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현대시의 증인,호세 이레르로의 “환각의 시집”,외
José Hierro:“Libro de alucinaciones” y otros poemas ( 1964-93)
민용태
이에르로는 60년대를 풍미하던 사회참여시(poesía social)의 시인이면서,안또니오 마차도 류의 “내적 체험의 시인”(poeta intimista)으로 평가된다. 기타 다른 예술의 소양도 풍부하여,미술,음악 평론도 겸한다.그러나 비교적 근래에 발표된 발표된 “확각의 시”를 포함하여,오늘 3판까지 나오고 있는“시선집”(“Antología”,Visor Libros,Madrid,1980,1985,1993)을 보면 그는 서반아 오늘의 시를 대변하는 “상상의 시풍”(poesía imaginativa)이 일반적 성향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위 문학이 예술과 삶을 최대한으로 접근시킬려고 노력했다면,이에르로는 예술보다는 인생,시적 기교보다는 삶의 맥락을 중시한다.그의 시에는 일상성과 이야기적 바탕이 있다.그러나 동시에 이런 요소들은 시인의 독특한 부조리적 현실관에 의하여 체색된다.이에로의 시가 환각적, 환상적인 것은 이런 현실성에 바탕한 상상의 비약이 돋보이기 때문이다.“나에 대하여 내가 아는 모든 것”(Cuánto sé de mí,1957)이라 이름한 그의 시집에는 그의 이런 시학이 나온다:
봄의 일화
삶에서 노래가 나온다.
노래한다는 것은 포도에서
포도주가 나오는 것 같은,
술잔 속에 노랗게, 또로록 소리내며
떨어지는 가을 삶:포도송이를
밀어내는 손.
술을 마시면,노래는
사라져간 날들을 일으켜 세운다.
우리가 우리였던 그 모든 것의
부활이 노래에서 시작된다.그
부활, 어둠의 가장자리를 돌아
인생으로가는 그 길목...
(오늘의 삶 속에
젖어,어제의 삶을 만진다.)나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누가 지금 이런 생각들을
내게 불러주고 있는지...
(중략)
삶에서 노래가 나온다.
노래한다는 것은 포도에서
포도주가 나오는 것 같은,
술잔에 노랗게,또로록 소리내며
떨어지는 삶.
노래를 하면,사라져간
날들이 스스로 일어선다.노래는
부활.그래서 나는 노래한다.산다
새롭게,노래하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하는 말을 모르리.)
그러나 내 앞에 나의 날들이
일어선다.내가 짜낸
포도송이들,그것들이
더러는 떫고,더러는 불처럼 타오르는
포도주를 만들었다.
노래의 술.노래한다는 것은
내 가슴을 조국으로 삼은
그런 것들을 숨어서 불러보는 일.
죽음의 비밀들을 불러보는 가락이
오늘 나를 살린다, 죽음이
나를 지탱한다.
시인의 노래는 시인의 삶에서 짜낸 포도주.술이나 노래는 살아왔던 날들들이 곰삭아 우러나는 가을 맛의 향연.“노래를 하면,사라져간 날들이/스스로 일어선다”.시인은 시와 노래 속에서 “부활”의 묘를 배운다.죽은 날들의 기억이 오늘로 되살아나는 맛을 경험한다.그래서 시를 읊는다는 것은 어제의 죽음을 포도주 삼이 마시고 오늘을 사는 일.오직 이 길만이 삶의 진솔성에서 우러나온 맛이다.
이에르로에겐 삶이 에술보다 중요하다고 했다.예술이 오늘 나의 삶을 지탱해 준다고 해도 나는 내일의 삶이 더욱 중요하다.내일의 삶은 나의 시가 지탱ㅎ주지 못 한다.우나무노의 말처럼 나의 시가 내일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해도,독자의 가숨 속에 내 목소리가 영원과 비슷한 형태로 남아 있다 해도,그 나의 시는 나의 삶의 영원성에 대한 욕구보다는 못 하다.이에르로는 늘 “말 하지 않는다”, “묻지 마”같은 표현을 좋아한다.그 이유는 이 알 수 없은 내 개인의 실존의 욕구에 답을 해 줄 그 어느 것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우리가 왜 이렇게 괴로운 삶을 살아왔는지왜 죽어야 되는지 았는지, 대답은 없다.나의 유일한 말은 그냥, “묻지 마” 정도.
만남
라파엘 알베르띠에게
어느날 말하겠지: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이게 너의 불이야.
이제 너의 잔에 너의 술을 마셔,
하늘을 봐,빵을 쪼개.
정말 오랫만에 돌아왔구먼.남녁 별자리 밑에서
떠돌아다녔다며..물소리가 다른
강물들을 항해하며....자네의 여행이
참말 길었구먼.자네 얼굴이
피로해보여.나한테 묻지는 마.
자네 개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구,
플라타나스의 노래를 듣든지...
아무 일도 내게 묻지 마,
묻지는 마.
내가 말을 하면
자네는 울 테니까.자네의 귀신들을
거울에 비쳐보면,자네는
거기 비친 모습들을 보지 못 할껄.
멀리 살아있던 것들은 다 죽었어:
세월이 죽였지.오직 자네만이
그걸 묻을 수 있어.내일 쯤
묻어주지 뭐, 좀 쉬고 난
뒤에.자네 집에 오질 참 잘 했어.
아무것도 묻진 마.내일
내일 이야기하지 뭐.
