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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르, 그 지독한 여독
이 홍사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는다.
말복을 하루 앞둔 날이다. 나는 내 서재에서 돗자리를 깔고 목침을 베고 오전 내내 선풍기를 틀어놓고 잤다. 일어나니 열한 시 반이었다. 초원의 길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꾼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몸이 무겁다. 어디서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전신이 눅진눅진하고 목덜미 양쪽의 힘줄이 부어 뻐근한 통증이 느껴진다. 머리맡에 자리끼로 놓아둔 보리차를 마시는데 불현듯 초이르로 가는 그 외통수의 포장도로와 초원에 난 여러 갈래의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참으로 지독한 여독이다.
몽고에서 어제 새벽 비행기로 돌아왔다.
울란바트르에서 밤 열한시 이십 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다. 한 시간의 시차가 있으므로 우리 시간으로는 자정이 넘어 출발했다. 나는 비행기에서 한 숨도 자지 못했다. 기내식을 먹고 눈을 붙이려고 했지만 처음으로 한국으로 오는 몽고처녀가 자꾸 말을 걸어왔다. 처녀는 바로 내 옆자리 창가에 앉아 있었다. 취업비자로 나가는데 팩스로 받은 취업계약서까지 보여주며 급료와 근무환경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처음 가는 길을 나서면 가슴이 설렌다. 약간의 두려움과 잔잔한 기대감이 포한된 호기심이 발동된다. 몽고처녀도 예외는 아니리라. 계약서에 적힌 나이를 보니 스물한 살이다. 한번 말을 터니 처녀는 이것저것 끊임없이 물었다. 계약서를 보니 취업하는 곳이 무슨 플라스틱 금형회사 같았다. 그런 회사라면 아무래도 적응이 될 때까지 냄새로 인해 두통을 느끼겠지만 그런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계약서를 보니 근무조건은 열악했다. 숙소는 기숙사로 되어 있으며 밥값을 공제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밥값을 공제하더라도 몽고에 비하면 급료가 후한 편이고 숙소 또한 몽고의 게르에 비하면 호텔 수준일 것이다. 처녀는 한국어를 좀 배웠지만 발음이 시원찮았고 몽고말로 하자니 내가 좀 어눌했지만 소통에는 지장이 없었다. 내 말의 요지는 너무 궁금해 하지 말고 그렇다고 걱정하지 말고 가보면 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안심시켜놓고 잠을 청했지만 잠자기는 걸렀다. 몽고처녀가 입국수속을 도와달라고 청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으며 안양으로 가는 차편을 알아달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 멘트가 나오고 나는 손목시계를 한 시간 앞으로 돌려 한국시간에 맞추었다.
인천공항에서 몽고처녀의 입국수속을 도와주고 가방을 찾아 나오니 새벽 네 시가 좀 넘었다. 대구행 공항 리무진 버스는 여섯시 사십 분에 있다. 입국장 로비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거의 세 시간을 죽여야 했다. 몽고의 날씨와는 달리 입국장을 나서자 말자 후덥지근한 공기에 숨통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곳을 서성이며 세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입국장 로비 곳곳에는 지방으로 내려가는 차를 기다리다 의자에 앉아서 자는 사람, 아예 의자를 두 개 붙여놓고 손가방을 베고 자는 사람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몽고 처녀는 그때까지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피곤한 나로서는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으나 마다할 구실을 찾지 못했다.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태워주면서 서울역에서 전철로 안양으로 가서 택시를 타라고 일러주며 첫차를 태워 보냈다.
내가 가장 못견뎌하는 것은 기다림이다. 몽고처녀를 보내고 입국장에 들어가서 텔레비전 앞을 기웃거리다가 가방을 끌고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또 입국장 안을 운동 삼아 몇 바퀴 천천히 걸어서 돌았다. 입국장 한쪽 구석에는 아예 그곳이 교회인양 삼십여 명이 꿇어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목사로 보이는 사람이 앞에 서서 설교를 하고 꿇어앉은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 어쩌고 하며 나불대고 있었다. 지방의 어느 교회에서 해외로 선교를 다녀오는 모양인데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나는 왈칵 짜증이 일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러니까 비행기가 이렇게 복잡하지, 도대체 하나님은 외도나 오입을 얼마나 하셨으면 저렇게 많은 자식을 둘 수가 있는 거야?
그 기도하는 자리를 피해서 입국장 안을 몇 바퀴 돌면서 지독히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대구행 버스를 탔다. 첫차는 김천을 경유하고 이십 분 후에 출발하는 두 번째 차가 구미에 선다. 나는 구미에서 내려야하므로 여섯 시 사십 분 버스를 탔다. 대구로 가는 사람들이 첫차로 어지간히 빠져 나갔으므로 버스는 한산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도 잠을 자지 못했다. 28인승 리무진이라 좌석이 비행기보다 훨씬 안락하고 넓고 에어컨을 털어놓아 시원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피곤하면 잠이 오지 않는 법인가? 눈이 따가워 눈을 감고 있었을 뿐 잠이 들지는 못했다. 중간에 휴게소에 한 번 들리고 오면 구미까지는 세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구미에 도착하니 열 시가 좀 넘었다. 오면서 휴게소에 들렀을 때 공중전화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열 시에 터미널로 마중을 나오라고 했고 버스에서 내리다 보니 아내가 하차장에서 내가 내리는 버스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내와 짧은 포옹을 하고 버스 짐칸에 실린 가방을 꺼내 주차장으로 끌고 나왔다.
