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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무엘하17장1~14절
제목 : 아히도벨의 계략, 하나님의 모략
압살롬이 이르킨 반역은 승리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고, 다윗은 피난 길에 오르게 됩니다.
다윗은 자기에 닦치는 모든 고난이 자기의 죄로 인한 것을 받아 드리고 회개합니다. 시므이의 저주도 감수합니다.
피난중에 다윗은 압살롬의 진영에 아이도벨이 있다는 정보를 듣습니다.
그 정보를 듣은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때에 후새를 만나게 됩니다.
다윗은 후새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아이도벨의 계략을 분쇄 하도록 명령합니다.
아이도벨은 첫 계략으로 아버지의 후궁들과 대 낮에 동침하게 합니다.
이는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였바입니다.
그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아이도벨의 정확한 계략도 결국에는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략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하심에 의해서 철저하게 분쇄되어 지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이도벨이 다윗을 죽이기 위한 계략을 내놓지만 결국 후새의 제안이 채택됩니다.
승리를 위한 인간들의 전략 싸움 너머에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모략이 있습니다.
1. 아이도벨의 계략(1~4절)
1)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하게 하여 오늘 밤에 다윗의 뒤를 추적하겠다고 합니다(1절)
“[1]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따라. - 여기서 '오늘 밤' 은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서 급히 도망가고(15:14-16)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바로 그날(15:37;16:15)밤을 가르킵니다.
따라서 아히도벧(Ahithophel)의 이와 같은 모략(謀略)은 다윗에게 약간의 쉴겨를도주지말고 바로 뒤따라가 다윗을 처치하자는 계략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아히도벨의 상황 판단은 아주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다윗은 피곤한 몸으로 바후림(또는 아예핌) 부근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곳은 예루살에서 밤사이에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는 요단강근처였기 때문입니다. 16:14 주석 참조.
*16:14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그러므로 만일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정예군을 급파 하였더라면 다윗은 꼼짝 못하고 칼에 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Wycliffe).
2) 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겠다고 합니다(2절) “[2] 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약할때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르페 야딤'은 직면하면 '손들이 무력해질 때' 란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손들'이란 말은 성경의 용례들을 살펴볼때 대개 '힘'을 상징하는 말입니다(레 12:8;14:21,32;민6:21;신3:24;16:10;시89:48;겔8:1).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이와 같은 아히도벧의 예견(豫見) 또한 아주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다윗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은 소수의 시위병들과 육백인의 용사들(15:18)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무장하지 아니한 오합지졸(烏合之卒)이거나 선량한 백성들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15:17 주석 참조.
따라서 압살롬의 정예부대가 엄습(掩襲)할 경우 아히도벨의 예견대로 이들은 모두 혼비 백산(魂飛魄散)하여 흩어질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히도벨의 놀라운 통찰력을 보게 됩니다.
다윗왕만 쳐 죽이고. - 다윗 왕만을 쳐 죽이겠다는 아히도벨의 이같은 모략은 치밀한 계략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즉, 아히도벨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대다수가 압살롬을 지지하고 있으며(15:12), 현실적으로 실제적인 왕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에(대상 3:1-9)
무의미한 살인을 감행할 필요가 없다고 계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지 다윗 왕만 처치하면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압살름의 지휘하로 몰려들게 될 것 이라는 것이 아히도벨의 치밀한 계산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아히도벨의 무서울 정도로 치밀한지략(智略)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상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침해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자극하는 것이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이 제거하려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삼상16:1-13).
3)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합니다(3절).
“[3]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니”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 여기서 '모든 백성'이란 온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당시 다윗 왕을 추종하던 세력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16:15주석 참조.
따라서 본절로 보아 아히도벨은 다윗이 사망한 이후에는 다윗 왕을 추종하던 자들일 지라도 이미 사망한 왕을 더 이상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아히도벨은 '돌아오게 하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곧
그가 다윗의 추종자들을 국가의 반란자들로 그리고 압살롬의 정권(政權)을 정통성 있는 정권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즉 아히도벨은 이갈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압살롬에게 은연 중 아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Keil,Lange)
한편, 70인역(LXX)에서는 본절 다음에 '마치 신부가 자기 남편에게로 돌아옴과 같이...'이란 구절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 이는 다윗 추종자들이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느냐 오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순전히 다윗의 생사(生死) 여부에 달린 문제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죽기만 하면 백성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압살름에게로 오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4)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깁니다(4절).
