자동차들이 뒤집히는 사건을 접한 적이 있었다. 무서운 공포 그 자체였다. 신선하고 고마운 바람이기도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무서운 광풍으로 돌변하여 재산만 아니라 생명의 손실까지 슬프지만 맞이하곤 한다.
자연에서 자란 식물과 온실에서 자란 식물은 급한 기온의 변화와 바람의 세기에 따라 뿌리를 더 깊게 든든하게 땅에 내려서 생존한다. 비와 바람, 아니 거센 소낙비와 거센 풍랑에서 견디는 식물은 짠 소금물에 약하지만 뿌리가 강하기에 오래 지속한다. 하지만 온실의 식물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따금 온실의 식물에 선풍기로 임의의 바람을 불게 하여 뿌리가 제대로 내리도록 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
성경에서 바람은 영이라 불린다. 성령 하나님은 바람으로 번역할 수 있다. 중생에 관한 메시지에서 예수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더라도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고 하시면서 바람과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대조한 것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은 임의로 흐른다. 물론 과학적으로 기온과 지대의 차이로 바람이 흐르지만 그 기온과 지대를 인간이 어떻게 조절할 수 없기에 바람의 흐름도 어쩌지 못한다.
하나님의 선택한 자에게 그분은 바람처럼 불게 하여 그분의 감동과 감화에 반응하게 한다. 어떤 바람을 맞이할는지 모르지만 성령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자는 동일하게 반응한다. 창조자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의 내면, 영, 인격, 본테에 반응하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무의식이지만 반응한다. 그것은 신자의 삶을 산다. 달리 말하면, 견인의 삶을 살게 된다. 삶이 워낙 복잡하고 힘들더라도 바람의 세기에 따라 시원함을 느끼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끔도 한다.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수백 톤 되는 범선도 움직이기도 하지만 더 세게 불게 되면 광활한 바다에 전복되고 만다. 성령하나님의 역사를 피조물 인간이 조절할 수 없다. 그분이 행할 때 행한다. 우리는 그분의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 말씀에 따라 사는 훈련의 삶이 필요하다. 언제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행하시는지 모르지만 그분의 움직임에 반응할 수 있거나 깨달을 수 있으면 좋다. 분명한 한 가지는 성령하나님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 들을 때, 배울 때, 그분의 뜻을 깨달을 때 우리는 시원함을 느낀다. 물론 인간적 깨달음일 수 있지만 이 깨달음이 진실하다면, 삶의 변화를 나타낸다. 아무튼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진리를 배우고 익히는 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지혜를 받는 것은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