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해인사에서 가장 소중한 건물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 을 소개한다.
대적광전 위에는 장경판전이 자리하고 있다.
장경판전은 대장경을 모신 건물로, 이 형국은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부처님께서 법보인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을 나타내므로 더욱 뜻깊다. 국보 52호로 지정된 이 장경각을 처음 세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진 때가 1397년임을 미루어 볼 때 지금의
건물은 조선초 무렵인 1488년 쯤에 세워졌으리라고 여겨지는데, 여러 차례에 걸친 부분적인 중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장경판전은 모두 네 동으로 되어 있다.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하고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전이라고 하는데, 이 두 건물을 잇는 작은
두동의 건물에는 사간판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이 장경각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조 초기의
건축물 가운데에서 건축 양식이 가장 빼어나서 건축사적인 면에서도 퍽 중요하게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이 건물은 대장경을 보관하는 데에 절대적인 요건인 습도와 통풍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도록
지어졌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장경각의 터는 본디 그 토질 자체도 좋거니와, 그 땅에다 숯과 횟가루와
찰흙을 넣음으로써, 여름철의 장마기와 같이 습기가 많을 때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또 건조기에는
습기를 내보내곤 하여서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되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 기능을 더 원활하게
하려고, 판전의 창문도 격자창 모양으로 하였으며, 수다라전의 창은 아랫창이 윗창보다 세배로 크게
하였고 법보전의 창은 그 반대 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아주 과학적인 통풍 방법으로서, 오히려
건축 방식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따라가기 어려운 우리 선조들의 슬기를 잘 보여 준다.
좀더 자세하게 알아보면
[해인사중수기]에 의하면 조선 세조왕의 비인 정희왕후가 1481년 뜻을 두어 중수 공사를 기획하다가 돌아가셨으므로 그 뒤 인수, 인혜대비가 학조 스님으로 하여금 감독케하여 1488년 (成宗 19)에 경판당 30칸을 다시 짓고 보안당(普眼堂)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경판전은 앞의 수다라장과 뒤의 법보전(法寶殿)이 나란히 있어 이들은 주칸이 각각 도리통 15칸과 보통 2칸(건평 165평)으로 합하여 30칸이 되는데 위의 기록이 두 동 가운데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두 동을 합쳐 도리통만을 합산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지금의 수다라장은 천계(天啓) 2년(1622)에 상량한 기록과 법보전은 1624년 중영(重營) 상량한 기록으로 보아 이때에 두 건물이 다시 중수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대적광전 바로뒤 한층 높은곳에 위치한 장경판전 입구
옆에서본 장경판전
계단을 올라가면 수다라장 건물이 있다.
수다라장은 정면 15칸 중 가운데칸에다 출입을 위한 개구부를 만들었는데 앞면에는 상하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곡선으로 된 판재를 고정시키어 마치 종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곡선의 뚫린 문틀이 아름답다. 그 안에 들어가면 좌우 양측으로 경판장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을 굳게 닫고 살틈으로 보면 경판을 판가(板架)에 잘 쌓아 보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후면의 개구부는 그냥 상하 인방과 문설주만을 짜아 둔 채 문은 달지 않고 있어 최대한의 통풍을 고려한 것 같다. 그리 높지 않은 기단 위에 대체로 네모지거나 자연석 위를 면바르게 한 초석을 두어 평면으로 보아 앞뒤에 갓기둥열과 중앙에 높은 기둥열을 배치한 형식이다. 갓기둥은 두리기둥으로 약간의 배흘림을 두어 오래 된 시대의 형식을 보이고 있는데 높은 기둥은 네모 기둥으로 배흘림이 없다. 건물의 가구(架構) 형식은 되도록 간략한 구조를 보이어 보관 창고로서의 기능만을 충분히 발휘하려 한 것 같다. 곧 갓기둥 머리에는 간단한 초익공(初翼工)을 짜아 대들보를 받치고 이 대들보는 중앙에 배열되어 있는 높은 기둥의 옆구리에 고정시켰다. 이와 같은 방법은 반대쪽에서는 같아 종단면으로 보아 대칭을 이룬다.
높은 기둥 좌우로 걸쳐 댄 대들보 위 가운데쯤에 각각 동자 기둥 (童子柱)을 세워 종(宗)보를 받쳤는데 높은 기둥의 보머리가 이 종보 중앙 밑을 받치고 있어 구조는 더욱 견고함을 보인다. 높은 기둥 머리에는 주두와 첨차, 소로 등이 간단히 짜여 장식을 이루고 동자 기둥 밑에는 복화반(覆花盤)형의 받침재를 고정, 보강시켰으며 기둥 머리 부분에는 주두와 초공을 짜아 굴도리와 함께 종보머리를 받들었다.
