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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박사 등 학위취득의 변
석 홍(민주당오산시지역위원장)
차례
1.머리말
2.법학사
3.법학석사
4.법학박사
5.교역학석사
6.사회복지학석사
7.결론
1. 머리말
어려웠던 어린 시절부터 대학생을 보면 부러웠고, 특히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며 가끔씩 홀로 찾아서 낭만을 즐기며 미래의 아름다운 꿈을 그리곤 했던 냇물이 굽이쳐 흐르는 경주 반월성언덕 [꿈의 동산]에 앉을 때면 대학 졸업하는게 큰 꿈 이였다.
고교 농업과를 3년 다니면서 영어공부에 부족 하였어 고시나 대학입학 등에 필수과목인 영어로 73년 대구로 발령 근무 후 왕고모와 생활하면서 셋집을 대구시내 학원가 근처에 두고 새벽이면 중학생들과 같이 삼위일체, 메들리 나중에는 성문종합영어, 다이제스트, 토플, 등 영어 공부에 발버둥을 첬다. 덕분에 고시외의 대학 편입학, 대학원 입학, 졸업 시험이나 심지어 대구시 7급 공무원 소양고사대항시험에서 수성구청 1등, 대구시 전체에서 2등하여 대구시장으로부터 상금 2만원을 받아서 구청의 전 직원들에게 커피를 대접했던 일도 있다.
그러나 부족한 내가 통신대학 행정학과 2년을 거쳐서 대학편입검정고시합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실력과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과분한 모든 학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고 대신에 공부할 때 함께 생활하며 뒷바라지해준 고모할머님이나 아내와 자식들 덕분이고 내공부한다고 특히 자식들 공부를 제대로 못해 준게 너무 가슴이 아픔으로 늘 남아서 미안함뿐이다.
2. 법학사
1975년에 대구 달성군청에 근무하면서 한국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를 입학, 2학년 말에 (대학편입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영남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3학년에 편입시험에 합격하여 당시 대명동에 위치한 야간부에서 수업코 법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편입시에 행정학과에서 법학과3학년에의 편입이 안 된다는 접수처의 거절에 영남대 법정대를 졸업 후 공직에 있는 지인을 통하여 당시 행정학과 김모 교수님을 통하여 겨우 허락을 받아서 편입시험에 응시한바 영어, 헌법, 민법총칙 시험과목 중에 헌법과 민법총칙은 제일 우수한 성적이라는 알림을 받기도 했다. 같이 편입한 장교출신 권영섭은 졸업후에 경찰간부후보시험을 거처서 총경으로 승진하여 후에 경주경찰서장시에 신일대학 전임교수로 있을 때 초청하여 전경찰조회시간에 특강의 배려와 대구수성경찰서장 부임 시에는 내가 교수 사직하고 수성구 범어동 낙원교회를 개척 담임 시에 초청하여 경찰간부 소개 및 식사접대를 하는 등 고맙고, 친절한 법대동문의 정을 나누었다. 졸업하기위해서는 간단한 논문작성이 있었는데 서울법대출신 조정호 교수님께서 ‘내가 지도교수를 해 주겠다“고 하셔서 이후에 줄곧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지도교수로서 수고와 정을 나누어주셨다.
대학4년을 졸업식 할 때는 대명동학교(현 영남대 부속병원)에서 많은 분들이 축하해주셨다. 대구시청의 최종련 당시 과장님께서도 사진사를 대동하시고, 경주성애원의 유권사 어머님과 이동승목사님, 유모선생 등과 친구들, 고모할머니도...
3. 법학석사
달성군청에 근무하면서 주경야독으로 야간대학을 졸업함에는 산림과 과장님이나 계장님이나 직원들의 배려가 많았다. 특히 당시 달성군청은 대구시를 둘러싸고 있는 읍면으로 팔공산의 공산면 등에는 산불이 잦아서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특근 근무를 하고 산불진화에 자주 출동 하곤 했다. 유가면 비슬산의 대형 산불 시에는 산 정상에서 밤을 새우고 잠을 자는 등 그리고 정상 절벽 밑에서 시체를 발견하였는데 제3사관학교 퇴교당하여 정상에서 자살한 시체로 주민등록증으로 유족에게 연락하여 조치하기도 했다. 대학부에서 여러모로 공부한답시고 편의를 많이 봐 주셨는데 당시 과장님은 대학원진학을 허락지 않으셨다. 부득이 최종련님께 말씀드려서 당시 군수님께 부탁하여 1개월간의 휴가를 얻어서 김천 용문산 기도원에서 경북대 대학원 법학과에 입시공부를하고 시험에 응하였으나 불합격하여 영남대 대학원 법학과에 응시하여 겨우 합격해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1년을 어렵게 다니고, 2학년 졸업반 때 안동군청 보호계 차석으로 발령이 나서 어렵게 경산 영남대 대학원까지 수업을 다녔다.