여행용가방을 싣고 차에 타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에 있던 내 휴대폰을 내밀었다. 나는 몽고에 나갈 적에는 휴대폰을 가져가지 않는다. 업무용 전화가 많이 오는 까닭으로 사무실의 여동생에게 맡기고 간다. 몽고에는 내 휴대폰이 따로 있다. 급한 일이 생기면 동생이 그 전화로 국제전화를 한다. 아내에게 받은 휴대폰 메시지를 훑어보았다. 이런, 저녁에 문상을 다녀와야 한다. 고향 불알친구들끼리 모은 계의 계원 중에서 한 친구가 모친상을 당했다. 그 외에는 모두가 쓸데없는 스팸메시지다. 쓸데없는 메시지를 지우며 근 열흘간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물어보니 큰일은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 바로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그 동안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거실에 켜둔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새벽에 기내식을 먹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나가 배차노트를 쭉 훑어보고 중기들이 일하는 현장을 한 바퀴 돌았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가. 일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가. 중기가 들어간 현장을 한 바퀴 돌고 현장 소장들과 귀국인사를 하고 현장 상황을 물어보며 업무를 파악했다. 그리고는 다섯 시가 넘어서 친구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일찍 문상을 마치고 들어와 자겠다는 심산이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하나 둘 모이는 바람에 그곳에 발목이 잡혀 밤 열 한 시가 넘어서 대리운전을 불러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들어와서 다시 샤워를 하고 누웠지만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들 만하면 눈에 몽고의 초원이 펼쳐졌다. 잠을 포기하고 머리맡에 있는 책을 읽다가 웬 밤중에 담배를 그렇게 피냐는 아내의 지청구를 듣고 두 시가 넘어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여섯 시에 일어나 주기장의 중기들이 일을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올라와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는 아예 잠자리를 서재로 옮겨 돗자리를 깔고 목침을 베고 한 숨 잤다. 일어나니 열 한 시가 넘었고 눈앞에 초이르의 초원이 펼쳐졌다. 나는 잠시 여기가 몽고인지 한국인지 혼돈스러웠다.
거듭되는 이야기지만, 누구나 처음 가는 길을 나서면 가슴이 설렌다. 약간의 두려움과 잔잔한 기대감이 포한된 호기심이 발동된다. 나도 예외는 아닌지라 일주일 전. 울란바트르를 떠날 적에 그런 마음이었다. 초원으로 난 길을 다시카와 번갈아 운전을 하면서 현장에 일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소풍을 나선 기분이었다.
몽골 초원은 많이 다녔지만 초이르는 초행길이었다. 초이르에서 샤인산드로 가는 길을 찾으라고 했다. 초원에서는 철길을 오른쪽으로 끼고 따라가는 게 제일 찾기 쉽다고 현장을 몇 번 다녀온 이이사가 길을 일러주었다. 초이르까지 포장도로를 달려 그곳부터 샤인산드로 가는 길을 찾아 초원으로 난 길을 달리다보면 92킬로미터 지점에 우리 회사의 현장 켐프가 있다고 했다. 빨리 가면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길이라고 했다. 몽고에서는 정확한 도착시간을 말하지 않는다. 가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까닭에, 한두 시간 지체되는 것은 보통이기 때문에 출발 시간은 말하되 도착시간은 정확히 예기하지 않는 게 몽고 사람들의 불문율이다. 도착시간을 정확히 말하면 무슨 일이 생겨도 그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다고 믿는 눈치다.
초이르는 몽골에서 중국으로 가는 육로의 중간에 있는 도시다.
초이르를 거쳐서 샤인산드까지는 초원이고 샤인산드부터 중국 국경인 쟈밍우드까지는 고비사막을 통과해야 한다. 중국을 통해 수입하는 물건 중에서 기차로 이용할 수 없는 물건은 트레일러들이 직접 그곳까지 가서 싣고 사막을 통과하고 초원을 통해 육로를 이용하기에 비교적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이다. 그 사막과 초원으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베테랑 기사들이 있다고 했다. 그 베테랑 기사들은 지름길을 알고 있으며 어디에 주유소가 있고 어디에 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두 명의 기사가 밤길도 마다않고 달린다고 했다. 우리는 엄두도 내지 못할 길이다.
초이르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그것이 궁금했다. 통역 겸 매니저로 동행한 다시카에게 물어보았다.
-이곳 사람들은 뭘 먹고 살지?
한국에 취업으로 나와 오 년간 불법 체류한 적이 있는 다시카는 한국말을 잘한다. 그의 대답으로는 쟈밍우드에서 육로를 이용하는 사람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또 부근에 있는 크고 작은 형석이나 철광석 광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양과 말, 소를 키우는 유목민이 사는 도시라고 했다. 그런 만큼 초이르 입구 국도변에는 대여섯 개의 주유소가 있고 식당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도시라고는 하지만 한국으로 따지면 시골 면소재지 정도의 크기다. 초이르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벌판에 다섯 동이나 되는 오 층짜리 아파트가 비어 있었다. 그것이 초원에 참 어울리지 않았다. 그 아파트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을 적에 러시아 군인들이 거주하던 아파트이며 구소련이 붕괴되고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비어있다고 했다. 초원을 달리다가 보면 그런 아파트와 전투기 격납고를 군데군데서 볼 수가 있었다. 참으로 흉물스런 모습이다.
우리 회사에서 수주한 공사는 초이르에서 샤인산드까지 가는 도로공사이다. 거의 200킬로미터가 되는 초원에 포장도로를 내는 공사다. 그 공사를 우리 회사가 다 맡은 게 아니고 세 개 회사가 나누어서 발주를 받았다. 초이르부터 50킬로미터 지점까지는 중국회사가 발주를 받았고 그 다음부터 70 킬로미터는 우리 회사의 공사 구간이다. 그 나머지는 한몽 합작회사가 발주를 받았다.
