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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시선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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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에 대한 말씀 (마가복음 10:1-12) 우리 주 예수께서는 순회 전도자이시었다. 예수께서는 한 곳에서만 오랫동안 계속하실 수 없으셨다. 왜냐하면 가나안 온 땅이 당신의 교구요 관구이기 때문에 모든 지방을 순회하면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다. 여기에 예수께서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에 계시니 이곳은 두로와 시돈이 가까운 서쪽 변경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순회는 그 빛과 열에서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것과 흡사했다. Ⅰ. "무리가 다시 모여들었다"(1절). 예수께서 어디에 계시거나 많은 무리가 예수께 모여들었다. 전에 예수께서 이 지방에 계실 때에 모여들은 것처럼 그들은 "다시" 예수께 나온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전에도 늘 실행하시었고, 어느 곳에 가시더라도 전에 하시던 대로 말씀을 전하시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었다"고 하였고 여기에는 "예수께서 가르치시었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병을 고치심은 당신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하였고 그것을 증거 하여 준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치심은 당신의 병 고침을 설명하여 주었고 증거 하여 준 것이다. 예수께서 불쌍한 영혼들에게 가르치심은 곧 그들의 병 고침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가르치시더니" 그리스도께서 이미 가르치셨던 자들도 다시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유의하라.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망각 때문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회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Ⅱ.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영적인 세력이 확장되어 감으로 시기하여 어떻게 라도 그 일을 방해하고 반대하려고 한 것이다. 예수를 견제하고, 예수를 당황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 잘못된 편견을 갖도록 조장하였다. 1. 그들은 이혼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였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2절) 만일에 이 질문이 이 문제에 대해서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정당히 물었다면 좋은 질문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시험하려"고 그를 방해할 기회를 찾으려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 질문을 어느 각도에서 취하실는지 그를 폭로할 기회를 찾으려고 이를 물은 것이다. 목사들은 그들에게 충고를 받고자 하는 가장 아래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질문으로 응수하시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3절) 이 질문을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은 것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당신의 관심을 증거하고, 그들에게 당신께서 율법에 대한 당신의 관심을 증거하고, 그들에게 당신께서 율법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님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에 대한 보편 타당성을 증거하고 그 일부와 다른 부분을 비교하려고 한 것이다. 3.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서 이혼에 대한 표현을 찾아서 좋은 대답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명령하였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여기에 대한 말씀이 신명기 24장 1절에 나와 있으니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라 하였다. 4.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시었는데 그 대답은 예수께서 전에 밝히셨던 교리이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를 간음하게 함이"라 하신 것이다(마 5:32). 그런데 예수께서 여기에 더욱 분명하게 말씀을 하시었다. (1) 모세가 그이 율법에서 이혼을 허락한 것은, 그 허락대로 그들이 이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5절) 만일에 그들에게 이혼이 허락되지 않을 경우, 그들이 자기들의 아내를 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이 매우 완악하여 이 허락을 필요로 할 경우에만 이혼 증서를 주어 아내를 내어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2) 모세가 결혼에 대한 제도를 설명하는 가운데 이혼에 대한 그러한 이유를 언급한 것이지만 대체로 이혼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3절)고 물으신데 대하여 이렇게 대답을 해야 마땅한 것이다. "비록 임시적인 조건에 의한 이혼을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허락하였지만 영구적인 의미에서 그는 모든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에게 이혼을 금하였으며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세는 다음의 사실들을 이야기하였다. [1]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남자와 여자로" 즉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만드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자기의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취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 모든 후손들에 대해서 그러지 말도록 하는 하나의 암시가 되는 것이다. [2] 이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법령에 의해서 하나로 결합하여 결혼을 하였을 때에 율법은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연합하여"야 함을 선언한 것이다(7절). 이 말씀은 가장 가까운 관계가 성립됨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 영구성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그 아내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그 아내와 연합됨을 말하는 것이다. [3] 그러한 연합의 결과로 말미암아 비록 그들이 둘이지만 그들은 하나가 되고 "한 몸이" 되는 것이다(8절). 그들 사이의 연합은 아주 밀접하게 이루어진 것이므로 하몬드 박사가 말한 대로 신성하여 범할 수 없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친히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그들이 서로 만나 위로하고 돕도록 하시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와 선 가운데 그들이 연합하도록 하시어 죽음이 그들 사이를 떼어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시는 것이다. 결혼은 사람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으로 그 제도가 준수되어야 하며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사이의 분리될 수 없는 신비한 연합에 대한 상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점을 비추어 모세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살도록 짝지어 주신 아내를 사람이 버릴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붙여 주신 것을 사람이 경솔히 떼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아내에 대해서 매사에 흠을 잡아 이혼하려고 하는 자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그렇게 대하시게 된다면 자기 자신들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생각해 봄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사 50:1; 렘 3:1). 