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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파미르종주기 -고대의 타지크의 역참(驛站), ‘지르가라[驛舍]’
* 실크로드 나그네들의 안식처, 역참(驛站)
옛 실크로드의 대상들이나 구법승들은 과연 어디서, 먹고, 자고, 마시고, 쉬면서 필요한 물건을 보충할 수 있었느냐? 는 문제는 ‘실크로드학’에서는 중요한 주제에 속한다.
바로 역참제도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서남아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는 투르크어의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y)1) 또는 차이하나(Chikhana) 또는 ‘지르가라’2) 같은 용어로 알려져 있으나 그 기능상으로는 중국권의 역(驛)3) 또는 역전(驛傳)4)과 큰 차이가 없다.
▼ '와칸남, 북로'의 행선도와 타쉬쿠르간 인근의 역사 유적 분포도
▼ 파미르의 유목민
▼ 터키의 카라반세라이
▼ 이란의 카라반세라이
▼ 키르기즈의 카라반세라이
▼ 아프간 형의 차이하나 내부
▼ 중동 형의 역사 및 밥집, 찻집 역할을 하는 차이하나 내부도
▼ 중동형 카라반세라이 내부 상상도
‘역참제’라는 것은 고대국가에 있어서 중요한 기간 도로 상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숙박시설과 기타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국가차원의 통신과 교통을 겸한 시설을 관리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래서 전쟁 같은 긴급사태가 생기면 그 사실을 조정에 빨리 전달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문서 등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또한 사신들이나 높고 낮은 관료들이 공무를 수행할 때 다음 행선지로 편하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일종의 고대 네트워크는 수도라는 일정한 지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드넓은 영토를 다스려야하는 제국으로서는 필수적인 제도였다.
이 역참은 평균적으로 대개 말과 낙타의 하루 행군거리에 해당되는 40km5)마다 설치되었는데, 이용자는 일반적으로 3일간 무료로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 때 국가가 발행하는 일정한 허가증[첩지]이나 패자(牌子)-우리나라 식으로 한다면 말이 그려진 ‘마패(馬牌)’-등이 필요하였고 기타의 경우, 즉 대상들이나 개인적인 여행자는 공인된 화폐나 응분의 현물을 지불하는 방식도 함께 혼용되었을 것이다.
이 역참제도는 몽골제국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정착되었다고 하지만, 중원에서는 이미 BC 6세기 말 춘추시대 후반에 설치되어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뒤 정착되면서 중앙집권제가 확립된 왕조들인 한(漢), 수(隋), 당(唐)나라로 계승되었다.
역참에는 숙식을 해결하는 시설뿐만 아니라 통신용 말과 마차를 항시 준비하였다가 전쟁 같은 긴급사태나 중앙의 중요한 명령을 전달할 때에는 전문 역졸(驛卒)이 말을 계속 갈아타고 달려서 하루에 무려 450km를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불을 피워 연기로 위급을 알리는 봉화(烽火)나 훈련된 비들기 다리에 문서를 보내는 전서구(傳書鳩) 등이 위험부담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가장 확실하고 빠른 국가차원의 중요한 통신체계였다.
그리고 외국으로 오가는 사신들이나 고관의 부임행사 같은, 공무로 인한 왕래 시에는 말보다도 속력이 떨어지는 마차[傳]를 주로 사용했다. 이른바 역전(驛傳)이다. 그러니까 넓게는 역참제도이지만, 엄격한 구별을 하자면 ‘역’은 긴급한 통신시설에 해당되며, ‘전’은 국가차원의 기간산업인 교통시설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중앙집권제가 확립되면서 역참제도가 생겼다. 가장 이른 기록은 신라 소지왕 9년(487년) 때이다. 그리고 문무왕 8년(668년) 10월에 “왕이 욕돌역(褥突驛)에 행차하니 국원경 사신(仕臣)인 대아찬 용장(龍長)이 사사로이 잔치를 베풀고 왕과 모든 시종을 대접하며 음악을 연주하였다.”고 한 기록도 보인다. 또한 신라의 경우 9주 5소경을 연결하는 5통(五通)과 5문역(五門驛)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보면 당시 이미 역참제가 확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중원의 표준형 역참 복원도
▼ 몽골제국의 역참 네트워크
▼ 명, 청대 유명한 天福 驛站 /
영화촬영지로 유명해졌다.