모양은 약간 다르지만 이와 같은 형식은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대공에서도 흡사하다. 다만 여기서는 종도리를 받드는 솟을 합장(人字形 대공)이 있어 오래 된 시대의 특성을 보이는데 이러한 솟을 합장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볼 수 있고 남아 있는 고려 및 조선 초기의 목조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이렇게 보아 전체적인 가구 형식은 5량집 위에 짧은 서까래와 긴 처마서까래를 걸친 홑처마집의 우진각을 한 건물이다.
공포는 갓기둥 위에 짜인 것으로만 볼 때는 보머리에 주두를 올려 놓고 익공초를 그 밑에 엇물려 그 위에 보머리가 포개지도록 결구하여 전형적인 초익공 형식이긴 하지만 동자 기둥 또는 대공에 붙어 있는 초공(草拱)이나 높은 기둥 머리에 짜은 첨차 등은 마치 주심포(柱心包)형식의 초기적 수법을 표현하여 이를 주심포의 분류로 설명하려는 자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건물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능은 경판을 보호하고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적당한 환기와 온도로 경판의 부식을 방지하여야 한다. 따라서 건물의 통풍이 잘 이루어지도록 건물 외벽에 붙박이 살창을 두었는데 벽면의 아래위와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공기가 실내에 들어가서 아래위로 돌아 나가도록 계획한 절묘한 기술을 발휘한 것이다. 곧 건물의 전면 벽에는 양측 기둥 사이에 중방을 걸치고 붙박이 살창을 아래위로 두었는데, 아래 창구는 폭 2.15미터 × 높이 1.0미터=넓이 2.15평방 미터이고 위의 창은 1.2 × 0.44=0.528평방 미터이다. 그러므로 아래창이 위창보다 약 4배가 크다. 그리고 뒷면은 아래창이 1.36 × 1.2 = 1.63평방 미터이고 위창은 2.4 × 1.0 = 2.4평방 미터로 위창이 아래창보다 1.47배가 크다. 이러한 차이는 동북쪽에 놓인 법보전에서도 볼 수 있어 이 건물의 정면 0.52평방 미터로 약 4.6배가 아래창이 크고, 건물 뒷면은 아래창 1.8 × 0.9 = 1.62평방 미터와 위창 2.2 × 1.1 = 2.42평방 미터로서 약 1.5배가 위창이 더 컸다. 이러한 계획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건물 뒤쪽에서 내려 오는 습기를 억제하고 건물 안의 환기를 원활히 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다만 여기서 건물 뒷면의 하부의 창틀에는 문틀의 연귀맞춤을 정식으로 짜지 않고 문선을 아래위로 꽂아 맞춘 후대에 수리를 가한 듯하여 약간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의 바닥도 맨흙바닥으로 두고 또 천장도 반자가 없이 지붕 구조가 보이는 연등 천장을 하고 있어 습기가 바닥과 지붕 밑에서 조정이 되도록 한 것으로 생각된다. 경판가(經板架)는 굵은 각재를 이용하여 견고하게 짜아 경판을 세워서 두 단씩 놓이도록 단을 두고 공기 유통이 잘 되도록 배려하였다.
법보전
이 건물은 수다라장에서 약 16미터 동북쪽에 떨어져 앞의 건물과 같은 규격으로 나란히 놓여 있고 중앙칸 위에 '法寶殿(법보전)' 이란 현판을 달고 그 아래 분합 살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 중앙칸은 안쪽 높은 기둥열이 있는 곳까지 벽을 쳐서 비로자나불상과 양측에 문수, 보현의 협시 보살을 봉안하여 예불을 드리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경판장에 출입하는 문은 수다라장과는 달리 분합문이 있는 칸의 좌우 양 협칸에 두 짝 판문으로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건물의 규모나 가구 형식은 수다라장과 같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 익공 쇠서가 전면에서는 몽땅하게 부리가 잘렸고 측면에서는 쇠서 부리가 남아 있었으며, 뒷면에서는 경사지게 직선으로 잘려 있어 수리할 때 에 변형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 붙박이 살창도 수다라장의 것과 비슷하였지만 그 규격은 약간 차이가 있었다.