5.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더불어 이 문제에 관해서 조용히 말씀하시었다(10-12절).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복음의 비밀에 대해서나 도덕적인 의무에 대해서 대하의 시간을 갖는 일은 그들을 더욱 만족스럽게 해 주는 큰 유익이 된 것이다. 여기 제자들과의 사적인 대화의 자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라고 말씀하시었다(11절). 그것은 자기 아내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자기 아내에게 범죄 하는 것이요 결혼 서약을 파기하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더 계속하여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12절)고 말씀하시었다. 그러므로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서 동의를 얻었다고 하는 변명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지배하는 지혜와 은혜, 성결과 사랑은 육 적인 마음에 있어서 무거운 멍에가 되는 그러한 명령들도 쉬운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을 축복하심 (마가복음 10:13-16) 이 기사는 어린아이들을 친절과 사랑의 마음으로 돌아보라는 지시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시는 우리 주 예수 안에서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에 자기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일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성인들이라도 자신들이 연약하고 아이들같이 무능력하고 무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일으켜 주는 것이다. Ⅰ. 어린아이들을 예수에게 데리고 나옴(13절).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나 그들을 돌보는 연고자들이 예수에게 그들을 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데리고 나온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져 주심은 축복해 주시는 표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병들어 병 고침을 받으러 데리고 온 것도 아니고 가르침을 받게 하고자 데리고 나온 것도 아닌 것 같다. 1. 그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자들이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자들이었다. 어린 자녀들에 대한 그 부모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그들의 영혼들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본적인 부분이고, 그들의 영혼들이 건전할 때에 그들이 건전할 수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그리스도의 축복이 그 아이들의 영혼들에게 유익함을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양친들이 아무 것도 그들에게 말해 줄 수도 없고, 해 줄 수도 없고, 미칠 수도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심령을 축복하실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어린아이들을 예수께서 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데리고 나온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에게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부터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축복하실 수 있고, 거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만함과 확장에 대해서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믿음의 자손들에게 대한 은혜와,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취지와, "우리와 우리자녀들에게" 대한 약속, 특히 "그의 신을 우리 자손에게 그의 복을 우리 후손에게 내리리"(사 44:3)라고 약속에 대한 친절한 암시를 주신 것이다. Ⅱ. 어린아이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리고 나옴에 대하여 제자들이 준 실망. "제자들이 꾸짖거늘"(13절). "소자 하나라도 멸시하지 말라"는 주의를 얼마 전에 예수에게서 들었음에도 마치 그들은 이 일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잘 아는 듯이 행동하였다. Ⅲ. 여기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힘을 북돋아 주심. 1.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그들을 금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시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분이 여겨"(14절). 아마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었을 것이다. "너희가 무엇 때문에 그들을 금하느냐? 너희는 내가 선을 행하는 것을 방해하느냐? 이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해서, 이 어린양들과 같은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선을 행하는 것을 방해하려느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나아오는 자들이나, 당신에게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대하여 대단히 노하시었던 것이다. 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그들을 방해하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삼가라고 명령하시었다. 어린아이들이 가능한 속히 내게 나와서 그들의 구할 것을 구하고 내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 어린아이들이 "호산나"를 부르며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도록 환영하라. 3.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유대교 교인들이었던 것처럼 당신의 교회의 교인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이 기회를 기해서 천국이 이런 어린아이들을 신민으로 받아들인다고 선포하고 그들에게 천국 시민의 특권을 부여한 것이다. 아니 천국은 이런 자들에 의해 존속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린아이일 때에 영접하여, 이 후로 그들이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나갈 수 있는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시고 축복하시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어린아이 성품과 기질이 보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15절). 그 말은 곧 어린아이들이 그들의 부모들과 유모들과 선생들을 따르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과 같이 호기심을 가져야만 하며, 아이들과 같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되며, 배운 것을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배우는 자는 믿어야만 한다"는 말이 있다. 아이의 마음은 흰 종이와 같다. 거기에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복된 성령의 펜에 대해서 그러해야 한다. 아이들은 누구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 사무엘이 한 것처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 10)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의 부모의 지혜와 돌보심을 의지하는 어린이들은 그 부모들의 손을 잡고 어디로 인도하든 따라가는 것이며, 그들에게 무엇을 마련해 주든지 그것을 받는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리고, 우리의 힘과 의에 있어서나 교육과 의식주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5.