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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SCP2/2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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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묵상글
1차(0625. 22:40), 2차(05:12), 3차(11:00).
6월 26일 묵상글, 25일 22시 4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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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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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8,1–4
나병 환자는 그 시대에
공동체에서 가장 멀리 밀려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만지려 하지 않았고,
그 자신도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용기를 내어 주님께 다가와 엎드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짧은 청원에 담긴 믿음과 겸손에 주목합니다.
그는 주님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고자 하시면” 하며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깁니다.
아우구스티노에게 이것이야말로 바른 기도입니다.
내 뜻을 관철하려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믿으며 그분의 뜻에 자신을 여는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는 대목입니다.
말씀 한마디로도 고치실 수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굳이 손을 내밀어
아무도 만지지 않던 그 몸에 손을 대십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여기서
우리의 비참함에까지 몸소 내려오신 말씀,
곧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봅니다.
그 손길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도리어 만지는 그 자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교부들은 나병을 죄의 표상으로도 읽었습니다.
죄는 우리를 하느님과 이웃에게서 갈라놓아
‘영혼의 나병 환자’로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자리에까지 손을 내미시어
우리를 다시 깨끗하게, 다시 ‘우리’ 안으로 부르십니다.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는 말씀은
곧 공동체로 돌아가라는, 회복과 재일치의 명령입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평화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평화는 깨끗한 이들끼리의 평온이 아니라,
밀려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다시 공동체로 품어 안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손길은 때로 오래 참는 인내를 요구하지만,
바로 그 인내가 갈라진 ‘우리’를 다시 잇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하고자 하시면” 하고 주님의 뜻에 나를 여는가?
나는 누군가를 ‘만질 수 없는 이’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밀려난 이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가?
나는 내 안의 ‘영혼의 나병’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가?
주님,
당신의 능력을 믿으며 당신 뜻에 저를 맡기게 하소서.
아무도 만지지 않는 이에게 손을 내미신 당신처럼,
저도 밀려난 이에게 먼저 다가가게 하시고,
제 안의 나병까지 당신 손길로 깨끗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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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살면서 우리는 ‘당황(唐慌)’할 때가 있고, 때로는 ‘황당(荒唐)’할 때가 있습니다. 당황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 갑자기 생겨서 마음이 급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황당은 그보다 더 깊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고, 현실 같지 않아서 말문이 막히는 상황입니다. 당황은 잠시 정신이 없는 상태라면, 황당은 삶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경험일 수 있습니다. 달라스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이 그랬습니다. 원래는 아침 7시 30분 비행기였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취소되었습니다. 다시 예약한 비행기도 취소되었습니다. 공항에서 기다리면서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일정은 꼬이고, 마음은 조급해졌습니다. “오늘 갈 수는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행히 오후 5시 30분 비행기를 탈 수 있었고, 처음에는 경유 편이었는데 오히려 직항편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감사한 일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미국 성당은 사제가 부족하고 고령화되면서 몇 개의 본당이 합쳐지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있던 브루클린 교구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 공동체가 이웃 본당과 합쳐지면서 본당 신부님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북미주한인사제 모임에서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파견되어 온 첫날 교구청에 갔다고 합니다.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 본당은 교구 방침에 따라 우선 매각 대상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새로운 사목을 꿈꾸며 왔는데 첫날부터 본당이 없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다행히 교구에서 한국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성당을 알아보고 있었고, 더 안전한 지역의 성당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방향이었지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우리 삶에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갑자기 회사가 문을 닫습니다. 건강검진 결과를 들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병이 발견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평생 모은 돈이 경제 위기로 흔들립니다. 자녀의 문제, 부부의 갈등, 인간관계의 아픔도 있습니다. 당황스러운 일도 있고, 황당한 일도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모든 것을 잃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단순히 당황한 정도가 아닙니다. 황당함을 넘어서 절망의 상황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인가?”라는 생각까지 들었을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병만 앓은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쫓겨났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했고, 미래를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인생의 하늘이 무너진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의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미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 순간 그의 삶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인은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황당한 일을 겪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당황과 황당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계획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그 솟아날 구멍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 구멍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때로는 비행기가 두 번 취소되어도 결국 직항편이 열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본당이 없어질 위기 속에서도 더 좋은 길이 준비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눈물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병환자처럼 “주님, 당신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당황의 순간도 있고 황당의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오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의탁하여 새 삶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의탁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막힌 길에서도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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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2열왕 5,1-27),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13,45-46)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했고,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도 없었으며,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민수 5,2-4).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자기에게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지만,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때문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복음>은 이 처럼, 규정을 제시하기보다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레위 14,46).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접촉하시지만,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규정보다도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은 성모님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고,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이루소서.