동서사간전
수다라장과 법보전 사이 서북 끝과 동북 끝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는 향으로 세워진 작은 경판장으로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 맞배3량집이다. 이들 건물 역시 익공형 주심포계의 집이지만 익공 쇠서가 수다라장과 같이 보머리와 붙지 않고 떠 있기 때문에 좀더 주심포에 가까운 형식이다. 또 벽체 역시 출입을 위한 판물가 살창으로 되어 환기를 원활히 하도록 하였다. 이상 해인사 대장경판전은 4동으로 국보 제 52호로 지정되어 있고 이 안에는 국보 32호인 고려대장경판 81,258판(1962년 12월 국보 제32호로 지정, 최근 해인사 대장경판 보존관리 시스템 구축사업을 통해 경판의 수가 81,350매로 조사되었으며, 이에 대한 경판의 수량에 대해서는 별도의 정밀조사, 연구를 통해 규명할 예정이다.) 및 국보 제 206호인 고려각판 2275매를 보존하고 있다.
앞쪽이 수다라전, 뒤쪽이 법보전이다.
원활한 통풍과 습기제거를 위해 아래와 위창문의 크기를 각각 1:4 정도의 면적비를 갖게 설계한 것이 지극히 과학적이다.
판전 건물은 그 중요성으로 인해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그 하나는,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경판을 봉안하기 때문에 사격(寺格)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만 한 곳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해인사의 일주문, 봉황루, 해탈문, 구광루(九光樓)를 차례로 거치고 부처를 모신 대적광전(大寂廣殿)을 지나 해인사 경내의 맨 뒤쪽, 가장 높은 곳에 판전 건물이 자리한다. 이는 곧 법보사찰 해인사의 상징인 것이다. 다음으로 판전은 그 건물이 자리할 입지와 건물 자체의 과학적·기술적 문제를 해결하여 경판을 잘 봉안할 수 있도록 처리됐다는 점이다.
판전 건물은 이 문제를 훌륭하게 처리해 오고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건축적 가치 또한 높이 평가받는다. 우선 판전 건물의 입지를 보면, 해발1430m인 가야산의 중턱에 해당되는 약655m 높이에 서남향으로 앉아 있다.
판전 주변 지형은 북쪽이 높고 막혀 있으며, 남쪽 아래로 열려 있다. 따라서 남쪽 아래에서 북쪽으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이 자연스럽게 판전 건물을 비스듬히 스쳐지나게 되어 있다. 특히 습기가 많은 여름 동남풍은 판전을 타고 돌아 옆으로 흘러나간다. 또한 이지점은 계곡에서 불어온 공기의 습도가 어느 정도 떨어지는 높이기도 하다. 이는 건물 내부의 적절한 유지와 원활한 통풍에 직결된다.
바람골에 비켜서 있는 판전 건물의 좌향은 그 어느 산봉우리와도 일직선의 축을 형성하지 않는다. 광역(廣域) 지리조건으로 보아 해인사는 가야산의 품에 안김으로써 명찰이 되었지만, 주변 소역(小域) 지리조건은 풍수지리적으로 훌륭하다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해인사가 빛나는 것은 그 자체의 입지조건을 잘 활용하고 비보한 데 있다.
한 예로 대적광전 앞의 삼층탑은 마당의 중앙이 아니라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는데, 이는 판전 옆으로 통하는 바람골인 좌청룡이 허(虛)하기 때문에 탑을 배치함으로써 풍수지리적인 균형을 맞춘 것이다. 이외에도 판전 건물은 바람이 스쳐지나가도록 서남향을 하고 있는데, 서남향은 건물 주변 어느 곳에도 영구히 음영이 생기지 않게 하는 배치기도 하다.
판전 건물 자체의 과학적·기술적 문제 해결을 살펴보면, 수다라장과 법보전 두 건물의 각 벽면에는 위아래로 두 개의 창이 이중으로 나 아래창과 위창의 크기가 서로 다르게 돼 있다.
건물의 앞면 창은 위가 작고 아래가 크며, 뒷면 창은 아래가 작고 위가 크다. 이것은 큰 창을 통해 건조한 공기가 건물 안으로 흘러 들어오게 함과 동시에, 가능한 한 그 공기가 골고루 퍼진 후에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경판의 변형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온도, 습도, 통풍 등 기후의 조절이 중요하다. 건물 내부의 통풍이 원활해야 하며, 낮과 밤, 계절에 따른 온도와 습도의 변화는 적어야 하고, 실내에는 항상 일정한 공기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을 판전의 창은 인공이 아닌 자연적인 기후 조절로 해결하고 있다. 이외에 숯과 횟가루와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놓은 판전 내부의 흙바닥은 습기가 찰 때는 습기를 내보내며 자연적으로 습도를 조절해 경판의 변형을 줄일 뿐만 아니라 해충의 침입도 막는다. 경판을 진열한 판가(板架)의 진열 장치 역시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만들어졌다.
