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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왼쪽 둘째) 장군이 아들 샘 워커 대위를 콜린스(왼쪽) 참모총장에게 소개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미군은 1950년 7월 1일 스미스대대 장병 540명이 부산에 상륙한 이래 3년1개월 동안 178만 명이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낙동강방어전투·장진호전투 등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열심히 싸웠고 희생도 많았다. 삼복더위를 견뎌야 했고 적보다 더 무서운 동장군(冬將軍)과 싸우면서 풍토병도 이겨야 했다. 식량·화포·탄약·차량 등 모든 전쟁 물자를 다 갖고 와 싸우면서 목숨까지 바쳤다. 전사 5만4246명, 실종 8177명, 포로 7140명, 부상자 10만3284명 등 17만2847명이 희생했다. 세계 최강국 국민이 약자를 위해 바친 희생은 값지고 숭고했다.
특히 우리에게 더 감동을 주는 것은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장관·장군 등 최고위층 아들 142명이 참전해 그중 35명이 전사했다는 사실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육군중위는 1952년 미 3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했고, 워커 8군 사령관의 아들 샘 워커 중위는 미 24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해 부자가 모두 한국전 참전 가족이 됐다. 아버지는 의정부에서 순직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전에서 사단장, 군단장, 8군사령관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의 아들 지니 밴 플리트 2세도 B-52 폭격기 조종사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2년 4월 4일 새벽 평남 순천 지역에 야간출격을 나갔다가 전사했다. 미 해병 1항공단장 필드 해리스 장군의 아들 윌리엄 해리스 소령은 중공군의 2차 공세 때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미 중앙정보국 앨런 덜레스 국장의 아들 앨런 메시 덜레스 2세도 해병중위로 참전해 머리에 총상을 입고 상이용사로 살고 있다. 또 유엔군사령관 클라크(1896~1984) 대장의 아들도 참전했다가 부상했다.
하버드대학은 교내 예배당 벽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20명의 이름을 동판에 새겨 추모하고 있다. 월터리드 미 육군병원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중상을 입은 용사 수십 명이 아직 침상에 누워 있다. 미 의회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거나 중상을 입은 장병 중 공로자를 선발해 136명에게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했다. 이 숫자는 제1차 세계대전 때의 124명보다 많은 것이어서 6·25전쟁이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었나를 말해준다. 마지막인 136번째 명예훈장의 주인공은 고(故) ‘에밀 카폰’ 대위로 전사한 지 62년 만에 추서(2013년 4월)됐다. 그는 군종신부로서 고통받는 부상병들을 마지막까지 돌보다 중공군에게 포로가 됐다. 후에 자신도 폐렴에 걸려 수용소에서 사망할 때까지 환자들을 돌봤다.
6·25 전쟁 당시 전선에서 미사를 드리는 미군. 국방일보 DB
특히 안타까운 것은 1950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졸업생 365명 중 110명이 한국전에 참전해 41명이 전사한 것이다. 꽃봉오리들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이름도 모르는 동방의 작은 나라에 와서 떨어졌다. 미군은 전쟁 후에도 대를 이어 한국을 위해 싸웠다. 휴전 이후 63년 동안 485만 명이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주한미군으로 근무했다.
