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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섯 번의 불행 선언(28-31장)
앞서 13-27장의 선포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 민족과 온 땅을 수신자로 삼았다. 28-31장은 1-12장처럼 에프라임과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 특히 지도자 계급을 수신자로 삼는다. 다섯 번의 불행 선언은 예언의 수신자를 명확하게 밝히며, 본문의 구조를 나눈다.
1) 첫 번째 불행 선언(28장)
28장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눠 바라볼 수 있다 : 술 취한 에프라임의 화관을 향한 불행 선언(28,1-6) ; 이사야 예언자와 반대자들-사제와 예언자-의 논쟁(28,7-13) ; 이들을 향한 주님의 판결(28,14-22) ; 농부의 비유(28,23-29). 다만 본문의 흐름에서 하느님의 지혜를 농부의 지혜에 비유하는 마지막 단락은 에프라임과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앞선 세 단락과 분리된 모습을 보여준다.
1-6절 술 취한 에프라임의 화관을 향한 불행 선언
28장은 불행을 선언하며 “술 취한 에프라임의 거만한 화관!”을 예언의 수신자로 등장시키며 시작한다. 에프라임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에프라임의 화관은 북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를 가리킨다. 거만함을 지닌 화관은 사마리아의 교만을 드러내며 이로 인해 하느님 심판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사마리아를 위협하고 침략하는 세력은 아시리아를 의미하지만, 침략을 지휘하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 결과로 거만한 화관은 짓밟히고 사마리아의 아름다움은 시들어버린다. 거만하게 높은 곳에 자리 잡았던 화관은 땅으로 내동댕이쳐지며 짓밟힌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화관의 움직임은 사마리아를 향한 심판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단락의 마지막(28,5-6)에 남은 자들을 향한 말씀이 전달된다. 그들이 어느 도성의 출신(사마리아 혹은 예루살렘)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미래를 위한 희망의 표지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1,9 ; 6,13 참조).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잃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충실했던 이들로 등장하는 남은 자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화려한 화관과 아름다운 꽃이 되어주신다. 이사야 예언서 전체에서 남은 자들은 새로운 예루살렘을 위한 거룩한 씨앗(6,13 참조)이며, 시온의 기초이고(28,16 참조), 하느님의 소중한 면류관이 된다(62,3).
7-13절 이사야 예언자와 반대자들-사제와 예언자-의 논쟁
이사야 예언자와 논쟁을 벌이는 이들은 사제이고 예언자이다. 그들은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비틀거리고 그들의 식탁은 그들이 토한 오물로 더럽혀져 있다. 이렇게 술에 취한 사제와 예언자들은 에프라임의 주정꾼과 흡사하며28,1.3), 그들의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고 있음을 묘사한다. 그들은 가르침을 베풀고 계시를 설명하는 이사야 예언자에게 불만을 품는다(28,9). 그러므로 그들은 이사야가 선포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이해한다. “차우 라차우 차우 라차우 카우 라카우 카우 라카우 즈에르 삼 즈에르 삼”(28,10)에 대한 해석은 다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이것은 더듬거리는 말씨를 보여줘서 제대로 발음되지 않는 말로 이해한다. 둘째, 차우(צו)와 카우(קו)를 히브리어 알파벳 차데(צ)와 코프(ק)의 옛 형태로 보면서 어린아이에게 알파벳을 읽어주며 글자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셋째, 히브리어 차우, 카우, 즈에르, 삼의 어휘를 그대로 직역하여 이해한다. “차우”는 ‘계명, 명령’을, “카우”는 ‘잣대, 척도, 규범’을, “즈에르”는 ‘조금’을, “삼”은 ‘거기에, 여기에’를 의미한다. 이를 종합해서 직역하면, “명령에 명령, 명령에 명령, 규칙에 규칙, 규칙에 규칙,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이사야의 이러한 말이 더듬거리는 말씨와 다른 나라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맥락에서 다른 나라 말은 아시리아의 말을 가리킨다(33,19 ; 36,11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내리시려는 재앙의 도구는 아시리아의 군사적 위협을 의미한다(10,5-6 참조). 하느님께서는 아시리아를 통한 위협에 앞서서 이미 ‘안식처’와 ‘쉼터’를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은 그들 마음의 완고함을 보여주며(6,9-10 참조), 그것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재앙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차우 라차우...즈에르 삼”은 반복된다. 10절과 13절의 차이는, 앞이 이사야의 말이었고 뒤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데 있다. 이로써 재앙이 구체적으로 예고된다.