수업시간에 영어원서로 수업하시는 이 용구 교수님에게 1학년 때 영어실력부족의 꾸지람을 많이 듣고 출석하는 안동교회 부목사인 장 성덕 목사님께 부탁하여 고교2학년들을 모아서 성문종합영어를 지도하였는데 그게 효과가 있어서 대학원 2학년 수업 때는 영어원서를 읽는 것을 보시고 영어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이 용구교수님이 칭찬하셨다.
대학원은 수료했지만 논문준비를 제대로 못하여 졸업 및 학위취득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차에 대구시 수성구청으로의 영전발령으로 대구에서 정신을 가다듬어서 논문을 어렵게 준비하여 1차 심사는 꾸지람 듣고 퇴짜당하고 후 학기 2차 심사에서 논문발표 및 심사가 통과되어서 법학석사학위를 받을 수가 있었다.
4. 법학박사
1). 머리말
대구시 수성구청에 근무하면서 공직자로서 불안함이 없지 않았다. 공동 경비 조달 등으로 노임 인건비 더 달기 등으로 관례적인 부정행위가 불가항력적으로 이루어졌다. 대학원 졸업 직후에 아무도 모르게 영남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고, 박사과정에도 응시하게 되었다.
대구대 법대 이모교수와 이모교수의 경북고때 제자인 배모 법대동기(현 영남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나하고 3명이 응시 합격했다.
3여 년간의 수업과 외국어시험 종합시험 등을 거쳐서 수료 후 82년부터 신일전문대학에 강의 나가며 5월 달에 결혼, 10월 달에 학생과 주임으로 임명, 83년 3월에 전임강사 임명, 강의하며 기획실과 교목실 봉사, 85년 2월 수료후 서울 광장동 장로회신학대학원 진학하여 1년을 수업과 교목실 봉사하며 모르게 다니며 논문자료수집 등을 겸했다.
2). 논문작성과정
논문주제나 내용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사회에 기여할수있는 논문으로 목표로하고 고뇌하며 찾다가
가족법 중에 <혼외자법>에 정통하신 부산대학교 김용욱교수님을 찾아서 <미혼모>에 대하여 법적인 고찰을 해보라 도와주겠다고 하셔서 공감하고 수시로 찾아 뵙고 <미혼모에 관한 논문자료와 지도를 받기도하며 영남대 도서관 등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서울에서 이태영 박사님도 만나보고 연세대 교수 등 가족법의 유명한 교수 및 인사들을 찾아서 만나보고 자문을 구하고 발버둥을 쳤다. 3여년 간의 대학 교수연구실에서 밥을 끓여먹으며 논문작성에 사투를 버렸다.
논문 제출기한이 당시에는 박사과정입학후 8년인가 만기였다, 심사위원이 모교 법대교수 4분과 외부대학교수 1분으로 경북대학 법대 곽동헌교수님이 정해져서 특히 곽동헌교수님이 일본 등 외국책자나 국내 관련 자료들을 주시면서 논문작성 지도를 철저하고 가혹하리만치 지도해주셨다. 논문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엄청남 고생과 고뇌와 연단이였어 지금도 생각하면 끔직스럽고 당시에는 너무 야단맞고 힘이 들어서 포기 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있었지만 지나고보니 엉터리 박사논문이 아니라는 위안과 감사한 마음이다.
학위를받고 부산대학 법대 김용욱박사님을 찾았을 때 같이 책을 내자고하시면서 곽동헌교수가 지도했다면 확실히 보잘할 수 있는 논문이고 책으로도 할 수 있다고하셨다. 심사위원중에는 현재 서울대학교 총장이신 당시 영남대 법대 성낙인교수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3). 논문재목
[미혼모와 혼외자의 법리연구]
4). 박사학위수여식
1982년도 2월에 법학박사과정에 입학한지 7년 6개월만인 1990년 8월에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수여를 받았다.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축하해주셨고 특히 처갓집 식구들이 많이 오셨는데 장인어른께 박사까운을 입혀드리면서 기념촬영도 했다.