원래 판전 내부는 두 줄의 판가가 동남에서 서북 방향으로 가운데와 뒤편에 벽면과 평행을 이루며 길게 서 있다. 전면은 벽을 따라 비워 놓은 공간인데, 이곳은 인경(印經)작업을 하는 장소다. 건물 앞면의 아래창이 큰 것은 통풍뿐 아니라, 대장경 인경 작업을 하는 데 충분한 채광을 얻기 위해서기도 하다. 또 경판이 뒤흔들리지 않도록 양 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붙였는데, 손잡이 역할을 하는 이 마구리 부분은 두껍고 글씨를 새긴 경판 부분은 얇다.
마구리 부분보다 얇은 경판과 경판 사이의 공간은 공기가 아래위로 자연스럽게 유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모든 경판이 공기에 접하도록 돼 있는 셈이다.
창을 통하여 들어온 공기는 건물 내부에서 앞뒤로 유통하고 또 판가에서는 아래위로 흐르기 때문에 판전 내부의 온도와 습도는 자연 고르게 분포된다. 이런 과학적 처리야말로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자연을 이용한 하이테크다. 판전 건물의 형상 및 배치 방식에 깔린 엄격함, 치밀함, 간결함, 소박함의 독특한 구성미와 아름다움은 이러한 과학성과 합리성에 기초한다
대장경 진본
세계문화유산 인증서
건물뿐만 아니라 내부 판전의 배치에도 과학이 숨겨져 있다.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간행된 구판대장경은,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무렵으로서는 중국의 장경에 견주어 내용이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된 이 구판 대장경은 고종 19년인 1232년에 몽고군의 방화로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뒤인 1236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하여 1251년에 그 완성을 보게 되니, 16년에 걸친 이 큰 불사의 결실이 바로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이다.
대장경의 경판에 쓴인 나무는 산벚나무 등으로 , 그것을 통째로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그었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고, 다시 대패로 곱게 다듬은 다음에야 경문을 새겼는데, 먼저 붓으로 경문을 쓰고 나서 그 글자들을 다시 하나하나 판각하는 순서를 거쳤다.
대장경을 만드는 데에 들인 정성과, 한치의 어긋남과 틀림도 허용하지 않은 그 엄정한 자세는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도 없거니와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곧, 글자를 한자씩 쓸 때마다 절을 한번 하였다고 하니, 그렇듯이 끝간 데 없는 정성을 들임으로써,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의 솜씨로 쓴 무려 52,382,960개에 이르는 구양순체의 그 글자들이 한결같이 꼴이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마치 한 사람이 쓴 듯이 일정하며, 한 글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린 자가 없이 완벽한 장경을 이루고 있다.
경판의 마무리까지 세심하게 손을 본 이 대장경은 그 체제와 교정이 정확하고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하여서도 그렇지만, 이미 없어진 거란장경의 일부를 비롯하여 중국 대장경에는 없는 경전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도, 중국 최고의 대장경이라고 일컬어지는 만력판이나 또 후세에 만들어진 어떤 대장경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빼어남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고려대장경은 특히 근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신수대장경을 비롯한 현대의 불교 대장경들의 으뜸가는 보기가 되기에 이르렀다.
대장경을 만들 무렵에 고려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오랑캐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임금과 귀족과 백성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다시 이루어 놓은 것이 팔만 대장경이다. 오늘날 몇몇 경솔한 사학자들이, 칼과 창을 들고 오랑캐와 맞서 싸우는 대신에 대장경을 만들기에 힘을 쏟은 그때의 염원을 무기력한 시대사조로 그릇 되이 평가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대장경 간경 사업은 역사의 맥을 바로잡아 이어 가려는 민족의 염원이 그토록 간절하고 컸다는 것을 드러내는 민족 의식의 총화라는 데에서 그 의미가 빛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세계 정신사의 산맥에 우뚝 솟아난 한 봉우리이기도 하며, 아울러 세계의 인쇄술과 출판물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한 것이다.
대장경 판각에 앞서 그 내용을 교정하고 새로이 편찬하는 책임자로는 당대에 화엄학승으로 명망이 높았던 개태사(開泰寺) 승통 수기(守其)대사가 맡았다. 그는 30여 명의 학승들을 거느리고 팔만대장경 경문을 교정할 때 기존에 인출해놓은 우리의 초조대장경본과 송나라 대자경인 북송관판대장경본, 그 사이에 나온 거란대장경본을 엄밀히 비교 · 대조하여 착오를 상세히 정정하고 빠진 부분을 보완했으며, 그 동안 각 나라에서 모은 독자적인 불전들과 그밖에 『개원석교록』과 『정원석교록』 같은 일급 불전목록을 참고자료로 삼아 완벽한 대장경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수기대사는 법량이 광활하고 법안이 명쾌하여, 대장경을 교정봄에 있어 각종 자료들을 변증하고 옥석을 가리는 것이 헌헌장부 칼 휘두르듯 막힘 없이 자재하여,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기가 마치 자신의 저술을 검열 보듯 했다. 수기대사는 그 교정의 엄밀한 과정을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30권을 따로 만들어 팔만대장경 안에 수록하였는데, 이 『교정별록』은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정본으로 하게 된 경위를 상세한 근거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어서, 그 자료적 가치가 절대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에서는 대장경 판각을 위한 경판 재료를 일찍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기록에는 없으나 대장도감이 설치되고 2년 뒤에 본격적인 판각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미루어, 경판 재료는 적어도 그 5년 전인 1234년, 그러니까 강화 천도를 결행한 지 2년 뒤인 고종 21년부터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판을 만든 재료는 거제도, 완도, 제주도, 등지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白樺木)로서, 거제목이라고도 부르는 것이었다.
