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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그림자 찾기와 그 기법
-이연희의 수필세계
이연희의 수필은 여자의 감성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감성은 남자보다도 더 절제를 요구한다. 어찌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어색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말을 부려 쓰는 패턴이 아주 능숙하면서도 흥분하지 않는다. 아무리 커다란 충격이라 해도 작가 이연희에게 잡히면 그냥 평범한 것으로 먹히고 만다.
그가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특이하다. 세세한 부분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여성의 예민한 감수가 내재해 있으면서도 사건을 바라보는 눈은 그렇게 밋밋할 수가 없다. 좋지 않게 표현하면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작가 이연희에게 잡히면 별거 아닌 것이 되고 만다고 할 수 있다. 흥분이 없고 감정이 없는 냉혈에 잡힌 포로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수필 속에는 커다란 사건이 거의 없다. 일상인의 눈에는 흘리기 쉬운 것들이 그의 미늘에는 언제나 걸려든다. 그리고 그것을 한입에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입 안에 물고 삭혀나간다. 작가 이연희는 입 안에 글감을 물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곱씹어 보며 사색하여 풀어낸다.어찌 보면 담론에 가까운 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연희 수필의 내용은 생활 주변의 이야기다. 하지만 주변에서 일어난 소소한 것도 제목에 가까운 언급에서 멈추고 있다. 생활 주변의 이야기라 해도 자초지종은 이렇고 저렇고가 아니고, 사건의 제목만 제시하고 그곳에서 출발한다. 삶의 의미를 먼 곳에서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서 후벼내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평범한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래서 혹자에게서는 의미의 심층을 파고들지 못하고 주위만 맴돈다는 불평을 들을 가능성도 있다. 정곡을 찌르는 정공법이 아니라 변죽만 울린다는 타박을 들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과연 이연희의 수필작법은 그런 것일까.
그의 수필 문법은 수사에 뿌리를 둔다. 욕심이 없는 냉정한 면에서 의외의 수사적 문법을 만나게 된다.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어제 오늘의 결과가 아니고, 긴 시간의 독서에서 비롯하고, 메모에서 근거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이 더러는 흠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나친 수사와 이중적 수식은 수필에서 피하는 요소이다. 문장이란 짧으면 짧을수록 그 함유하는 의미가 크기에 이 같은 요구가 가능하다. 그것을 아는 작가 이연희는 왜 그런 수필 문법을 들고 나왔을까.
1. 이연희의 수필작법
이연희는 전북 무주에서 태어나 “전주일보” 신춘문예(1993)와 “수필과 비평” 신인상(1995)을 거쳐서 문단에 나왔다. 그동안 “인도(人道) 가는 길”(2000)과 “풀꽃들과 만나다”(2006) 등 두 권의 수필집을 낸 작가다. 그의 저서 “풀꽃들과 만나다”에는 ‘끝없는 여정 속으로’라는 글이 나온다. 이 글은 작가 이연희가 살아오면서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글쓰기를 해 온 여정이 잘 드러나 있다.
특별히 문학수업이라고 이름짓지 못한 내게 가장 큰 재산은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이다. 그물처럼 엉켜 있는 자잘한 추억과 그들을 향한 그리움이다. 외로움과 쓸쓸함, 홀로 지니고 감당해야 할 고독 그리고 기다림이다. ……<중략>……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작고 사소한 일에 감동할 수 있는 감성과 작은 풀포기에도 멈추어 서던 발걸음이 무뎌질까 하는 일이다. 살아가는 것들과 맺힌 것이 없도록 화해하는 일이며 자꾸만 흐려져 가는 낯빛을 밝게 채색하는 일이다. 배움에 어디 끝이 있던가. 죽는 날까지 겸손하게 배우려고 애쓰면서 사는 일, 살면서 파생되는 작고 큰 일들이 인생 공부이자 문학수업이 아니고 무엇이랴. 삶의 특별한 의미가 별로 멀리 있지 않듯 나의 문학에로의 길도 그러하리라 믿는다.