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영접하고 그들이 바라던 소원을 이루어 주셨다.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6절). 예수께서 그 부모들의 소원에 넘치게 주신 것을 보라. 그들은 만져 주시기를 바랐지만 예수께서는 저들을 안고 축복해 주시기까지 하신 것이다. (1) 예수께서 "어린아이들 안고." 여기에서 이사야 40장 11절의 예언. "그는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어린아이일 때에 시몬의 품에 안기웠던 것인데(눅 2:28) 여기에 지금 예수께서 모세와 같이 짐이 된다는 불평이 없이 이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기뻐하신 것이다. 모세는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불평하면서 "내가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으라" 하느냐고 항의하는 말을 하였다(민 11:11, 12). 만일에 우리가 정중하게 우리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리고 나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능력과 섭리의 품속에 그들을 안아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동정과 은혜의 품에 안아 주시는 것이다(겔 16:8). (2) 예수께서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이것은 그들에게 성령을 부여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손은 주님의 손이고 주님은 스스로 성령을 그들에게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신령한 복으로 "축복하시"었다. 주님께서 이 신령한 축복을 부여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만일에 우리의 자녀들이 그들의 분량에 따라 중보자이신 예수의 축복을 받는다면 그들은 행복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 어린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셨다는 말씀을 볼 수 없음은 사실이다. 세례는 예수께서 부활하신후부터 비로소 교회에 입교의 관문으로 베풀어지도록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교인이 되는 자격을 주장하시었는데 그것은 다른 증거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축복이 임할 것임을 말씀하시었다. 그것은 우리나 우리 자녀에게 약속된 것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따르는 성령의 인인 것이다(행 2:38, 39). 부자와 천국 (마가복음 10:17-31) Ⅰ.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청년"사이의 희망에 찬 대면의 장면이다. 마태복음 19장 20, 22절에는 "청년"이라고 하였고 누가복음 18장 18절에는 "관원"이라고 하였는데 지위가 있는 사람인 듯하다. 여기에 나와 있으나 마태복음에는 그렇지 못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에게 대단히 유망한 이야기를 한 점이다. 1. 그가 그리스도에게 "달려"왔다. 이것은 곧 그의 겸손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에게 나올 때에 그는 관원으로서의 위엄과 명예도 개의치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함은 또한 그가 자기의 열심과 끈기를 나타낸 것도 되는 것이다. 그는 급한 사람 마냥 달려 나와 그리스도와 대화를 갖기를 원하였다. 그는 지금 대선지자와 더불어 그의 평안에 속한 일들에 대하여 의논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2. 그는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무리 가운데 계실 때에 예수께 나온 것이다. 그는 비록 관원이었지만 니고데모처럼 밤에 몰래 찾아와 담화를 나눈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밖에서 그를 만났을 때에(자기에게 충고해 줄 기회를 얻어) 입을 맞추어도 자기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아 8:1). 3. 그는 예수께 "꿇어앉아" 물었는데 이것은 그가 예수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큰 가치와 존경을 나타낸 표시이며, 예수께 가르침을 받고 싶은 그의 간절한 소원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예수께 무릎을 꿇고 엎드리었는데, 이것은 지금 그가 예수께 경의를 표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항상 예수께 복종하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마치 자기 영혼이 예수에게 경배 드림을 의미하는 것처럼 꿇어 엎드린 것이다. 4. 예수에게 드린 그의 질문은 신중하고 무게가 있는 것이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비록 그 당시에 우세한 당파인 사두개인들에 의하여 부인되었지만 영생은 그에게 신조의 한 종목이었다. 그는 영생이 우리에게 약속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가 "영생을 얻을"수 있는 것은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기가 영원히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되느냐고 묻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선을 소유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시 4:6). 그는 내세에서 최대의 선을 즐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어떠한 선을 행해야 되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의 질문은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가 누구냐?" 가 아니고(시 4:6)'누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도록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의무를 행하므로서 행복을 구한 것이다. 솔로몬이 궁구한 첫째의 선은 인생들이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는 선이었다(전 2:3). (1) 이 질문은 그 자체가 대단히 신중한 것이었다. 그것은 영생에 관한 문제였고 그의 관심은 영생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되느냐고 신중하게 묻기 시작할 때에는 거기에 얼마만큼 유망성이 있어 보이는 것이다. (2) 이 질문은 가장 적격자에게, 즉 모든 면에서 대답하시기에 적합하시고 그분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며 영생에 이르는 참된 길이 되시는 분에게 물어진 것이다. 그분은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천국문을 여시려고 오셨고 우리에게 천국문을 여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싶은 자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고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영생을 보여 주고 영생을 얻는 길을 보여 주는 것이 기독교의 특색인 것이다. (3) 이 질문은 가르침을 받기 위한 선한 목적으로 물은 것이다. 우리는 어떤 율법사에 의해서 이와 같은 질문을 물은 것을 볼 수 있다(눅 10:25). 그는 무릎도 꿇지 않고 서서 물었고 예수를 시비하기 위한 나쁜 목적으로 물은 것이다. 그는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청년의 물음은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좋은 의도에서 한 질문이었다. 하더라도 그리 좋은 말은 못되는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 이 청년의 청원에 대해서 친절히 응해 주시었다. (1) 그의 신앙을 도와줌으로써 그렇게 하였다(18절). 그가 예수에게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예수께서 그를 시정해 줌으로써 당신을 하나님으로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이름도 하나인 것이다(슥 14:9). 영어의 하나님(God)은 선(good)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능력의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Elohim)이라 하는데 "강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을 강조하기 위해 선하신 하나님(good God)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2) 실행을 지시하심으로 그렇게 하시었다. "계명을 지키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19절). 