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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글러브 중독자」해설
바빌로니아 유폐 또는 마경덕의 도시
변학수 (문학평론가, 경북대 교수)
나는 마경덕의 시를 읽으며 그의 시가 가진 이중성, 그리고 그 시가 주는 복합감정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그의 시에는 기억 속의 자연이라는 공간과 현재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도시라는 공간이 중첩되어 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자연의 상관물인 나비, 천변, 나무, 꽃, 상추, 저녁, 달빛, 후박나무, 직박구리, 우듬지, 모래밭, 떡갈나무, 뻘밭, 냉이, 개나리, 향나무, 풀벌레, 잡초, 귀뚜라미, 바람개비, 기러기, 노루, 외딴집, 추녀, 나팔꽃들은 어떤 맥락 속에서 문장의 주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흩어져 있거나 갇혀 있다. 이런 심상들은 이 새 시집에서 루카치가 말한 “별빛이 그 길을 환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는 완결성의 시대나 선험적 고향 상실의 시대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것은 이제 파편화되고 왜곡되고 그저 흔적으로만 존재하는 그런 공간이다. 이런 공간을 나는 도시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런 마경덕의 도시는 직접성을 전제하는 자연공간과는 달리 익명적 공간이다. 그곳은 한편으로는 시민적 공론장과 개인의 자유, 평등함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폐, 무관심, 고독, 범죄, 불안을 동반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시인이 이런 이중적 공간에서 문학적 성취를 이루는 동안, 나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빌로니아 유폐(바빌론 유수(幽囚)라고도 한다)를 떠올리게 되었다.
- 유폐의 현장
바빌로니아는 기원 전 3000년경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기원전 626년 바빌로니아 왕조가 열린 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개역성서의 느부갓네살)에 이르러 바빌로니아의 황금시대를 이룬다. 그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유대인들을 바빌론에 끌고 갔다. 고대 함무라비 왕 이래 몰락했던 바빌론은 다시 부흥하여 명실 공히 세계 상업의 중심도시로서 성장하고 유래 없는 번영을 누린다. 나는 마경덕의 시를 읽으며 오늘날 도시인들이 이때 엔게디에서 바빌로니아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삶과 강한 유비추리를 이룬다고 보았다.
횡단보도 앞
속도들이 다리를 뻗고 누웠다
고장 난 신호등에 길이 막혀도 태연한 대명시계점
저 묵언默言을 깨워 값을 지불하는 순간
끝없는 동그라미에 갇혀
죽을 때까지 고된 노역勞役을 치러야한다
소리에 귀가 늙은 사내가
시계를 팔뚝에 묶는 순간, 시간의 노예가 태어났다
세 개의 바늘이 놓친 걸음 허겁지겁 따라간다
―「시간의 방목장」부분
고향 엔게디에 남았던 유대인들은 다윗의 폭포와 사해에서 포도와 고벨화를 땄을 것이지만 바빌로니아의 포로가 된 자들은 “끝없는 동그라미에 갇혀 / 죽을 때까지 고된 노역(勞役)을 치러야” 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방목장”이란 그에게 하나의 아이러니다. 물론 시인이 바빌로니아 유폐를 염두에 두고 시를 쓰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시는 이렇게 곳곳에 유폐의 현장을 담고 있다. 그것도 자발적인 유폐가 아니라「국내산 종업원」같은 은유에서 누설되는 ‘도시유입’과 같은 강제적 유폐다. “꽁치 통조림에는 압축된 바다가 있고”(「압축」), “스타킹에는 [...] 눈 가리고 손을 묶고 비명을 틀어막는 대낮 은밀한 <인질놀이>”가 있으며(「스타킹 놀이」) “지긋지긋한 암 덩어리는 곱게 포장되어 입관을 기다리고 있”다(「입관」) 그곳은 결국「타임캡슐」이고, 「향기 보관소」가 될 뿐이다. 