만드는 과정을 추정해보면 하나의 완전한 경판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 했는지, 그 대규모의 까다로운 공정을 어떻게 하나처럼 완벽히 수행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경판 자체가 부패하거나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고 나무 재질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원목을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구어 두었다가 꺼내어 판자로 짠 다음, 다시 그것을 소금물에 삶아내서는 그늘에 말린 뒤 깨끗하게 대패질하여 판을 만든다. 완성된 밑판은 판각하는 곳으로 옮겨지고, 판 각수들은 여기에다 편찬 교정이 끝난 경의 내용을 구양순(歐陽詢)필체로 경판 수치에 알맞게 정성껏 써놓은 사경원(寫經員)들의 판하본을 붙여 한자한자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는다. 그런 다음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양 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붙이고 옻칠을 하고 마무리 손질을 가한 다음, 마지막으로 네 귀에 동판(銅版)으로 장식하여 한 장의 경판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렇듯 정성들여 세심하게 제작한 까닭에 7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경판들 모두가 썪는다든가 좀먹는다든가 뒤틀리는 일 없이 온전히 보전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판은 가로 2척 3촌(약 69.7cm), 세로 8촌(약 24.2cm), 두께 1촌 2분(약3.6cm)이며, 약3.5kg쯤 무게가 나간다. 판면은 가로 1척 5촌(약 45.5cm), 넓이 7촌5분(약 22.7cm)으로 위아래에 경계선을 그었고, 한 면에 23행씩 행마다 14자씩 앞 뒤 양면에 444자쯤 새겼다. 새긴 글자의 크기는 사방 5분(약1.5cm)쯤이다. 판의 뒷면 끝에는 새긴 경의 제목, 장수(張數), 천자문 차례에 따른 함이름을 새겼고, 경판 양쪽 끝 각목에도 같은 표시를 새겨 정리하고 찾기 쉽게 해놓고 있다.
이렇게 조판하여 완성한 고려팔만대장경의 수량은 정확히 얼마나 될까? 이게 관하여서는 조사자들에 따라 파이가 적지 않은 실정이고 정설이 없다. 일제시대 총독 테라우치가 일본 천용사(泉湧寺)에 헌정하려고 인경(印經)할 때 조사한 것이 표준으로 여겨져왔는데, 그에 따르면 팔만대장경의 종수는 1,512종에 6,819권, 총81,258매의 경판이 있는 것으로 조사 보고되어 있다. 고려팔만대장경 자체의 대장목록에는 책종과 그에 따른 권수, 장수만 표시되어 있고 총계가 없다. 대장목록에 따라 계산하면 1,524종에 6,569권이 되는데, 목록과 각 경판의 실제 수량에 차이가 다소 있는데다 보유장경까지 넣고 있어서 혼선이 생기고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총괄하여 펴낸 <민족대백과사전>에는 팔만대장경의 수량을 정장 1,497종에 6,558권, 보유정장(부장) 4종에 150권, 총 경판 81,258매로 적고 있다. 비교적 최근의 조사 보고로는 경북대학교 서수생 교수의 것이 세밀하데, 그는 팔만대장경 정장 수량을 1,524종에 6,606권, 78,500매의 경판으로 보고, 보유장경판 17종 238권, 2,740매의 경판을 더하여 총 1,541조에 6,844권, 81,240매의 경판에 160,642장의 장수를 가진 것으로 자세히 내역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의 종수만을 두고도 의견이 분분하다. 1960년대 중반에 인출한 팔만대장경을 정본화하여 고유번호까지 매겨 세계 각 나라에 보낸 동국대학교 팔만대장경 영인본에는 팔만대장경의 고유번호가 1514까지 매겨져 있다. 말하자면 1,514종의 불전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북한판 팔만대장경 해제는 팔만대장경의 순서와 내용을 그대로 따라 번호를 붙여가며 각 경의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하여 풀이한 것인데, 여기서는 1537로 끝을 맺고 있다. 서수생의 1,541종은 보유경판의 『대장일람』, 『대장일람집목록』까지 포함하고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동국대 영인본 판의 고유번호를 보면 납득가기 힘든 부분이 있다. 438권째의 『불설마니라단경』부터 뒤의 7종이 같은 438의 번호 아래 들어가 있고, 1224 번호에는 12종이 들어가 있으며 1228번에는 3종이, 1230에는 5종이, 1238에는 2종이 같은 번호 밑에 들어가 있다.