오, 주님! 당신이 원하신 것을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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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 뒤에 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따르지만, 예수님의 눈길은 한 나병 환자에게 향합니다.
고대의 ‘나병’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질병의 수준에서 이해되지 않습니다. 레위기 13-14장이 서술하듯 나병 환자는 격리되고 소외되는 것을 참아야 하였고, 공동체 밖으로 밀려나 존재 전체가 부정당하고 고립되어야 하였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다가와 절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이 고백은 그저 치유를 바라는 요청이 아닐 것입니다.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다시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불리고 싶다는 간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십니다. 그 접촉은 예수님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었지요(레위 5,3 참조).
사회가 부정하다 여긴 그곳에 예수님께서는 과감히 함께하셨고, 부정이 전염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에게서 깨끗함이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위험이 아니라 회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율법이 정한 절차에 따르도록 보내십니다.
이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산상 설교의 선언을(마태 5,17 참조) 증명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다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8,4)라는 당부는 묘한 긴장을 남깁니다. 많은 군중 사이에서 예수님의 치유는 소문으로만 머물기보다는 서로를 향한 인정과 용서와 화해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저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면 됩니다. 마음을 열기보다 말만 앞세운다면 서로가 야속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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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희망은 훈련입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희망은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희망은 하나의 영적 훈련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고난의 때의 희망
희망은 훈련입니다!
2026년 6월 25일 목요일
조직가이자 활동가인 마리암 카바(Mariame Kaba)는 희망을 하나의 영적 훈련으로 성찰합니다:
저에게 희망은 슬픔이나 좌절, 분노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감정들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희망은 감정이 아니에요. 희망은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희망이 하나의 훈련이라는 생각은 제가 오래 전 한 수녀님께 들은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세를 이미 현재에 살아간다는 태도는 일종의 도피일 수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땅에서 세상 안에 머물며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수녀님이 말씀하신 희망은 매일 실천되는, 뿌리 깊은 희망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오래 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 하느님! 이것은 제 삶의 철학으로 다가옵니다. 희망은 하나의 훈련이며, 우리는 그것을 매일 실천해야 합니다."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절망하기 쉽습니다. 모든 것이 늘 나쁘게만 보이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지요.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나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선택하고,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선택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신뢰할 수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들을 신뢰하기로 선택합니다.
자유주의적 복음운동가로 알려져 있는 짐 월리스(Jim Wallis)는 희망이란 "증거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며, 그 증거가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완전히 이해되는 말입니다. 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정의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거스르는 사람들보다 더 많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카바는 단기적인 사고방식이 우리로 하여금 희망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저는 긴 안목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저는 이미 거대한 전사가 앞서 있었고, 또 그 뒤에 이어질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속에서 저는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저는 그 끝을 볼 만큼 오래 살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깨달음이 나를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이끌어 줍니다. 제가 하는 일이 세계 역사 속에서는 아주 미미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한두 사람에게라도 의미가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히 기쁩니다.
저는 많은 젊은 조직가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는 늘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여러분의 시간표는 운동이 전개되는 시간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시간표는 부수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간표는 오직 여러분 자신의 성장과 삶을 기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우주가 살아온 삶,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삶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가 거대한 질서 속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될 때, 오히려 그것이 자유가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자유 속에서 우리는 필요한 일을 실제로 해낼 수 있고, 자신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수십 년 전, 제가 가톨릭 신앙 안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리처드 로어의 『아담의 귀환』이라는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그의 많은 책을 읽었고, CAC를 방문했으며, 그의 ‘매일 묵상’을 읽어왔습니다. 저의 가톨릭 정체성은 더욱 깊어졌고,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방식에 축복처럼 작용하고 있습니다.
