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 35살에 감상한 조맹부(趙孟頫) 「낙지론(樂志論)」진적
왕양명이 35살(1506) 8월에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낙지론(樂志論)」 진적을 보고 제발(題跋)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왕양명이 관직을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와서 산속에 서재를 짓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11월에 곤장을 맞고 귀양 갔습니다. 왕양명인들 자기 앞날을 어찌 알겠습니까?
元代法書,推趙文敏公為第一。
聞公學書十年,不下樓
觀此「樂志論」,書法精妙,洵堪為寶。
正德元年八月,陽明山人守仁識。
원나라 서법이 될 만한 것은 조맹부를 제일이라고 한다.
그는 서예를 10년 동안 배우면서 계단을 내려와 밖에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 「낙지론(樂志論)」진적(眞跡)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서법이 정밀하고 신묘하며 확실히 보물이 될 만하다.
정덕 원년(1506) 8월에 양명산인 왕수인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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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憶龍泉山」:(왕양명 35살 7월에 지은 시)
我愛龍泉寺,寺僧頗疏野。
盡日坐井欄,有時臥松下。
一夕別山雲,三年走車馬。
愧殺巖下泉,朝夕自清瀉。
용천산을 그리워하며:
나는 여요현 용천산에 있는 용천사가 좋다,
절간 스님들도 엉성하여 아무렇게 하여도 괜찮았다.
하루 종일 우물가에 앉았다가, 때로는 소나무 그늘 아래 누워 잠도 잤었지.
저녁이 되면 산에 피어오른 구름을 두고 집에 왔었는데,
북경에서 벌써 3년 동안 수레와 말을 타고 바쁘게 살았구나.
그동안 바위 아래의 샘물을 모른 척한 것이 부끄럽구나,
아침저녁으로 올라가서 샘물 물길을 터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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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한 말기 중장통(仲長統, 179-220)은 소위 은일(隱逸)이라고 합니다.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나중에 상서랑(尙書郞)이 되어 한때 조조(曹操)와 군사를 도모하였으나 조조의 관심을 받지 못하여 그만 두었습니다.
한나라 무제가 경제성장의 과실을 외국 정벌하는 데 탕진한 뒤부터 경제가 침체하였고, 동한시기에도 불경기 때문에 실물자산에 투자하는 풍조가 일어나서 농경지를 매집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대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은 주로 높은 관원, 부자 상인, 학식 높은 학자 셋이라고 합니다. 장원(莊園)을 만들고 수백 수십 명씩 농노를 두고 지주는 한가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마을 안에는 농장, 방앗간, 철공소, 시장 등이 있어서 마을 문을 닫으면 자족도시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중장통 역시 경기 침체에 정치사회마저 혼란한 시기에 살면서 이렇게 사는 것을 바랐습니다. 아주 부유하게 살면서 가정의 책임도 국가의 책임도 지지 않고 마음대로 살고 싶었나 봅니다. 사람도 골라서 사귀고 가장 좋은 벗은 하늘과 땅 그리고 자연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장통은 공자와 자공의 말처럼 부유하게 살더라도 뭔가 혼자 즐기는 것이 나쁘지 않았으면 좋다는 뜻이겠지요.
중장통은 좋은 농장에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걱정없이 살고 싶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호강(豪强)이라고 합니다. 요즘 말로 갑중의 갑이고 왕갑이지요. 위진남북조와 수당시기에 사족(士族)들이 대체로 이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장통이 희망한 생활은 많은 노동자들의 고통이 따라야하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옛날부터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착취와 빈부 차이 때문에 농민 반란의 까닭이 되었습니다.