▼ 청대의 유명한 하북성 鷄鳴 驛站
▼ 기원전 한대 벽화속의 驛吏圖
그 뒤 몽골제국 때에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 역참제는 유라시아 전 지역을 잇는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로 구축되었는데, 통계에 의하면 제국 내에 무려 1천5백여 개 정도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쿠빌라이가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하며 수도를 현 베이징으로 옮기고 국호를 ‘대원’이라 바꾸고 남하정책을 시행하여 남송지역을 정벌함으로써 중원을 통일하여 세계 역사상 일찍이 유래가 없었던 대제국을 세운 후 그는 자신이 직접 통치하는 본국과 칭기즈 칸의 다른 자손들이 다스리는 4개 칸국으로 분활 통치하면서 역참제를 통해 소통을 계속했다.
마르코 폴로도 이런 역참제도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대칸의 사자가 칸발릭[현 北京]을 출발하면 어느 길을 택하든지 40km마다 ‘쟘’이라고 부르는 역을 만난다. ‘쟘’은 역사(驛舍)라는 뜻으로 어떤 역사에는 말 400마리가 언제나 준비돼 있다.
길도 제대로 없고 민가도 여관도 없는 외딴 시골을 지나는 경우에도 어디서나 역사는 세워져 있는데, 단지 그 간격이 좀 길어져서 하루의 이동거리가 40~50km 아닌 56~72km가량으로 늘어날 뿐이다. 정말 이 제도만큼 대규모의 것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여기서 ‘쟘’으로 번역된 말은 아마도 한문 ‘참(站)’의 중국어 발음인 쟌(Zhan)의 음사로 보인다.
실은 이 획기적인 역참제도는 쿠빌라이 이전에 이미 칭기즈 칸의 후계자이며 몽골제국의 제2대 황제인 오고타이 칸이 토대를 잡은 것으로 <원조비사>는 역참제에 대한 그의 결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았다.
그동안 사신이 왕래할 때에 백성들의 지원을 받도록 했는데, 그 결과 왕래하는 사신도 여행이 늦어지고 백성들도 고통스러워했다. 이에 우리는 이렇게 결정한다.
여러 고장의 천호(千戶)에서 참호(站戶)와 마부를 공출해 역참일을 보게 한다. 사신들은 아주 위급한 때를 빼고는 이 역참을 이용해서 오가도록 한다.”
▼ 몽골제국의 제5대 대칸이며,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원나라를 세운 원 세조 쿠빌라이칸
▼ 몽골제국의 공식문자인 팍파 문자로 쓰린 관원 신분증 牌子
이 문자는 티베트의 싸갸파의 고승 팍파가 쿠빌라리칸의 요청으로 티베트문자를 본따서 만들었다.
▼ 칭기스 칸의 금패
▼ 역시 팍파문자의 호랑이문양 관원패
▼ 원대 호랑이문양 관원 금패
▼ 관원금패의 탁본
바로 몽고제국의 대동맥이 된 역참의 공영화 조치였다. 이 시스템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 대륙을 하나로 연결하여 인적 교류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신적, 종교적, 물질적 자원이 소통하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제국의 깃발 아래 기독교, 이슬람, 페르시아, 힌두, 불교 그리고 유교 등 동서양 모든 종교와 문화, 문명이 하나의 체제로 모여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몽골제국 이전에는 인류는 실크로드를 통해 부분적으로 소통을 해왔지만, 그러나 실크로드는 사실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 경주-장안-콘스탄티노플-시리아-로마에 이르는 불완전한 연결형이라는 점과 그 긴 루트 사이에 한 곳이라도 부분적인 문제가 생기면 전 루트가 완전히 끊기는 사태가 종종 벌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몽골의 역참제도는 강력한 행정력,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에,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명실 공히 세계의 모든 문명과 종교를 아우르는 네트워크가 이루어진 것이다.
원나라의 역참제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송광사박물관에 아주 귀중한 실물자료가 하나 소장되고 있기에 여기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이른바 <송광사 원대 티베트 글자 법지(法旨)>6) 라고 알려진 것으로 고려 충렬왕 시대 송광사의 원감국사 충지(圓鑑 沖止, 1226∼1292)7)가 대원(大元) 울루스(Dai-ön ulus), 즉 몽골제국의 세조 쿠빌라이 칸에게 초빙을 받고 원나라를 여행할 때 사용하였던 첩지로 비정되고 있다.8) 이 쿠빌라이는 고려 충선왕의 외조부로 우리 역사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원감국사는 이 첩지를 제시하고 원제국 내의 모든 역참에서 적어도 3일 동안 무료로 먹고, 자고, 마시다가 다른 곳으로 떠날 때는 여러 가지 여행의 편의를 제공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 <송광사 원대 티베트 글자 법지(法旨)
▼ 송광사 박물관의 <송광사 원대 티베트 글자 법지(法旨)> 전시물
▼우리나라의 역참의 마패
물론 이렇게 실크로드 상의 나라에 있어서 중앙집권제에 확립되어 있을 때는 국가의 사신들이나 관료들뿐만 아니라 대상들이나 개인 여행자들도 이 역참제도를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이 느슨해진 왕조의 말기 때에는 당연히 역참제도도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을 것은 당연했기에, 이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민간차원의 시설이 활성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름하여 객잔(客棧), 반점, 주점, 여인숙, 주막 등과 같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숙박시설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사족을 하나 달자면, 흔히 우리가 ‘역마살(驛馬煞)’이라 부르는 말의 어원도 이 역참제도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하겠다.