우리는 초이르에서 늦은 점심으로 양고기 덮밥을 먹고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가득 채우고 샤인산드로 가는 방향의 초원으로 들어섰다. 92킬로미터 지점이라고 했으니 차의 미터기를 0으로 누르고 초원길을 달렸다. 초원에는 외통수 길이 없다. 차들이 이리저리 다녀서 가는 방향은 한곳이지만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다. 철길을 따라 가면 길을 잃을 일이 없다고 했으므로 가급적이면 멀리 철길 옆에 서 있는 전신주를 보이는 곳으로만 달렸다. 백미러를 보니 내가 운전하는 짚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일으키며 따라오고 있었다. 초원 저쪽에도 가끔씩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것이 있어 가까이 가보면 마주 오는 차량이다. 뽀얗게 일어나는 먼지를 보고 차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철길을 따라 한 삼십분 달리다 보니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철길에만 연연하여 전신주만 보고 달리다 보니 제법 큰 형석 광산 정문이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가 달려온 길은 형석광산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차를 돌려 광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광산을 빙 돌아서 다른 길을 찾아서 남쪽으로 난 길을 달렸다. 형석광산 옆으로 마주 오는 컨테이너를 실은 트레일러를 보고 그 길이 쟈밍우드로 통하는 길임을 확신하고 그 길을 달렸다. 한 이십 분 정도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다시 철로의 전신주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철길을 따라 가면 된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초원을 달렸다. 군데군데 양과 말이 무리를 지어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 곳이면 부근에 어김없이 하얀색의 게르가 하나씩 있다. 유목민들의 게르다. 우리는 찾을 수가 없지만 그곳에는 물이 있다는 증거다. 그런 게르에 가면 틀림없이 말 젓을 발효시켜 만든 마유주가 있다. 좀 얻어 마시고 페트병으로 한 병을 얻어가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언덕을 넘어서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다. 주위의 지형으로는 목적지까지 거리가 얼마 남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우리가 달려온 시간과 미터기를 보고 달려온 거리를 체크하여 대충 얼마나 남았는지 짐작할 뿐이다. 아무튼 이 길을 달려가다 보면 우리 현장의 켐프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다시카와 교대로 운전을 하면서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포원에 흰색 표지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핸들을 그쪽으로 꺾어 다가가 표지판 앞에 차를 세웠다. 표지판을 보니 여기부터 우리 회사의 공사구간이라는 표지판이고 위에는 몽골문자인 키릴문자로 안내문이 적혀있고 그 아래 영어로 같은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맨 밑에는 원청업체와 하청업체인 우리 회사의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길을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그 초원에 서있는 표지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제 다 왔다.
여기가 공사 시점이라 하더라도 앞으로 남은 거리는 40 킬로미터 정도 남았다. 몽고사람에게 물어 본다면 40킬로미터라고 할지라도 바로 저 언덕을 두어 개 넘으면 있다고 할 것이다. 초원에서 몽고사람에게 거리를 물으면 그렇게 말한다. 조금만 가면 된다는 것이 한 시간 거리다. 바로 조~오기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이십 분 거리다. 허허벌판에 외로이 서 있는 표지판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달렸다. 다시카에게 물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표지판만 보고 다 왔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다시카니까. 똑 같은 풍경의 언덕을 두어 개 넘어서니까 측량을 해놓은 붉은 깃발이 군데군데 꽂혀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깃발은 일렬로 서 있었다. 머지않아 몽고말로 솔롱쟘! 곧은 도로가 될 자리다. 우리는 그 깃발을 따라서 달렸다. 깃발만 따라가면 틀림없이 우리 회사의 켐프가 나올 것이다. 또 언덕을 넘어서니 그레이드가 초원의 풀과 뿌리의 제거 작업을 하고 있는 게 멀리 보였다. 우리는 그레이드가 작업을 하는 쪽으로 갔다. 그레이드 기사가 차가 오는 것을 보고 작업을 중지하고 차에서 내렸다. 다시카가 내려 몽고말로 무슨 말인가 한참 주고받은 뒤에 차 트렁크에 실린 물을 한 병 꺼내서 그레이드 기사에게 주고 차에 오르며 말했다.
-다 왔어요. 언덕을 두 개만 넘으면 켐프가 있대요.
거기서부터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언덕을 하나 넘어서니 덤프들이 성토작업을 하는 게 보였고 우리는 그곳을 지나쳐 다시 언덕을 오르니 그곳에는 포클레인이 언덕을 깎고 있었다. 그러나 현장 어디에도 조사장의 짚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작업장을 지나 언덕에 올라서니 멀리 초원에 푸른색 지붕으로 만든 켐프가 보였다. 켐프는 상당히 거창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사무실과 식당, 정비소 그리고 사십 명이 넘는 기사들이 잘 수 있는 게르가 여러 동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켐프주위는 울타리를 치지 않고 반듯하게 포클레인으로 땅을 일 미터 정도의 깊이로 파서 그 흙을 쌓아 사람이나 동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넓이가 천 평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켐프입구에는 경비가 서있었다. 경비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 턱이 없다. 다시카가 누구라는 사실을 말하고 나자 철제로 만든 바리게이트를 열어주었다.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토야 혼자서 컴퓨터를 켜고 일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토야는 본사 사무실에 근무하던 여직원인데 현장으로 파견을 나온 것이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나를 보자 토야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반갑게 맞았다.
-나마익 산스노?
나를 보고 싶었냐고 묻자 토야는 눈시울을 글썽이며 말했다.
-산승! 에미리 산승.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었다는 말이다.
-조 다르크 한벤 웨?