14-22절 주님의 판결
이 단락부터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예언의 수신자로 등장한다. 그들은 죽음, 저승과 계약을 맺었음을 자랑한다. 시대적 배경에서 그들이 맺은 계약은 아마도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항하여 이집트와 맺은 계약을 의미한다(30,1-6 ; 31,1-3). 이집트와의 동맹은 유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이집트는 아시리아에 대항할 만한 힘을 지니지 못했으며, 그래서 아시리아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기원전 701년)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런즉 그들과 맺은 동맹과 조약은 위협을 받을 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무용지물이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러한 동맹의 무용성을 강조하고, 동시에 동맹에 의지하는 행위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음을 의미하기에 동맹에 대해 강하게 반발한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동맹에 의존하면서 자신들의 운명을 이방 민족에게 내맡기지만, 하느님께서는 시온에 품질이 입증된 돌을 기초로 놓으신다(28,16). 여기서 관건은 ‘믿음’이다. 이방 민족의 침입 앞에서 이사야서는 ‘믿음’이라는 기초를 이미 제시하였다(7,9).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번 믿음이 시온의 기초가 될 수 있도록 주춧돌을 놓으신다. 이에 공정과 정의는 하느님 통치의 척도가 되고, 하느님을 믿지 않은 이들을 향한 심판이 예고된다. 예루살렘을 심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프라침산에서 일어서시고 기브온 골짜기에서 격노하실 것이 예고된다(28,21). 이제 이방 민족의 도움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심판이 나타난다. 프라침산은 ‘바알 프라침’이라는 이름으로 구약성경에 등장하며(2사무 5,17-25 ; 1역대 14,8-10)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손에 필리스티아인들을 넘겨 주셨다. 기브온은 여호수아가 아모리족과 싸울 때, 하느님께서 그곳에 큰 우박을 내려 많은 아모리인을 죽게 하셨으며(여호 10,9-14), 다윗이 하느님 명령에 따라 필리스티아 군대를 쳤던 장소이기도 하다(1역대 14,16). 이처럼 프라침산과 기브온은 이스라엘을 위해 하느님께서 이방 민족과 싸워주셨던 장소이다. 그러나 이사야서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으로 이끌어 준 장소로 인정된 곳을 하느님 심판이 시작되는 장소로 변모시킨다.
23-29절 농부의 비유
이 단락은 앞선 불행 선언의 기조 아래 전개되던 재앙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본문이다. 여기서는 농부가 지혜롭게 종류별로 씨를 뿌리고 타작하는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낸다. 농부가 창조 질서에 순응하며 농사를 짓듯이, 비록 하느님의 일이 기이하게 보이더라도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진행된다는 일종의 우화를 들려준다.
2) 두 번째 불행 선언-아리엘을 향한 불행 선언(29,1-14)
첫 번째 불행 선언이 사제, 예언자와 지도자(28,7.1)4를 향했다면, 여기서는 예언자(29,10)와 백성과 현인(29,13-14)이 수신자로 등장한다. 앞선 불행 선언과 연속성을 보이는 가운데 두 번째 불행 선언이 선포된다.