아주 소소한 것들로부터 삶을 배우고 익혀 가듯이 만나고 헤어지는 숱한 사람들과 풀 한 포기, 미세한 바람까지도 내게는 기쁨이고 희망이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목숨 줄일지라도 살아 있는 그날까지 그들을 사랑하고 품에 안고 가야만 하는 것이 숙명처럼 여겨진다. -<끝없는 여정 속으로>에서
위의 글은 이연희의 작품세계에 대한 답을 말해준 부분이다. 이연희는 고향 무주와 아주 작은 것, 소소한 것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자신을 있게 한 고향에 대한 애정은 그의 작품 여기저기에 나타난다. 그리고 작은 풀꽃 같은 것에 대한 애정은 이 작가의 특징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세심하다. 작은 것에 대한 애정은 비단 들풀에 국한하지 않는다. 사람을 얘기해도 작은 존재, 남들에게 치이거나 뭔가 장애가 있어 자의로 자신의 힘을 쓰지 못하는 존재, 이런 미약한 사람에게 사랑의 시선이 머문다. 그러기에 남들이 다 흘리기 쉬운 것들, 가을들판에 흘려버린 이삭 같은 존재에 더 관심의 눈이 가 있다. 이러한 시선은 물건을 사도 본래의 물품보다는 ‘덤’으로 얻는 것에 더 의미를 주게 된다.
그리고 힘이 있는 것의 우쭐함보다는 미약해도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는 마음에 가치를 두고 있다. 어쩌면 말수가 적은 작가의 일상처럼 어깨 뻐기고 나서는 것보다는 숨어서 자신의 성숙을 꾀하는 작가의 삶이 그대로 투영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그녀의 스승인 소설가 최명희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어설프게 해본다. ‘끝없는 여정 속으로’에서 보면 이연희에게 진정한 문학수업은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최명희 선생을 만나 국어시간에 공부한 것이 모두라고 숨김없이 털어놓고 있다. 그 외에는 문학 수업다운 수업을 받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연희의 작품세계에서 작은 것에 연민의 정을 두는 것은 어쩌면 최명희가 평생 가슴에 안고 토로하고 싶었던 것은 ‘어둠이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이연희의 시선은 사물에 대한 애정이 그늘에 덮인 작은 것, 소소한 것에 머물렀던 것이다.
강렬한 힘이 있어 우쭐대는 것보다는 적은 힘이라도 서로 이해하고 보태고 화합하는 데에 더 의미를 두었다. 오히려 힘이 있어 남에게 부담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리감을 느끼며 살았다. 그래서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작고 사소한 일에 감동할 수 있는 감성과 작은 풀포기에도 멈추어 서던 발걸음이 무뎌질까 하는 염려였다. 살아가는 것들과 맺힌 것이 없도록 화해하는 일이며 자꾸만 흐려져 가는 낯빛을 밝게 채색하는 일에 마음을 놓지 않고 작가는 살았다.
이러한 세계의 표출을 위해서는 어떤 수필작법이 가장 합리적이었을까. 작가는 글의 내용에서 요구하는 가장 합리적인 수필작법을 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내면을 담담히 풀어가는 기술방법이다. 충격요법을 취하지 않고, 있는 듯이 없는 듯이 내면의 의식세계를 조용히 풀어간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요란한 사건이라 해도 작가 이연희에게 잡히기만 하면 맥을 못 쓰고 흐물흐물한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 이연희가 여간하여서는 자신의 감정을 내세우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을 고수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수필이 다분히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한 고백의 문학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자신의 감정에 포로가 되지 않고 기술하고자 하는 바만 적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작가만의 의지에서 나온 작법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은 글감에 맞는 분위기와 통일된 구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터전에 문장의 씨앗을 놓아야 좋은 결실을 맺는다. 수필 문장은 간결해야 하고, 지나친 수식을 배제해야 하며, 미문을 쓰려는 욕심을 버려야 온전한 글이 된다. 이러한 것들을 유념한다면 더욱 독자들의 눈빛에 활기가 돋고, 친근감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2. 이연희의 수필세계 -- 삶의 그림자 찾기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내린 비를 보고도 누구는 가을비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겨울비라고 하는 것은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같은 글감이라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르기에 작가는 존재한다. 그 바라본 결과가 남다른 참신함이 있으면 더 바랄 바가 없다. 세월을 보내고 맞이함에도 어떤 시선 어떤 생각이냐에 따라서 결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정체성이 나타난다. 정체성(identity)이란 어떠한 대상이 그의 고유한 본성을 일관되고, 동일하게, 연속적으로,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수필의 정체성이라 하면 수필 작품 속에 일관되게 내재해 있는 장르적 본질과 고유성을 일컫는다. 수필을 수필답게 만들어주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으로, 수필문학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견지해 온 장르의 고유한 뿌리와 원형을 지속적으로 보존해 주는 것이 바로 수필의 정체성이다. 이리하여 여타의 장르와 차별화되는 것이다. 한 작가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차별화된 나름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한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본질과 고유성은 그 작가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
수필가는 그 어느 장르의 작가보다도 자신의 고향을 잊지 않는다. 자신이 어려서 뛰어놀던 고향의 산천과 들판은 수필의 구석 어디에든 숨어 있기 마련이다. 누구나 다 고향은 간직하고 있어도 수필가만큼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수필이 고백의 문학이라는 범주 때문이다. 자신의 지나온 삶이 글감이 되고, 삶의 환경이 의미를 들고 일어서기에 수필가의 고향은 그만큼 중요하다.
