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선교사 루비 캔드릭(Ruby Rachel Kendrick: 1883~1908)

1905년 캔자스 여자성경학교를 졸업한 루비 켄드릭(Ruby Rachel Kendrick, 1883~1908)은 북텍사스엡윗청년회(North Texas Conference Epworth League)의 후원으로 남감리회 한국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됐다. 그녀는 1907년 8월 29일 미국을 떠나 서울에 도착한 때가 9월이었고, 11월에 송도(개성)에 도착했다. 대부흥 운동이 지나간 한국교회는 급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부흥 운동의 중심지 송도는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이 많아 전도열과 교육열이 높았다.
켄드릭은 개성에서 여자 사업을 시작하면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러나 6월 9일 병에 걸려 급히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와서 치료를 받고 수술했으나, 내한한 지 9개월만인 1908년 6월 19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5세의 젊은 나이였다. 남감리회 선교사 중 첫 사망자였다. 그녀는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올 때, 마지막 유언처럼 자신이 죽으면 자신을 대신할 청년을 텍사스엡윗청년회에서 보내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전에 보낸 편지에서 "나에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에 드리겠습니다(If I had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고 썼다. 이 말은 양화진 묘지의 묘비명이 되었다.
이 문구를 담은 편지는 태평양을 건너 1908년 여름 텍사스엡윗청년회 연회 모임 때 전달되었고, 회원들은 켄드릭의 헌신적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날 그 자리에는 서울에서 보낸 "켄드릭 사망"이라는 전보가 도착했다. 그녀의 모범과 유언을 따라 청년 20여 명이 외국 선교사로 자원했다. 그중 서너 명이 한국 남감리회 선교회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루비 캔드릭 선교사가 부모님께 보낸 편지
이 곳 조선 땅에 오기 전 집 뜰에 심었던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루 종일 집 생각만 했습니다. 욕심쟁이 수지가 그 씨앗을 받아
동네 사람에게 나누어 주다니, 너무나 대견스럽군요. 아마 내년 봄이 되면
온통 우리 동네는 내가 심은 노란 꽃으로 덮여 있겠군요.
아버지, 어머니!
이 곳 조선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이 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킬로미터를 맨발로 걸어 오는
어린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예수님을 영접한 지 일주일도 안된 서너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 본부에서는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순교를 할 작정인가 봅니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 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이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 하겠죠?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어 내겠죠?
저는 이 곳에 작은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히게 되었을 때 아마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제가 조선을 향하는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한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편지를 보낸 후 얼마 있지않아 급성 맹장염으로 순교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