1-8절 아리엘을 향한 심판과 구원
불행 선언의 수신자로 아리엘이 언급된다. 아리엘은 본문에서 예루살렘을 의미하지만, 그 의미는 다양하게 설명된다. 아리엘(אריל)은 구약성경에서 여덟 번 언급되며, 사람의 이름(에즈 8,16)과 제단의 화덕(에제 43,15.16)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아리엘은 다섯 번 사용되는데, ‘예루살렘’[29,1(2번),2.7]과 ‘제단의 화덕’(29,2)의 의미로 사용된다. 불행 선언은 예루살렘을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한다. 우선, 예루살렘이라고 직접 언급하는 대신 아리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아리엘이 의미하는 ‘제단의 화덕’과 관련하여 제의가 진행되는 경신례 중심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매년 거듭되는 축제를 언급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둘째로 “예루살렘은 나에게 아리엘처럼 되리라”(2ㄴ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처럼, 아리엘은 모든 것을 태우겠다는 하느님 심판의 의미도 담고 있다. 셋째로, 아리엘은 다윗이 진을 친 도성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다윗이 여부스족의 도성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자리를 잡은 사건을 의미한다(2사무 5,6-12). 따라서 아리엘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예루살렘을 지키려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사고를 반영한다.
예루살렘은 하느님 심판의 대상이 된다. 예루살렘의 함락이 하느님의 계획으로 선포된다. 예루살렘이 아리엘(제단 화덕)처럼 되고(29,2ㄴ), 성전 함락이 묘사(29,3-4)되는 것은, 이 장면이 바빌론에게 함락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예레 52장 참조. 예레미야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예루살렘이 불에 타고 함락되는 장면을 묘사한다). 하지만 예언서는 누구에 의한 공격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판의 말씀과 동시에 예루살렘을 향한 구원의 말씀도 선포되는데(29,5-8절), 구원은 시온산을 공격하기 위해 나온 모든 민족의 무리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내림으로써 이루어진다.
9-14 절 백성의 어리석음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 예언자들의 눈을 멀게 하신다(29,9-10) 이 부분은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께 받은 ‘보지 못하게 하라’는 사명의 성취로 이해된다(6,9-10). 이어서 봉인된 문서의 말씀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사야 예언자는 자신의 증언과 가르침을 제자들 앞에서 봉인하였다(8,16). 그가 자신의 증언을 봉인한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 자신의 사명이 성취되고 있음을 이미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봉인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는 29,11은 이사야에게 부여된 사명이 계속 성취되는 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봉인은 볼 수 없어서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읽을 가능성이 아예 차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어서 경신례와 관련된 부분이 비판을 받는다(29,13-14). 백성의 잘못은 입과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하였을 뿐,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이다. 입과 입술을 통한 공경은 형식적 경신례를 의미하며, 이것은 이사야 예언서의 시작 부분에서 심판의 이유로 제기된 문제이다(1,10-20). 그러므로 마음이 함께하지 않는 형식적 정신례는 하느님 심판의 대상이 됨을 알려준다(29,13).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향하여 놀라운 일을 계획하신다(29,14).이를 통해 하느님의 계획과 인간의 계획이 대조를 이루고, 현인들의 지혜와 슬기도 하느님의 지혜 앞에서는 쓸모가 없어 사라질 것이라고 예고된다.
2) 두 번째 불행 선언-아리엘을 향한 불행 선언(29,1-14)
첫 번째 불행 선언이 사제, 예언자와 지도자(28,7.1)4를 향했다면, 여기서는 예언자(29,10)와 백성과 현인(29,13-14)이 수신자로 등장한다. 앞선 불행 선언과 연속성을 보이는 가운데 두 번째 불행 선언이 선포된다.
