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군, 장흥을 풍속 옛날에 낙토(樂土)라 일컬었고, 백성은 순박하고
일은 간략하다고 평했다.
또 장흥을 이색(李穡)의 기문에 '형승 땅이 큰 바다에 임하였다'. 임종선(任從善)의 기문에는 '삼면이
넓고 아득한 바다이다'. 최경지(崔敬止)의 시에, '아득히 넓은 바다로 삼면이 물인데, 푸르고 두터운 땅에는 얼마나 산이 많은고"
하였다
이러한 곳, 오랫만에 장흥군을 들린다. 장흥읍 외평길 168 장흥소방서가 자리한 길로 들어서면 평화마을 입구 좌측 저수지를
바라보이는 다전등 언덕에는 장흥 백산재(長興 栢山齋)가 자리하고 있다. 장흥 위씨 시조공사적비(長興魏氏始祖公史蹟碑)뒤로하고 있는 육중한
목조건물이다.
이곳은 장흥 위씨(長興魏氏) 문중의 문중재실겸 사우인 하산사(霞山祠)의 강당으로 함께 활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그러나 원래 조선후기 장흥부의 관아건물을 2차 이건을 통해 1936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당시 이건 과정에서는 거의 원형 그대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다. 백산재는 건축
부재나 결구수법 등으로 보아 조선후기인 19세기경의 건물로 보인다.
건물규모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된 본 건물은 비록
이축과정에서 다소 변형된 구조 기법을 보이기는 하나 넓은 대청과 온돌방 등 조선후기 관아건물 구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들보 등 사용부재도 매우 장대하고 견실하며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5량 가구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문화재자료 272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산재 뒤뜰에 기와집 3칸의 단청으로 하산사(霞山祠)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시조
위경(魏鏡)과 1세조 위창주((魏菖珠) 등 5현조(五顯祖)를 제향하는건물전체가 흰색으로 다른 사당에서 흔히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두 건물 다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
장흥 위씨(魏氏)의 시조는 회주군 휘(諱)는 경(鏡)이다. 그는 당나라 한림학사로 638년 신라 27대
선덕여왕 7년에 도예지사로 동래하여 벼슬이 아찬에 이르렀으며 고려 때 회주군 으로 추봉 되니 회주는 곧 장흥(長興)이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된 위씨 가문의 인물로는 위창주(魏菖珠)의 5세손 위계정(魏繼廷)이 고려 문종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
장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재신반열 부총리).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으뜸벼슬로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정승)을
역임하였다
특히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보다 90여년 앞선 조선전도(朝鮮全圖)그렸으며 90여권의 저서를 남겼던
호남 실학의 거목, 옥과현감
백규(伯珪)도 장흥 위씨(魏氏)의 한 사람이다.
장흥위씨 유적으로 백색으로 칠한 독특한 하산사(霞山祠)를 비롯 백산재(栢山齋). 죽천사(竹川詞). 장천재(長川齋). 월명사(月明詞). 관산재(冠山齋)등
많이 산재하고 있다.
또 백산제 옆 마을에 무계고택(읍 평화리 89)은 목질감의 전통의 아름다움에 연못 주변으로 심어진 배롱나무 군락이 형성되어 꽃이 피는 시기에는 환상적으로 장식하고 있어 지나는 객들을 불러보으고 있다. 또
장흥향교(읍 교촌리 4) 등의 목건축을 만날 수 있다.
이 일대 장흥읍에서는 사인정(읍 송암리 산359)은 깎아지른 듯한 거대한 암벽산 운암산(雲岩山)을 배경으로 탐진강이 흐르는 조망권을 확보하고 있어 여름에는 좋은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
이밖에 장흥읍에는 덕재리 송산마을에 독취정(獨醉亭 김병용 1933), 우목리 화수정(花樹亭
김대수.또는 蓮花齋), 기양리 40 창랑정(滄浪亭 길신식 1918), 덕재리 송산마을 만취당(晩翠堂 정재홍) 등이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스토리텔링이 얼마든지 만드는 정자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장흥읍에만 해도
덕재리에 회고정(懷古亭 임효일), 평장리 송산마을 추강조대(秋江釣臺), 이심상의 석정조대(石汀釣臺), 독곡(獨谷) 정명세(1551~1539)의
독곡조대(獨谷釣臺), 취수정(醉睡亭 위천회)과 관누정이었던 동정(東亭 변침卞沈), 청화루(淸和樓), 채양루(蔡陽樓. 공복루), 임벽루(臨碧樓),
도호문루(都護門樓), 봉명대(鳳鳴臺 변포卞袍) 등이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정자만 사라진것이 아니고 그들의 선비정신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하늘을 처다보게 만든다.
문화.김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