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은 당연한 일인데 피하려 하고, 직면해야 하는데 만나기 두려워하고, 어쩔 수 없는데 모면하고자 한다. 누구나 죽을 것을 알면서,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사람은 죽는다. 언제일지 모른다고 해도 거의 다 백 년 이내에 죽는다. 그리고 태어날 때 아무것도 없었듯이,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사람들은 흔히 앞에 예정된 일에 대해 준비한다. 출산을 앞두었거나, 결혼이나 승진이나, 하다못해 점심 약속이 있으면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한다. 그러나 아무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 언제일지 몰라서인가? 준비 할 것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그딴 것을 준비하면 재수없어 일찍 죽을까 걱정되어서인가? 나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통계청에서 낸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2012년에 우리나라에서 26만 7천명 남짓 사망하였다. 하루에 730명, 2분에 한 명꼴로 사망한 셈이다. 작년에 스승 두 분이 타계하셨지만, 내 삶에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러고 보면 작년 그 많은 죽음이 나에게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꽤 많은 사람이 “아, 그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과연 몇 년이 지나 1년에 한 번이라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전 세계 70억 인구 가운데 70명이나 될까?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 세상은 또 돌아가리라. 위인도 많지만, 한 사람의 죽음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기’가 십상이다. 거꾸로 내가 죽으면 과연 무엇이 의미가 있는가? 민족 화합이나 조국 통일부터 누가 대통령이 되든, Obama Care가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인가? 나의 죽음은 나에게 모든 것의 끝이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다.
죽음은 적극적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마치 ‘어둠’을 빛이 없는 상태로 정의하듯 죽음은 삶의 반대 개념으로만 정의할 수 있다. 살지 않았던 것은 죽을 수 없으며 일단 살았으면 반드시 죽는다. 요컨대 죽음은 ‘삶이 끝남’이다. 또는 모든 신체 기능의 영구 정지다.
엄밀하게 죽음의 정의(죽음이란 무엇인가?)와 죽음의 기준(죽음을 어떻게 판단할까?)은 다르다. 전통적으로 심장과 폐의 기능이 영원히 멎음[終止], 즉 심폐기능종지설을 따른다. 뇌사설이 추가되었지만 우리나라 법은 아직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지 않는 등, 약간은 모순이 있는 법을 운용하고 있다. 심장과 폐와 뇌의 기능이 영원히 멎은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생명 현상을 호흡으로 인식한 듯하다. 성경의 창세기도 숨을 불어넣어 아담을 만들었다고 하였고, ‘숨이 멎었다’는 표현은 사망을 의미한다. 숨을 쉬면 살았고 숨을 쉬지 않으면 죽었다. 숨을 쉬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 있을까?
심전도가 없을 때에 심장이 뛰는지는 어떻게 알았을까? 맥박은 수축기 혈압이 60mmHg 이하면 느끼기 어렵다. 청진기로 심장 멎음을 판단하게 된 것은 19세기 이후다. 뇌사설은 중환자의료가 발전하고 심장이식수술을 한 뒤 20세기 중반 이후에나 거론되었다. 심장과 호흡 기능의 종지는 달리 기준이랄 것이 없다. 의사의 오감(五感)에 맡긴다.
그러나 뇌사는? EEG(Sleep Electroencephalogram, 수면뇌파)가 없어도 여러 가지 반사기능과 자발호흡 유무 등이 뇌사의 판단 기준이지만, 뇌사만큼은 엄격한 기준을 마련하였다. 뇌사를 판단하는 목적은 일반적인 사망의 판정이 아니라 이식할 장기 구득과 연명의료의 중지이기 때문이다. 심장, 폐, 뇌 중에 어느 것이 먼저 멎을까? 당연히 사망원인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의사들은 사망하였는지를 사망하는 순간에 알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 단역은 그냥 추풍낙엽처럼 죽지만, 주인공은 죽는 과정이 길다. 할 얘기를 다 하고 고개를 툭 떨어뜨리면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고개를 툭 떨어뜨린 때는 아마도 의식을 잃은 순간일 것이다. 대개 가사(假死, Apparent death) 상태를 거친다. 이때에 의식을 잃고 거의 모든 주요 장기의 기능이 나빠진다. 의식을 잃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가사 상태를 거쳐 드디어 주요 장기(주로 심장과 뇌간)가 기능을 잃는다. 호흡을 멈추고 심장이 멎으면 즉 주요 장기가 사망하면 이를 개체의 사망으로 간주한다. 이를 임상적 사망(Clinical death) 또는 개체 사망(Individual death)이라 한다. 비록 임상적으로는 사망을 선고하였지만,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각종 장기나 조직, 세포는 아직 살아있다. 그렇기에 이식할 장기나 조직을 거두기도 한다. 평소에 산소 공급에 민감한 뇌 세포는 몇 분 사이에 비가역적(Irreversible) 변화를 겪지만 그렇지 않았던 뼈, 근육, 피부 등의 세포는 상당히 오래 생존한다. 정자(精子)는 개체 사망 후 며칠을 생존한다.
우리는 경험으로나 관습적으로 죽음은 어느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인식한다. 사망진단서에도 사망 기간이 아니라 사망시각을 기재한다. 일간신문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예보가 실리고 일기예보에는 반드시 일몰(日沒, Sunset) 시각이 나온다. 예를 들어 10월 3일 일몰 시각은 18시 13분이었다. 구름 없는 날 바닷가에서 해지는 광경을 바라보면 해가 수평선에 닿아서 완전히 잠길 때까지 몇 분이 걸리는데, 18시 13분은 어느 때에 해당하는가?
해가 지려면 몇 분이 걸리지만 우리는 관습적으로 해지는 시각을 정하였다. 죽음도 그러하다. 실제로 죽음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일정한 기간에 일어나는 과정이지만 관습적으로 어느 시각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인식한다. 죽음 과정이 언제부터 시작하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나는 의사소통(Communication) 여부가 중요한 기준이라고 본다. 사고로 갑자기 사망한 사람은 죽음 과정이 짧고 만성 질환으로 연명의료를 받고 있다면 그 과정은 매우 길다.
죽음을 거론하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죽음을 당하지 말고 맞이하자는 주장이 맞다. 철학자 한 사람이 죽음 준비를 4가지로 정리하였다. ⑴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 삶 살기, ⑵죽은 뒤의 자기를 위한 준비, ⑶죽은 뒤에 남을 사람들을 위한 준비, ⑷품위 있는 사망 과정마련하기 등이다.
부디 잘 살다가,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하자.
이윤성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장
첫댓글 이사장님 잘 계시죠. 반갑네요. 사모님도 잘계시죠. 멀리 떨어져서 만나기가 쉽지않군요
네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마음회가 더욱 번성할수 있도록 기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