시인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들어간 입으로 배설해야 하는 「꽃병」이고 통조림과 캔 같은 “밀봉된 바다” 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시가 유폐라는 의식의 상관물을 재현하면서 미래의 지향점이 되는 기억공간과 감각하는 현재의 도시 공간이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서로 길항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인의 엔게디는 어디인가? 그는 제1시집 『신발論』에서 바다와 산과 호박과 우물을 노래했다. 그리고 “뭍으로 밀려난 고래들”을 노래하고, 고로쇠나무와 벚나무, 수박밭과 시골집, 텃밭과 애호박을 노래의 선율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그의 기억 공간은 아직 아름다울 수 있었다. “선생님, 저는 제 시가 자연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의 시를 두고 도회시라고 그래요.” 어느 날 시인이 내게 한 말이다. 그렇다. 그의 시는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이름 모를 힘에 의해 끌려가 유폐된 자들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독일의 낭만주의자 노발리스가 말한 것처럼 “늘 고향 길로 향하는 도중에 있다”. 그의 시는 도시라는 유폐된 공간에서 자기를 키워준 엔게디, 즉 고향을 향하고 있는 셈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 성을 중건하였고 신전과 제단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이때 거대한 지구라트도 함께 만들었다. 바빌론 시의 중심부에 있는 마르두크 신의 성역 안에 화려한 청색 벽돌을 구워 탑을 쌓아올렸는데, 고대 전설 속의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이 지구라트는 수세기 전 아시리아인들이 파손한 것을 네부카드네자르의 아버지가 기초를 쌓고, 그 아들이 완성하여 재건한 것이다. 탑은 오늘날 고층빌딩만큼이나 높게 건립되었다. 바빌로니아는 오늘날의 대도시, 뉴욕이나 파리, 서울과 같은 곳보다 어쩌면 더 화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곳에 유폐된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온몸이 입이다
한 입에 우겨넣은 붉은 목 한 다발. 부르르 꽃잎이 떨린다. 잘린 발목에서 쏟아지는 비린 수액, 입안 그득 핏물이 고인다. 소리 없이 생피를 들이키는 저 집요함. 허기진 구멍으로 한 아름 허무를 받아먹는,
식욕과 배설뿐인 캄캄한 구멍은 입이고 항문이다.
―「꽃병」 부분
일반적으로 도시의 문화는 반복 재생산이 그 특징을 이룬다. 대도시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듯 보이나 그것은 투쟁의 공간이며, 자유로운 문화의 다양성이 보장되어 있는 듯 보이나 실제로는 모방과 유행이라는 획일성이 지배하는 곳이다. 마경덕의 시는 여기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필요악이다. 도시에서는 “온몸이 입이다.” 바벨이 함축하고 있는 “입”, 즉 말로 만들어진 그곳에서는 말과 식욕과 배설이 한 군데서 이루어진다. 더 쉽게 말하면, 그곳에서 사람들은 같은 입으로 말하고 오줌 누고 그것을 물로 되받아먹는다. 그가 응시하는 “식욕과 배설뿐인 캄캄함 구멍”은 “입이고 항문”, 즉 욕구와 배설로서 같은 하나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허무”일 뿐이다. 끌려온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헛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70년 대 독일의 흑인 보컬그룹 보니 엠의 <바빌론의 강가에서>란 노래가 생각난다. “바빌로니아의 강가에 / 우리들은 앉아 있었다네 / 그래. 우린 시온을 생각하며 / 눈물을 흘렸지. By the rivers of Babylon / there we sat down / Yeah we wept / when we remember Zion.” 시에서 직접적으로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눈물을 흘리는 마경덕의 도시를 상상할 수 있다. 다만 그는 그의 시온과 엔게디(이곳은 그가 자란 아름다운 곳 여수(麗水)일 수도 있다)를 생각하며 이제 울 수도 없는 처지에 놓였다.