예수께서 인간에게 대한 여섯 계명을 진술하시었는데 그것들은 우리의 이웃에게 행해야 할 계명들이다. 예수께서는 그 계명들의 순서를 바꾸어 놓으시었다. 제 7계명을 제 6계명 앞에 둠으로써 간음이 살인 못지 않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임을 암시하시었다. 제 5경을 맨 뒤에 두었는데 이것은 특별히 기억하고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며 끝까지 잘 지키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제 10계명 "너희는 탐하지 말라" 대신에 우리 주께서 "속여 취하지 말라"고 하시었다. 이 말의 원어 "mh. avposterh,shj"는 하몬드 박사에 의하면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축내면서 네 것을 많게 하려고 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과 손해를 끼침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앞서거나 부요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의의 원칙인 것이다. 6. 그 청년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지 않음으로써 공명정대하게 천국을 구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느 정도까지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0절). 그는 자신이 그렇게 행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의 이웃들도 그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의 범위와 영적인 무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사실보다도 더 낫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이 없이는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율법이 신령한 줄을 알게 되었을 때에 자기 자신이 육신에 속하여 있음을 보게 되었다"(롬 7:9, 14). 그러므로 자기는 수치스러운 죄에서 자유함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영생의 길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고전 4:4). 7.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친절히 대하시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21절) 예수께서 그가 무흠하게 살아온 것을 아시고 기뻐하시었으며, 그가 어떻게 더 나은 생활을 살을 수 있는 가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이 청년 부자가 "그 얼굴을 하늘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는"것을 보시고 사랑하시었다(렘 50:5). Ⅱ. 그리스도와 이 청년 사이의 슬픈 이별. 1.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시험적인 명령을 하시었다. 이 명령에 의해서 그가 진실로 영생을 목적하고 구했으며 그것을 밀고 나갈 것인가가 판명되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그 심령으로부터 영생을 사모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사실이 그러하다면 그는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가 진실로 그 심령에서 영생을 구하였을까? 그러면 그를 시금석 위에 데려다 세워 보자. (1)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자기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었는가? 그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재빨리 기독교란 필요한 경우에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도록 요구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행 4:34, 35).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것을 면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 후에 말씀을 인해서 환난과 핍박이 일어날 것이며, 그는 그 재산을 팔지 않으면 안 되거나 다 빼앗기게 될 것인데, 그러면 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그는 그 최악의 사태를 지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런 불행에 이르지 않으려면 그 재산에 대한 자기의 권리를 포개해야 되는 것이다. 그가 처음에 예수에게 나와서 좋은 태도를 보인 것처럼 나중에도 그러했어야 하는 것이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를 주라"(21절). 아마 그에게는 양육해야 할 가족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가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가 되어 그들로 그이 상속자들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마땅히 자기의 능력에 따라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어떠한 어려움을 무릎 쓰고 그렇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세상 재물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로부터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생계비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사용하도록 하는 "달란트"로 주신 것이다. (2)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을 수 있는 그 어렵고 값비싼 봉사를 수행할 수 있고 "하늘에서 보화"를 얻으려고 주님을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는가? 그는 그리스도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그가 지금까지 행해온 일 외에 무엇을 해야 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얻고 싶어하는 "영생"에 대해서 진정으로 확고한 마음이 그에게 있으며 그 귀한 가치를 알고 있나 판명될 수 있는 이 명령을 그에게 내리신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하늘에 보화가 있음을 믿었다면 충분히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떠나거나, 버리지 않았겠는가? 그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려고 하였는가? 그는 자기의 모든 가치가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믿고 미래의 영광을 위해서 현재의 십자가의 고난을 참을 수 있었는가? 2. 그는 이 명령을 듣자 떠나가 버렸다(22절). "이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하는 것보다 어떤 쉬운 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영생도 얻고 세상 재물도 간직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자가 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이를 변명하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근심하며 가나리"(22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 진리가 여기에 입증된 것이다(마 4:24). 그가 재물을 붙들고 있는 동안 그는 사실 그리스도를, 마치 그분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그런 모든 자들처럼 멸시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는 마음에 있는 것을 사려고 시장에서 값을 물은 것이다. 그러나 근심하며 그곳을 떠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부른 값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청년을 멸망하게 한 것은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탓이었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이다(잠 1:32). 그리고 부요한 중에 소일하는 자들은 시험을 받아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를 떠나라"고 하며 그들의 마음에 대하여 "하나님을 떠나라"고 하게 된다. Ⅲ.