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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사기13장15~25절
제목 : 내 이름은 기묘라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므로 그들을 40년동안 블레셋 사람 손에 넘깁니다.
그 때에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였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 임신하여 아이를 날 것을 예언합니다.
그 소식을 마노아에 알리고 마노아는 여호와께 기도하였더니 다시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나타나 나실인으로 키울 것을 명령합니다.
*'나실인'은
➀포도 나무에서 나는 것과 독주를 먹을 수 없으며,
②머리를 자르지 말아야 하고,
③시체를 가까이하여 자기의 몸을 더럽혀서도 안 되었습니다(민 6:1-21).
오늘 본문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대접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는 자신의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기묘’라 알리며,
이적(응답)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약속대로 태어난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합니다.
1. 마노아의 요청과 번제(15~20절).
1)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를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해달라고 합니다(15절).
“[15]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다음 절에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으로 미루어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아직까지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염소를 대접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아마 그는 염소를 잡아 자기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려 했을 것입니다.
염소는 유목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중요한 재산이었으며(삼상 25:2 ; 눅 15:29), 염소를 잡는 것은 손님에 대한 후대(厚待)의 표시였습니다.
*삼상25: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눅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2)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리라고 합니다(16절).
“[16]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 기드온의 경우와 똑같은 사례입니다. 즉 앞서 기드온에게 나타났던 여호와의 사자도 기드온이 준비한 음식을 먹지 않고 번제물로 불살랐었습니다(6:19-21).
이처럼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나 기드온이 바친 음식을 먹지 않은 까닭은 그들에게 자신의 참 모습을 깨우쳐 주려는 데 있었습니다.
즉 여호와의 사자는 근본 하나님이신바 인간이 취하는 것과 같은 음식을 취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알아보지 못한 채 다만 기쁜 소식을 전해 준데 대하여 감사의 예물로 염소 새끼를 드리려 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는 그 소식으로 인해 자신이 감사 받기를 거절하면서 마노아에게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림으로 그 감사를 나타내라는 의미로 본절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마노아가 미리 번제를 그 사람을 위해 준비하려고 의도 했다면 그것은 경건한 그의 신앙과 모순됩니다.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 이 말속에도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염소 새끼를 먼저 하나님께 바치라고 권면하고 있음이 잘 나타냅니다.
이로써 그는 자기가 전해준 기쁜 소식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3)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봅니다(17절).
“[17]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
당신의이름이 무엇이니까. 이 말은 마노아가 하나님의 사자가 지닌 신분을 물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의 이름만을 물은 것입니다.
즉 마노아는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자를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여 그의 예언이 이루어질 때 그를 찾을 수 있거나 그에게 예물을 드리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 빛나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물었을 뿐입니다(Goslinga).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 이 말 가운데 마노아가 자기를 방문한 사람의 이름을 물었던 것이 그 사람의 신분이나 정체를 알고자 의도했던 것이 아님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즉 마노아는 그 사람의 예언이 성취될 때 그 사람의 뛰어난 영적 능력을 자신뿐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널리 알려 존경받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물었던 것입니다.
4) 여호와의 사자가 “내 이름은 기묘자”라고 합니다(18절).
“[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奇妙)자라 하니라”
내 이름은 기묘(奇妙)니라.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곧 그 대상의 본질이나 특성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창 25:19-26).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이름을 '기묘'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기묘'는 '펠레'의 형용사형으로 '이해를 초월한'(NIV),
또는 '놀라운'(RSV)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기이(奇異)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용어는 구약에서 메시야 탄생 예언과 관련하여 메시야의 속성을 묘사하는 말로도 사용 되었습니다(사 9:6).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따라서 마노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Cassel, Lange, Matthew Henry).
5)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재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그리매 이적(異蹟)이 일어났습니다(19).
“[19]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일전에 기드온은 번제로 '염소 새끼 하나와 무교 전병과 국'(6:19)을 취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노아가 바친 소제물도 아마 기드온이 바친 것과 유사한 종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제물로는 발효된 식품과 꿀이 섞인 것은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레 2:11).