(다른 나라 대장경에서는 이들이 각각 고유한 종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들을 하나의 독립된 종으로 보아 순서를 매긴 북한판 해제본의 방식이 외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제반 사정을 고려해보면, 우리 팔만대장경의 수량을 1,538종(북한판) 해제본 종수 1,537종에다 그들이 빼놓은 보유장경 목록집을 더한 것)에 6,844권, 81,240매의 경판으로 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자나 대중들을 위해서라도 정확한 기준에 의거하여 공식적으로 인정할 만한 수량 결정이 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온 나라가 몽고군의 창칼 아래 짓밟히고 난을 피해 도읍을 강화로 옮겼던 피난 시절에 그 많은 불전들을 모아 정리 · 교정 · 편찬을 해내면서, 또한 판목을 다듬고 경을 쓰고 글자를 하나하나 새겨넣어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이루어냈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더구나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기 위해 수백 명의 명필과 조각사들이 동원되어 일했을 터인데도, 경판의 그 수백만 글자가 틀린 자나 빠진 자가 없이 바르게, 그것도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필체가 한결같음을 보면 신기를 접하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 김정희 같은 분도 팔만대장경을 보고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요, 마치 선인들이 쓴 것 같다”고 찬탄해마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16년의 긴 세월을 거쳐 마침내 고종 38년(1251)에 고려팔만대장경은 완성을 보게 되었다. 총1,538종의 엄정한 불전이 권수로는 6,844권으로, 내용을 빽빽이 앞뒤로 아로새긴 경판으로는 총 81,240매에 이르러 거대한 대장경으로 완비된 것이다.
이토록 정성을 다하여 완성한 귀중한 법보를 처음에는 강화 서문밖에 판당(判堂)을 짓고 모셔두었다가 오래지 않아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모셔두었다. 강화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고에 항쟁하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직후에 당시 최고 통치자였던 최우(최이崔怡라고도 부른다)가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심혈을 기울여 세운 시찰로서, 송광사와 더불어 고려의 2대 선찰로 손꼽히는 큰절이었다.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대장도감도 바로 이 선원사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충렬왕 대에는 원나라에 대하여 일어난 반란군이 고려로 쳐들어왔을 때 왕이 피난하여 임시 궁궐로 쓰기도 했던 곳이다.
지천사에 모셔졌던 팔만대장경은 여름철 우기가 지나고 가을 들어 곧바로 다시 해인사로 옮겨간 것으로 보이는데, 정종 원년 정월초 9일조 기록에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해인사에서 장경을 인출하는 승려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게 하는데, 태상왕(은퇴한 태조 이성계)이 사재로 대장경을 인출하기 위하여 동북백(함경도)에 조와 콩 540석을 단천 · 길주의 두 창고에 납부하고 그것으로 해인사 근처 고을에 있는 쌀과 콩을 그 수효만큼 교환케 하였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바로 그 해 말에 해인사로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대장경판을 옮기는 행렬 앞에는 향로를 든 동자와 함께 스님들이 독경을 하며 길을 열었고, 그 뒤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소중하게 포장한 경판을 소달구지에 싣거나 지게에 이거나 머리에 이고 행렬을 이루어 나아갔을 것이다. 이행렬은 서울 지천사에서 시작하여 장호원과 충주를 지나 조령 · 문경 · 점촌 · 구미를 통과하여 장경나루를 거쳐서 해인사 판전에 도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설에는 서울에서 한강에 배를 띄워 대장경판을 싣고 서해 바닷길을 통해 남해를 돌아 낙동강 줄기인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마을에 이르러, 그곳에 배를 대로 해인사까지 운반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 개포마을의 이름도 ‘경을 풀었다’는 뜻에서 나온 ‘개경포(開經浦)’가 전화된 것이라고 한다.
