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하루, 코로나가 우리에게 앗아간 것들...
학회에서 발표하는 한 논문의 논평을 맡아서 지난 토요일 날 육지로 나가야 했다. 학회는 부산에 있는 **대학교에서 있었기 때문에 학회 일주일 전에 김해 공항으로 가는 항공편 예약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제주에서 김해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표는 모두가 매진이었다. 금요일 날 가서 하루 묵으려고 해도 금요일 항공권도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김포공항으로 가서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탈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비행기가 연착을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안전하게 공신력이 있는 ‘**항공’을 예매하였다. 김포에서 김해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탈 시간은 약 5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부칠 짐도 없고 또 같은 국내 항공을 갈아타는 것이니, 충분한 시간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제주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10분 이상 지연되어 출발하였다. 김포공항에서 갈아타는데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승무원에게 예매한 시간표를 보여주면서 어떻게 하면 가장 빨리 갈아탈 수 있는지 ‘조언’을 구했다. 여승무원은 나의 핸드폰 속의 예매 시간표를 남 승무원(기장?)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져갔다. 그리고 한두 가지 조언을 해주면서 “탑승절차를 줄이기 위해서 검색대 직원에게 전화로 사정을 얘기해 놓았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10분 이상 늦게 출발한 비행기가 마음만 먹으면 하늘 위해서 10분정도는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것인데, 오히려 15분 이상 더 늦게 도착하였다. 그러니 ‘**항공’이 연착한 시간은 총 25분 정도였다. 남은 시간은 20여분 남짓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다. 검색대에 도착해야하는 시간이 최소한 20분전이어야 하는데, 비행기에서 내려서 공항을 나가서 다시 무인기에서 ‘티게팅’을 하고 검색대로 가는 시간이 도저히 ‘5분’으로는 불가능했다. 김포공항에서는 이동하는 시간만도 10분은 걸리기 때문이었다. 아쉬웠지만 마음으로 포기하고 있는데, 승무원이 “가급적 서둘러 가보라, 올라가기 전에 비행기를 탈수 있는지 확인부터 해보라!”는 등의 말을 하였다. 나는 “왜 불가능한 일을 해보라고 하지, 무언가 이들이 나를 위해 연락을 취해놓은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고, “혹시 김해로 가는 비행기도 연착이 되었다면 탈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뛰고 또 뛰어 무인기 앞에서 ‘티케팅’을 시도 했다. 그런데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었다. 두 번씩 시도해 보아도 여전히 “승객이 조회되지 않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결국 김해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는 이미 놓쳐버린 것이었다.
학회참여를 포기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어쨌든 서울까지 왔으니 학회에는 꼭 참석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빨리 다음 비행기를 알아보려고 ‘**항공’ 판매대로 갔다. 손님들에게 항공권을 티케팅하는 직원들 외 다른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나의 말을 제대로 듣고자 하지도 않았고, “예매한 항공사에서 환불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남 승무원을 불렀다. 남 승무원에게 사정을 얘기하니, 항공사가 너무 많아서 어떤 비행기가 가장 빠른 비행기인지 자신도 알 수가 없고, 직접 인터넷으로 확인을 해 보거나, 전광판을 보면서 가장 빠른 비행기를 찾아보라고 했다. 화가 났다. 자신들 비행기가 연착을 한 바람에 다른 비행기를 놓쳐버렸는데, 누구도 “우리 비행기가 연착을 하는 바람에 환승을 하지 못하게 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또 누구도 그 실수를 만해 하고자 다음 비행기를 찾아주고자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남 승무원에게 목소리를 좀 높였다. “당신들 비행기가 연착을 한 때문에 제가 환승해야할 비행기를 놓쳤지 않습니까? 여기에 인터넷이 어디 있으며, 제가 어떻게 이항공사 저항공사 뛰어 다닐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최소한 가장 빠른 다음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항공’에서 도와주어야 도리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그 직원은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마치 마지못하다는 듯이 컴퓨터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는 자기항공사의 2시 비행기를 예매해 주었다. 속으로 생각하였다. '다시는 **항공은 타지 않을 것이라고...'