이연희에게서 고향, 무주는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나타난다. 여기서 얘기하는 ‘고향’이란 산천에 국한하는 말이 아니라 고향에서의 추억 또한 같은 기능을 발휘한다.
어머니는 된장 속에 묻어 두었던 콩잎을 밥 위에 얹어 쪄내고, 싱싱한 푸성귀를 버무려 따끈한 점심상을 차려주신다. 입맛이 없거나 심신이 지쳐 있을 때에도 어머니가 지어주신 밥 한 그릇이면 거짓말처럼 기운이 솟던 나에게 엄마 손은 신비한 약손이었다. 한때는 곱디곱던 그 손이 지금은 울퉁불퉁 제멋대로 핏줄이 솟아올라 삶의 연륜과 고단했던 세월의 더께를 말해주는 것 같아 짠하다.……<중략>……한바퀴 둘러보고 전주로 향하려는데 마침 오늘이 닷새만에 서는 장날이다. 장터를 가득 메운 시골 풍경에 솔깃해서 시장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깜짝 놀란 일은, 십여 년 전에도 그랬듯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떡을 파는 아주머니며 생선장수 아줌마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장날마다 동료들과 함께 했던 국숫집하며 길씨네 순대국 밥집도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댔다. 막걸리 사발만큼이나 투박해 보이는 아저씨들이 텁텁한 웃음을 날리고 있는 술자리에서는 금방이라도 젓가락 장단에 육자배기 가락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내 마음의 팡세>에서
눈에 잡히듯 시골집 모습과 장터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과 그에 얽힌 추억은 몇 날을 풀어내도 미흡하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선명히 그릴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 따뜻하고 영원하기에 가능하다. 또 시골장터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정겹다. 하물며 그곳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그 의미는 사뭇 깊어진다. 눈에 잡히는 어느 분이든 남같이 보이지 않고 정겹게 다가온다. 이러한 고향의 추억이 작가 이연희에게서는 깊이 내재해서 나타나고 있다. 고향 무주를 무던히 사랑한 작가이다.
늘 고향의 산천과 들판이 마음에 안주해 있는 작가는 자연 속에서 글감을 취하는 일에 능숙하다. 그러나 그것도 작가의 면면에 따라 차별화될 수 있다. 작가 이연희에게 있어서 자연은 크고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아주 자잘하고 소소한 것에 국한한다. 지나칠 정도로 소소한 것에 애정을 갖다 보니 이름조차 모르는 작은 들풀에 사랑을 쏟고,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된다. 세찬 바람에 꽃잎이 찢어지고 꽃대가 부러지는 아픔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그러나 작가 이연희는 피고 지는 들풀을 위해 자신이 사랑을 베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에게서 자신의 나른한 삶이 위로받고, 평정을 잃고 방황을 할 때도 그들 앞에서 고해하듯 가슴을 비운다. 가슴을 비우러 찾아간 작가이기에 그들에게서 위안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염려보다 더 많게는 외려 그들에게서 위로를 받는 수가 많다. 평정을 잃고 방황할 때 나는 꽃에게로 간다. 그리고 고해하듯 가슴속을 비운다. 입단속을 시키지 않아도 좋은 그들은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기운 내!” 하면서 숭숭 구멍 뚫린 속을 감싸준다. 내 엄지손톱보다 작은 풀꽃 한 송이가 사람의 말보다 더 큰 위안과 용기를 갖게 해준다. -<꽃아, 너에게>에서
흐린 것을 버리면 맑음이 절로 나타나듯, 마음의 눈이 맑아진다면 멀리에서 오는 향기가 맑은 줄 왜 모르랴. 사람과의 대화에는 한계를 느끼지만, 언어를 모르는 자연 속 그들과의 소통이 더 자유로울 수 있음은 행복한 일이다. -<스스로 깊어지는 그 맑음>에서
이처럼 자잘한 풀꽃에게서 용기를 얻고, 삶의 이치까지 터득하는 작가는 눈물처럼 지는 꽃잎을 바라보면서 눈물겹게 신뢰가 가는 자연의 섭리를 알아차린다. 매사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변질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가 그에겐 새롭게 와 닿고, 언어가 없는 자연과 소통하기가 사람보다 더 수월함을 느낄 때 작가는 행복해 한다.