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말씀하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따르려고 한 젊은 사람을 깜짝 놀라 돌아서게 한 그 말씀을 진정시키고 그 말 가운데 나타난 가혹함을 씻어버리기 위해 어떤 설명을 하였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 청년이 부자이며 관원이기 때문에 당신의 제자가 되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가려면 가라고 하신 주님의 태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뜻을 거역하면서 아무도 붙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를 불러 돌아서게 하시지 않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기회를 맞이하여 당신의 제자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치려 하신 것이다. 1. 이 세상의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재물을 소유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것들을 버리라고 한다 해서 버리고 따르거나 선을 행하기 위해서 내놓을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이 사실을 주장하였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말씀을 모든 제자들이 주의해서 잘 듣고 그들이 과대 평가하기 쉬운 세상 재물에 대하여 옳은 판단을 갖고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23절). 그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별로 없는, 움켜쥐려는 시험이 많고 그대로 지나치기 어려운 점들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얘들아"하고 부르셨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그들이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마땅히 아이들과 같은 심정에서 배워야 하고 그들은 그 청년이 움켜쥐려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섰던 그런 재물보다도 더 좋은 것으로 분배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재물이 많은 것보다 그들이 재물을 신뢰하고, 재물이 그들을 보호하여 주고 생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생각하여 의지하며, 다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함에도 "금으로 소망을 삼는"(욥 31:24) 그런 것이 더욱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재물에 대해서 이와 같이 과대한 평가를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대해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나 물질의 허무성을 알므로 가난하면서도 그들의 영혼이 행복한 자들은 어떠한 역경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서 쉽게 그 재물들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은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만일 그 적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자들은 그것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주장을 강조하였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절). 여기에 나온 두 가지의 불균형은 너무 차가 크다(그렇지만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여기에 의도하신 더 좋은 대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자들은 약대와 바늘귀의 불균형의 차이를 조금 좁혀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1] 어떤 이들은 추측하기를 예루살렘성에는 보통 "바늘귀"라고 부르는 협문이나 쪽문이 있었을 것이며, 그것이 너무 협소해서 약대가 짐을 싣지 않고 빈몸으로 끌어야만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창 24:11). 그러므로 부자가 세상 재물의 짐을 기꺼이 벗어 놓지 않으면 천국에 들러갈 수 없고 신앙적 의무에 대해서 겸손히 굽혀야만 그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2] 다른 어떤 이들은 설명하기를 우리가 "약대"라고 번역한 이 말은 때로는 밧줄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바늘 귀"로 통과되지는 않지만 전연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자를 빈자와 비교하는 것은 밧줄을 실과 비교하는 것이나 같은데 밧줄은 강하기는 하나 유연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도로 풀지 않으면 "바늘귀"로 통과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는 그의 부한 재물로부터 얽힌 것을 풀어야만 되는데 그렇게 할 때에 그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밧줄을 풀은 실이 바늘귀로 통할 수 있는 것 같이 그에게 천국에 들어갈 소망이 있으며 그러지 않고는 그는 지상에 닻을 내리고 있는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 이 진리는 제자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26절). 그들은 유대교 선생들의 일반적인 소감이 어떠함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부자들에게 찾아와 거하기를 원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일시적인 선한 일들에 대해서 구약에 풍부하게 약속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또한 부자나 연약한 자에게나 똑 같이 그 약속들이 타당하지만 부자들이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던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부자들이 구원을 얻는 길에 놓인 장벽을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으로 해결하실 수 있다는 여유 있는 말을 하여 그들을 안심시켰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27절). 사람의 수단이나 힘으로는 그 어려운 장애물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7절). 만일에 의인도 구원함을 받기가 어렵다면 부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하다. "우리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이 세상에 대해서 가난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의 구원은 위대한 것이다.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절)라고 자기 자신과 다른 제자들이 주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하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너희가 잘하였도다. 마지막 날에 이르면 너희가 잘하였음이 판명될 것이다. 너희가 넉넉하게 보상을 받을 것이다. 너희와 같이 적은 것을 버린 자나 많은 소유를 버린 자나 다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1) 주를 위해 버린 손실이 대단히 클 것을 암시하였다. 예수께서 그에 대해서 일일이 열거하시었다. [1] 세상적인 부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었는데 그 중에서 집을 맨 먼저 말씀하시고 전토를 맨 나중에 말씀하시었다. 만일에 사람이 자기의 거주지인 집을 버린다면 그리고 자기의 생계의 수단이 되는 전토를 버린다면 자기 자신을 거지로 만들고 추방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이 고행을 위해 나선 성도들의 선택한 길이 되어왔다. 제아무리 편리하고 욕심이 나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 하더라도 아름다운 큰 저택들이 즐비한 하늘 나라와 빛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들의 거주지인 천국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2] 귀한 가족들에 대해서 다음에 말씀하시었다.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나"(30절). 