팔만대장경이 강화에서 머나먼 합천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지면서, 해인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법보종찰(法寶宗刹)로 자리잡게 되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왜구들이 고려 후기에 들어와 극성을 부리게 되는데, 강화에도 여러 번 출몰하면서 노략질을 자행한 사실이 나와 있다. 고려말에 왜구 소탕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어느 정도 안정을 기할 수 있었으나, 팔만대장경을 강화에 그대로 봉안하는 것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된 해인사는 위치상 외적의 침입이 미치기 어려운 곳인데다 그 이전 고려시대에도 <고려왕조실록>를 보관했던 사고지였고, 화엄사찰로서 교종의 뿌리가 깊었기에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조선 태조는 해인사를 팔만대장경의 최종 보안지로 확정하였다.
팔만대장경이 보안되어 있는 해인사 대장경판전은 같은 양식과 규모의 60간짜리 165평씩의 두 긴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 판고로서, 국보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 북쪽 건물은 법보전이라 부르는데,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 기능을 위해 일체의 장식을 가하지 않은, 소박하면서도 전통 과학의 우수성이 독창적으로 발휘된 건물이다.
세 가지 재앙이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는 해인사는, 그러나 내부에서 대규모의 화마(火魔) 재앙을 맞곤 했다. 조선시대에 7번이나 대화재가 나서 그때마다 해인사 건물들 대부분이 소실되어 힘들여 중창해야 했다. 하지만 이 대장경판전만은 조선 초기 태조대에 지어진 뒤, 조선 성종 19년(1488) 인수대비와 인혜대비가 정희왕후 윤씨의 뜻을 받들어 30간을 증개축한 일이 있을 뿐, 대화재 속에서도 조금도 다치지 아니하고 기둥 한 군데 기울어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판가(板架)의 진영장치뿐 아니라 주변 환경과 공기의 흐름을 정확히 이용하는 통풍방식, 방습을 위한 배부 구성, 인경작업할 때의 편의성 등이 완벽히 조정되어 있어서 가히 전통과학의 보고라 할 만하다.
팔만대장경이 위기를 맞은 것은 대화재 때만이 아니었다. 선조 연간 임진년(1592)에 왜군들이 대규모로 침입, 부산포에 상륙하여 이후 전국을 병화로 몰아 넣었을 때 팔만대장경은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빠졌다. 임진년 4월 13일에 침공한 왜군은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15일에는 동래, 17일에는 양산 · 울산, 19일에는 밀양 들로 파죽지세 진군하여 21일 창원 · 창녕으로 휩쓸고 들어와 거창을 점령하고 지례를 지나 27일에는 해인사 코앞인 성주를 점령해 들어 왔다. 불과 보름 만에 경상도 전역의 주요 읍성이 왜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것이다. 왜군이 거창이나 성주에서 한발 옆인 합천 해인사로 들어와 팔만대장경을 약탈하는 것은 이제 죽먹기보다 쉬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조선 초기부터 우리 팔만대장경본은 물론 그 경판 까지도 줄곧 눈독들이고 요구해 오고 있었던 터였고, 조선의 우수한 문화재와 장인들을 우선적으로 약탈하거나 파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거의 절망적인 지경에서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것은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한 거창의 김면(金沔)장군, 합천의 정인홍(鄭仁弘)장군이 이끄는 경상도 의병과 소암(昭岩)대사가 이끄는 해인사 승병이었다. 망우당(忘憂當)곽재우는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의령에 묻혀 살다가 41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을 맞자, 개전10일 만인 4월 24일 가솔 50명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낙동강 지류로 움직이는 왜군의 유통로를 초반에 막아버렸다. 그러자 곧 거창에서는 의병장 김면이, 합천에서는 정인홍이 의병을 일으켜, 주요 읍성을 점령한 왜군의 준동을 갸야산에 의지하여 막아냈다. 송암 김면과 내암 정인홍은 모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중앙 벼슬자리를 사퇴하고 고향에서 후진을 가르치고 있다가 임진왜란을 맞았다. 소암대사는 휴정(休靜) 서산(西山)대사의 제자로서 임진왜란을 맞자 승병을 모아 해인사를 수호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성주를 점령한 왜군들 일부가 해인사로 접근하자, 승병들을 이끌고 절로 들어오는 앞의 큰 산고개를 막아 감히 넘보지 못하게 했다(지금도 그 산고개를 왜구치 倭寇峙라 부른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힘을 합쳐 5,000의 의병으로 낙동강 동쪽 현풍 · 창녕 · 영산 등지의 왜군 제9군 11,500명과 대결, 이들을 영산성으로 몰아붙이고는 다시 성주성으로 쫒아냈고, 김면 의병군과 정인홍 의병군은 합동으로 손금보듯 잘 아는 고향 땅 지세를 방패삼아 성주성에 몰린 2만 왜군의 발목을 묶었다.