“[4]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모두가 아히도벧의 말을 기뻐하면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로 인해 부패해진 인간들의 이성적 판단이 얼마나 그릇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절감(切感)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친아버지 다윗을 죽이자는 제안에 스스럼없이 '옳게 여긴' 압살롬이나, 지금껏 섬겨오던 자신들의 왕 다윗을 쳐죽이자는 제안에 동조한 이스라엘 장로들이나 모두 다 건전한 이성(理性)을 지녔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아히도벨으 모략을 비난하는 후세(5~10절)
1) 압살롬은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고 그에게 아히도벨의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십니다(5,6절).
“[5]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6]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 압살롬이 후세(Hushai)를 불러 그의 견해를 경청코자 한 사실로 보아 이제 후새는 아히도벨 못지 않게 압살롬으로부터 대단한 신임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Lange).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은 다윗을 구원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음을 결코 간과 해서는 안됩니다(14절).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이는 압살롬의 이 작은 조치 하나로 말미암아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가 뒤바뀌어지기 때문입니다(17:14-26).
2) 후새는 압살롬에게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7절).
“[7]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이 때에는 아히도벨의 베푼 모략이 선치 아니하니이다. - 이는 아히도벧의 모략이 지금까지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잘못된 것이라는 후새의 주장입니다.
즉 후새는 다윗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15-26절) 아히도벨의 모략(謀略)에 정면으로 반박한 것입니다.
3) 아히도벨의 계략이 잘못된 내용입니다(8~10절)
(1) 다윗 왕과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요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들과 함께 자지 아니할 것이다는 것입니다(8절).
“[8] 또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 이와 같은 후새의 주장은 다윗이 지금 기진맥진해 있다고 한 아히도벨의 주장(2절)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입니다.
즉 후새는 아히도벨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은 용사(勇士)들이며 지금은 예루살렘 성을 빼앗긴 일로 인하여 격분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즉시 군사적인 행동을 개시 하자고 주장한(1절) 아히도벧의 모략을 분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위급한 상황을 최대한 호도(糊塗)하여 다윗을 위기에서 구하려는 후새의 절실한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편, 후새가 본절에서 다윗과 그 종자들을 '새끼를 빼앗긴 곰' 에다 비유한 것은 의도적이었습니다.
여기서 곰은 팔레스틴에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시리아의 갈색곰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매우 사나운 것으로 이름나 있습니다(잠 17:12; 호13:8).
*잠17:12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호13:8 “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
즉 후새는 다윗과 그 종자들을 사나운 시리아의 갈색 곰에다 비유 함으로써 지금 심히 약화된 다윗의 실제 전력(戰力)을 압살롬이 직시하지 못하도록 꾀하였던 것입니다(16:14).
*16:14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 이러한 후새의 주장 또한 기습 공격시 쉽게 승리롤 이끌어낼 것이라고 한 아히도벨의 낙관적인 주장(2절)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즉, 후새는 아히도벨이 아무리 기습 공격을 한다 하더라도 다윗은 병법(兵法)에 뛰어난 사람이므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그리 용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다윗이 사울 왕으로부터 도피할 때 실제로 많은 추격 부대를 여러차례 따돌린 바 있고(삼상24:1-22;26:1-15), 또한 그가 뛰어난 지략가라는 사실은 이미 압살롬과 그 신하들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후새의 주장은 그들에게 상당한 호소력(呼訴力)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서 패함을 당했다고 할 것입니다(9절).
“[9] 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에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정예 부대를 파견할 경우(1-4절) 압살롬과 다윗 진영은 사실상 최초의 전투를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새는 이 최초의 전투에서 기습 공격에 능한 다윗군에게
압살롬의 군대가 패배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10절).
“[10] 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 이는 최초의 전투에서의 패배가 몰고 올 압살롬 군대의 심각한 사기 저하(士氣低下)를 예상하는 후새의 말입니다.
즉 '사자'는 성경에서 대개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스러운 자를 상징하는 바, 여기서는 압살롬의 용맹스런 군사를 의미합니다(1:23;창49:9;사38:13;벧전 5:8).
따라서 본절을 해석하면. 아무리 용맹스러운 압살롬의 군사라도 그 마음이 완전히 낙담해 버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후새의 논리는 매우 그럴 듯합니다.