낱장인, 나를 주장할 수 없었어요
여러 겹이 되기 위해
하얗고 캄캄한 세상으로 들어가야 했어요
합류하지 못한 몇 장의 바깥은 밭고랑에 버려진다고 했어요
―「양배추」부분
시에서 표현된 “하얗고 캄캄한 세상”은 도시라는 공간에 대한 모순어법(oxymoron)이다. 이 표현에서는 저 악명 높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나 “아침의 검은 우유”를 노래한 파울 첼란의 「죽음의 푸가」 같은 절박한 심정이 만져진다. 시인이 보는 유폐의 현장은 그가 보는 것보다 우리가 더 많이 보고 그가 아파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그런 유폐의 공간은 우선 푸코가 이야기하듯 감독하기 좋은 판옵티콘(원형 감옥)처럼 만들어져 있다. “다닥다닥 달린 창문을 빠져나와 / 넥타이를 풀고 잠시 숨을 돌리는 곳, 도시의 숨구멍은”(「옥상」) 사실상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의 사람들은“어둑하고 좁은 골목, / 가난의 모서리에 질겨진 울음이 발을 포개고 있다”. (「환영」) 유폐인들의 내면은 더 거칠다. 그는 “홈런만을 요구하는 세상에게 주먹감자를 날려볼까 / 야유를 퍼붓는 관중석으로 강속구를 던져볼까” 생각해보지만 처벌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글러브를 움켜쥐고 부르르 떠는 / [...] 글러브 중독자”가 된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 스스로 “중독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도시 유폐의 현장은 「나비표본 상자」에서 절정을 이룬다.
옷 한 벌을 짓기 위해 평생을 바친 장인들, 날개옷 한 벌을 완성하고 유리무덤에 갇혔다. 입으면 벗을 수 없는, 아름다운 그 옷이 화근이다.
나비는 죽어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
― 「나비표본 상자」부분
유폐인들은 쇼윈도를 응시하지만 사실 쇼윈도가 그를 응시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가 사용한 메타포 “유리무덤”은 그런 쇼윈도의 상징이다. “나비”가 지어 입은 옷이 유폐인들의 일상이라면 그들은 옷을 입어 몸을 감춘다기보다는 오히려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입은 옷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분을 말해주고, 종국적으로 도회적 삶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보여준다. 속이 꽉 찬 사람들이나 자연에 속한 사람들은 옷으로 자기를 포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시에서 나비는 자기가 응시되는 줄 알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말한다. 도시가 만들어내는 눈과 눈의 마주침은 전통적인 사유방식을 포기하게 만들지 않는가!
근대의 시인들은 주체-눈-대상의 관계를 일직선으로 파악해왔다. 그러나 대도시의 문명인은 이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대상이 나를 지각한다”는 파울 클레의 말처럼 “나비”가 나를 지각하는 동시에 ‘유폐인’이 “나비”를 지각하기 때문이다. 파리의 도시민 조르주 뒤아멜은 이렇게 말랬다.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려는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움직이는 이미지가 나의 사유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이제 유폐된 도시인은 “누가 보고 있는지 누가 보여지고 있는지, 누가 그리는지, 누가 그려지고 있는지를 더 이상 알 수 없다.”그러므로 “날개옷 한 벌을 완성하고 유리무덤에 갇힌”나비는 영락없는 유폐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의 유폐는 이외에도 다양한 이항으로 끝없는 만화경을 이룬다.
밀봉된 바다, 무게 400g. 꽁치의 짭조름한 눈물이 캔에 담겨있다. 천사백 원을 지불하면 원터치로 열리는 진공의 바다, 같은 용량의 인스턴트 바다들이 마트 진열대에 쌓여있다.