성주성을 둘러싼 8월과 9월, 12월의 대규모 의병 공격에 몰린 왜군은 이듬해 1월에 개령 · 선산 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됨에 따라 가야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가야산을 의지한 경상도 의병이 펼친 전대미문의 유격전쟁과, 해인사를 목숨 걸고 지키려는 승려들의 헌신 덕분이었다. 의병장 김면 장군이 이듬해인 계사년(1593)에 전장에서 과로로 숨을 거두며 남긴 유언시는 당시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던 우리 조상들의 절절한 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 지금까지 나라가 있는 줄 알았지, 이 한 몸이 있는 줄은 몰랐네(兄知有國 不知有身)"
치욕적인 일제시대를 지낸 뒤, 팔만대장경이 또 한 번 중대한 소실 위기를 맞게 된 것은 민족 상잔의 비극이 전개되었던 6.25 전쟁 때였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내려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다, 인천상륙작전을 기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3개월 만에 북쪽으로 퇴각하게 되었는데, 그때 낙오된 인민군 약 900명이 가야산에 숨어 가야산 줄기와 계곡의 요처인 해인사를 중심으로 주변 숲을 진지화해서 소탕작전을 펴는 국군과 맞섰다.
운명의 기로는 1951년 9월 18일에 일어났다. 토벌을 진행하던 육군이 공중지원을 요청하여 해인사 주변의 공비를 폭격해달라는 주문을 낸 것이다. 당시 김영환 대령을 편대장으로 한 4대의 전폭기는 각각500파운드 폭탄 2발씩과 5인치 로켓탄 6발씩을 장착하고 있었고 특히 편대장 김영환 대령의 1번기는 폭탄대신 750파운드짜리 네이팜탄을 적재하고 있어서, 투하했다 하면 해인사 전체가 불바다가 될 판이었다. 인민군의 소재지를 파악한 정찰기가 백색 연막탄을 투하해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을 폭격지점으로 가리키자, 즉각 미군사고문단에서 폭격 명령이 시달되었다. 그런데 1번기를 기수로 해서 4대의 전폭기가 해인사로 꽂혀가던 그 순간, 갑자기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급상승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게 폭격 중지를 명령했다. 김 대령은 편대장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 것,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해인사 밖 능선에 숨은 인민군 진지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인민군의 지상포화가 교차하는 속에 기총소사로 공격하던 비행편대에 다시 정찰기로부터 폭격 재촉 명령이 떨어졌다.
“해인사를 네이팜탄과 폭탄으로 공격하라.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명령을 들은 기장들은 인민군들이 공격을 피해 해인사로 몰려가고 있으니 빨리 폭격을 하자고 편대장에게 재촉했다. 그러나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날카롭게 명령을 뒤집었다.
“각 기는 일체 공격을 중지하고 내 뒤를 따르라.”
그러고는 기수를 돌려 몇 바퀴 선회하다가, 몇 개 능선 뒤의 성주쪽 인민군을 폭격하고 기지로 돌아갔다.
그 날 바로 미군사고문단이 윌슨 장군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명령불복종을 항의하자, 이 대통령은 크게 분노하여 김 대령을 총살이 아닌 포살(砲殺)에 처해야 할 것이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때 배석하고 있던 당시 공군참모총장 김정렬은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이 명령불복종 행위를 겨우 무마할 수 있었다. 그는 미군사고문단의 해인사 폭격에 맞섰던 김영환 대령의 형이기도 했다.그 날 저녁, 미군사고문단 책임자가 국군전대본부를 방문하여, 김영환 대령이 이끄는 편대원 전원과 작전참모 장지량 중장 등과 한자리에 모여 군인으로서 가장 큰 죄인 명령불복종의 경위를 추궁했다. 이에 대하여 죽기를 각오한 김영환 대령의 대답은 이러했다 한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라 생각했기 떄문이 아니었습니까 · 뿐만 아니라 영국이 인도를 영유하고 있을 때, 영국인들은 차라리 인도를 잃을지언정 세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고 하지 않아습니까 ·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에게도 인도하고도 바꿀 수 없는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판이 있습니다. 이를 어찌 유동적인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
투철한 군인으로서 죽기를 각오하고 민족의 유산 팔만대장경을 지키려 했던 김영환 대령은 그 뒤 1955년 강릉 지구에서 순직했다. 민족적 자긍심과 참된 기개를 가진 김 대령이 거기 없었던들, 팔만대장경은 일순간에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은 완성된 뒤 현대에 이르기까지 750여 년이라는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전란고 화재를 맞았음에도, 그 대규모의 전질 모두가 마치 어제 만든 것처럼 깨끗하게 보안되어 있으니 실로 신비롭고 감동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팔만대장경에 대해 알아갈수록 참으로 귀중한 우리문화유산이라느걸 느낄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