1-8절 아리엘을 향한 심판과 구원
불행 선언의 수신자로 아리엘이 언급된다. 아리엘은 본문에서 예루살렘을 의미하지만, 그 의미는 다양하게 설명된다. 아리엘(אריל)은 구약성경에서 여덟 번 언급되며, 사람의 이름(에즈 8,16)과 제단의 화덕(에제 43,15.16)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아리엘은 다섯 번 사용되는데, ‘예루살렘’[29,1(2번),2.7]과 ‘제단의 화덕’(29,2)의 의미로 사용된다. 불행 선언은 예루살렘을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한다. 우선, 예루살렘이라고 직접 언급하는 대신 아리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아리엘이 의미하는 ‘제단의 화덕’과 관련하여 제의가 진행되는 경신례 중심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매년 거듭되는 축제를 언급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둘째로 “예루살렘은 나에게 아리엘처럼 되리라”(2ㄴ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처럼, 아리엘은 모든 것을 태우겠다는 하느님 심판의 의미도 담고 있다. 셋째로, 아리엘은 다윗이 진을 친 도성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다윗이 여부스족의 도성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자리를 잡은 사건을 의미한다(2사무 5,6-12). 따라서 아리엘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예루살렘을 지키려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사고를 반영한다.
예루살렘은 하느님 심판의 대상이 된다. 예루살렘의 함락이 하느님의 계획으로 선포된다. 예루살렘이 아리엘(제단 화덕)처럼 되고(29,2ㄴ), 성전 함락이 묘사(29,3-4)되는 것은, 이 장면이 바빌론에게 함락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예레 52장 참조. 예레미야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예루살렘이 불에 타고 함락되는 장면을 묘사한다). 하지만 예언서는 누구에 의한 공격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판의 말씀과 동시에 예루살렘을 향한 구원의 말씀도 선포되는데(29,5-8절), 구원은 시온산을 공격하기 위해 나온 모든 민족의 무리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내림으로써 이루어진다.
9-14 절 백성의 어리석음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 예언자들의 눈을 멀게 하신다(29,9-10) 이 부분은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께 받은 ‘보지 못하게 하라’는 사명의 성취로 이해된다(6,9-10). 이어서 봉인된 문서의 말씀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사야 예언자는 자신의 증언과 가르침을 제자들 앞에서 봉인하였다(8,16). 그가 자신의 증언을 봉인한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 자신의 사명이 성취되고 있음을 이미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봉인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는 29,11은 이사야에게 부여된 사명이 계속 성취되는 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봉인은 볼 수 없어서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읽을 가능성이 아예 차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어서 경신례와 관련된 부분이 비판을 받는다(29,13-14). 백성의 잘못은 입과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하였을 뿐,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이다. 입과 입술을 통한 공경은 형식적 경신례를 의미하며, 이것은 이사야 예언서의 시작 부분에서 심판의 이유로 제기된 문제이다(1,10-20). 그러므로 마음이 함께하지 않는 형식적 정신례는 하느님 심판의 대상이 됨을 알려준다(29,13).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향하여 놀라운 일을 계획하신다(29,14).이를 통해 하느님의 계획과 인간의 계획이 대조를 이루고, 현인들의 지혜와 슬기도 하느님의 지혜 앞에서는 쓸모가 없어 사라질 것이라고 예고된다.
3) 세 번째 불행 선언 – 주님 앞에서 계획을 숨기는 이들을 향한 불행 선언(29,15-24)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향한 세 번째 불행 선언이 이어진다. 현인의 지혜와 슬기가 사라질 것이라는 앞 단락의 예고(29,14)가 여기 와서 구체화한다. 세 번째 불행 선언 단락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불행을 선언하는 동시에 고발이 이루어지고(29,15-16) 이어서 재앙이 구원으로 전환되는 장면이 묘사된다(29,17-21). 단락은 하느님 말씀으로 마무리된다(29,22-24). 불행 선언은 ‘거꾸로 행동하는 이들’(29,16)을 향하고 이들에 대한 고발이 중심을 이룬다. 아울러 그들에게 대항하여, 하느님의 행위를 통해 모든 것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담은 구원의 메시지가 선포된다.
