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째 꼬맹이가 휴대전화로 한참 무엇을 들여다보고 있길래 슬쩍 봤더니 ‘쎄시봉’이라는 영화더군요. 요즘 한창 어느 정도 나이 든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있는 지난날의 몇 몇 유명가수들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하긴 언젠가 그런 영화 찍는 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는 몰라도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영화 대사가 들려서 띄엄띄엄 소리만 좀 듣게 되었습니다.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조영남, 오근태, 이름만 들어도 다 알만한 가수들 이야기입니다(오근태 이 가수는 사실 새로 듣게 된 이름입니다만...) 윤형주나, 송창식, 김세환 같은 가수들은 지난 해에 어느 텔레비전 방송국의 ‘쎄시봉친구들’인가 하는 무슨 콘서트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보았던 얼굴들입니다.
이 싸나이 개인적으로 다들 좋아하는 가수들입니다. 음악에 대해 이렇다하게 아는 것 없는 사람이지만, 윤형주의 차분한 분위기와 송창식의 열창, 조영남의 풍부한 음량, 김세환의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 이장희의 상당히 독특한 색깔의 곡조, 다들 이 싸나이가 평소에 좋아하는 매력적인 노래들이며 멋지다고 할 수 밖에 없는 부러운 가수들입니다. 그래서 어쩌다 그 텔레비전 방송의 콘서트 프로그램을 보게 되면 다른 일 하다가도 일부러 잠깐씩 멈추고 보곤 했습니다.
특히나 가수 송창식의 열정적인 노래는 이 싸나이 개인적으로, 조용필의 노래와 더불어, 더욱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노래들입니다. 그래서 이 ‘쎄시봉 친구들’에 대해서 다른 가수들보다 호감이 더 있다고 할까요.
그런데 텔레비전의 콘서트 ‘쎄시봉 친구들’이나, 띄엄띄엄 흘려들은 영화 ‘쎄시봉’의 대사를 들으면서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가수들이 활동하던 60년대 70년대 그리고 그 들의 전성기를 넘겼으나 여전히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던 80년대 그 뒤를 이어 2015년인 지금에 이르기 까지 그들이 어떤 행적을 남겼는가를 생각해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60년대 70년대 그리고 80년대에 이르는 30년의 기간은 그들의 노래 인생의 전성기였을 뿐만 아니라 그 뒷심이 여전하던 시기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이 나라가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던 암울한 시대였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음악감상실 등에서 외국의 곡들을 번안하여 국내에 들여와 ‘팝’을 소개하고, 낭만을 이야기하고, 청춘을 노래하며, 술잔을 들이키기를 권하고, 사랑을 외치며, 현실을 잊어버렸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 또래의 다른 젊은이 전태일이 제 몸에 불을 살라 저항하다 죽어갔고, 각종 긴급조치와 유신으로 많은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김근태는 밀실에서 끔찍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고, 다시 박종철이 고문 받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박승희가 또 제 몸에 불을 붙이며 저항하다 죽었고, 서울 용산 재개발 철거 현장에서는 생떼같은 목숨들이 느닷없는 불에 탔고, 세월호에서는 수 백명의 우리 아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물에 잠겨 죽어갔습니다.
그 기나긴 시절동안 ‘쎄시봉 친구들’의 노래에는 그들 또래의 젊은이들이 고통 받고 죽어가는 현실이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동병상련의 감정도 없었으며, 죽은 자들에 대한 애도도 경의도 없었고, 현실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노래에는 주구장창, 술이 넘쳐흘렀고, 사랑타령만이 끈적거렸으며, 외국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온통 짙게 색칠되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단적인 표현을 해서 과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들 노래의 본질에 있어서 이와 다를 바 없다는 말입니다. 혹시 그들의 노래에 현실을 노래한 것이 있는데 이 싸나이가 과문하여 아직 듣지 못했다면 확실히 저 표현이 과하다고 하겠습니다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있는지 없는지 조차 잘 모르는 것이라면 너무 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현상에 대해 그들만을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그 시절 대부분의 대중가수들 치고 현실에 대해 노래한 사람 몇 안 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회가 모두 다 똑같이 한 가지 특징이나 한 가지 방향으로만 나갈 수는 없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저마다 다양한 분양에서 다양한 색깔로 살아가는 것이기에 대중가요에 있어서도 다양한 노래들이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 현실과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가 사회 현실을 만들어내고 그 구성원의 삶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정치와 현실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표현 할수는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싸나이는 요즘에 ‘쎄시봉 친구들’이 다시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대중가요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무게감으로 볼 때, 그들에 대해 단지 고운 시선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솔직한 감정입니다. 그들이 젊은 시절에는 현실에 대해 미처 눈뜨지 못했거나 아니면 혹독한 현실을 일부러 피하려고 했거나 간에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노래를 하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기나긴 시대의 질곡을 지나와 노년에 접어든 지금에 와서는 한 번 쯤 지나온 시대와 스스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씩은 지난시절 이 나라의 현실을 바꾸려고 자신을 희생했던 이들에 대해 빚을 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쎄시봉 친구들’이 지금 저렇게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나와서 지난 날 자신들의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그 들이 살펴보지 않았던, 또는 못했던 또 다른 현실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뭔가 조선시대 같으면 고매한 인품의 선비였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들 중 맏형격인 윤형주는 자신이 윤동주 선생의 사촌이라는 것을 종종 말하곤 합니다. 한 번은 그가 윤동주의 ‘서시’를 노래로 만들려다 부친의 만류로 그만뒀다고 말 한 적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봐서 윤형주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현실에서 완전히 눈 돌리고 있었던 것은 적어도 아니었다고 이 싸나이는 봅니다. 그렇기에 이 싸나이는 ‘쎄시봉 친구들’에게 더욱 큰 아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이 그 긴 세월동안 그 많은 술과, 사랑과, 낭만과 동경을 노래하면서 적어도 몇 곡쯤은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는 노래가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없었다면, 적어도 지금쯤이면 ‘쎄시봉 친구들’은, 대중들 앞에서 자신들의 노래인생을 이야기하고 인기를 누리며 호사하는 이 시점에서,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말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6~70년대와 8~90년대의 역사적 격변기를 거쳐 오는 동안 그들이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노래하지 못하고(또는 안하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미안함과 아쉬움을 말입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꽃이 피는 봄에는 좋은 소식이 많이 들리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