이러한 작은 것에의 애정이 어이 풀꽃에만 한하랴. 사람의 삶에서도 힘이 있어 어깨를 들먹이는 자보다는 육신의 질고로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 그 중에도 제 몸 간수조차 어려운 어린아이나 노인들에 대해 항시 애정의 눈빛이 머문다. 뿐만 아니라 전철 안에서 장애우의 어려움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건강함에 감사하고 행복을 감지한다. 정신지체인 환자가 부모의 걱정도 모르고 제 혼자 만족한 삶을 꾸리는 모습, 불구의 몸에 옆구리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싣고 구걸에 나선 모습, 육신은 멀쩡한데 언어 장애로 필답으로 길을 묻는 모습 등을 접하면서 작가는 그들에게 애정을 갖는다.
육신의 질고로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어리거나 젊은 환자를 만날 때가 가장 곤혹스러웠다. 저들은 아직은 밝고 씩씩하게 또래들과 어울려 즐거워야 할 텐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머리카락 한 올 남김 없는 민둥머리 소년의 혈색 없는 얼굴과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십대 아저씨, 숨쉬기조차 힘들어하는 고령의 할아버지. 이렇듯 고단한 생명줄을 이어나가는 사람들로 인해 가슴이 아려왔다. -<짧은 하루 긴 생각>에서
또 돈 많은 자의 허세에 찬 봉사보다는 작은 힘이나마 긁어내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의 삶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있다. 작은 것에 대한 가치는 물질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영혼까지도 조금씩 나누는 것에 관심의 눈이 더 간다. 그러한 것들은 제과점에서 받은 빵의 덤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기에 족하다. 본래 구매한 물품보다 덤으로 받은 것이 사람의 마음을 더 부여잡듯 작은 ‘덤’이 사람의 마음을 더 움켜잡는다.
어찌 그 뿐이랴. 홀로 사는 노인과 어려운 처지의 청소년들을 위해 앞치마 질끈 동여맨 가정부부들과 자원봉사자들을 비롯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훈훈한 마음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며 살고 있다. 제과점 여주인이 덤으로 얹어주는 한두 개의 빵과 미소가 고객들에겐 즐거움이다. 이렇듯 주어진 현실에서 물질만이 아닌 영혼을 나누고 다독여주는 일들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불길처럼 번져나간다면 좋겠다. -<덤의 미학>에서
작가 이연희는 이와 같이 덤으로 받는 것에 흐뭇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늘 드나드는 단골가게에서 시들삐들한 사과를 선물 받았다. 역시 ‘덤’으로 받은 즐거움이다. 더러는 썩은 부분이 있으면 도려내고, 성한 것은 얇게 삐져서 사과잼을 고아내며 가족에 대한 사랑을 덤으로 얻는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생각은 더 깊어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떠올리며, 인간의 이기와 자기 탐닉을 개탄한다. 이렇게 사람의 정을 나누는 사과상자가 부정한 마음의 탁류에 휩싸인 것을 안쓰러워하던 작가는 썩은 사과 몇 알에 흐뭇해하고 가족애를 나눈 데에 만족하려 한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어수선하기만 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선과 악의 개념이 불완전한 경우가 허다해서 동전의 양면성을 보는 것 같다. 오늘의 선이 내일의 악이 되기도 하고 또한 그것과 반대가 되기도 하는 일상사에서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에의 갈등은 끝이 없다.