15-16절 불행 선언을 통해 고발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
불행 선언이 제시하는 고발의 이유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그들의 계획을 하느님 앞에서 숨긴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들의 계획이란 아시리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이집트와 동맹을 맺어 군사적 협조를 받으려는 움직임이다(기원전 705-701년 ; 30,1-7 ; 31,1-3). 이사야 예언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계획을 대립시키고 인간의 계획을 비판한다(8,10 ; 11,2 ; 14,26 ; 16,3 ; 19,3.11.19 ; 28,29 ; 36,5). 왜냐하면, 인간의 계획은 자신에게 이로운지 아닌지에 따라 마음대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인간 계획의 대립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과 관련된 것이다.
17-22절 재앙에서 구원으로 전환
구원을 향한 전화는 자연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레바논은 풍요를 상징하는 과수원이 되고, 과수원은 다시 숲이 되면서 자연의 변화는 점점 확장된다. 이어서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다. 귀먹고 눈먼 이들이 듣고 보게 되며, 겸손하고 가난한 이들이 기뻐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게 된다는 커다란 변화가 선포된다. 앞서 눈이 덮이고 문서가 봉인되어 읽지 못하는 예언자들(29,10-12)은 겸손하고 가난한 이와 분명한 대조를 이루며, 대전환은 절정에 이른다. 다시 듣고 보게 되는 이들, 겸손하고 가난한 이들과 반대로 포악한 자, 빈정대는 자, 죄의 기회를 엿보는 이들은 없어지고, 사라지고, 잘려 나간다. 이로써 의인과 악인의 분리가 이루어진다. 29,18-22이 보여주는 신앙인과 불신자들의 분리는 28-33장에서 선포되는 불행 선언의 목적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불행 선언은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다르게 전개되는지를 제시한다. 이 주제는 제7편(56-66장)에서 더욱 심화된다.
23-24절 야곱 집안을 향한 구원의 약속
여기서는 야곱 집안이 중심에 서 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구원하신 분으로 소개되고, 이제 하느님의 구원이 야곱 집안을 향한다. 앞선 단락에서 구원된 겸손하고 가난한 이들은 야곱 집안과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야곱 집안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된다. 이사야서의 흐름과 함께 살펴보면, 그들은 ‘남은 자’(1,9 ; 6,13 ; 28,5 참조)이다. 이제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된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심을 알고 인정할 때에야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 이사야서는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고발하였다(1,3-4). 이제 큰 변화와 함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이루는 야곱 집안은 하느님을 옳게 인식하게 되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라졌던 지혜(29,14)가 다시 나타나게 된다(29,24).
4) 네 번째 불행 선언-반항하는 자녀들을 향한 불행 선언(30,1-33)
네 번째 불행 선언과 함께 시작되는 30장은 본문의 형태와 주제에 따라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네 단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러 내려가는 자들을 향한 불행 선언(30,1-7) ; 주님의 길과 원수로부터 도망치는 길(30,8-17) ;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시온의 백성(30,18-26) ; 주님의 산을 향하는 주님과 아시리아의 멸망을 기뻐하는 백성(30,27-33).
1-7절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러 내려가는 자들을 향한 불행 선언
불행 선언의 수신자로 “반항하는 자식들”(30,1)이 언급된다. 그들은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이 세운 계획을 따른다. 하느님께 문의하지도 않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어 하느님이 아닌 이집트의 도움을 보호막으로 삼으려 한다(30,1-2). 그 결과 그들은 보호가 아닌 수치를 받게 된다. 이로써 이집트의 도움은 헛되다는 진실이 밝혀지고, 동시에 동맹을 맺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동맹은 하느님이 아닌 이방 민족을 피신처로 삼고자 하는 인간적 사고이며 그에 따른 합리적 결과이다. 이사야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강조하였고(7,9), 이에 반대되는 모든 움직임을 죄로 바라본다. 그러므로 레비아탄과 같은 바다 괴물(27,1)로 여겨지는 라합은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로 언급되며, 이집트와 맺은 동맹이 허상으로 드러난다(30,7).