조 사장이 어디 갔냐고 묻자 여기서 20킬로미터 떨어진 원청업체 사무실에 회의를 들어갔다는 것이다. 거기가 어딘지 궁금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되냐고 묻자 우리가 가던 방향으로 20킬로미터쯤 가면 작은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발주처 회사의 켐프가 있다고 했다. 조 사장은 우리 회사의 정 일품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현장관리와 중기정비와 인사관리를 도맡고 있다. 나로 말하자면 우리 회사에서 종 삼품정도 되는 셈이다. 한국에 거주하면서 회의나 무슨 일이 있어야 한 번씩 나가는 이사다. 지분으로 따져도 그렇고 그냥 투자만 해놓고 정 일품과 정 이품인 이 이사가 하는 대로 뒷짐을 지고, 보고만 있는 나는 분명 종삼품에 해당한다. 조 사장을 만나보아야 현장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가 있다.
조 사장이 갔다는 초원을 바라보고 있는데 토야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하고 손을 내밀었다.
-미니 초코파이 우거치!
자기에게 줄 초코파이를 달라는 말이다. 키가 작달막하고 통통한 몸피를 지녀 귀염상인 토야는 한국산 초코파이를 좋아했다. 나는 모르지만 중국산은 그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게 토야의 주장이다. 그래서 몽고에 나갈 적마다 짐스럽지만 초코파이를 두통씩 가져간다. 물론 초이르를 가면서도 그 초코파이를 챙겼다. 나는 다시카를 시켜 차에 있는 초코파이를 가져오라고 하고 그 초코파이 한통을 토야에게 주었다.
-바이르따!
토야는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다시카에게 토야와 같이 있으라고 말하고 차를 끌고 켐프를 나와 발주처의 사무실이 있다는 방향으로 무작정 달렸다. 그 쪽으로는 측량 깃발만 꽂혀 있을 분 아직 공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깃발만 보아도 내 눈에는 머지않아 놓일 초원의 곧은 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공사 현장에서 뼈가 굵은 내 눈에는 깃발만 보아도 도로의 높이와 넓이, 형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켐프를 나와 한 십 분 정도 달리다 보니 내가 가는 철길 옆길이 아닌 저쪽 언덕 아래 보얗게 먼지를 내며 달려오는 흰색 짚이 보였다. 혹시 조 사장인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던 길을 버리고 초원을 가로 질러 그 짚이 달리는 곳으로 핸들을 꺾었다. 그 짚도 자기 차를 향하는 내 차를 보았는지 가던 길을 버리고 초원을 가로 질러 내 차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게 초원을 달리는 차들의 무언의 약속이고 예의다. 모르는 사이라도 자기 쪽으로 차가 달려오면 가던 길을 버리고 마중을 온다. 몽고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마주치면 뭐가 필요한지 묻고 서로 도와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조 사장의 토요다 짚이 분명했다. 조 사장은 자기 차를 보고 달려오는 자주색의 짚이 내 차라는 걸 직감했다고 했다. 우리는 초원 중간에서 차에서 내려 한 번 포옹을 했다. 엊그제 전화할 적에 모레쯤 현장에 가겠다고 통화를 했고 내일쯤 포클레인 부품이 비행기로 도착하면 부품을 찾아서 정비사를 따라서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초행길을 빨리 잘 찾아왔다고 나를 추겨 세웠다. 석 달 만에 보는 조 사장은 초원과 사막의 강렬한 햇볕에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얼굴이 새카맣게 탔다. 하지만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사무실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며 조 사장이 앞장섰다. 조 사장 차가 일으키는 먼지 때문에 조금 거리를 두고 그 차를 따라 켐프로 돌아왔다. 켐프에 돌아오자 조 사장은 정비를 맡고 있는 톨가를 불러 게르를 빨리 한 동지으라고 지시 했다. 우리가 왔으니 잘 곳이 없다는 계산이었다. 게르를 한 동 설치하는데 서너 명이 붙으면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조 사장과 사무실에서 우리 회사의 수주 금액과 사외 이사인 윤 회장이라는 늙은이의 마지막 지분을 빼주는 금액을 조율하다가 나가보니 벌써 게르는 바로 사무실 앞에 설치되어 있고 침상이 없어 사무실 바닥에 깔고 남은 비닐 장판을 깔고 있었다. 톨가는 내일 침상을 만들어주겠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밥은 한국인과 몽고 기사들이 따로 먹는다. 우리는 조 사장 침실에 붙은 작은 주방에서 전기밥솥에 밥을 해서 한국식으로 먹고 사십 명이 넘는 기사들은 식당에서 몽고식으로 먹는다. 몽고 요리사 아줌마를 두 명이나 고용했다. 아니 세 명이다. 림카라는 몽고처녀가 있다. 조 사장 침실과 반장들의 침실, 침실 앞에 붙은 주방과 사무실 청소와 빨래를 맡고 있는 스물 두 살짜리 몽고 처녀다. 그 아이가 식사 시간이면 몽고인들의 주방에서 일을 거든다. 그 아이까지 합치면 세 명이다. 사십 명이 넘는 몽고 직원들이 하루에 양을 한 마리씩 먹어 치운다. 고기만을 먹는 몽고인들이라 국수에까지 양고기를 썰어 넣고 양고기 덮밥에, 복음 밥에도 양고기가 들어가니 그 많은 식구가 하루에 한 마리 먹어치운다는 말도 무리가 아니다. 울타리 안에는 몇 마리의 양이 묶여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경비들이 하루에 한 마리씩 양을 잡는다고 했다. 그들의 식성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우리는 날이 어두워지자 한국식으로 밥을 지어 먹었다. 