스페인 내란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이딸리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돌아온 선배 시인 라파엘 알베르띠에게 바치는 시이다.시를 만들겠다는 생각보다는 함께 했던 삶과 아픈 기억에 대한 정들이 소록소록 베어나는 말들이다.처음부터 말했듯이 이에르로는 시보다 삶이,삶에서 우러나오는 포도주나 그 진솔성이 시라고 생각한다.실존주의처럼 삶은 부조리의 굴레나 벽,알 수 없는 고통의 소용돌이일 수 있다.그러나 이에르로의 마지막 의지와 자존심은 “묻지 마.내일,/ 내일 이야기하지 뭐.”로 비겁하리만큼 진솔하게 얼버무리고 있다.
“환각의 시집”은 이렇게 해서 더욱 절절한 현실이 하나도 알 수 없는 인생의 그림자로 점철되어 있다.시인의 말대로면 현실은 현실인데 모두가 “안개 속에 싸인것처럼” “환각”으로 나타나는 나의 삶의 절절한 파편들이다.질서를 잃어버린,이성과 결론을 상실한 삶의 편린들의 나타남과 사라짐.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자에겐 모든 것은 이래선 안되는 “환각”들이다.그의 환각의 시학의 “이론”은 이렇다:
이론
어떤 행동의
한 텅빈 순간이
문득 술과 그리움만으로 가득차질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생생한 말로
시로 채우기도 한다(귀신들의
행각,참회의 술).
삶이 멈출 때,
지난 과거,혹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 쓰여진다
남들이 시인이 산 삶(혹은 이루지 못한 삶을)을 살도록...
그런 시인은 남에게 진짜 술을
진짜 그리움을 줄 수 없다:말만 준다.
그들에게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면...
시는 바람과 같다,
아니면 불, 아니면 바다와 같다.
나무들을 떨게 하고,옷을 펄럭이게 한다
이삭을 태우고,마른 잎을 태우고
그 물결 위에,바닷가에서
잠자는 물건들을 흔들어 잠재운다.
시는 바람같은 거,
아니면 불,아니면 바다같은 거:
이미 움직이지 않는 것,마비된 것에게
살아잇는 모습을 준다.
그리고 불타는 나무장작,
파도가 가져가고 가져오는 조개껍질들,
바람이 앗아가는 종이 쪽지들이
두 개의 부동의 현실 사이
수간적 생명의 광휘를 발한다.
그러나 정작 살아있는 것들,
행동에 부풀어있는 것들,
술과 그리움에 파둥대고 있는 것들,
그것들은...그대로 행복하다,기분좋다,
그것들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도 달리는 말처럼,
바다가 말라도 날으는 갈메기처럼,
그렇게 사람은 운다,그리고 노래한다,
미래를 설계하고,건물을 짓고,불이 있건 없건...
이에르로는 드디어 살아있는 사물, 살아가는 행동으로서의 시를 생각한다.바람같은 시,불같은 시...따로 말이 필요 없는 삶의 맛,느낌들...열망과 그리움,희망과 절망에 몸부림치는 그 행동 그대로의 생의 맛을 체크하고 싶어한다.그것은 론이ㅘ 상식을 넘어선다,“바다가 말라도 날으는 갈메기처럼”삶에 대한 희망과 갈구가 영원하듯 이렇게 시는 영원하다.비록 그것이 “바다”(죽음) 위의 부조리한 날개짓이나 그리움일지라도...
환각
나는 더블린의 나무들을 기억한다.
(상상한다거나 기억한다는 것은
서로 겹치고 혼동된다;
서로 얽히고섥혀, 한 텅빈
순간을 똑같은 감동으로 채운다.
상상한다는것이나 기억한다는 것...)
나는 더블린의 나무들을 기억한다...
누군가 그 나무들을 살고 나는 그 나무들을 기억한다.
나무들로부터 황금빛 잎사귀들이
떨어진다,마드리드의 아스팔트 위에.
나의 어깨 위며, 나의 발 밑에
잎사귀들이 바스락거린다,
내 손을 어루만지며
내 가슴의 수액을 짜내려 한다.
그 일이 성공할지 나는 모르겠다...
상상한다는 것,기억한다는 것...
내 것이 아닌 순간들이 있다,
과거에 있었는지,미래에 있을 것인지,
아니면 어떤 불가능의 세계인지....
그러나 나는 그걸 어루만지며
시와 함께 현실을 만든다,불타오르게 한다.
나는 그걸 내가 상상하는지 기억하는지 모른다.
(상상한다거나 기억하는 것은
나의 텅빈 순간을 채운다.)
나는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다.
내가 보는 창 밖은 더블린이 아니라
마드리드이다.그리고 그 안에 한 사내가
술도 없이,행동도 없이, 그리움도 없이
문을 두들기고 있다.
그것은 귀신이다
과거의 다른 귀신을 좇는 귀신:
바람과 바다와 불의 귀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리라--,귀신
귀신이 노래를 하게 한다,가슴을 뛰게 한다,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렇다.이에르로의 “환각”은 진솔한 살아있음의 느낌이다.그 느낌이 메달려 있는 끈이 “귀신”에게서 온다.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의 끈에서 이토록 절실하게 느껴져오는 그리움과 느낌과 사념들...시인을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를 산다.환상을,혹은 기억을 현재로 산다.시인은 그 부재의 요소들이 아니면 살지 못 한다.이것이 진정한 시인의 시인됨의 파라독스다.죽음을 먹고 사는 삶,부재를 마시고 사는 현실의 아이러니.더구나 그것이 이토록 절절하게 가슴 아프고,심지어 가슴을 뛰게 함에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