이런 꿈을 꾸었던 사람이 또 있었는데 도연명(陶淵明, 352, 365-427)입니다. 그의 대표작 ‘도화원기(桃花源記)’입니다. “세금 걷어가고 젊은이 징발하는 국가 없는, 복숭아꽃 피는 마을에 토지가 평평하고 넓고, 가옥과 창고가 잘 지어졌고, 농지 기름지고 연못도 커서 물고기 길러 팔고, 뽕나무와 대나무 등 돈되고 쓸모 있는 나무 많고, 농경지 정리되었고, 넓고 좁은 농로를 도로로 쓰고, 마을 소식을 주민들이 공유하고, 개인노동과 집단노동으로 농사짓고, 사람마다 마음이 흐뭇하고 즐겁게 살고 있다.(土地平曠,屋舍儼然,有良田、美池、桑竹之屬。阡陌交通,雞犬相聞。其中往來種作,男女衣著,悉如外人。黃髮垂髫,並怡然自樂。)”고 합니다. 복숭아꽃은 서왕모가 먹었다고 하니 이것이 신선의 무릉도원이고 신선세계입니다. 물론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대지주는 아닐지라도 자영농 마을을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꿈꾸었던 대표적인 '자영농 마을'입니다.
물론 왕양명이 은퇴하면 살고 싶은 삶은 후한말기 중장통가 꿈꾸었던 농장주가 되는 것이겠지요. 왕양명 집안은 아버지 왕화가 가난하여 알바를 많이 했지만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높은 관원이 된 뒤에는 아주 청렴하지 못하여 재산도 많이 모았습니다. 따라서 왕양명은 젊은 나이에 관직생활하면서 부패하고 혼란한 정치를 보고 세상에 싫증이 났던 것 같습니다. 조맹부 글씨를 보고 이런 생각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왕양명은 걸핏하면 관직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서 산속에 서재를 꾸미고 수양공부하겠다고 합니다. 적어도 농장주가 되어 여유롭게 살고 싶었나 봅니다.
왕양명이 50살에 고향 소흥부에 돌아온 뒤부터 여러 농장을 사놓고 열댓명 마름을 두고 경영하였습니다. 처음 경영하기 때문에 마름들을 야단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왕양명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농장주의 삶을 잘 누리지 못하고 바쁘게 살다가 갔습니다. 이런 삶은 왕양명 사회경제 사상의 심리적 정서적 바탕입니다.
현재 산업사회 또는 민주사회에서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요즘 우리나라 어린이도 꿈꾼다는 너그러운 건물주이겠지만 또 바뀌어 연예인이 되겠다고 합니다. 부자가 되고 인기 많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사람의 본능인가 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중장통의 「낙지론」도 읽었겠지만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더 많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1923년 일제강점기에 이원수 작사, 홍남파 작곡의 「고향의 봄」에도 사실상 「도화원기」 내용이 조금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도화원기」처럼 “산골에 복숭아꽃”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살구꽃과 진달래”도 있습니다. 살구꽃이야 꽃보다는 약으로 썼던 과실나무이고 벌거숭이산의 진달래가 더욱 우리나라의 고향답습니다. 아무래도 「고향의 봄」은 외적에 침략 받지 이전에, 국가와 지주의 간섭이 적거나 없는 산골에 있는 우리나라의 평화로운 자영농 마을을 나타낸 것 같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요즘 은퇴하신 분들이 도시를 벗어나서 들판이나 산속에 전원주택을 짓고 여유롭게 살고 취미생활을 하면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또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살고 싶다고 합니다. 아마도 중장통 같은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중장통이 못 되더라도 자연인이 되고 싶겠지요. 그래도 조선시대 후기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양반 지주들이 넓은 농토를 갖고 많은 소작인을 거느리고 살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중장통의 꿈처럼 살았나 봅니다. 그래서 잘사는 양반집에 딸이나 여동생을 시집 보내려고 하였지요. 또한 몇십년 전에도 결혼할 때 호강시켜달라고 부탁하는 호강이라는 말이 사실 후한시기 이후의 중국 사회경제의 용어 호강이겠지요. 중국에는 대토지 농장의 흔적도 흔적이 남았는데, 옛날에 장원을 가진 집의 문패에는 성씨 뒤에 원(園)을 붙여서 김씨라면 김원(金園), 이씨라면 이원(李園)이라고 불렀고 비슷한 이름들도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큰집을 댁(宅)이라고 불렀는데 농장은 포함시키지 않았는지, 김씨댁(宅) 이씨댁이라고 불렀지요.