한편 워싱턴 시내 한가운데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이 있는데, 매년 수백만 명이 이곳을 방문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이 공원에는 2개의 큰 볼거리가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판초 우의를 입고 수색 정찰하는 19명의 미군 병사 조형물이다. 1950년 11월 중공군의 2차 공세 때, 함경남도 장진호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미 1해병사단 장병들의 영웅적인 철수작전을 기리기 위해 수색 정찰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그 옆에는 검은 대리석에 전사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새겨 넣은 기념비가 있다.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이 한 구절의 비문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의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나를 말해준다. 이보다 더 감동을 주는 한 구절이 잔디밭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1950 KOREA 1953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일찍이 만나본 일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부름에 응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 비문은 국가(미국)가 국민에게 스스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출했다. 2009년 미국의 국방정보센터(CDI)는 미 의회조사국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6·25전쟁 당시 미국이 부담한 전쟁비용을 총 670억 달러로 산출했다. 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910억 달러(약 767조 원)에 달한다. 이는 2차 대전 비용 3조2110억 달러보다는 적지만, 1차 대전(6420억 달러)이나 베트남전쟁(6500억 달러)보다 많다. 그들은 이렇게 천문학적 비용을 지불하면서 한국을 도왔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
인천상륙작전을 관찰하는 더글러스 맥아더
1.4후퇴 당시 중공군의 모습
1.4후퇴 당시 꽁꽁 언 한강. 폭파되어버린 한강철교 아래로 피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6.25참전국
세계의 한국전쟁 기념비
1. 파리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
파리 세느강 마레다리 근처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기념비
2. 호주캔버라 Korean War Memorial, Canberra
한국전쟁 가평전투에 참가한 호주군인들
3. 캐나다 Wall of Remembrance(Brampton, Ontario), 한국전쟁기념비
4. 워싱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Korean War Veterans Memorial)
링컨기념관 인근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의 기념 조형물은 미국 성조기를 향해서 우비를 입은 한 소대가 전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조각상 양쪽으로 서 있는 벽에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2,500명의 얼굴들이 레이저로 새겨져 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 150만 명이 참전하여 5만 4000명이 사망하고 11만 명이 잡히거나 부상당했으며, 8,000명이 실종되었다.
가운데 게양되어 있는 성조기 아래에는 "조국은 그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조국의 부름에 응한 아들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라고 적혀 있다.
5. 맨하탄의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기리는 장소가 뉴욕 맨하탄의 최남단 배터리 파크 내에 있다. 배터리 파크 내에는 수많은 기념물과 기념탑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기념물이 군인 형상의 구멍 뚫린 조각물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이다.
6. 미국 Connecticut (컨네티컷) West Haven의 한국전쟁 참전기념비
7. 미국 Atlantic City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8. 미국 Staten Island에 위치한 Korean War Veterans Parkway
9. 보스톤의 한국전쟁기념비
Korean War Veterans of Massachusetts, Charlestown Navy Yard
10, 남아공의 케이프타운 한국 전쟁 참전 기념비.
국내 6.25 참전 기념비
유엔군 초전기념비 (경기 오산시)
유엔군 참전기념비는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1950년 7월 5일 미군 제 24사단 소속 제21보병부대 및 제 52 야포대대 소속 1개 중대로 편성된 스미스 전투부대 406명의 장병이 북한과의 최초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1955년 7월 5일 미군 제 24단과 장병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UN묘지 (부산 남구 대연동 779번지 일대)
남구 대연동 779번지 일대의 면적 144,146㎡로 유엔 묘지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도발에 의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한 16개국의 전투지원국과 5개국의 의료지원국의 유엔군 장병의 전사한 영령을 안치한 곳이다. 1951년 1월 18일에 묘지를 조성 설치하고, 1955년 11월 15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에서 오직 하나 뿐인 유엔 관리의 묘지로, 1959년 유엔과 우리정부 사이에 묘지의 영구적인 관리 및 사용을 위한 협정이 성립되었으며, 1974년에는 관리권이 영령을 안치한 참전국 11개국으로 구성된 국제연합기념관리위원회에 이관되었다. 현재 이곳에 안치된 영령은 영국 884, 터어키 462, 캐나다 378, 오스트레일리아 281, 네델란드 117, 프랑스 44, 뉴우질랜드 34, 미국 19, 남아프리카공화국 11, 노르웨이 1, 한국 36, 무명용사 4, 비전투원 11기로서 총 2,282기가 안치되어 있다. 처음 이곳에 묘지가 설치될 때 묘의 수는 미국 등 16개국 11,000기 이었으나 이디오피아, 태국, 그리이스,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등 5개국 전몰장병 묘를 이곳에서 본국으로 이장해 갔기 때문에 현재의 기수(基數)로 줄었다.
유엔군 참전기념비
높이 12.05m, 16개의 기둥으로 탑신을 이루고, 기둥의 중간부분에 각국 의 특색을 살린 군인상을 청동으로 조각해 붙였으며, 기둥끝에 각국의 국기를 게양토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