— Bill M.
References
Mariame Kaba, We Do This ‘Til We Free Us: Abolitionist Organizing and Transforming Justice (Haymarket Books, 2021), 26–2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yu Ha,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희망과 우리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시간에 연결되고자 하는 깊은 열망으로 손을 뻗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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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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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26 05:07
- 주님 주시는 모든 것을 선으로.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나병환자의 이 말은 주님께 대한 그의 두 믿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는 주님의 능력-깨끗하게 하실 수 있음-에 대한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선의-하고자 하시면-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치유를 받으려면 두 믿음이 필요한데
전능하신 주님을 믿는 우리에겐 치유의 능력을 믿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선의를 믿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인데
사실 의외로 주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님께서 탈렌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바가 있듯이
많은 사람이 조금 주고 많이 요구하시는 모진 분이요,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로 주님을 믿습니다.
설사 주님을 선하신 분으로 믿긴 하더라도
주님의 선하심이 내가 생각하는 선과 다르기에
주님의 선하심을 전폭적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견해 차이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들이 지금 시험에 붙는 것이 선인데
공부 안 한 아들이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선이라고 하시고,
우리는 꽃길 걷기를 좋아하고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선이라고 하시지요.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자기가 생각하고 원하는 선을 내려놓고
무엇을 주시든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선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나병을 고쳐주십사고 청하지만 고쳐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다시 말해 계속 나병을 앓으며 살아도 된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고
그래서 고쳐주지 않으셔도 그것이 선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병을 이미 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며,
적어도 꼭 벗어나야 할 악으로 그는 생각지 않는 것이고
더 나아가 나병으로 인해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나병환자처럼 되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하며
주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선으로 받아들이는 여생이 되길 비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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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늦게 피는 꽃처럼 새로 태어나는 믿음은 오래갑니다.
늦게 피는 꽃이 오래 갑니다. 우리의 믿음은 늦었더라도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실이 믿음의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익숙함은 복음을 낡은 관습으로 만들고, 습관은 살아 있는 관계를 형식으로 바꾸며, 열심은 때로 사랑보다 의무를 앞세우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종교적 지식이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니코데모에게 "너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교리를 하나 더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방식으로 나 자신과 이웃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시간에는 늦음이 없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늦게 피는 꽃이 오래 갑니다. 충분히 뿌리를 내린 꽃은 쉽게 지지 않고 오래도록 향기를 남깁니다. 너무 일찍 피어난 꽃은 화려할 수는 있어도 오래가지 못하지만, 긴 기다림 속에서 생명의 힘을 모은 꽃은 계절이 깊어질수록 더욱 아름다운 여운을 남깁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늦게 피어난 믿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수많은 실패, 눈물과 침묵을 통과한 믿음은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품어 주고, 서두르기보다 기다려 주며, 자신의 뜻을 주장하기보다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는 법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공생활은 겨우 삼 년이었지만, 그 삼 년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은 나자렛에서의 서른 해 숨은 삶이었습니다. 세상은 공생활을 기억하지만 하느님은 숨은 시간을 먼저 준비하셨습니다. 목수의 손으로 나무를 다듬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이웃들과 함께 살아간 평범한 하루하루가 십자가를 견딜 힘을 길러 주었습니다. 세상은 결과를 보지만 하느님은 과정을 먼저 빚으십니다. 사람은 꽃이 피는 순간을 기억하지만, 하느님은 뿌리가 자라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짧은 공생활은 이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류 역사 안에서 가장 오래가는 믿음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오래가는 것은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믿음의 기초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것보다 더 깊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나 자신을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예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할 때에도 먼저 용서하시고, 내가 나를 믿지 못할 때에도 먼저 믿어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출발이며 모든 믿음의 기둥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먼저 사랑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변화되어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에 변화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 사랑은 결코 나를 소유하거나 지배하려는 사랑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를 끝없이 내어주시며 생명을 흘려보내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도 언제나 선의 흐름으로 나를 향합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은 서로를 붙잡아 두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며,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관계를 살리고 생명을 일으키며 자유를 자라게 합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 사랑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흐르고 있는 그 사랑을 신뢰하고, 그 흐름을 막지 않으며, 나 자신을 그 사랑 안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과정의 선이 결과의 선으로 흘러가도록 허용하는 용기입니다. 