따라서 마노아의 소제물은 본문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화덕에 구은 무교병이나 기름 바른 무교 전병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레2:4).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 여기 사용된 '이적(異蹟)'이라는 용어는 역시 앞 절의 '기묘(奇妙)'를 뜻하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지닙니다.
따라서 본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사자의 행동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할만큼 놀라왔다'로 됩니다.
이 이적의 내용은 20절에 묘사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이적은 잉태하지 못하던 마노아의 아내가 아들을
낳게 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24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또한 역사상의 이적에 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정녀 탄생(마1:23), 하나님의 성육신(요1:14), 그리스도의 부활(마28:7 ;고전15:13) 등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은 문학적 비유 내지 신화가 아니라 엄연히 역사상으로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인 것입니다.
오늘날 합리주의를 숭배하는 신학자들 중에는 성경에서 초자연적 요소들을 제외시키고 다만 자유, 평화, 헌신 등과 같은 소위 '예수님의 정신'만을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자 하는 지극히 불순한 행위입니다(롬 10:6, 7).
*롬10:6,7 “[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7]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6)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갔습니다(20절).
“[20]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 혹자는 19절을 근거로 하여 마노아가 번제물에 불을 붙였으며 다만 하나님의 사자가 그 불꽃을 타고서 하늘로 올라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Goslinga, Cundall).
그러나 19절에는 마노아가 번제물에 불을 붙였다는 암시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기드온의 경우에서와 같이(6:21), 이번에도 하나님의 사자가 이적으로 번제물을 태운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Keil).
이때 나온 불은 더러운 것을 태우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암시합니다(히12:29).
*히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또 이 불은 제물을 태우면서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제사를 열납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불꽃을 타고서 여호와의 사자가 승천(昇天)한 것은 그가 마노아 부부와 관련된 일을 모두 마치셨음과 또한 그 자신이 정작 하나님이셨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 이러한 표현은 성경에서 사람이 하나님 영광을 바라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 복종하는 것을의미합니다(창 17:3 ; 수 5:14 ; 단 8:17 ; 겔 1:28 ; 3:23 ; 43:3 ; 44:4).
즉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이제 서야 자기들과 대화한 사람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2. 삼손의 출생과 성장(21~25절)
1)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았습니다(21절).
“[21]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마노아 부부가 자신들에게 나타났던 사람을 '여호와의 사자', 즉 하나님으로 인지한 것(22절)은 번제단 이적 사건으로 인해서입니다(20절).
그런데 본절은 마치 그 후 여호와의 사자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으므로 인해 그때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후의 사실을 추가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더욱 더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이었음을 확증하는 구절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인식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2) 아노아가 그의 아내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합니다(22절)
“[22]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 죄악에 물 들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경우에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출 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따라서 이사야도 여호와의 영광을 뵈온 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었으며(사 6:5),
야곱과 기드온도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기 때문에 죽을 줄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6:22, 23 ; 창 32:30).
*6:22,23 “[22]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6 ; 10:19,20).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10:19,20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피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길을 터 놓으신 것입니다(히9:14,15)
*히9:14,15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15]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라고 합니다(23절)
“[23]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 본절로 보아 마노아의 아내는 상당히 지혜로운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공포심에 휩싸여 있을때에도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남편을 위로하였습니다.
그 위로의 내용인즉 여호와께서는 전혀 자신들을 죽일 의향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그녀는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➀ 곧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제물을 열납하셨으며,
② 이적을 베풀어 보이셨고,
③ 자신들과 대화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타당한 추론입니다.
일전에 기드온도 하나님을 뵈었지만 죽지 않았습니다(6:22,23).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기 위한 목적에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취하사 그 본체의 영광을 가리우고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6:23 주석 참조.
따라서 마노아와 그 아내도 비록 하나님을 뵈었지만 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 - 여호와의 사자가 친히 현현(顯現)하신 것(3, 9절)과
번제단 불꽃 이적(20절)을 행해 보이신 것 등을 가리킵니다.
이런 말씀. -삼손의 탄생을 예고해주신 것(3절) 및
마노아의 아내가 지켜야 할 일(4, 14절),
*4,14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삼손의 양육법(5절) 등에 대하여 일러주신 것을 가리킵니다.