밥은 내가 하고 김치찌개는 조 사장이 만들었다. 그 동안 현장에 나가 있던 반장 두 명이서 돌아왔다. 한국식으로 밥을 먹는 사람은 조 사장과 나, 그리고 한국인 반장 두 명이다. 현장 거리가 너무 길어 양쪽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조 사장 혼자서 감당할 수가 없어 몽고에 사업을 하러 들어와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국제 미아가 아니라 국제 실업자가 된 한국인을 두 명 반장으로 고용했다. 다들 몽고말을 잘 하는 편이다. 그들의 침실은 컨테이너로 만든 조 사장의 침실 맞은편에 있다. 그러니까 사무실과 붙어 있는 그 컨테이너는 세 칸짜리 집이 되는 셈이다. 조 사장의 침실, 그리고 중간에 주방, 그리고 한 칸은 반장들의 침실이다. 합판으로 칸막이를 만들고 문을 달아 견고하게 격리 되어 있었다. 침실에 비하면 주방과 식당이 좁은 편이다. 네 명이서 밥을 먹다가 다시카를 불러 같이 먹자고 했으나 눈치가 삼단인 다시카는 벌써 몽고기사들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조 사장과 사무실에서 장비 가동과 공정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는데 울란바트르에서 중기 정비업을 하고 있는 변 사장이 조수를 데리고 도착했다. 내일 온다던 부품이 오늘 비행기로 와서 급하게 왔다고 했다. 본사에 있는 이 이사가 삼겹살과 목살을 아이스박스에 잔뜩 넣고 어떻게 구했는지 상추와 깻잎, 그리고 소주를 한 박스 챙겨 그들 편으로 보냈다. 생각지도 않은 파티가 사무실에서 벌어졌다. 반장들과 변 사장 다시카까지 불러서 삼겹살 파티를 했다. 먼 이국 초원에서 삼겹살 파티! 그 이름만으로도 환상적이다. 조 사장과 반장들은 오랜만에 먹어보는 소주고, 삼겹살이라고 환장하도록 맛있다며 다들 입을 모았다. 무슨 음식이든 구하기가 귀하고 오랜만에 먹으면 맛이 있는 법이고 분위기가 고기 맛을 더했다. 고기를 굽기가 바쁘게 잔이 돌아갔다.
거나하게 취해 만찬을 마치고 나오니 조 사장이 내게 자기 방에 같이 자자고 했다. 그러고 싶지만 다시카를 게르에 혼자 재우는 게 맘에 걸렸다. 나는 코를 곯고 두 시간마다 일어나 담배를 피우기에 조 사장은 나랑 같이 자면 한숨도 못 잘 거라며 극구 사양하고 다시카와 게르에 자겠다고 고집했다. 변 사장은 반장들 방에서 자겠다고 했다.
금방 뚝딱 지은 게르에는 침상과 전기가 없는 게 흠이다. 전기가 없으니 조 사장이 잠자리를 둘러보고는 들고 있던 랜턴을 주고 잘자라고 인사를 하고 나갔다. 다시카와 둘이 자는 독채 게르다. 내가 양치를 하고 자리끼로 물을 한 병 챙기는 동안 다시카는 차에서 이불 보퉁이를 가지고 왔다. 장판 위에 요를 깔고 이불을 펼쳤다. 울란바트르에서 출발할 적에 내가 챙긴 것은 겨우 칫솔과 입고 잘 반바지와 티셔츠가 고작이었는데 다시카의 아내 바아기가 초원은 추울지 모른다며 이불보퉁이와 베게 침낭까지 챙겨주었다. 7월말! 한국에는 가장 더울 때이고 열대야가 나타나는 시기인데 이불보퉁이라니? 이사 가는 것인가? 하고 의아했지만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겨우 이틀 밤이나 사흘 밤을 자고 올 것인데 준비한 것이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두꺼운 이불보퉁이, 아이스박스에 라면 한 박스, 코펠 버너, 그리고 물 한 박스. 거추장스럽고 짐스럽다고 생각했지만 바아기의 판단이 맞았다. 해가 떨어지니 추운 것은 아니지만 선득했다. 나는 반바지와 티셔츠를 잠옷으로 입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담배와 라이터 랜턴 물 한 병을 더듬으면 집을 수 있는 머리맡에 놓고 입고 있던 청바지를 그대로 입고 양말만 벗은 채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취기가 올라 그리 추운 줄은 몰랐다. 다시카는 차에서 점퍼를 꺼내 입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카가 가볍게 코를 고는 소리를 듣고는 나도 잠이 들었다. 초원의 잠이라 좋은 꿈을 굴 것만 같았다. 취기에 금세 잠이 들었나보다. 얼마나 잤을까 자다가 너무 추워서 떨다가 깨어 랜턴으로 시계를 비춰보니 새벽 두 시다. 겨우 세 시간 정도 잤다. 여름의 초원에는 백야현상이 나타난다. 낮이 지나치게 길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내리면 밤 열 시다. 그리고 새벽 네 시쯤이면 동이 터는 게 밖이 훤해진다. 겨울은 오후 네 시가 되면 해가 지고 아침 아홉시가 되어야 해가 뜬다. 영하 사십오 도까지 수은주가 내려가는 추운 겨울에는 많이 자고 여름에는 일을 많이 하라고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기상이다. 나는 랜턴을 들고 밖으로 나와 차에 가서 바아기가, 싫다는데도 기어이 챙겨준 점퍼를 찾아서 입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벗어놓은 양말을 찾아 신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추위는 뼈를 파고들었다. 한국에는 열대야 때문에 밤새 에어컨을 틀어놓고 자는데....... 중얼거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러니 발이 이불 밖으로 나왔다. 발을 덮으니 머리가 나오고. 웅크리고 잘 수밖에 없다. 밤낮 일교차가 이렇게 심한 줄 몰랐다. 보통 추운 게 아니었다. 이빨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웅크리고 자다가 다시 깨어나니 밖이 훤하게 동이 터고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네 시가 좀 넘었다. 켐프 안은 자들 잠이 들어 있어 쥐 죽은 듯 조용한 여명의 시간이다. 초원에서는 처음 보는 여명이었다. 띄엄띄엄 떠있는 구름이 발갛게 노을이 드는 그 순간이 환상적이었다. 나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켐프 밖으로 나왔다. 