우리는 당장의 결과를 보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판단하려 하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과정을 통하여 결과를 빚으십니다. 씨앗은 땅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싹을 틔우고, 뿌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깊이를 더한 뒤에야 꽃을 피웁니다. 하느님의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해되지 않는 시간, 침묵뿐인 기도, 실패처럼 보이는 순간들까지도 하느님께서는 선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으로 사용하십니다. 믿음은 그 과정을 견디며 하느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진실은 평온한 날보다 상처받는 날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일이 내 뜻대로 풀릴 때는 누구나 하느님이 선하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를 받고, 배신을 당하고, 애쓴 만큼 인정받지 못하며,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을 때에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놓지 않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고통이 없는 삶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선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방해받고 상처받는 자리에서조차 하느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반드시 관계 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은 관계이시며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되다면 우리의 관계도 달라져야 합니다. 난폭한 아버지에게서는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자녀를 자신의 욕망과 기준에 맞추어 끊임없이 조종하려는 어머니에게서도 하느님의 사랑은 드러나기 어렵습니다.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곳에는 두려움이 자라고, 통제로 사람을 붙잡는 곳에는 자유가 사라지며, 소유하려는 사랑은 결국 생명을 메마르게 합니다. 하느님은 결코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억지로 따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다리셨고, 존중하셨으며, 자유롭게 초대하셨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배반하는 제자도, 의심하는 제자도, 도망치는 제자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참된 권위는 지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에서 나오며, 참된 믿음은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바꾸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에 변화되어 그 사랑이 나를 통하여 흘러가도록 허용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나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이 내 삶을 통과하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내가 사라질수록 그분의 사랑은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내가 비워질수록 그분의 생명은 더 자유롭게 흐르며, 내가 내려놓을수록 하느님의 나라는 더 깊이 자라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평생 배우고 살았던 내적 가난의 길이며, 작음의 길이고, 형제성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희망할 수 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새로운 믿음을 피워 내고 계십니다. 늦게 피는 꽃이 오래가듯, 늦게 익은 믿음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향기를 남깁니다. 그리고 그 향기는 말보다 관계 안에서 드러납니다. 기다려 주는 한마디, 용서하는 침묵, 상대를 존중하는 눈빛,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 안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하느님의 얼굴을 만나게 됩니다. 늦게 피는 믿음은 늦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시간을 닮은 믿음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은 오랫동안 시들지 않고, 관계 안에서 생명을 꽃피우며,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깊은 향기로 세상을 살리는 아름다운 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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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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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뜨거운 하느님 사랑의 불꽃에 순식간에 소멸되어 버린 상처!
젊은 사제 시절, 아이들 생활 시설에서 생활했습니다.
당시 소년원에서, 분류 심사원에서, 법원에서 수시로 저희에게 아이들을 보내주셔서, 기숙사는 아이들로 넘쳐났습니다.
단체생활이다 보니 별의별 전염 질환들이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옴이었습니다.
한방에 옴 걸린 아이가 들어오면 순식간에 전염됩니다.
어쩌다 보니 저도 옴에 걸렸는데,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가려운지 밤새 피가 나도록 긁고 또 긁었습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손가락 하나 하나에 붕대를 감고 잠자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기에 나중에는 옴 방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격리 수용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그렇게 밤새 안절부절 못 하면서 나병 환자들이 겪었을 고통에 잠시나마 동참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가장 가난했으며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이 바로 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번번한 치료제도 없던 당시 매일 썩어 문드러져 가는 자신의 환부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는 것은 참으로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고통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었습니다.
당시 나병을 하느님의 벌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더 이상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 밖으로 나가 동굴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과 세상으로부터 격리가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는 보아하니 꽤 중증 환자였습니다.
그는 이미 오랜 세월 나병에 시달려왔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치유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나병 환자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로구나.