― 「통조림」부분
빙하에 구멍을 뚫어 빙핵(氷核)*을 채취한 과학자는 기포를 분석했다. 바람은 얼지 않았다. 80만 년 전 남극을 떠돌던 공기가 그 속에 갇혀있었다. 체온이 올라간 현재의 바람은 그때 종족이 다른 낯선 바람을 보았다.
― 「타임캡슐」부분
神은 모래톱 띠를 둘러 펄펄 뛰는 바다를 그 안에 가두고
바다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네
―「어쭈! 저 모래톱」부분
그가 밝힌 도시 이미지의 환등상의 만화경은 환멸의 결정판들이다. 그는 이런 이미지들을 모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빙핵 속에 있는 바람을 탐구하고, 캔에 담겨 있는 바다의 “눈물”을 열고, “모래톱 띠를 둘러 펄펄 뛰는 바다를 그 안에 가두”면서 시적 아우라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상실한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상실한 자만이 그리움을 안다. 유폐의 현장이 그렇다면 유폐된 이의 몸은 어떨까? 시인은 시의 키질을 멈추지 않는다.
- 유폐의 몸
이 시집이 출간되기 전 나는 그의 시를 다룬 적이 있다. 그때 큰 감동으로 다가온 시가 있었는데 바로 「그녀의 외로움은 B형」이란 시다. 도시에서 눈을 떼어 도시인의 부엌으로 들어가 문턱이 될 수 있는 시다.
앞집 렌지후드에서 빠져나온 저녁메뉴와 반쪽 창문에 걸린 거실 표정을 책상위에 올려두고 잠을 설쳤다. 프라이팬과 여자의 관계는 우호적이다. 닭다리튀김, 소시지볶음, 햄, 생선튀김…여자는 늘 프라이팬을 의지한다. 팬은 지나치게 입이 크다. 늘어나는 뱃살과 외로움은 함수관계를 이룬다.
먼저 ‘마른 A형’과 ‘비만 B형’으로 외로움을 분류한다.
소파나 여자의 무릎에서 느릿느릿 기어 나오는 고양이 울음도 B형이다. 두 마리 고양이와 비만형 여자는 24시간 서로를 의지한다. 주방에서 맴도는 고양이의 허기는 여자의 우울증과 비례한다. 거실에서 주방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가면 여자는 프라이팬과 고양이를 붙잡고 있다.
간간히 끼어드는 기침소리, 그 음습한 소리는 주방 반대편에 산다. 문턱을 넘지 못한 누군가 그 방에 단단히 밀봉되어 있다. 여자는 가끔 방문을 향해 프라이팬을 던지며 소리를 지른다. 기침소리에 그녀는 왈칵 고등어통조림처럼 쏟아진다. 마당 늙은 살구나무가 창문을 가리지만 않았다면 나는 그 ‘외로움’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외로움과 프라이팬, 폭식과 허기는 사랑과 동일한가? 나는 쓰다만 리포트를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든다.
- 「그녀의 외로움은 B형」전문
현대 문학이 주체의 몰락과 저자의 죽음을 이야기했다면, 우리는 이 시에서 그 현장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위의 시에“그녀”의 밖에서 물끄러미 응시하고 엿듣는“나”가 모호하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실 이 시에서 주체의 성질을 띠는 화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는 하나 자아일 터, 누가 존재하는지 누가 존재한다고 말하기라도 하는지, 누가 누구에 대해 말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나”가 그냥 “리포트”를 상상하는지 독자로서는 알 수 없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도시는 이제 이미지의 폭주로 인해 사유할 수 없는 공간임을 체현하고 있다. 도시에서는 자연과는 달리 직선적 사유가 불가능하고 인과론적 사유 또한 불가하다. 그러니 자연 “여자”는 누구며 “기침소리”는 누군지 모든 것이 애매하고 모호하다. 어디 그뿐인가.“쓰다만 리포트를 머리맡에 두고 잠든”나와“앞집 렌지후드에서 빠져나온 저녁메뉴”를 엿듣고, “반쪽 창문에 걸린 거실 표정을”응시하는 시인이 동질성을 갖는지도 불분명하다. 정말이지 나는 이 순간, 행간 사이에서 어떤‘두려운 낯설음’das Unheimliche을 경험했다. 나의 산문적 육감은 시인의 운문적 육감에 상응한다. 시 「틈」에서 그 순간을 시인은 이렇게 관찰하고 있지 않는가!