바리게이트를 열어주는 경비가 묻지는 않았지만 이 시간에 어디를 가나 의문스러운지 고개를 갸웃했다. 켐프 밖으로 나와 해가 뜨는 쪽으로 초원을 달렸다. 초원에 혹시 웅덩이가 있을지 몰라 초원길을 더듬으며 조심스레 해가 뜨는 쪽으로 달렸다. 웅크리고 잔 몸이 뻐근하고 추위가 풀리지 않아 차의 히터를 틀었다. 열이 받은 차에서 나오는 더운 바람이 몸을 녹여주었다. 언덕을 넘어서 달리다 보니 초원 군데군데 말과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초원이 깨끗하고 평평한 곳에 차를 세웠다. 해가 막 뜨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초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지평선에서 해가 뜨는 경이로운 순간을 만끽했다. 바다에서 뜨는 해는 보았지만 지평선에서 해가 뜨는 것은 처음으로 접하는 순간이었다. 붉은 불덩이가 올라오는, 그 자연의 섭리, 과히 장관이었다. 그 장엄한 광경에 저절로 두 손이 모아져 합장을 했다. 누구에게 드리는 무엇을 향한 기도인지는 모르지만 그 환장할 장엄함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풀밭에 서서 해가 한 뼘이 넘게 올라오도록 그 광경에 엄숙하게 사로잡혀 꼼짝없이 서 있었다. 해가 온전하게 올라오고 내 그림자가 초원에 길게 늘어지도록 나는 그 일출에 홀려 있었던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초원과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차에는 카메라가 있었지만 그 장관을 사진에 담지 않고 가슴에 고스란히 담았다. 해를 담은 가슴은 활기차고 뜨거웠다.
한 참을 더 서성이다 차를 돌려 켐프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은 내 차가 가면서 밟았던 풀밭의 궤적을 따라서 돌아왔다. 켐프에 돌아오니 다들 일어나서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있었다. 조 사장은 나에게 어디를 갔다 오느냐고 물었다. 멋진 일출을 보고 해를 가슴에 담아왔다고 하면서 가슴에 든 해를 보여줄까 농을 하면서 점퍼를 벗고 세수를 하였다. 지하수 물이 얼마나 찬지 손이 시릴 지경이었다. 밤에 웅크리고 자서 흐트러진 머리까지 감고 주방에 들어가니 전기밥솥에서 증기가 빠지는 소리가 들리며 구수한 밥 냄새가 났다. 우리는 서둘러 아침을 먹고 사무실에서 조회를 했다. 조회라고 하지만 조 사장을 일방적인 그 날의 작업 지시였다. 반장 둘과 정비사 그리고 토야가 함께한 자리였다. 조 사장과 나는 발전기와 양수기를 실은 차를 데리고 다니면서 구간마다 뚫어놓은 지하수를 체크하고 점검하기로 했다. 우리 구간에 스무 개가 넘는 지하수를 뚫어 놓았다. 살수차가 물을 받아 성토용 흙을 다짐할 적에 뿌릴 물이다. 물을 뿌리지 않으면 다짐이 되지 않는다. 조회는 간단히 끝났다. 다들 모자와 물을 챙겨서 현장으로 각각 차를 끌고 출발하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카에게 켐프에서 쉬라고 하고 조 사장의 차에 올랐다. 그 날은 종일 조 사장과 함께 일을 했다. 지하수를 뚫어놓은 곳에 가서 발전기를 돌려 물이 나오는 양을 확인하고 한 차를 받는데 걸리는 시간과 뿌리는데 걸리는 시간을 체크했다. 전기가 없으니 발전기를 돌릴 수밖에 없는데 물을 받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서 공사에 차질이 있다는 판단으로 내가 저수지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저수지를 어떻게 만드느냐를 상의했다. 그렇다고 지하수마다 돌릴 발전기가 없다. 발전기는 겨우 두 대 뿐이다. 난감했다. 내가 제안한 방식은 물이 새지 않는 찰흙을 실어다가 조그마한 저수지를 만들고 발전기 두 대로 24시간 돌아가면서 저수지에 물을 받아놓은 다음 그 물을 살수차에 실을 적에는 3.5인치 수중펌프를 이용하자는 제안이었다. 조 사장도 내 제안에 동의를 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저수지를 만들고 수중펌프를 살수차에 장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한 곳에 찰흙을 실어다가 저수지를 만들어 밤새 물을 퍼 올리고 그 물을 차에 싣는 시간을 체크하고 이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결정을 내리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 실험은 내 지시 하에 이루어졌다. 그 동안 나는 모자도 없이 낮에는 강렬하고 따가운 햇볕과 싸우고 밤에는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에 떨어야 했다. 초원의 사흘은 바쁘게 흘러갔고 그 동안 깎지 못한 수염은 가지를 칠 지경이었고 얼굴은 새카맣게 그을렸다. 겨우 한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고 나는 울란바트르로 돌아가야 했다. 거기에 있어도 더 할 일이 없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서둘러 이불보퉁이와 코펠과 물을 챙겨 켐프를 나섰다. 조 사장과 반장들 그리고 정비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켐프를 기분 좋게 나와 초원길을 달렸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뒤에 실은 가스통이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짚 차 트렁크에는 빈 가스통이 다섯 개나 실려 있다. 가스를 울란바트르에서 수송해야한다. 우리는 가스통을 본사 마당에 내려놓으면 다음에 현장으로 들어가는 차가 가스를 채워서 싣고 갈 것이다. 거의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운전하던 다시카가 차를 길 옆 풀밭으로 들어가 세웠다.
