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고통을 어루만져 주자
팔리본 <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3단계에 걸쳐 12가지 양상을 가진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파악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한 여러 신, 마라, 브라흐마, 은자, 바라문과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나는 가장 높은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 비구들이여, 3단계에 걸쳐 12가지 양상을 가진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순간 여러 신, 마라, 브라흐마, 은자, 바라문과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나는 가장 높은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전의 한역본에서는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다. 비구들이여, 사제를 각각 3번 돌리면 깨달음의 눈(慧眼)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고금의 제천, 악마, 사문과 바라문들 앞에서 나는 모든 번뇌를 떨쳐버리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선언한다.
법륜은 12번 돌아갔다. 사성제를 각각 3번씩 돌린 셈이다. 사성제를 그저 지적인 차원의 이해가 아니라 체인(體認)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법륜을 12번 돌려 볼 필요가 있다.
법륜을 1회전 시키는 것을 ‘인지’라 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는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피해 보려고 애를 써보지만 소용이 없다. 고통은 없다고 부정해 보기도 하지만, 고통은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힌다. 부처님은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진 노새가 견뎌내야 하는 괴로움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선 우리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 그 근거가 육체적인 것인지 생리적인 것인지 아니면 심리적인 것인지를 판단해 보아야 한다. 이렇게 고통의 실체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통을 인지하고 확인하는 것은 의사가 병을 진단하는 것과 같다. 의사는 말한다. “여기를 누르면, 아픕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예, 아픕니다. 바로 거기가 아픕니다.” 마음의 상처는 명상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몸의 상처를 의사에게 보여주듯이 마음의 상처를 부처님에게 보여드려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직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우리와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친절하고도 상냥하게 그것을 다룰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공포, 혐오, 비통 그리고 분노를 감싸 안아주어야 한다. “사랑하는 나의 고통아. 나는 네가 거기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단다. 너 때문에 내가 왔으니, 잘 보살펴 주도록 하마.” 고통에서 도망치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있는 힘껏 기운을 차리고 부드러운 태도로 고통을 인지하고 받아들여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법륜의 2회전은 ‘자극’이라고 한다. 고통을 인지하고 확인하고 나면 그 본연의 성질, 즉 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깊숙이 내관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의사가 증상을 살펴보고 나서 이렇게 말하듯이 말이다. “좀 더 깊이 관찰해보겠습니다. 그러면 무슨 병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의사가 각종 검사를 하고 우리가 먹은 음식, 몸가짐과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 등등을 물어보느라 일주일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의사는 일단 우리의 병을 알아보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 즉 우울증, 질병, 원활하지 못한 인간관계나 두려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마치 저 의사처럼 우리는 그것을 알아내려고 결심해야 한다. 좌선과 행선을 하고 도반이나 스승이 있는 사람은 스승에게 지도와 도움을 구해보라. 그렇게 해보면 고통의 원인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고통의 원인을 밑바닥까지 파헤쳐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단계에서의 수행은 여전히 ‘퇴보’할 가능성이 있다.
법륜의 3회전은 ‘성취’라고 하는데, “이 고통의 원인을 이해했다.”는 말로 표현된다. 그것은 법륜이 2회전 하는 동안 시작된 노력을 성취하는 것이다. 마치 의사가 병명과 그 특징을 말해주는 것과도 같다. 초성제를 연구하고 곰곰이 생각해서 실천에 옮긴 결과 고통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멈추는 경지에 도달한다. 이제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특정한 이름으로 부르고 그것이 가진 모든 특징을 식별해 낼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만 ‘퇴보하지 않는’ 행복과 즐거움을 얻게 된다.
그런데 병을 진단하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한동안은 계속해서 스스로 고통을 야기하게 된다. 우리는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을 통해 불에 기름을 붓는 짓을 하면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성제 법륜의 1회전은 나는 계속해서 고통을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엇인가 나타나면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본성을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나타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몇 종류의 요인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행복으로도, 고통으로도 통할 수 있는 네 종류의 자양분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셨다. 그것은 우리가 먹는 음식, 감각을 통한 인상, 의지 그리고 의식이다.
첫 번째 자양분은 먹는 음식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정신이나 신체에 고통을 야기할 수 있다. 그렇기에 건강에 유익한 것인지 해로운 것인지를 분간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먹을 때 정견을 실천해야 한다. 부처님은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젊은 부부가 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사막을 건너려 하고 있었는데, 식량이 바닥나고 말았다. 이리저리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부모는 살아남으려면 아들을 죽여 그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모는 하루에 아들의 인육을 얼마큼씩 먹고 나머지는 말려서 어깨에 지고 가면 남아 있는 여행일정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젊은 부모는 아들의 인육을 한 조각씩 먹을 때마다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나서 이렇게 물으셨다.
“사랑하는 벗들이여, 그 젊은 부부는 과연 아들의 인육을 먹는 일을 즐겼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들의 인육을 즐겨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모와 자식 그리고 손자의 인육을 먹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의 많은 부분이 부주의하게 먹는 일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건강과 심신의 안녕을 지킬 수 있도록 먹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마약을 먹는 것은 곧 자신의 폐와 간 그리고 심장을 먹어 치우는 일과 다름이 없다. 자식들이 있는데도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자식의 인육을 먹는 짓이다. 자식에게는 건강하고 튼튼한 부모가 필요한 법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음식물을 마련하는 과정을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의 안녕을 지키고, 다른 생물들의 고통과 우리의 고통을 최소화시키고, 지구가 계속해서 우리 모두를 위한 생명의 원천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택해서 먹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먹는 일을 통해 생물과 환경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자기 아들딸의 인육을 먹는 짓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어떻게 먹을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함께 깊이 생각해 보고 의논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법담(法談)의 하나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