여기에도 다른 일시적인 축복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위안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없이는 세상은 광야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이들 중에 한편을 버려야만 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와 가까운 생명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교제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모든 세상을 끊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레위와 같이 부모에 대해서 "내가 당신들을 모릅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선한 사람의 지조에 있어서 가장 큰 시련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 합리적인 인간적 사랑 즉 자기의 의무와 경쟁할 때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의 어떤 욕망을 버리는 것은 그래도 쉬운 편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자기 안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들을 버리는 일은, 그들을 자기가 마땅히 돌보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이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버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손해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더욱 영광을 받으시고 복음이 더욱 전파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순교자가 되게 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명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유익도 큰 것이다. (2) 이 유익을 살펴보도록 하자. [1]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30절). 종류를 따라 열거하지 않았으며 모두 동등하게 취급하신 것이다. 그는 자기 생전에는 자기의 손실에 대해 흡족한 보상을 받게 되어 넘치는 위로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와 그의 관계, 모든 성도들과의 교제, 영생의 축복, 주 안에서 얻은 형제, 자매, 집들 등등의 축복도 그 보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잃었던 욥은 그 두 배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백 배의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다. 모든 피조물을 위로하는 성령의 위로 중에 이 모든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여기 마가복음에는 "핍박을 겸하여" 다 하였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이 승리자들이 되었을 때에라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천국에 이를 때까지는 핍박을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현제에서 복음을 받는 자들에게도 이 핍박이 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짐은 그리스도를 믿게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도 당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다는 아니다. [2] 그들은 내세에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만일에 그들이 금세에서 백 배의 축복을 받으면 그들은 더 이상 감히 다른 축복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기도 쉽다. 그러나 그들이 금세에서 받는 축복도 적은 듯이 영생의 축복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를 위해 버린 것의 만 배도 더 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너무 많이 말을 하고 실제로 그들이 한 것 보다 지나치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비록 그들이 처음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들 뒤에 제자로 부름을 받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보다 더 나을 수 있다고 하시었다. 사도 바울을 보더라도 그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 자였지만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한 것이다(고전 15:10). 그러므로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은" 것이다. 자기의 운명을 예고하심 (마가복음 10:32-45) 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예언하심. 그리스도께서 여러 번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귀에는 거슬리는 말이었고 유쾌하지 못한 말이었다. 1.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담대하신가를 보라.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우리의 구원의 대장으로서 지금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시려는 것이다(32절). 그러므로 그는 몸소 사명을 짊어지고 앞장서서 나아감을 보여 주신 것이다. 비록 그 사명의 가장 어려운 지점에 이른 때까지도 말이다. 지금 그 때가 이른 것이다. "보라 우리가 올라가노니" 예수께서는 비겁하게 물러 설 분이 아니시다. 그리고 지금 예수께서는 이 전보다도 더 앞장서서 가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 두려워하더라."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무한한 위험 속에 뛰어들어가고 있음을 생각하였다. 그들의 선생과 자기들을 적대시하는 산헤드린 대법원 법관들이 얼마나 악한가를 그들은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여도 겁이나 떨리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을 고무하기 위해 그들 앞에 서서 걸으셨다. 그는 말씀하시었을 것이다. "가자. 너희는 분명히 너희의 선생이 하는 모험을 너희도 할 것이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게 될 때에 우리 주님께서 앞장서서 걸으시는 것을 보면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게 된 일은 예수께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유쾌하고 민첩하게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더욱 존경하게 된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사명을 다하시려고 앞서서 가시는 그리스도의 요기와 지조는 그의 모든 제자들의 놀라움이 될 것이다. 2. 예수의 제자들이 얼마나 비겁하고 의지가 약한 자들이었나를 보라. 저희는 예수를 따라가면서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위험에 사로잡혀 스스로 두려워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들이 두려워한 일에 대해 마땅히 부끄럽게 여겼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선생의 용기는 그들에게 용감한 정신을 불어넣어 주었을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두려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어떠한 방법을 취택하였는가를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그 문제를 그 보다 낫게 해결하려고 노력하거나 자기가 그 폭풍을 피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나타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전에도 자주 말씀하신 "자기의 당할 일을" 다시 말씀하시었다. 예수께서는 그 수난의 최악의 상태를 알고 계시었다. 그러므로 그는 담대하게 나아가신 것이며 그들에게 그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가자 두려워하지 말자고 하시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다른 방법이 없다. 문제는 이미 결정되었다. 그리고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2) 오직 인자만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그들이 당할 고난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그들의 안전을 공급하시는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다 부활하실 것이다. 그의 고난의 졀과는 그 자신에게 영광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33,34절).