새마을운동의 기원과 취지는 다르겠지만, '도와원기' 비슷한 내용이 많이 있고 목표는 사람마다 흐뭇하고 여유로운 '자영농 마을'입니다. 앞으로는 고령화사회라고 합니다. 대토지 소유의 농장보다는 도화원처럼 자영농 마을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텃밭운동에 따라 텃밭에 먹을 채소를 심고 간단한 노동하고, 마을 사람들과 조금만 어울려서 외롭지 않고, 괜찮다면 흐뭇하고 여유롭게 살면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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仲長統(179-220, 현재 山東省 鄒城市 西南部), 「낙지론(樂志論)」:
仲公理常以為,凡游帝王者,欲以立身揚名耳,而名不常存,人生易減。優游偃仰,可以自娛。欲卜居清曠,以樂其志。論之曰:
使居有良田廣宅,背山臨流,溝池環匝,竹木周布,場圃築前,果園樹後。舟車足以代步涉之艱,使令足以息四體之役。養親有兼珍之膳,妻孥無苦身之勞。
良朋萃止,則陳酒肴以娛之;嘉時吉日,則亨羔豚以奉之。躕躇畦苑,遊戲平林,濯清水,追涼風,釣遊鯉,弋高鴻。諷於舞雩之下,詠歸高堂之上。
安神閨房,思老氏之玄虛;呼吸精和,求至人之仿佛。與達者數子,論道講書,俯仰二儀,錯綜人物。彈「南風」之雅操,發清商之妙曲。消搖一世之上,睥睨天地之間。不受當時之責,永保性命之期。如是,則可以陵霄漢,出宇宙之外矣。豈羨夫入帝王之門哉!
중장통(字公理) 자신이 생각해보니, 제왕 앞에 나가서 관원이 되는 것은 입신양명하려는 것인데, 이름도 오래 가지 않고 인생은 쉽게 늙는다. 고개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땅도 내려 보면서 즐겁게 사는 게 좋다. 공기와 물 좋은 곳에 넓게 집터를 잡고 자신이 평소에 하고 싶은 것을 즐기면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남자로서 즐겁게 사는 것을 따져보았습니다:
만약에 좋고 넓은 농지와 너른 집이 있다면, 산을 등지고 개천을 앞에 놓고, 도랑과 연못을 집 둘레에 파놓고, 대나무와 좋은 나무를 도랑 둘레에 심고, 집 앞에는 꽃밭과 채소밭을 만들고 집 뒤에는 과일나무를 심으리다. 수레와 배를 사서 걷거나 물 건너는 괴로움을 대신하고, 노복과 심부름꾼을 두어 내 몸 팔다리 움직이는 노동을 하지 않으련다. 부모님께는 맛있는 음식을 모두 만들어 드리고, 처자식에게는 고달픈 노동을 시키지 않으련다.
좋은 친구들이 모이면 좋은 술과 안주를 내어 즐겁게 해주고, 좋은 날에는 양과 돼지를 잡아 대접하리라. 들판에 나가서 어슬렁거리고, 숲속에 가서 놀고, 맑은 물에 발 씻고, 시원한 바람을 쐬고, 헤엄치는 잉어를 낚고, 높이 나는 기러기를 쏴서 잡으련다. 공자님의 소망처럼 개천에서 목욕한 뒤에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바람에 머리 말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크게 노래 부르련다.
집안에서는 조용한 방안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노자의 현허(玄虛) 뜻을 생각하고, 천지의 정화를 호흡하면서 신선처럼 되길 바라련다. 세상에 현달한 사람들 몇 명과 함께 모여서 도를 논의하고 책을 토론하면서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옛날 사람들을 이야기하련다. 악기로는 우아한 「남풍」을 타면서 맑고 고운 소리를 내련다. 이렇게 한 세상을 소요하면서 세상을 내려다 보련다. 세상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한평생 건강하게 살련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은하수에 있다는 신선이 되어 시공을 초월할 수 있을 텐데, 어찌 높은 관원으로서 황제 궁정에 드나드는 것이 부럽겠느냐!
조맹부(趙孟頫)의 「낙지론(樂志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