목숨을 한번 걸어보자.’ 하면서 율법규정까지 어겨가면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치유되고 싶은 심정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얼굴을 땅에 대고 완전 납작하게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정말이지 온몸과 마음을 다 담아서 절박하게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몸이 종기로 뒤덮인 한 가련한 인간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하느님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나병 환자가 지니고 있었던 수많은 죄와 상처, 종기, 고름은 뜨거운 하느님 사랑의 불꽃에
모두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태초의 보송보송한 애기 피부로 아름답게 재생되었습니다.
결국 죄인인 우리, 결핍과 상처투성이뿐인 우리 인간이 살길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접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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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태 8,1-4)>
1)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이 불치병으로 생각했던 병들과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장애들을 고쳐 주신 일들,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죽은 이를 살리신 일들은 모두, 당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을 드러내신 ‘표징들’입니다.
이 말은 11장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연결됩니다.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2-6)”
세례자 요한의 질문은, 그 자신이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 한 질문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으로 해석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예수님께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직접
보고, 예수님 말씀을 직접 들으라고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면, 예수님을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오신 메시아’로 믿고 있었는데(마태 3,12), 예수님께서 심판하는 일은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는 일만(자비를 베푸는 일만) 하시니까
심판하는 일은 언제 하시느냐고 물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요한 3,17).
그 ‘구원’은 죽은 다음에 얻게 되는 구원만은 아니고, 지상에서 사는 동안 겪는 온갖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되는 구원도 포함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덕분에 치유되고 해방되면서 구원을 받게 되는데, 물론 그것은 영원한 구원의 ‘시작’일 뿐이고, 구원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일은,
그 자체로 복음 선포가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자비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되고, 그 나라를 향해 걸어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2) 2절의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좋은 쪽으로 해석해서, 예수님 뜻에 순종하겠다는, 또는 예수님 뜻에 전적으로 자기를 맡기겠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의 뜻이(의향이) 어떤지를 모르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고,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아직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은 무슨 병이든 다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을 들어 주실지, 어떨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3절의 “내가 하고자 하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병자를 고쳐 주는 일은, 병자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원하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예수님께서 원해서
하신 일이고,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복음서에는 사람들이 청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기적을 일으키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나인 고을의 어떤 과부의 외아들’의 경우에,
죽은 그 사람을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청한 사람이 없었는데도, 예수님께서 먼저 그 과부를 가엾게 여기셨고, 그 젊은이를 살리셨습니다(루카 7,13-15).
‘벳자타 못 가의 병자’의 이야기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을 몰랐고, 몰랐으니까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가엾게 여기셨고,
고쳐 주셨습니다(요한 5,6-9).
3)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를
모두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믿으니까 무엇이든 청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불가능한 일로 보이는 일이라도
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자비를 믿으니까 다른 것을 걱정하지 않고 예수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거절당할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치료비를 걱정할 필요도 없이 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자비’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고, 당신의 자비를 그렇게 우리에게 그냥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고, 모든 것을 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0,8).
신앙생활은 주님의 자비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그 자비를 그대로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베풀어주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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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오늘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도전적 초대!~~
오늘 복음 내용은 산상설교를 통해 주님께서 가르치신 이론적 가르침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특별히 우리 모두에게 더 큰 도전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삶으로 드러내라!"는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 8장 1-4절의 나병 환자 치유 이야기는 산상설교(마태 5장~7장) 직후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산상설교는 주님께서 펼치신 이론적 가르침이었고, 나병 환자의 치유는 그 가르침의 실제적 적용이었습니다.
산상설교의 시작에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마태 5,1).
그리고 산상설교의 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마태 8,1).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분이 말씀하신 높은 가르침이 실제 삶에서도 가능할까?"
그리고 그들이 목격한 장면은 바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오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병은 당시 가장 두려운 질병으로, 사회에서 격리되고 성전에도 들어갈 수 없는 '살아있는 죽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충격과 불쾌함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저분이 과연 저 두렵고 더러운 나병 환자를 만지실까?"
그러나 주님은 말씀만 하신 분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신 분이셨습니다.
유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습니다. "악성 피부병(나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 13,45-46).