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방법과 특징이 여기에는 다른 어느 예언보다도 더 광범하게 되어 있다. 즉 그가 먼저 유다에 의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그들이 그를 죽이기로 정죄하였고 그들이 직접 죽일 권한이 없으므로 "이방인들"에게 로마의 권세 아래 넘겨주어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라 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글에 대한 모든 악한 상태를 완전하게 통찰하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죽음을 맞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두 제자의 야심적인 요구를 저지하심.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20장 20절에 나와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그곳에는 그들의 어머니를 통해서 그들의 요구를 부탁하였고 여기에는 그들 자신이 직접 요구하였다. 어머니가 그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요구를 간청하였다. 그리고 그들도 거기에 동의를 한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 기도에 있어서 우리에게 허락한 큰 용기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활용치 않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남용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큰 일들을 구하는 것은 훌륭한 믿음이다. 그러나 이 제자들처럼 주님께 무제한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도한 낭비가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35절). 우리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대로 이루어 주시도록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훨씬 현명한 것이다. 그러면 주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이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엡 3:20). 2. 우리는 일반적인 약속들을 어떻게 대해야 될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무엇을 바라든지 모두 이루어 주시려고 하시지 않고 그들이 바란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시는 것이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26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기들에게 적합한 것을 구하기를 원하셨으므로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였을 것이다. 3.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하여 거짓된 개념을 가져 유혹에 빠졌으니 이는 그들이 그 나라를 이 세상으로 또한 이 세상의 권력자들로 구성되는 왕국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생각하기를 만일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면 그가 왕이 되실 것이고 그가 왕이 되면 그의 사도들은 장관들이 될 것이고 이들 중 한 사람은 바로의 왕정에 요셉과 다리오의 왕정에 다니엘과 같이 총리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본 것이다. 4. 세상 영광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여러 번 현혹하게 하였던 찬란한 것이다. 그러므로 크게 보이고 뛰어나게 될려고 하는 것보다 선하게 되려고 하는 데 우리의 관심이 더욱 많아야 한다. 5. 우리의 약점과 근시안적인 사고는 다른 어느 문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 가운데도 많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에게나 우리 자신에게 대하여 이성이 흐려서 하나님께 명령적인 언사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명령함은 어리석은 일이며 청원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6. 우리가 고난에 대비하고 그리스도께서 그 고난에 대하여 보상하여 주시도록 그에게 맡기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하수에로 왕과 같이 자기의 백성들을 기쁘게 하는데 마음에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으며 또한 자기 백성들의 믿음의 역사나 사랑의 봉사에 대해서 잊으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견디는가에 대한 지혜와 은혜를 소유하는 것이며 그러한 때에 어떻게 우리가 그와 더불어 다스리며 우리의 영광의 척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지든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도록 그에 맡기는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이 일에 대하여 불쾌하게 여기는 나머지 제자들에 대하여 이를 금하심.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41절). 그들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두 제자들에게 분개하였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음에 대하여 불행해서가 아니라 그들 서로가 스스로 으뜸이 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한 번은 견유학파의 사람이 알렉산더의 보도 융단을 밟으면서 "지금 내가 알렉산더의 교만을 짓밟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적절하게 그의 행동을 저지하였으니 곧 "그러나 네 자신의 교만은 더욱 크다"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그들의 불쾌한 언사에서 그들 자신의 야망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경우를 당하여 그들을 경고하였고 모든 복음 전도의 계승자들에게 경고하신 것이다(42-44절). 그리스도께서는 친절한 방법으로 그들을 자기에게 부르시고 그들에게 겸손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 후에 그들의 야망에 대하여 꾸짖고 그들 사이에 거리감이 없도록 당부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보여 주신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그런 야심은 세상에서 보통 남용되고 있다는 것이다(42절).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이방인들을 다스리는 소위 그 집권자들은 그들을 임의로 주권을 행사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런 목적으로 배웟고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복리를 제공하도록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들에게 권리를 행사하도록 배웠고 저들은 복종하여야 하며 매사에 그들의 의사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의 사고는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내가 명령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곧 나의 법이다"라는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의 주관에 따라 그들 자신의 찬란과 영광을 누리도록 무엇을 얻느냐이고 저들을 위해 자기들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닌 것이다. 2.그러므로 그런 정치 사고가 교회에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43절). 너희들의 책임 하에 들어온 자들에 대하여 목자의 보호 하에 있는 양들같이 하라. 목자는 양들을 돌보고 먹이고 봉사하는 것이다. 몰이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말과 같이 앉은 것이다. 그들은 말을 부리고 때리고 몰아대지만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위대하게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를 세속적인 지배와 통치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는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의 눈에는 천하고 비열하게 보이는 것이다 "스스로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리라." 