* 타쉬쿠르간의 민간 역참(驛站), ‘지르가라[驛舍]’
현장법사는 타쉬쿠르간 조에서 또 다른 귀중한 기록을 남겼는데, 바로 고대 실크로드의 민간 역참제도에 대해서다. 우선 본문을 읽어본 뒤 그 의미를 새겨보도록 하자.
거대한 암벽에서 동북쪽으로 산봉우리를 넘고 험난한 길을 지나서 2백여 리를 가면 ‘분양사라[奔穰舍羅(唐言福舍)]’9)에 이른다. 이 건물은 총령의 동쪽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고 사방으로 네 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 부속토지는 사방 백여 경(頃)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는 지대가 낮다. (중략)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먼 옛날 만여 명의 대상들이 낙타 수천 마리에 금은보화를 싣고 장사를 하러 왔다가 눈보라를 만나 사람과 동물들이 모두 목숨을 잃을 지경에 놓였다.
때마침 걸반타국에 대아라한이 있었는데 그가 멀리서 이들이 재앙을 만난 것을 보고 가엾게 여겨서 신통력으로 날아와 그들을 구해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라한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들은 숨을 거두고 난 뒤였다.
이에 [그 아라한은] 온갖 보석들을 거두고 그들이 지녔던 재물을 한데 모아 숙소[驛舍]를 세우고 나머지 재물들을 비축하여 이웃의 땅을 사서 변방의 거주민들을 돕고 [또한]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시의 은덕을 베풀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행인이나 상인들은 모두 그 은덕을 입고 있다.
▼ 현장법사가 며칠 묵어간 것으로 알려진 다부다르 마을 인근의 옛 지르가르 역참
▼ 타쉬쿠르간 인근의 옛 역사들
위 구절을 요약해보면 어떤 대규모 대상들이 타쉬쿠르간 경내를 지나다가 자연재해를 당해 몰살당했는데, 이 때 어떤 수행자가 그들이 남긴 재물로 땅을 사서 건물을 지어 무료급식소 겸 여행자를 위한 숙소를 운영하여 실크로드를 지나가는 대상들이나 일반 행인들 그리고 인근의 가난한 행인들에게 보시를 베풀었다는 이야기이다.
위 기록 역시 현장이 타쉬쿠르간을 지나가면서 원주민 노인들에게서 주워들은 한 역사의 유래와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만, 문맥으로 보아서는 현장 자신도, 그 숙소에서 며칠 신세를 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에서 소개한‘공주성’처럼 역시 그 건물이 현장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남아 있어서, 이 이야기는 막연한 전설을 기록한 것 보다 현장 당시에는 실제로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던 실제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현장은 현지어로 ‘분양사라(奔穰舍羅)’라고 하고 중국어로 번역하여 복사(福舍)10)라고 병기(倂記)했다. 현장의 설명에 의하면 이 시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보시(布施)11)를 행하는 일종의 복지시설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타지크어로는‘지르가라[吉日尕拉]’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순수한 역사(驛舍)를 뜻한다.12) 바로 실크로드 상의 역참(驛站)이며 투르크어의 카라반세라이이다.
실크로드가 번성했을 당시에 파미르고원 상의 이런 역사들은 물론 그 숫자가 적지 않았겠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확인된 것으로는 타쉬쿠르간 하(河)를 따라 뻗어 있는 옛 실크로드 상에는 모두 6곳의 고대 역사의 유지가 보존되어 있다고 하나 그중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는 다브다르 마을의 것을 꼽는데, 그 위치와 거리상으로 보아서는 현장이 기록한 바로 그 역사가 아닌가 하고 추정되기도 한다.
이 옛 역사의 주위로는 목장지대가 펼쳐져 있고 앞으로는 급한 격류가 흐르는 하천이 가로 막고 있는 지형이다. 그리고 하천 둔치에는 고대 묘지들이 산재해 있고 동쪽 언덕으로는 규모가 작은 성곽의 유지도 보이고 있다.