따라서 어떤 나병 환자도 정통 랍비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지만, 복음 속의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담대히 다가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특별한 일이었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그의 몸에) 손을 대셨다…." 이 만짐은 그의 병을 치유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단순히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 나병 자체라는 절망적인 자기 인식까지 치유해 준 것입니다. 그 만짐은 그의 고립과 외로움, 절망, 하느님께 저주받았다는 생각까지 치유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께서도 '부정한 이'가 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 안에서 우리는 자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말씀만 하신 분이 아니라, 당신 말씀을 구체적인 삶에서 실현하신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보다 낫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5,20) 하고 말씀셨는데, 실제로도 율법의 규정을 넘어 나병 환자를 만지시며 치유하셨습니다(마태 8,3).
또 그분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하지 마라."(마태 6,1) 하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도 치유받은 환자에게 조용히 사제에게 가서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마태 8,4).
그리고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 하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도 나병 환자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자비로써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주님은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는 참된 스승이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곧 놀라운 자비와 사랑의 행위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도전적인 초대입니다. 그 도전적인 초대란 우리가 작은 방식이라도 말씀을 전하는 '복음의 선포자'가 되고, 나아가 사랑과 증거의 삶으로 말씀을 살아내는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분 치유의 손길을 느끼고 그 따스한 손길을 통해 우리 내면의 "나병 같은" 어두움과 상처를 치유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히 '말하는 데'만 머물지 않고 그 '말을 구체적인 삶에서 구현하는 증거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용서와 치유의 손길을 매 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펼쳐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처럼 예수님의 그 크나큰 자비와 사랑을 굳게 믿고, 우리의 어둠과 죄,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과 자비의 주님, 저로 하여금 당신께서 사랑과 자비의 손길로 제 마음과 삶 속의 '나병 같은' 어둠과 상처를 치유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늘 의식하여 마음 깊이 새기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더더욱 굳건하고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감으로써 당신이 살아계신 구원자이심을 제 주변에 드러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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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6.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8,1-4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능력’과 ‘뜻’ 사이에 보이는 큰 간극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부족한 우리의 이성과 지식으로는 도무지 그 간극을 메우기가 어렵지요. 주님께서 당신 입으로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그러하시듯, 주님께서도 당신이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두고 ‘전능’하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왜 고통과 슬픔이, 부족하고 아쉬운 것들이 이리도 많을까요? 수많은 신앙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고, 주님께서도 분명히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아신다고, 그러니 그분께 청하라고 하셨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과 뜻 사이의 간극을 만드는 건 주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능력을 갖고 계신 주님이 반드시 우리가 당신께 청하는 것들을 들어주셔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기도의 의미가 ‘소원성취’에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 우리의 고집이 주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져 그분과 우리 사이에 간극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라, 기도를 통해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워지는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그저 내 소원을 이뤄주는 ‘도깨비 방망이’정도로 여기면 그분과 우리 사이에 인격적 친교가 맺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건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이 당신 마음에, 우리 뜻이 당신 뜻에 합쳐져 우리가 당신과 참된 일치를 이루기를, 그 일치를 통해 당신께서 누리시는 참된 영광과 행복을 함께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는 이런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다가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병자들은 주님을 만나면 자기 병을 좀 고쳐달라고 ‘청원’을 하기에 바빴지만, 그는 주님을 만나 자기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즉, 주님께는 ‘하고자 하는’ 뜻과 ‘하실 수 있는’ 능력이 갈라짐 없이 완전히 하나를 이루고 있음을 믿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은 원하는 그대로 이룰 능력이 없으니, 그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자신이 바라는 뜻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과 일치되기를 고대하는 것 뿐임을 겸허한 자세로 고백하는 겁니다.
이는 마치 운전자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내비게이션이 인도하는대로 충실히 따라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 속 나병환자는 그저 자기 병이 낫기만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사는 게 힘들고 괴롭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일시적 위로를 찾으려 들지 않고, 자기 뜻이 주님 뜻과 합쳐져 신앙의 길을 충실히 걸을 수 있기를, 그렇게 하느님 나라라는 최종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지요. 우리도 이 나병환자의 모습을 닮아야겠습니다. 주님께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것저것 요구할 생각만 하지 말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며 그분의 뜻에 내 뜻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데에 한 눈 팔지 말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그곳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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