너무 고생하여 취득한지라 생각하기도 싫어서 잔치비용 100여만원을 고향 모교회인 경주 중앙교회로 장학금으로 보내드렸다. 그리고 박사학위 받은 후 10일후에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서 몸담고 있는 신일대학의 설립자며 당시 이사장이신 신진수장로님께서 당시 파크호텔(현 인터불고)에서 경비를 들여서 [석홍교수 법학박사학위 및 목사안수축하연]을 배푸러 주셔서 간부교수와 왕고모, 고모들 숙모, 사촌들과 달성군청에 근무 중에 공부하도록 배려해 주신 산림과 두 계장님, 지도교수님, 초교은사 강성수은사님, 최종련국장님, 대구기도원원장님, 영천 동문교회목사님, 은수아버지(대령출신), 김재근, 김희수교수 등등 보람 있는 감사예배와 축하행사및 만찬을 가졌고 고향 모교회인 경주중앙교회에서 저녁헌신예배에 초대되어 아내와 남매와 함께 특송도하고 눈시울이 뜨거운 지난날을 간증으로 감사중심으로 설교하는 시간도 가졌다.
5. 교역학석사
장로회신학대학원 M. Div의 3년 과정이었다.
영남신학교를 졸업했지만 일반대학원을 졸업하고 3학년에 편입하여 2년의 수업으로 서울 장신대학에서 목연과정 1~2년 더하고 <목사>가 된다는게 내가 내 자신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신일대학에 전임교수로서 강의와 교목실의 일을 도우면서 당시에도 장자교단이라는 통합 측의 4년제 대학 출신이 진학하는 최고 일류의 신학 과정이요, 입학하기도 쉽지 않다는 신대원에 입학시험을 처서 합격했다. 1984년. 제80기였다.
합격은 되었으나 아직도 영남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1년의 수업이 남아있었다. 설립자 신진수이사장님을 찾았다. 말씀드리니 나무라셨다.
일단 휴학처리를 해놓고 1년 후에 박사과정3년 수료 후에 전임교수로서 주 12시간의 수업을 월요일 주, 야간으로 수업하고 아무도 몰래 서울로 가서 신대원 수업에 참여하고 수요일 저녁에 내려오는 007 작전 이였다. 매주 목요일은 신일대학의 1학년 chaple(예배)가 강당에 있어서 모든 관리, 실무를 내가 맡아서 해야 하기에 서울에 있을 수 가 없었다. 희한하게도 신대원이 생기고 매주 목요일에 강당에서 드리는 chaple(예배)의 출석체크가 한해 동안만 출석체크가 없는 자율 이였다.
1학년을 어렵게 다니고 신진수 이사장님께 자수하니 깜짝 놀라시면서 휴직과 수업 없는 월요일은 주,야간 마음껏 강의를 하도록 선처를 허락하셨다.
휴직하고 서울에서 신대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금요일 수업마치고 내려와서는 1년은 노원교회 교육전도사로, 3학년 때는 성심교회 전도사로 봉사하면서 바쁘게 생활했다.
2학년 때는 울릉도에 관광안내 광고를 게시하여 10여명의 신대원생들을 인도하여 4박5일간 보람 있는 울릉도 여행을 다녀 오기도하고, 경상도출신 신대원생으로 <능금향우회>를 만들어서 친목과 박수암 교수님 신학박사학위 축하패 증정 등의 자리도 마련하고, 전두환대통령시대의 6.10만세 대모에도 서울시청 앞에서 참여하는 등과
신대원 졸업위원장으로 선출 되어서 <제주도졸업여행>을 130명을 인도하여 여행사에 맡기지 않고 미리 준비위원회 총무와 사전 답사하여 일정을 소책자로 만들어 3박4일간의 제주도 여행을 멋지게 하여 서귀포에서 교수님들의 회 대접을 받으면서 지금까지의 졸업여행 중에 최고의 멋진 여행 이였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대구 경신사진관의 사진사를 초청하여, 단체촬영이나 개인촬영등도 멋지게 하고, 기념품도 사진액자에 식자를 넣어서 대형수건과 함께 나누기도하는 등 보람이 있었다.
졸업논문은 주선애 교수님이 지도교수로 제출 심사 후, 졸업식에는 불참하였더니만 졸업식 순서에 졸업생대표로 학교에 기념품 증정순서가 들어 있었다고 했다.
3학년 1학기까지가 수업이고 2학기는 논문작성 제출 등 졸업준비 학기로서 수업이 없으므로 신일대학에 신진수이사장님께 요청하여 복직하고 교목실과 기획과장업무와 수업을 하면서 신진수이사장님의 일을 돕기도 했다.