8-17절 주님의 길과 원수로부터 도망치는 길
이사야는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을 봉인한 바 있었다(8,16-18 참조). 봉인한 이유는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이 사람들에게 수용되지도, 그들을 변화시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선포된 말씀을 거짓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자신의 선포가 참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말씀을 봉인하고 증거로 남겨두었다(8,16 ; 29,11). 이제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말씀을 서판과 책에 기록하여 봉인하라고 명령하신다(30,8). 그 기록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을 고발하는 근거로 사용될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올바른 것을 듣기보다 솔깃한 말을 원했으며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 대한 말”을 거부하였다(30,9-11). 그 결과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배척한 이들에게 심판을 예고하시고(30,12-14), 원수들로부터 도망치는 백성의 모습을 고발하신다. 하느님의 길이 아닌 자신들의 길을 따른 이들은 심판을 받아 오히려 도망치는 길을 걷게 될 것이다(30,15-17).
18-26절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시온의 백성
이 단락의 수신자는 앞서 심판을 받은 이들과 반대의 태도를 지닌 이들이다. 그들은 이미 선포된 재앙을 체험하였지만, 시온에 새로이 거주하는 백성이다. 이들을 대하시는 하느님의 태도는 앞 단락과 분명하게 대조된다.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을 가엾이 여기시며 자비를 베푸시어(30,18-19), 이들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제공하신다(30,19). 이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겪은 광야 여정을 연상시키며(탈출 16-17장 참조), 하느님께서 이 백성과 동반하고 계심을 알려준다.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하는 여정은 하느님의 길이며, 그 결과 이 백성은 우상을 내던질 수 있게 된다(30,20-22). 하느님께서는 이제 열매 가득한 땅에서 이 백성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신다. 그들이 인간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계획을 따랐으며 하느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다(30,23-24).
이어서 대살육이 예고된다. 이 말씀은 구원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이 단락(30,25-26)이 묘사하는 ‘대살육’과 ‘탑의 무너짐’은 초기 묵시문학적 요소를 나타내며 현재가 아닌 다가올 일을 예고한다. 높은 산과 솟아오른 언덕은 이사야서에서 양면적 의미를 지닌다. 이것을 교만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하느님 심판의 대상이 되고(2,10-22 ; 10,32 ; 30,17 ; 41,15 ; 42,15 ; 65,7),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구원의 장소가 된다(2,2 ; 31,4 ; 40,4.12 ; 54,10 ; 55,2). 그러므로 대살육의 때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심판과 응징의 때로 다가오지만, 하느님을 믿는 시온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때가 된다(30,25-26).
27-33절 아시리아를 향한 하느님의 심판
30,27-29은 주님의 행위와 청자의 행위를 대칭의 구조로 전개한다. 주님의 입술이 분노로 가득하고, 혀는 집어삼키는 불과 같으며, 입김은 격류에 비교되며 민족들을 뒤흔드신다(30,27-28). 말씀을 듣는 이는 노래를 부르고, 기뻐하며 주님의 산을 목적지로 삼는다(30,29). 이어서 민족들을 흔드시고자 하는 주님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예고된다. 그분의 우렁찬 소리와 팔은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을 예고한다(30,30-31). 아시리아는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놀라 자지러지지만, 주님의 승리는 손북과 수금이 울리는 가운데 기쁨 속에서 경축된다. 아시리아는 주님 진노의 막대였지만(10,5),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형벌의 막대를 내리치실 것이다. 그들의 오만과 교만 때문에(10,12), 이제 아시리아는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30,30-33).
5) 다섯 번째 불행 선언 – 도움을 찾아 이집트로 가는 이들을 향한 불행 선언(31,1-9)
31장은 직전의 30장이 선포하는 하느님과 이집트의 대립이라는 주제를 반복하고 심화한다. 다섯 번째 불행 선언의 대상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집트로 가는 이들이다. 이집트 동맹의 주제가 30장과 연관되어 지속된다. 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예루살렘을 포위한 아시리아의 위협(36-37장)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들 수 있다. 아시리아의 위협을 받은 히즈키야 임금이 이집트의 군사적 도움에 의지했기 때문이다(36,6.9 참조). 이집트와의 동맹을 경고하는 31장은 주제와 문체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 불행 선언(31,1-3) ; 예언자에게 전하시는 하느님 말씀(31,4-5) ; 회개를 촉구하는 구원의 약속(31,6-7).