학회 총무에게 연락을 취하여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의 논평시간 발표를 뒤로 미뤄 줄 것을 부탁했다. 얼마 후 총무는 나의 논평시간을 마지막 순서로 바꾸어 놓았으니 염려 말고 오라고 했다. 겨우 한 시름 놓았다. 그런데 항공편들이 모두 그렇지만 비행기에 내리고 공항을 빠져나오고 또 전철을 갈아타고 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전철에서 환승을 하는 동안 다시 총무에게 전화를 했다. 아직 ‘2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다며,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물어보았다. 학회 발표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어서 곧 마지막 발표가 있을 것이니 서둘러서 오라는 말을 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부산대 역에 내려 택시를 타려고 총무에게 어디서 택시를 타야 하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총무도 **대 사람이 아니어서 그곳 지리나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할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일단 역에 내려서 사람들에게 물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전철 역 근처 어느 곳에도 택시 승강장은 보이지 않았다. 대로변으로 나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기로 했다. 다행히 바로 빈 택시가 지나가고 있었고, 그 택시를 세웠다. “**대 안 **관으로 가는데, 시간이 촉박하니 좀 태워 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기사는 “예, 타세요”라고 했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했다. ‘**관’이란 곳이 네비에 뜨지 않아서 택시가 학교 안에서 여기저기 뺑뺑 돌고 있었다. 보통 학회를 하는 대학에는 정문에서부터 화살표로 학회장소를 표시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이번에는 무슨 사연인지 학회장소를 표시하는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한 학생들에게 물어도 ‘**관’이라는 곳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기사 양반이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물어 보아야 하는데, 혼자 위로 아래로 뺑뺑 돌고 있었다. 내가 “장소를 잘 모르면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계속 물어보아야 하지 않느냐”라고 하니 “학생들도 이렇게 **관’하면 어딘지 잘 몰라요!”라고 응수했다. 다행히 **대에 후배 교수가 있다는 생각을 했고 전화를 했다. 하지만 그곳 대학지리가 애매하여 처음 오는 사람들은 전화로 안내 받고는 ‘**관’을 쉽게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 교수의 안내를 따라 이리 저리 해메도 ‘**관’이란 곳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기사는 뺑뺑 돌다가 다른 사람이 택시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는 “나는 찾지 못하겠으니, 알아서 가세요!”하면서 정문 근처에서 다시 나를 내려주었다. 학교 안을 뺑뺑 도는데 무려 ‘6500원’의 요금이 나왔다. ‘처음부터 장소도 모르면 태우지를 말든가, 못 찾겠으면 처음부터 못 찾겠다고 내려주든가, 다른 손님 보이니 그때 아무 곳에나 내려 주는 그 심보는 뭐지!’ 화가 났다. 결국 후배 교수가 내려와서 학회 장소까지 안내해 주었다.
학회 장소에 무사히 도착 했지만, 이미 사회자가 나의 논평문을 대독하고 있었다. 결국 힘들게 학회에 도착했지만, 논평문도 읽지 못하고 10여분 더 있다가 학회는 끝이 났다. 제주로 가는 비행기 시간이 9시여서, 늦어도 7시에는 전철역으로 가야했고 따라서 저녁 만찬에 참석하기는 불가능하였다. 결국 30분 정도 참석하고 먼저 떠나야 했다. 학회장이 매우 아쉬워하였다. 학회장소를 떠나며 ‘참 운이 없는 날이다! 너무나 이상하게도 일이 꼬였네... 내가 쓴 논평문을 내가 읽지도 못하고, 그렇게 어렵게 찾아 왔는데 저녁도 못 얻어먹고 30분 만에 다시 학회를 떠나야 하다니...’ ‘항공사’도 ‘택시 기사도’ ‘학회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평소에 자신들이 하던 정상적이 행동을 최선을 다해 하였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을 ‘타인에 대한 배려’나 ‘손님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나’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나 혹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던 하루 인 것 같았다. 이 모든 일들이 스트레스를 유발하기에 충분하였다.