6. 사회복지학석사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강남대학교 사회복지전문대학원 2년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심사통과 등으로 <사회복지학석사>를 취득하였다.
2001년에 경주성애원의 김용성 이사장님께서 모교인 강남대학교에서 [명예사회복지학박사학위]를 취득하실 때 초청받아서 참석하고는 대구에서 먼 거리이지만 감동에 의거 2002년에 입학시험을 치고 입학하게 되었다.
매주 수업에 참여하고 논문작성 제출심사와 종합시험과 영어시험 등을 거쳐서 쉽지 않게 <사회복지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특히 예비논문발표심사에서 지도교수는 통과라고 하는데 수녀출신 노처녀교수가 불통과라고 고집하여서 한학기를 늦어버리는 피해를 당하여 이를 항의하는 청원서를 교목실장께 드려서 해결하는 등의 어려움과 2급복지사자격증이 졸업과 함께 나오는데 선택과목1과목이 잘목 선택되어서 부족하여 2013년에 오산에 살면서 한 과목(아동복지론)의 수업비를 내고 야간에 대학부 학생들과 여교수에게서 수업하며 발표를 두 번이나 하는 등의 수업을 또 들어야했다.
7. 학위취득 및 축하연
한국방송통신대학 2년 행정학과 수업과 대학편입검정고시를 거쳐서 영남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3학년편입과 졸업(법학사). 동대학교 대학원의 법학과 진학과 졸업(법학석사). 영남신학대학 3학년 편입과 졸업. 영남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사법전공 입학과 수료). 박사학위과정수료 직후 장로회신학대학원 입학 및 졸업(교역학석사). 1990년 8월25일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0일후인 9월6일에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되여서 설립자 신진수이사장님께서 1990년 9월29일 당시 대구 파크호텔(현 인터불고)에서 100여명의 간부교수, 친지, 지도교수, 은사 등 은혜입은 분들을 모시고 감사예배 및 축하연을 배풀어 주셨다.
이후에 신일대학 전임교수 사퇴 후에 1999년 11월에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에서 [낙원교회]를 창립하여 개척교회 담임을 하면서 2002년에 늦게 강남대학교 사회복지전문대학원에서 수업하여 논문 제출하고 <사회복지학석사>를 취득하게 되었다.
8. 결론
고교시절 경주 반월성 [꿈의 동산]에 가끔 가서는 미래의 희망, 소원 중의 하나가 <대학졸업>이였다.
지나온 날들 중에 어렵게 살아오면서 과분한 석, 박사학위 등의 취득이었다. 어쩌면 처자식의 생활과 장래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계속된 공부하는 행군이었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도 없지 않다.
딸 민영이는 계명대학교 대학원 음악과에 피아노를 전공하고 개인 레선 등을 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보는데, 아들 민국이는 아이큐도 좋고, 매우 활동적이라 장래가 촉망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학원 등의 과외나 대구에서의 초교수업을 받지 못하고 고모할머니 모신다고 경주로 내려가서 변두리의 전원주택 200여평을 구입하여 4여년을 죽으라고 꾸미는 등에 열성을 붓다가 대학교수 사표후에 대구로 와서 어려운 가운데 개척교회를 하면서도 늦게 또 욕심내어서 용인의 강남대학 사회복지대학원까지 수업하러 다녔으니 자녀에 대한 제대로의 편하게 지도, 감독이나 아비로서의 할 바를 하지 못하고 목사로서 율법적으로만 지도하다 보니 불신자 가정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놀기 좋아하고 4년제 대학은 진학했으나 제대로 뒷바라지를 못해주다가 군대에 다녀와서 복학 중에 알바로 푼푼이 모아서 통신매장을 차려서 자립하면서 늦게 야간대학 사회복지상담과에 다니고 있다.
내가 이렇게 공부하기까지의 아내의 고생과 수고도 이루 말 못할 정도의 희생의 고마움도 있다. 사정상 보답도 못하고 세월만 흐르니 처, 자식에게 정말 미안함뿐이다.
그러나 나도 부모님 없이 공직과 전임교수, 목회 등을 하면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렇게 마음껏 공부하고 신학공부와 사회복지학석사, 법학박사 등의 학벌과 학위를 얻을 수 있음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은혜 일 뿐이다. 그래서 남은 삶속에라도 배운 달란트로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서 마다않고 봉사,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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