적막을 오래 쓰다듬은 손바닥에 푸른 물이 들었다. 내 오른쪽 어금니처럼 한쪽이 닳아버린, 부르면 혀가 서늘한 적막. 소란한 틈으로 잠깐 뒤태를 보이고 사라진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불쑥 내 몸을 치고 사라지는 그 짧은 1초의 정전停電…내 몸의 플러그가 뽑힌, 그 1초.
떠밀리고 발등을 밟히는 사이, 방심한 내 어깨를 치는 순간, 울컥 혀끝에 닿는 찰나의 암전暗轉. 그는 인파 속에 나를 홀로 세워두고 길을 끌고 흘러간다. 세상과 불통이 되는 그 시간,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타전할 수 없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그 1초는 적막이 나를 다녀간 시간.
후박나무 빈 가지에 걸린 낮달을 보듯 그의 쓸쓸한 이마를 바라보고 싶었다. 계절이 한 페이지 넘어가고 공원 분수에 물이 마를 즈음, 무릎에 원고지를 펼치고 그가 네모난 칸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한동안 그를 오독하였다.
등 떠밀려간 노래방에서 흘러간 노래를 선곡하고 있을 때, 어쩌다 잡은 마이크를 들고 설쳐대고 있을 때, 그를 바라볼 수 없는 난감한 사이, 그 틈으로 반짝 적막은 출몰하는 것이었다.
― 「틈」 전문
한번은 돌아가신지 10년이 넘는 할머니가 꿈에 나타난 적이 있다. 나는 그야말로 식겁을 하였다. 독자들은 가위눌린 꿈을 식겁한다는 말로 표현하는 나를 이해할 것이다. 그 식겁한 경험을 프로이트는 두려운 낯설음(영어로 the uncanny라고 번역함)이라 하였다. 엄마보다 더 다정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꿈에 나타났을 때 느낀 이런 “두려운 낯설음”을 나는 시인의 “비만 B형의 여자”에게서 다시 만난다. 그것이 과연 프로이트의 말대로 친숙한-비밀스런 것에서 heimisch-heimlich 오는 억압의 잔재일까? 나는 모른다. 다만 마경덕의 시를 읽을 때 느끼는 그런 절망감 같은 것은 언젠가 풍성함으로 받아들였고 언젠가 아버지처럼 편하고 어머니처럼 다정했던 사랑 같은 것이었을 게다. 지금은 그런 다정함이“주방 반대편”에서 두려운 낯설음으로 존재하고, “퇴근길 지하철에서 불쑥 내 몸을 치고 사라지는 그 짧은 1초의 정전停電…내 몸의 플러그가 뽑힌, 그 1초”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시는 주문이며 신의 계시이자 예언자의 외침이다. 그러므로 시를 읽을 때는 ‘두려운 낯설음’을 가질 때가 많다. 언젠가는 편안했던 것, 언젠가는 사랑했던 것, 언젠가는 풍요의 화신으로 보았던 고향 엔게디에서 보았던 것들이 시에서는 다시 두려운, 또는 섬뜩한 것으로 회귀한다. 니체에 따르면 시는 일반적으로 고양된 언어로서 보통사람들이 하는 어법과는 다른 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경험공간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초혼자의 외침을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되는 (아니 저절로 그 계시가 새겨지는) 상황에 길들여지게 한다. 그런데 “왈칵 통조림처럼 쏟아지는” 고향 같은 “기침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두려운 낯설음을 품고 있다. 그것이 아마 유폐자의 분신이기 때문에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는 아마도 변화에 대비하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모르는 계시를 감지하려고 하기 때문일 게다. 우리는 타인을, 그리고 타인은 우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정이나 사랑은 너무나 취약하고, 위축되거나 사라지기 쉬우며, 시간과 공간에 의해, 불완전한 연민에 의해, 가정과 애정 생활의 온갖 슬픔으로 인해 짓눌리기 쉽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불쑥 내 몸을 치고 사라지는”순간은 어떤 사람이었을 것이다. 문득 그 사람이 어릴 때 좋아했던 사람(하지만 좋아해서는 안 되었던 사람)에 대해 억압했던 표상들이 귀환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억압들은 우리가 꿈에서 자주 만났던 기억(또는 망각)의 흔적들이다. 아, 그 사람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마경덕의 시는 그런 억압의 공간을, 그러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간을 말로 표현하지 않고 말한 것 속에 함의하고 있다. 그것이 독자를 환호하게 한다.