-왜? 쉬어가려고? 내가 운전할까?
-아니, 시동이 저절로 꺼졌어요. 엑셀레이터가 밟히지 않아요. 연료가 올라오지 않는 거 같아요.
-잠깐만!
다시카가 내리고 내가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는 바로 키를 넣었다. 차는 낄낄거리며 시동모터는 돌아가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도 없는 이 초원 한가운데서 차량고장이라니 이럴 경우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가 얼마나 다렸지?
-한 시간 가까이 달렸을 걸요.
보닛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가솔린엔진에 문외한인 내 육안으로는 고장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디젤엔진이라면 포클레인 운전을 오래 한 까닭으로 그 원리를 알기에 응급처치를 할 수가 있지만 토요타에서 나온 이 짚은 가솔린 엔진이라 아무리 훑어보아도 그 원인을 찾을 길이 없다. 퓨즈 박스를 열고 퓨즈가 나간 것이 없는지 확인을 했지만 퓨즈는 별탈이 없었다. 방법이 없다. 정비사를 보내라고 하는 수밖에, 그러나 정비사를 보내라고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전화는 스카이텔이라 초원에서는 터지지 않고 몽고전화인 모비콤이 초원에서도 통화가 가능한데 하필이면 그 곳에서는 불통인 것이다.
-안 되겠다. 저 언덕 위에 올라가 보자.
바로 앞에 보이는 언덕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바로 앞에 보인다고 해도 걸어서 이십 분이다. 언덕에 올라가니 모비콤인 다시카의 전화에 안테나의 그림이 나타났다. 전화가 된다는 얘기다. 그나마 다행이다. 조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설명하고 정비사를 보내 달라고 했다. 조 사장은 알았다고 했다. 여기서 못 고치면 초이르까지 견인해야한다는 생각에 다시 전화를 걸어서 견인할 수 있는 와이어로프를 챙겨서 보내라고 했다. 다시카는 언덕을 내려오면서 설명했다. 겨울에 이런 일이 닥치면 꼼짝없이 얼어 죽는다고, 그래서 몽고사람들은 겨울에는 한 사람이 볼일이 있어도 짚 차 두 대에 네 명이서 동행한다고 했다. 누누이 들은 말이지만 그 말을 들을 때는 그르려니 했지만 차가 고장 나고 보니 실감이 난다. 영하 사십오 도까지 내려가는 벌판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거기다가 전화까지 되지 않으면 기다리는 건 동사뿐이리라. 말로 들을 때는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정말이지 상상이 가능한 부분이다. 우리가 전력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렸으니 정비사가 화물차를 끌고 오려면 적어도 세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에서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참 하릴없는 기다림이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다. 철길이 보이는 쪽으로 오라고 했으니 길이 엇갈리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힘들어 하자 다시카는 나를 보고 차에 들어가서 한 숨 자두라고 했다. 나는 고장 난 차에 올라 의자를 젖히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이런 일을 당해보는 것도 몽고를 알아 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그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기다린 지 두 시간이 좀 넘어서자 멀리 언덕 아래 보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차가 있었다. 분명히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리 차가 맞다. 1톤 정비차량이 아니라 5톤 덤프차다. 엊그제와 어제 이틀 동안 발전기를 싣고 물을 퍼기 위해 내가 데리고 다니던 트럭이다. 우리 차를 보고 풀밭에서 내린 사람은 정비사가 아니라 우리 현장에서 나이가 제일 많다는 발전기 겸 5톤 덤프기사였다. 그는 조수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나이는 육십 대지만 얼굴을 보면 칠십이 넘어 보인다. 몽고 사람들은 다 그렇다. 같은 나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보다 거의 십 년은 더 들어 보인다. 혹독한 기후에 고생을 많이 한 까닭이다. 그는 걱정 말라고 말하고 보닛을 열고 이곳저곳 살피더니 5톤 덤프 연장통에서 공구를 챙겼다. 연장통을 보니 웬만한 정비공장의 공구만큼 들어있었다. 구소련 시절부터 운전과 정비로 뼈가 굵었다는 그는 일단 연료가 올라오는지 연료라인을 풀어서 확인하고 그 다음에 점화플러그에 불꽃이 튀는지 확인했다. 모두 이상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타이밍벨트가 문제인 것 같다며 타이밍벨트 커버를 열었다. 그곳은 공구가 들어가지 않도록 틈이 없어 커버를 여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나도 그 부분이 의심스러웠다. 한국에서는 10만 킬로미터를 타면 정비사들이 타이밍벨트를 갈라고 권유한다. 그렇지만 이 토요다 짚은 내가 중고로 산 지 오 년이 넘도록 타이밍벨트를 한 번도 갈지 않았다. 모두가 내 불찰이다. 커버를 열어보니 예상대로 타이밍벨트가 터졌다. 그는 웃으면서 이것이 문제라고 했다. 방법이 없다. 초이르까지 가더라도 타이밍벨트까지 정비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타이밍벨트는 그냥 바꾸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인치를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엔진의 폭발순서가 제대로 맞아 차가 떨리지 않는 것이다. 차를 견인하기로 했다. 와이어로프를 꺼내 견인하여 고리에서 로프가 빠지지 않게 제대로 묶고 출발했다. 서둘러도 날이 저물기 전에 울란바트르에 도착할지 의문스러웠다. 앞 차는 늙은 정비사와 조수가 교대로 운전하고 뒤차는 다시카와 내가 교대로 운전하기로 했다. 앞 차도 마찬가지겠지만 끌려가는 차도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절한 차량 간격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내리막에서는 브레이크를 밟아주고 오르막에서는 앞차가 힘들지 않게 브레이크를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견인 고리가 조수석 쪽에 붙어 있는 까닭에 너무 가까이 붙으면 와이어로프가 끌려가는 차 앞바퀴에 감길 수도 있는 것이다.