1-3절 불행 선언
불행 선언은 이집트를 믿고 의지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겨냥한다. 그들이 이집트를 믿는다는 것은 이집트의 군사력, 곧 군마와 병거를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지 않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를 책망하는 것이다(31,1). 그러므로 이집트와 동맹을 맺는 행위는 주님의 뜻을 거슬러서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31,2). 이어서 왜 그런지 이유가 제시된다. 이집트인들은 인간일 뿐 하느님이 아니며, 그들의 군마는 고깃덩어리이지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손을 뻗치시면, 이는 곧 하느님 심판을 상징하는데, 돕는 자인 이집트와 도움을 받는 자 이스라엘 백성 모두 망하고 말 것이다(31,3). 하느님과 그분의 행위는, 이집트인들과 고깃덩어리일 뿐인 군마와 강한 대조를 이루면서 이집트와의 동맹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알려준다.
4-5절 예언자에게 전하는 하느님 말씀
하느님의 말씀은 ‘사자’와 ‘새’의 비유로 시온을 보호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의지를 드러낸다. ‘사자’는 근접할 수 없는 지배력과 제어할 수 없는 강함을 지니기에 고대 근동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동물로 자주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강력한 임금으로(6,5 ; 24,23 참조) 시온을 보호하실 것이다(31,4). 또 다른 비유에 나오는 ‘새’는 둥지 위를 맴돌며 새끼를 돌보는 새처럼 시온을 지켜주겠다는 하느님의 의지를 표현하며, 보호라는 주제를 한층 심화한다(31,5). 그렇다면 이 비유들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누구로부터 시온을 보호하시려 하시는가? 여기서는 시온을 위협하는 이방 민족의 군대로부터의 보호가 아니라, 하느님이 아닌 이집트의 군마를 믿고 의지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로부터의 보호이다.
6-9절 회개를 촉구하는 구원의 약속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하여 당신께 돌아오라고 강하게 요구하신다. 이어서 우상숭배를 근절하기만 한다면, 아시리아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고된다(31,6-8). 아시리아는 “인간의 것이 아닌 칼”(31,7)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이 표현은 아시리아가 다른 이방 민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참된 임금이신 하느님에 의해 멸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시리아의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를 폐기할 때 그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30-31장은 이집트와의 동맹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기 위해 비슷한 표현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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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30장 | 31장 |
이집트 군사 동맹을 찾는 행위 | 1-7절 | 1-3절 |
주님께 문의하지 않음 | 1-2.11절 | 1ㄴ절 |
회개의 요구와 그들의 거부 | 15절 | 6절 |
아시리아 멸망 예고 | 31-33절 | 8-9절 |
이스라엘의 반항 | 1.9절 | 6절 |
군마에 의지 | 16-17절 | 1.3절 |
우상 폐기 | 22절 | 7절 |
주님의 화덕 | 33절 | 9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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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두 개의 장은 이집트와 동맹을 맺지 말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신 하느님을 믿어 의지할 것을 똑같이 강조한다. 하느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이 시온의 구원을 가져올 것이고 시온을 보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하느님과 이집트인의 차이를 묘사하는 방식이 다르다. 즉 30장이 ‘행위’라는 측면에서 전개하였다면(30,3-7), 31장은 하느님과 인간, 영과 고깃덩어리(31,3)라는 본질적 차이를 드러낸다. 연속적으로 배열된 두 번의 ‘불행 선언’(30,1-6 ; 31,1-9)은 시온을 보호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를 전달한다. 시온은 군사적 압박을 통한 외부적 위협과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인간의 계획에 의지하는 내부적 위협, 곧 신앙의 위협을 함께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위협으로부터 시온을 보호하고자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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