*5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4)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합니다(24절).
“[24]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삼손'이란 이름이 '태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세메쉬'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이러한 해석을 따르면 이는 삼손이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여 광명을 주기 시작하는 것과(5절)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삼손'이라는 이름이 '봉사하다'란 의미의 갈대아어 '쉐마쉬'에서 유래했다고도 주장합니다(Hervey).
이 주장에 따르면 '삼손'이라는 이름은 그가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헌신한 사실과 연관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추론도 완전히 배제될 수 없습니다.
한편 그밖에도 A.D.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나 카일(Keil)은 삼손이란 이름이 '강하다' 또는 '귀하게 여기다'란 의미를 지닌 '쉬므쉠'과 연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앞의 두 가지 주장보다 어원적, 역사적으로 그 근거가 빈약합니다(Cassel).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 삼손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서 성장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는 사무엘이 성장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았었으며(삼상2:26),
*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하나님과 사람들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성장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눅 2:52).
5)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25절).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소라(Zorah)는 현대의 '사라'(Sorah)와 동일시되는 곳으로 벧세메스 북쪽 그리고 예루살렘 서쪽 약 20Km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에스다올 - 예루살렘 북서쪽 약 23Km 지점에 위치한 단 지파의 성읍입니다(수19:41).
마하네단 - 문자적으로 '단의 진'이란 뜻입니다.
이곳은 삼손이 활동하며 생활 거점으로 삼은 곳으로 이주한 것 같습니다(16:31). 이곳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부모들이 거주했던 '소라'(2절)와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며 조그마한 성읍일 것입니다.
18:12에는 이곳이 기럇여아림 뒷편,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의 지역인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삼손은 그 마음과 몸을 주장하시는 성령께 사로잡힌바 되어,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개 성령의 감동은 지혜, 예언 등 다양하게 나타나나,
특히 삼손에게는 영웅적인 완력으로 나타났습니다(14:6,19; 15:4,15).
*14:6,19 “[6]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19]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
*15:4,15 “[4]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15]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기대하게 하십니다
믿음은 모든 것이 다 해명되어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23절).
신비와 여백을 품고 신뢰 속에서 주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이를 태어나게 하시고,
아이에게 “복”을 더하셨다는 것은 이 아이의 인생 주도권이 부모나 세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는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여호와의 사자는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자신의 이름을 ‘기묘’라고 밝힙니다(15~18절).
이를 통해 이제부터 발생할 모든 일(이적, 출생, 구원)이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건이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의 무지를 일깨우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기대하게 하십니다.
믿음은 모든 것이 다 해명되어야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23절).
신비와 여백을 품고 신뢰 속에서 주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2) 마노아가 드린 제물을 제단에서 나온 불로 태우는 이적을 통해 ‘기묘’(18절)임을 증명하시고 그분의 주신 약속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게 하십니다(19~23절).
이를 통해 흔들리는 그의 믿음을 세워주십니다.
그러니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때문입니다.
아무도 자기 백성을 돌이키고 새롭게 하실 그분의 지혜를 헤아릴 수 없고, 그분의 결심을 꺾지 못할 것입니다.
3) 약속대로 아들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움직이혀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라게 하십니다(24,25절).
이름(작은 태양) 처럼, 태어날 아이는 암울한 한 가정과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펼칠 ‘희망의 빛’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으로 이 땅에 오신 ‘참 빛’예수님으로 인해 죄와 흑암과 사망 가운데 살던 우리도 생명의 빛으로 나아와 참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망각한 채 옛 삶을 넘나들기도 하지만, 오늘도 말씀 앞에 이렇게 조아릴 수 있는 것도 이 자비로운 은총이 빛 때문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아이에게 “복”을 더하셨다는 것은 이 아이의 인생 주도권이 부모나 세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24,25절).
하나님의 영이 함께한 삼손은 부모와 이스라엘의 기대 속에서 성장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주의 복과 영이 임하여, 교회와 세상이 그들을 통해 이루실 주의 역사를 기대하도록 기도 해야 하지 않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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