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시동이 꺼져 있으므로 브레이크를 밟아도 힘이 들어가고 핸들을 돌리는데도 뻑뻑한 게 잘 돌아가지 않는다. 차를 세울 적에 앞 차는 비상등을 켜기로 하고 뒤차는 경음기를 울리기로 약속하였다. 앞 차를 운전하는 늙은 정비사가 워낙 베테랑이라 초원에서는 앞차가 일으키는 먼지를 뒤집어 쓸까봐 먼지가 나지 않는 풀밭으로 끌고 가는 배려를 해주었지만 오르막이나 내리막에서는 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 때 내뿜는 앞차의 매연과 먼지는 어디로 들어오는지 초이르에 도착하고 나니 흙먼지에 머리가 뽀얗고 목이 칼칼할 정도였다. 초이르에서 앞 차의 기름을 넣고 양고기 덮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조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트럭을 울란바트르까지 견인하고 내일 가스를 채워서 실어 보내겠노라고 했다. 기지국이 있는지 초이르에서는 스카이텔도 통화가 가능했다. 늙은 정비사는 전화를 하고나자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다. 전화로 보고를 하지 않고 나가면 목이 잘린다고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늙은 정비사는 내내 보고 없이 초이르까지 오는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울란바트르까지 남은 거리는 340킬로였다. 길이 멀다. 우리는 숟가락을 놓자 바로 출발했다. 어둡기 전에 울란바트르에 도착해야 한다. 날라흐까지는 길이 한산하지만 거기서부터 울란바트르까지는 길이 복잡하다. 견인하는 차인 줄 모르고 추월하다가 중간에 끼어드는 차가 생긴다면 대형사고로 이어진다. 우리는 길가에 넓은 공터를 만나면 차를 세워 교대로 운전대를 잡았다. 쉰 곳이라고는 날라흐 도착하기 전에 작은 가게가 있는 마을에 서서 물을 몇 병 사가지고 입술을 축여가며 긴장을 해소하고 길을 재촉했다. 견인차량이 달릴 수 있는 최고의 속도였다. 얼마나 긴장하면서 운전을 했는지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었다. 참으로 지루하고 먼 길이다. 너무 힘이 들어 중간에 차를 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 불쑥 일었다. 날라흐를 지나니 저녁 아홉시가 넘었다. 어둡기 전에 울란바트르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를 이렇게 끌고 그 복잡한 울란바트르 시내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다시카가 자기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마중을 나오게 했다. 동생이 잘 아는 정비사가 까쪼르트 입구에 살고 있다고 했다. 까쪼르트 입구에 도착하니 동생이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우리는 그 동생이 일러주는 곳으로 따라가 정비사의 집 마당에 차를 세우고 차에 실린 가스통을 트럭으로 옮겨 실었다. 그리고 트럭을 회사로 보내고 남은 짐을 동생 차에 옮겨 실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시카 집에 도착하여 샤워부터 하고 바아기가 챙겨주는 저녁을 먹으며 보드카를 한 잔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너무 피곤한 까닭인지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초원의 그 흙먼지와 앞 차가 내뿜는 지독한 매연이 얼굴을 뒤집어씌우는 듯 했다.
다음날 새벽에, 새벽이라 해도 여덟 시가 넘어서 우리는 견인차량을 불러서 차가 있는 곳으로 가서 차를 시내에 있는 정비공장에 집어넣었다. 두어 시간 기다린 끝에 타이밍벨트를 교체하고 회사로 나갔다. 주기장으로 사용하는, 천 평이 넘는 회사의 마당은 중기들이 몽땅 빠져나가고 텅텅 비어 있었다. 다만 어제 같이 고생한 늙은 정비사가 벌써 가스통에 가스를 채워서 초이르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빈 마당에 그 차 한 대와 사무실 앞에 승용차 두 대만 서있었다. 나는, 이름을 벌써 잊은 그 발전기 기사에게 다가가 어제 고생했다면서 만 투르럭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억지로 주머니에 찔러 주고는 사무실로 들어가 에어마켓에 전화를 걸어 비행기 티켓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예상대로다. 티켓이 없다. 선교사들과 대학생들, 또 다른 봉사단체가 그렇게 많이 들어오는데 비행기 표가 있을 리가 없다. 여름이면 비행기가 매일 두 대씩 떠도 자리가 없다. 일단 웨이팅을 걸어두었다. 이름과 여권번호를 전화로 일러주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오늘이 될 지 내일 비는 자리가 생길지 아니면 다음날이 걸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 때부터 따분한 시간이 시작된다.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운이 좋았다. 오후 네 시가 넘어서자 에어마켓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밤에 출발하는 대한항공에 자리가 하나 비었다는 전갈이 왔다. 이 이사와 마지막으로 회의를 하고 나는 다시카를 데리고 득달같이 에어마켓으로 달려가 티켓팅을 했다. 그리고 숙소인 다시카 집으로 가 가방을 챙기고 짐을 쌌다. 밤 열한 시 이십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아홉 시쯤 바아기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으로 나갔다.
약하게 선풍기를 돌렸지만 자고나니 등에는 땀이 젖어 있었다. 혼몽한 가운데 여기가 몽고인지 한국인지 잠시 헛갈렸다. 한 낮의 더위가 여간이 아니다. 내가 깬 기척에 아내가 서재의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몸이 무겁다. 아내는 누룽지라도 좀 끓여줄까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초이르에서 그렇게 떨다가 너무 더운 곳으로 오니 몸이 적응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자고나도 개운함이 없다. 아내는 좀 더 쉬라며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아내가 나간 문을 바라보는데 초이르의 초원 그 외통수 길과 초원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참 지독한 여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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