어디에선가 마경덕 시인의 시는 쉽게 읽힌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쓰여 있는 글을 발견한 적이 있다. 물론 그런 해석이 가능한 시들도 많다. 하지만 그의 시들을 잘 살펴보면 두려운 낯설음, 단순히 해석되지 않는 낯선 친근함이 있다. 니체는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죽은 것이므로, 말하는 행위에는 일종의 경멸이 담겨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친근함과 낯설음이 같은 것이 아닌가? 다음 시가 마경덕 시인의 구겨진 경멸, 언젠가는 친근했던 것들의 표상을 드러내주는 것 같다.
우묵한 집,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누가 살다 갔나. 오래된 적막이 나선형으로 꼬여 있다. 한 줌의 고요, 한 줌의 마른 파도가 주홍빛 벽에 걸려 있다. 조심조심 바다 밑을 더듬으면
불쑥 목을 죄는 문어의 흡반, 불가사리에 쫓겨 참았던 숨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뽀글뽀글 물갈피에 쓴 일기장을 넘기면…
빗장을 지른, 파도 한 방울 스미지 않는 방. 철썩 문 두드리는 소리에 허리 접힌 불안한 잠이 있고. 파도가 키운 둥근 나이테가 있고 부우-- 부우-- 저음으로 가라앉은 호른소리, 떨리는 어깨와 부르튼 입술도 있다. 모자반숲 파래숲 울창한 미역숲이 넘실대고 프렌치호른에 부르르 바다가 젖고 밤바다의 비늘이 반짝이고
외로운 나팔수가 살던 방, 문짝마저 떨어져 나간 소라껍데기, 잠시 세 들었던 집게마저 떠난 집, 컴컴한 아가리를 벌리고 무엇을 기다리나.
모래밭 적막한 방 한 칸.
- 「빈방」 전문
시인의 고향은 이 도시 바빌로니아에는 이미 없다. 고향이 없으므로 그에겐 또한 집이 없다. 그가 만나는 고향 상실의 고단함은 “문짝마저 떨어져 나간 소라껍데기” 속이나 “한 줌의 마른 파도가 주홍빛 벽에 걸려 있다”. 그래서 마경덕의 시에는 주어(체)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있다 하더라도 그 주체는 관찰자이지 참여자는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에게 집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 집은 (설령 그가 40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다손 치더라도) 선험적인 집으로 모습을 바꾼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라고 말하였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시인이 이제 언어로 그 존재의 집을 만들고 있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찾아 헤맷던 엔게디의 동굴 같은 그 집은 그를 “조심조심” “더듬게” 하고, “불쑥 목을 죄거나” “부르르 바다가 젖거나” “불안하게” 한다.