색깔 곱고 말쑥한 사과라 하여 독소가 없으란 법 없고 썩고 병들었다 하여 모두가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쩌다 사과상자가 재화의 씨가 되어 수난을 겪고 있는 요즘, 세상 모든 문제에 간단한 해답이란 없는 것 같다. 제 분복대로 자기 몫의 삶을 누리고 가면 그만일 텐데, 이기심과 자기 탐닉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실망과 좌절을 안겨 준 지난봄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숫자에 얽매이는 일도, 외면수새할 일도 없는 나는, 썩은 사과 몇 개로 가족애를 느꼈으니 이만하면 오늘 하루가 남부럽지 않다. -<썩은 사과>에서
세상의 어느 여인인들 가족의 안위와 평안을 기원하지 않겠는가. 배 아파 아이를 낳아본 여인이라면 자식의 일에는 가릴 바가 없고, 못할 것이 없다. 사력을 다해도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식 키우는 일이라며 관심의 맨 앞자리에 내놓고 사는 것이 어머니의 자식사랑이다.
하물며 입시를 목전에 둔 자식을 가진 어미의 심정은 어쩌겠는가. 비엔날레 전시장에 가서도 자식의 좋은 성적을 기원하기 위해 ‘소한도(消寒圖)’를 구입한다. 본래 소한도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입동에 여든한 송이 매화가 달린 밑그림을 그려 벽에 붙여놓고, 하루에 한 송이씩 색칠하여 입춘에 만개한 매화를 완상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작가는 그 소한도를 구입하여 벽면에 붙여놓고 아들의 좋은 결과를 기원하며 하루에 한 송이씩 색칠해간다. 이때의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정결하고 경건한 여인의 모습이다. 꽃잎 하나하나에 숨결을 가다듬어 호흡까지 맞춘다. 잡생각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절대자에게 간구한다. 이런 작가의 모습은 작가 자신의 가족애를 나타내주며, 더 나아가 한국 여인들의 헌신적인 가족 사랑을 대변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매화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은 지 아흐레째다. 엄지손톱만 한 꽃송이를 채색하는 짧은 시간은 가장 정결하고 경건한 순간이다. 꽃잎 한 잎 한 잎에 숨결을 가다듬어 호흡을 맞춘다. 혹여 잡생각이 끼어들세라 말초신경에까지 철통수비를 명령한다. 오직 아이만을 위한 간절함으로 가장 낮게 엎드려,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절대자에게 간구한다.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빌던 정성과는 비할 바 아니지만, 이렇게나마 나만의 의식을 치를 수 있다는 사실이 위안을 준다.
아이들의 가슴둘레가 점점 넓어지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해야 할 일들이 더 많고 다양해지고 있다. 매사가 술술 풀릴 수만은 없으니 더러는 작은 가슴을 부둥켜안고 애태우던 일들이 또렷이 떠올라 콕콕 가슴을 찌른다. 주고 또 주어도 모자라고, 마구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사랑이 어머니 마음인가. 자식을 향한 나의 마음은 늘 짠하고 안쓰럽고 애잔하다. 1% 부족한 산소결핍의 상태라면, 그 1%마저 내 모든 것으로 채워주고 싶어 안달하는 일이 모성본능이라는 것인가. 받는 쪽에서는 오히려 걸림돌처럼 귀찮고 마뜩찮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자식사랑 공식은, 영원히 성립될 수 없으면서도 해법이 확실한 고귀함인 것이다. -<‘소한도’를 그리며>에서
이렇게 사람의 삶은 각양각색이고, 그 가치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다양하다. 어떠한 삶을 꾸리든 그것은 한 사람에 있어서 최선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삶에 작가는 어디에 시선을 두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작품세계를 알아내는 데에 긴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내면의 깊이를 더할 때에 그 작품의 의미는 깊어지게 된다. 같이 더불어 사는 삶이든 이웃과 화해하며 사는 삶이든 그것은 다 가치 있는 것이다. 인고의 삶이든 겉으로 풀어헤치고 사는 삶이든 그것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냐는 각자의 몫이다. 어떠한 형태의 삶이든 그 삶의 진위 여부에 따라 또는 상황 논리에 따라 지혜롭게 사는 삶의 양식이 된다.
우리는 각자 자기 몫의 삶을 꾸리며 산다. 그 삶이 가치 있는 것이길 갈망하면서 산다. 아무리 삶이 고달파도 도중에 차단기를 내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일탈은 가능하다. 늘 머물러 있던 곳에서의 일탈은 자신의 모습을 반추해보는 데에는 효과적이다. 자신을 떼어놓고 볼 수 있어서 객관화시킬 수가 있고, 정확히 바라볼 수 있다. 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려는 노력은 가치 있는 일이다. 온 길을 되돌아보는 것은 앞으로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당연한 몸짓이다.