왜냐하면 군사전략상 최초의 전투는 전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향 일전(一戰)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번에 있을 전투는 압살롬 진영과 다윗진영의 실세(實勢)를 판단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이같이 중요한 최초의 일전에서 압살롬의 군대가 그 일부라도 다윗군의 기습 작전에 말려들어 패하게 된다면, 그 소문이 온 군대에 퍼져 그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될 것은 당연했습니다.
특히 압살롬의 군대는 반란 동조자들 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난이 실패할 경우 국가의 법에 따라 처벌 될 것을 염려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후새는 바로 이와 같은 논리로써, 만약 실패 할 경우 너무나도 큰 손실을 보게 될 이번의 성급한 출전을 포기하도록 압살롬을 회유(懷柔)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후새의 모략(11~14절)
1) 아히도벧의 모략(1-3절)을 대신하는 후새의 대안(代案)입니다(11절).
“[11] 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여기서 후새는 이스라엘의 국민병(國民兵)을 온 지파 에서모집 할 것을 제안합니다(Matthew Henry).
이러한 후새의 제안은 압살롬이 국민병을 모집하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다윗 왕으로 하여금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게 하기 위한 교묘한 방책이었습니다(15-26절).
그런데 이같은 후새의 제안은 자기들이 갖고 있던 모든 힘을 한번 과시해 볼 수 있는 매혹적인 기회라는 점에서 압살롬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끌었습니다(Clericus).
또한 여기서 후새는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총병력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진두 지휘(陣頭指揮)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이는 실상 압살롬을 전장(戰場)에 끌어들이기 위한 계략입니다.
즉 반란의 주모자인 압살롬이 전장에 나가서 죽거나 포로가 된다면 반란은 끝이 나기 때문에 후새는 압살롬 자신이 친히 전장에 나가도록 부추겼던 것입니다(18절).
그런데 이러한 후새의 제안은 압살롬의 영웅 의식을 자극하였습니다.
즉, 거대한 군대를 친히 지휘한다는 것은 섀로운 통치자 압살롬에게 있어 매력적인 것이었음이 틀림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후새의 제안은 압살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던 것(14절)입니다(Payne).
우리는 여기서 압살롬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교묘히 움직여, 당시 상황 하에서 최선책(最善策)이었던 아히도벨의 모략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후새의 뛰어난 활동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후새의 이러한 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14절).
즉 하나님께서는 비록 다윗의 죄에 대하여서는 징계할지라도,
그의 생명과 나라는 끌까지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바(7;14-16; 12:9-13) 이제 그에 따라 다윗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신 것입니다.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 단(Dan)은 팔레스딘 최북단에 위치한 성읍으로 일명 '라이스', '레센'으로도 불리웁니다(수 19:47).
그리고 브엘세바(Beer-sheba)는 팔레스틴 최남단에 위치한 성읍으로, 과거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사가 된 곳입니다(삼상 8:2).
따라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은 이스라엘 전국토를 의미하는데(24:2, 15; 삼상3:20), 본절 역시 그러한 의미입니다. 삿 18:29 주석 참조.
2) 인해 전술을 써서 전멸 시키자는 것입니다(12절).
“[12]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그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 여기서 '덮여'('누아흐')는 '앉다'는 뜻으로 이슬이 내려앉는 것 외에도 황충(蝗蟲)의 떼가 농작물을 갉아먹는 모습(출 10:14), 혹은 파리떼나 꿀벌떼가 먹이를 공격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사 7;19).
따라서 본절은 엄청난 다수로써 소수를 몰아붙이는 인해 전술(人海戰術)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Wycliffe).
그런데 후새가 제안한 이러한 전술은 많은 시간을 요하는 전술로서, 일찍이 제시됐던 소수의 민첩한 정예 부대를 파견하여 순식간에 다윗을 살해하자는 아히도벧의 모략(1, 2절)과는 정반대 되는 것입니다.
3) 후새는 자기의 전술을 확대 재 생산합니다(13절)
“[13] 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다윗이 요행히도 성 안으로 도피할 경우 밧줄로 그 성과 시설물들을 묶어 모조리 강으로 끌어내리자는 뜻입니다.
물론 이는 과장된 표현입니다.
즉 여기서 후새는 이스라엘 대중의 힘을 과장하여 표현함으로써, 인해 전술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자신의 제안(11,12절)을 더욱 그럴듯하게 보이려 한 것입니다.
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고 합니다(14절)
“[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이 당시로서는 최고의 전략이었던 아히도벨의 모사(1-3절)를 거부하고,
그보다 열등한 전략이었던 후새의 모사를 받아들이는 장면입니다.