시인이 어느 산문에서 자신의 처절했던 삶을 조명했던 것을 읽어본 적 있다. 언니의 신혼 방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추운 겨울 마루에서 이불에만 의지해 잠을 잔 적이 많았던 고난은 이 시에 “호른소리” 같은 통주저음(通奏低音, basso continuo)으로 녹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의 표현 “오래된 적막”이나 “밤바다의 반짝이는 비늘”과 같은 멜로디에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콘트라베이스 같은 통주저음은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누가 살다 갔나”라는 표현에서 읽는 친숙함에 스며있고, 엿듣고, 응시한다. 그런 느낌은 우리가 카프카의 「귀향」같은 시에서 “아버지의 집”이 풍기는 세계 내적 존재의 ‘낯설음’ 같은 것이다. 마경덕은 이런 존재론적 체험 위에서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 “원본 없는 번역본”들을 추출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의 몸에 대한 두려운 낯설음의 경지는 다음 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평생 누워있는 사막,
바람이 불 때마다 와르르 척추가 흘러내린다
모래척추는 사막의 고질병,
수렁과 유사流砂는 살아있는 뼈를 삼켰지만
사막의 등뼈는 자라지 않았다
척추가 무른 아비 어미도
그렇게 평생을 뒹굴며 늙어가고
흙바람이 불때마다 낙타의 무릎만 단단해졌다
- 「모래 척추」부분
모래척추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시도 나의 평문도 모래척추 같은 것이리라. 하지만 시인의 존재를 흔적으로 보여주는 모래를 다시 등뼈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곧 그의 기억력이자 상상력일 것이다. 엔게디에서는 모래가 척추였을까? 엔게디의 동굴을 만들었던 튼튼한 기암괴석이었던 때가 있었을까? 존재하는 것의 이면을, 존재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시인의 미덕이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장 은밀한 시간에 당신 마음의 깊은 느낌을 통해서만 대답을 구할 수 있는 의문에 대해, 당신 바깥의 외부로부터 그 대답을 기대하지 마십시오.”라고 충고한다. 그것은 바로 시인의 삶과 시를 규정하는 근원적인 것, 고단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말한다.
― 마경덕의 도시
유폐자는 언제부턴가 저절로 도시민이 되었다. 그 유폐인의 시는 “무지에 대한 의지”로 가득 차 있으며 비밀과 광기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마치 장님의 불 손가락이 벽에 써내려간 밀어(密語) ‘메네 메네데겔’을 닮아 있다. 오른쪽은 벽이고, 왼쪽은 성이며, 공중에는 철조망이, 옆에는 감시 카메라가 서있으므로 이곳은 끝이 난 곳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시인은 우리에게 어떤 계시를, 종말에 대한 예고를 보낸 것일까.?. 수많은 자들이 경비원처럼 우리를 관찰하고 있다. 우리도 관찰한다. 누가 누구를 관찰하는지 모르고 거기에는 익명성이 존재한다. 마경덕의 도시는 유폐의 공간과 그곳에서의 삶의 피폐함, “켜켜이 쌓인 주소불명, 수취거절, 수취인부재 / 미처 소인도 찍지 못한, 저 미납의 사연들”(「비파나무 그늘」)이있는 곳이며, 그 도시는 “죽을 때까지 고된 노역勞役을 치러야”하는 곳이다. 시인의 사상은 다리가 없기에 그는 우리에게 시라는 언어의 등에 그것을 태워 보낸다. 유폐인인 그의 절망감은 이 시간도 살아서 그를 옥죄고 있을 터이니 그가 보니엠처럼“우리 입술의 말들과 / 우리 마음의 묵상들이 / 오늘밤 당신의 면전에서 / 받아들여지길 원합니다. Let the words of our mouths / and the meditations of our hearts / Be acceptable in thy sight / here to night.”라고 노래하는 것 외에 어디에 또 구원이 있을까.
변학수 문학평론가
경북 문경 출생
슈투트가르트대학교대학원 독문학 박사
경북대학교 교수.
저서 「문학치료」「문학적 기억의 탄생」「프로이트 프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