다행히도 유일하게 나를 위로해 주었던 것은 논문 발표자가 나의 <논평문>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고, 나의 비판들을 솔직하게 수용하면서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어 고맙다고 했다. 자신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를 쓰고 논쟁을 일삼는 여느 철학적 담론이나 논쟁과는 달랐다. 소박하고 겸손한 사람 같았다. 그 교수의 그 태도가 유일하게 나에게 위로를 주고 있었다. 무언가 후배 교수들에게 내가 도움이 되었다는 마음에 만족감을 주었다.
집에 도착하니 거의 밤 11시였다. 몸은 피곤한데도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 일을 생각해 보았다. 왜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최선을 다해 하고자 하지 않는지, 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나 마음을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지, 왜 사람들이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나만 이득을 보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도덕적으로 추락한 것인지... 이런 생각을 하니, 결국 “코로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으로 귀결 되었다. 모두가 어렵고 특히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고 있으니, ‘내 코가 석자’라는 생각에 아무도 타인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쟁터에서는 모든 윤리 도덕이 중지되어 버리듯 사는 것이 마치 전쟁을 치는 것 같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우선 나부터 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아주 불행한 소식이 들렸다. 용산 이태원에서 축제를 하든 사람들이 사고가 나서 군중들 중 150명이나 압사를 당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너무나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럼에도 오늘 하룻동안 사람들의 행위를 보면 저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앞 사람이야 넘어지든 말든 밟히든 말든 그냥 나만 신나고 나만 즐기면 된다는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들이라면 저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싶었다.
오늘 학회에서 내가 논평을 해야 했던 논문의 주제는 ‘성경의 욥’과 관련된 주제였다. 참으로 묘하게 오늘 하루의 일들이 더욱 ‘욥’이라는 인물이 나에게 너무나 큰 의미를 주고 있었다. ‘욥은 성경적인 의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다. 악마가 ‘세상에 의인은 없다’라고 신에게 말하였고, 신은 악마와 내기를 하였다. ‘욥’이라는 사람을 악마의 손에 넘겨주고 악마가 무슨 짓을 해도 욥은 ‘신에 대한 신의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 장담을 한다. 악마는 욥에게 이 세상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불행들을 일으킨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신에게 이런 일을 허락한 신을 저주하라고 말하고, 자기 아내마저 ‘차라리 당신을 내신 신을 저주하고 죽어라’라고 말하지만, 욥은 끝내 자신의 의로움과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악마는 자신이 내기에게 졌음을 시인하고 물러갔고, 욥은 잃은 모든 것을 되찾게 된다. 이 욥의 이야기를 두고 키르케고르는 '성경적 의인의 전형' '윤리의 목적론적 중지'라는 개념을 도출하였다. 신의 뜻이나 섭리는 하도 깊고 심오해서 도저히 인간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불가능한 측면이 있다는 것, 여기서는 모든 윤리적인 해석이나 해명이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욥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자신이 가진 그 마음속의 신념, 진리와 진실과 신의 선함을 끝가지 믿고 저버리지 않았던 가장 신의가 깊은 인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욥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암시해주고 있다. 그것은 욥의 마음속의 그 ‘내면성’은 바다 보가 깊고, 하늘보다 높아서 죽음도 그에게 그 신의를 파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신이라는 말 대신에 도덕, 윤리, 진리, 진실, 선함 등의 말을 넣어 본다면 욥은 가장 인간적인 인간, 가장 고결한 인간의 전형이 된다. 오늘 날 이러한 내면성을 가진 사람을 본다는 것은 너무나 희귀한 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학회에서 발표한 저의 <논평문>을 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