이 고대 역사는 크고 작은 호박돌[卵石]로 쌓아올린 내모난 석축건물로 지붕은 원추형의 둥근 돔(Dome)형으로 되어 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지붕에는 하늘창이 달려 있어서 밝은 빛이 스며들고 있는 가운데, 사방의 벽면은 연기에 끄슬려 검게 변했고 그 안에는 불을 피운 듯한 돌화덕도 보인다. 벽에는 창문이 없고 대문은 동쪽으로 나있는 것은 고원지방의 혹독한 기후환경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 자료에 따라서는 ‘카라반사리’. ‘카라반사라이’ 라고도 표기되고 있지만, 모두 같은 뜻이다. 다만 ‘차이하나’는 주로 아프간을 중심으로 한 중아에서 다방, 음식점, 숙소를 아우르는 개년으로 쓰인다.
2) 타지크어로 역시 역사를 뜻한다.
3) 몽골제국의 도로망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비한 교통 통신망인 역참제는 유라시아 전 지역을 잇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도로에는 약 40km마다 역참이 설치되어 말·식량·숙소를 제공했는데, 제국에 무려 1,500개 정도가 있었다고 해. 사람이 살지 않는 초원이나 사막에까지 설치했을 정도라고 한다. 교통로를 왕래하는 관리, 사절에게는 특별한 통행증이 발급되어 관리들은 말을 바꿔 타면서 하루에 450km를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4) 주로 마차를 사용한다는 구별이 있다.
5) 지리적 위치나 중요도에 따라서 12㎞~50km 사이의 편차를 보인다.
6) 전남도청 문화예술과 편『文化財目錄』(1998)에는 그 사진과 더불어 크기「가로 61cm 세로 48cm」, 재료「비단」, 시대「고려중기」등의 정보를 기재하고, 문서의 성격에 대하여 元代 티베트 密敎와 관계된 것인가, 아니면 송광사에서 口傳되는 대로 「원감국사가 몽고에서 귀국할 때 그 신분을 보장하던 여행증」일 것이라고 설명하였다(p.52). 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제12권(1991)의 “송광사”의 항목에서도 「파스파 문자」라 하여 그 사진을 揭載하고 있다(p.894).
7) 고려시대 선승으로 충렬왕 때 조계산 송광사의 수선사(修禪社) 제6세 사주(社主)가 되었다. 불교의 삼장에 이 해가 깊었을 뿐 아니라 문장과 시는 당대의 유림에서도 추앙을 받았다. 그의 선풍은 선교일치를 주장하여 지눌의 종풍(宗風)을 계승하였다. 저서로는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1권이 남아 있으며, <동문선>에도 시와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충렬왕은 원감국사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8) 비록 원감국사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은 편이나 정작 이 문서에 대해서는 <원감집>을 비롯한 기타 자료에 일언반구가 없어서 그 동안 거의 미지의 문서로 남아 있었다. 다만 <圓鑑國師 入元時 自世祖 拜受者> 정도로 만 알고 있다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어 그 실체가 차츰 밝혀지고 있다. 특히 일본의 티베트학자 나카무라 준(中村 淳)/ 駒澤大學 文學部 專任講師) 는 <松廣寺 元代 티베트文 法旨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大元 울루스의 국가적 명령문서의 한 종류인 법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9) 현지어인 타지크어로는 역사는 ‘지르가르’라고 한다. 다만 현장이 ‘복사’로 병기하여 한역한 것으로 보아서는 이 ‘분양사리’는 단어는 용어가 분명히 음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언어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10) 현장은 이 복사에 대해서 적지 않은 기록을 해 두었는데, 에를 들면 『대당서역기』 4권 탁샤르(Takshar:책가국(磔迦國)조에서도 “불교 가람은 열 곳 정도 있지만 천사는 수백 곳이 있다. 이 나라에는 예로부터 많은 복사(福舍)가 있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데, 약이나 음식을 베풀기도 하고 식량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 나그네들이 쉬었다 갈 수 있게 하였다. ” 라는 구절이 보인다.
11) 자비심으로 남에게 재물이나 불법을 베푸는 행위로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실천덕목인 ‘6바라밀’의 하나이다.
12) 塔吉克语“吉日尕拉”汉语为“驿舍”之意,在塔什库尔干河谷至明铁盖山口的古丝道上,遗留着6座古驿舍。其中留存比较完整的一处是达不达尔古驿舍。这个驿舍为一间房屋大小的卵石建筑物,屋门向东,屋的下部呈方形,屋顶呈尖拱状。
첫댓글 역마살의 어원이 드뎌 나오는군요......
ㅎㅎ 드뎌 역마살의 뿌리가 드러났습니다
어려운 자료들을 잘 소화하셨습니다. 훌륭합니다.
과찬으로.. ㅎㅎㅎ
카라반세라이-자르가르-차이하나-역참
역참을 지르가라 부른다구요?
지역마다 모습도 용어도 다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