탈출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만 같아 또다시 길 위에서 있네.
시시로 엄습하는 쓸쓸함이랄까, 외로움이랄까, 아니면 역마살이라고 해야 할지. 설거지를 하다가도, 수다를 떨다가도, 자동차 핸들을 거머쥐고 달리는 동안에도 불쑥 불쑥 치미는 고약한 병이 도져, 나는 운암호를 지니고 강진을 거슬러 장구목으로 향하는 비탈진 산길을 더듬고 있다네.
어쩌겠는가. 하늘은 높고 바람은 상냥한데 일탈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게 더 슬픈 일 아니겠는가. 그냥 좋은 거고, 밥 먹지 않아도 포만감 그득한 행복을 맛본다면 그만 아닌가, 적어도 이 순간에는.
그래서 또다시 길 위에 서 있다네. -<길 위에 서다>에서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연희는 세상과 부딪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있다.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순수를 간직하려는 노력의 흔적이다. 이연희의 수필세계는 언제나 차분히 가라앉아 조용히 들여다보는 관조의 눈을 유지한다.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 일도 없고, 작은 옹달샘에 흙탕물을 일으킬 리도 없다. 긴장을 풀고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그의 작품이 다분히 관념의 바탕 위에 꽃을 피우는 것도 이러한 데서 기인한다. 그래서 그의 수필세계에는 언제나 정적이 흐르고, 고요하다. 고향이 그리워도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앉아서 추억한다. 고요 속에 침잠하여 그리워한다. 외로움과 쓸쓸함, 고독, 기다림과 같은 것들이 그의 수필 식탁에는 자주 오른다.
한 마디로 이연희의 수필세계는 삶의 그림자 찾기이다. 우쭐하여 나서지 않고 항시 뒤처져서 드리워진 그늘을 즐기고, 그 속에 머무는 것들의 가치를 찾아 나선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나약한 것에 애정을 쏟는 어머니의 손길 같은 작가의 눈을 견지한다. 작고 소소한 것에 글감이 매어 있는 것도 이러한 범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3. 나가면서
흔히 수필은 작가의 체험 속에서 글감을 취하여 그것을 해석해낸 결과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필은 생득적으로 작가의 삶과 무관할 수가 없다. 어떠한 삶을 견지했느냐에 따라 글의 가치가 가름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반드시 고급스러운 삶을 유지한 사람만이 수필을 쓸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그런 의식은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작가 이연희는 자유롭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도 부담스러워 겁을 내고, 화합을 먼저 생각하고 임한다. 힘이 있는 것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것에 애정을 두려 한다. 아무리 주위에서 번잡한 소요가 일어도 눈을 고쳐 뜨는 법이 없다. 언제나 그 모습으로 사물을 관조한다. 충격의 요법은 가당찮은 일이고, 개인의 감정을 내세워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없다. 이것이 이연희 수필 속에 나타난 작가의 모습이다.
그의 수필세계에는 언제나 풀꽃이 피어 있고, 향기가 흐른다. 장대한 나무 끝에 피어나는 꽃이 아니고, 관심 없이 지나면 눈에도 뜨이지 않는 풀꽃이다. 그 풀꽃을 그리는데 작가는 관념의 캔버스를 펼치고 있다. 그의 관념의 연못에는 온갖 소소한 것들이 헤엄치고 노닌다. 그러다가 가끔, 정말 가끔 커다란 물고기가 연못 안을 흔들고 지나갈 뿐이다.
연못 속에는 고향, 추억, 그리움, 외로움, 고독, 기다림, 풀꽃, 덤, 자연, 순환, 사랑, 마음, 얼굴 같은 것들이 헤엄치고 있다. 이렇게 차분한 성향의 것들이 안주하여 있으니, 더러는 태풍급의 바람을 불어넣어 심술이라도 부리고 싶어진다. 명상이나 하듯 관조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으면 독자는 더러 따분해 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는 심술이다.
한 작가가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가 이연희를 주목하게 된다. 누가 뭐라 하던 자신의 세계를 이만큼 견고히 구축하고 있다는 것은 작가의 능력이다. 앞으로 세상을 관조한 글들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는 글을 남기리라 믿는다. 작가가 전개해 나갈 미래의 수필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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