이는 압살롬 진영의 치명적인 실책(失策)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러한 압살롬의 치명적인 실책의 원인을 분석해 보면 두어 가지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1) 압살롬이 앞으로의 정세를 지나치게 낙관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압살롬은 앞으로도 다윗의 세력은 미미할 것이나 자기의 세력은 국민병의 모집으로 인해(11절) 크게 획장 될 것 이라고 낙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의 낙관과는 달리 다윗에게는 뜻하지 않은 군사적 원조가 들어왔으나(27-29절),
압살롬은 거국적인 국민병 모집에 실패하였던 듯합니다.
(2) 압살롬이 후새의 아첨에 우쭐 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이스라엘 총병력의 지휘자가 되라는 후새의 아첨(11절)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직관력(直觀力)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Payne).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압살롬의 통치 능력(統治能力)의 부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항상 자만심에 빠지지 않은 다윗의 자세와는 현저히 비교됩니다(5:19, 23).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 아히도벨의 모략이 파기되는 대신 후새의 모략이 채택되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사태의 변화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략과 술수가 팽배하던 압살롬의 군사 회의에 마치 친히 참석하셨던 것과도 같이 역사하사 악인들의 불의한 모략을 결국 파하시고 만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이 의인에게는 평안과 복을 뜻하지만 악인에게는 파멸과 심판을 의미할 뿐임을 재삼 획인 할 수 있습니다(요 1:14; 14:16).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후새의 계획을 채택하게 된 이유를 성경게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14절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아무리 훌륭한 계책이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시행되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후새의 전략은 아이도벨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전략이었습니다.
아이도벨은 압살롬 진영의 월등한 군사력에 초첨을 마춘것이라면,
후새의 전략은 다윗과 그의 군사력에 초점을 마춘 것입니다.
후새는 다윗의 전략이 만만치 않음을 이야기합니다.
이 작은 결정이 다윗에게는 회복의 시간을 주게 됩니다.
이 결정은 당대의 최대의 책사를 죽음으로 몰아 넣습니다.
전쟁의 대세는 완전히 압살롬의 일방적인 승리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전략가는 가장 합리적이면서 피해가 최소화 할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주 작은 것에 의해서 무저녀 네립니다.
그 이유가 매우 작지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14절에서 이미 보았듯이 여호아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이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추어야 할 것은 가장좋은 전략도 상황의 유리함도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있는가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재물과 영광과 생명의 복을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인간의 계략이 하나님의 모략을 이기지 못합니다(14절).
아히도벨의 탁월하고 신중한 계략이 후새의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계략으로 무산됩니다.
후새의 계략이 더 나아서가 아니라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는 다윗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입니다(15:31).
하나님이 아이도벨의 뛰어난 모략보다 후새의 의로운 모략에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아히도벨을 의지한 압살롬보다, 하나님을 의지한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아히도벨은 왕(압살롬)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겠다고 자청합니다(1~4절).
다윗 한 사람만 죽이고 만은 백성을 살리려는 전략도 모두 ‘다 옳게’여길 만큼 훌륭합니다.
그는 항상 신중하고 지혜롭지만 정작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대적하는 데 지혜를 사용합니다.
악한 일에 지혜롭고 선한 일에 미련합니다.
지혜를 구하기 전에 성경적 가치관과 성품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구하십시오.
모두 다 옳다고 혹은 틀렸다고 여기는 내 판단에 대해 왕이신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고 있습니까?
2) 압살롬과 장로들이 다 좋다고 여긴 아히도벨의 계략을 후새가 ‘좋지 않다’고 평합니다(5~10절).
후새는 전쟁과 병법에 능한 다윗을 과소평가한 계획이며 자칫 압살롬 군대의 전략과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겉으론 아히도벨의 전략을 비판하면서도 실제론 다윗을 구할 지혜를 짜냅니다.
그는 가장 유능한 사람이 아니자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지혜를 도모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편에, 진리의 편에, 의에 편에 선 자가 참 지혜자입니다.
3) 어리석은 자는 과장된 거짓에 쉽게 속습니다(11~13절).
합리적이지도 전술적이지도 않은 후새으 계략에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이 수긍합니다.
과도한 욕십이 과도한 꿈을 꾸게 만듭니다.
긍정적, 적극적 사고방식이란 이름의 거짓이 인간의 욕망에 바람을 넣습니다.
‘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믿음으로 오해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오히려 주께서 내게 두신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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