또는 "참으로 크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겸손히 모든 사람을 위해 선을 행하고 허리를 굽혀 가장 천한 일과 가장 고된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이후로는 가장 존경받을 자가 될 뿐 아니라 지금도 가장 존경받아야 마땅하고 가장 유용한 자인 것이다. 이 진리를 그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들 앞에 자기 자신을 예로 들어 말씀하시었다(45절). "인자는 먼저 가장 심한 고난과 어려움에 복종하여야 한다." 그런 후에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너희도 그렇게 고난을 당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고는 그와 같은 안위와 영광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스스로가 종의 모양을 취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기 위해 오시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시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량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죽으셨으나, 우리는 그들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을 배우고 있는가? 바디매오를 고치심 (마가복음 10:46-52) 이 이야기의 성귀는 마태복음 20장 29절 이하와 동일하다. 다만 그곳에는 두 사람의 소경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으며 본문과 누가복음 18장 35절은 오직 한 사람의 소경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곳에 두 사람의 소경이 있었다면 한 사람의 소경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이 한 소경의 이름이 여기에 "소경 거지 바디매오"라고 나와 있고 "디매오의 아들"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소경의 아들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바디매오는 소경의 아들인 소경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더욱 불행한 경우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경의 치유는 더욱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소경으로 난 자뿐 아니라 소경에게서 소경으로 난 자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 치유됨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더욱 적합하다. Ⅰ. 이 소경은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다. 그런 구걸하는 자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그들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 즉 다른 어떤 생계수단이 없는 자들은 우리에게서 자선을 필요로 하는 가장 적당한 대상자들인 것이다. 그런 자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Ⅱ. 그는 주 예수께 자비를 간구하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련함은 자비의 대상이다. 그 자신의 가련한 경우에 그는 다윗의 자손에게 동정을 구하였다. 그 다윗의 자손이 우리를 구하시려 오심에 대하여 이미 예언되어 있으니 곧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다"(사 35:5). 도움과 병 나음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나올적에 우리는 그가 약속된 메시야이며 자비와 은혜의 수탁자임을 한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그가 자비를 찾을 수 있음에 대하여 소망을 그에게 일으켜 주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하시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하고 나갈 때에 그 일이 중단된다고 해서 우리의 진로의 방해로 단정해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 주위에서 처음에 그를 잠잠하라고 실망을 주었던 자들이 지금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부름을 그에게 알려 주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그가 너를 부르시니 너를 고쳐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로 나오라는 은혜로운 초청들은 우리들에게 소망을 불러일으켜 주심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올 때에 신속히 나와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범죄한 자들, 빈털털이들, 시험 당한 자들, 배고픈 자들, 벌거벗은 자들이여 안심하라.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자들을 부르시어 용서하시고 공급해 주시고 구조해 주시고 채워 주시고 입혀 주시며 그들이 부르짖은 모든 것을 그들에게 얻게 하시는 것이다. Ⅳ. 여기에서 그 불쌍한 소경은 그리스도에게 나가는 최선의 길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거추장스런 겉옷을 내어버리고 그리스도에게 나아왔던 것이다(50절). 그는 자기를 넘어지게 할 만한 위험한 것들이나 어느 면에서나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나 자기의 행동을 둔하게 할 만한 것들은 집어 던져버린 것이다. 예수에게 나오기를 원하는 자들은 자기들 자신의 만족의 겉옷을 내어 던지고 모든 자만의 옷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무거운 것이나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가장 달리기에 간편하도록 해야한다(히 12:1). Ⅴ. 그가 간청한 특별한 자비는 자기의 눈을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생계를 위해 일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짐을 지워주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빵을 얻을 능력을 갖는 것이 가장 바라는 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그들의 지체와 감각을 주셨는데 그것들을 사용하는데 어리석고 태만하다면 실로 소경과 절름발이와 같으니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Ⅵ. 이 자비를 그는 받게 되었다. 그의 눈이 열린 것이다(52절). 그런데 여기에서 마가는 두 가지를 첨가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나타내고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이 눈 뜬 사실을 그의 믿음에 그 영광을 결부시킴으로써 그에게 이중으로 은혜를 베푸신 것을 볼 수 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다윗의 자손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그의 자비와 능력에 대한 신앙이다. 당신의 무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신앙이 그로 하여금 역사 하시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믿음을 주어 역사 하시게 한다. 2. 어떻게 그는 자기 스스로 이 사실로 하여금 이중적 은혜를 입게 하였는가를 보여 준다.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쫓으니라"(53절).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가 완전히 고침을 받았으므로 자기를 안내해 줄 어느 사람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혼자서 걸을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친절에 대하여 감사하는 생각을 표시하였으니 그가 시력을 얻게 되자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그것을 활용하려고 한 것이다. 영적인 치유를 받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고침을 받았을 때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고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영적인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실제적으로 그 뒤를 좇아가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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