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려실기술 제26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한 사람들
김상용(金尙容)나머지는 상신(相臣) 조에 들어 있다
김상용은 임진왜란 때에 선원(仙源)으로 피난하여 선원이라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 이때에 와서 원임 대신으로서 강화도에 들어갔는데, 적병이 사방을 둘러싸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왜 피하지 않는가?” 하자, 상용이 탄식하기를, “나는 대신이니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구차히 살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니, 상용이 일이 이미 틀린 것을 알고 드디어 집안 사람과 작별하고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부탁하고 이르기를, “네가 만일 온전히 살거든 이 옷을 아이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할 도구로 쓰도록 하라.” 하고, 곧 남문으로 가서 화약 상자에 걸터앉았다.윤방이 문 밑에까지 걸어와서 말하기를, “정승은 기필코 죽고자 하십니까? 죽으려거든 나도 함께 죽읍시다.” 하니, 상용이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죽겠는가.” 하자, 윤방이 이내 지나가 버렸다. 상용이 시자(侍者)에게 말하기를,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를 피우고 싶으니 불을 가져오너라.” 하니, 시자는 공이 일찍이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가져오지 않았다. 상용이 재촉하고 이내 손을 내저어 곁에 다른 사람들을 멀리 가게 하자, 권순장(權順長)과 김익겸(金益兼)이 말하기를, “정승은 홀로 좋은 일을 하려 합니까.” 하면서 끝내 가지 않았다. 상용이 드디어 상자 속에 불을 던지니 사람들과 문루(門樓)가 모두 날아가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난리잡기(亂離雜記)》
○ 상용의 손자 수전(壽全)은 나이 13세로 그때 곁에 있었는데 종에게 안고 가라고 명하니 아이가 옷을 잡아당기며 울면서, 가지 않고 말하기를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 하였다. 종도 가지 않고 모두 죽었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내리고, 선원 옛터에 사당을 세워 충렬사(忠烈祠)라 이름하였다. 《강화지》
권순장(權順長)
권순장의 자는 -,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벼슬은 빙고 별좌(氷庫別坐)이다. 지평을 추증하고 또 대사헌을 증직하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라 정려하였다.
○ 처음에 순장이 비분강개하여 앞서 말하기를, “임금의 안위를 알 수 없으니, 나와 함께 나루터 싸움터에 나갈 자가 있는가? 이와 같은 것이 비록 반드시 승패에 유익하지 않을지라도 홀로 편안히 앉아서 밥이나 먹고 지내면서 세월을 허송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하였다. 이에 선비들이 모여드니, 의려(義旅)라 일컫고 유성증(兪省曾)의 분사(分司)에 가서 소속하였다. 유병(儒兵)이기 때문에 행진(行陣)에는 무관하였으나 방비하기에는 넉넉하였다. 드디어 빈궁의 위사(衛士)가 되어 남성(南城)을 지켰는데, 이때에 와서 두 아우를 보내 늙은 어머니를 피난시켜 구하게 하고, 자기는 마침내 불에 타죽었다. 충렬사에 배향하였다. 《강화지》
○ 순장의 아내 이씨는 □구원(久源)의 딸로, 그때 송정촌(松亭村)에서 병난을 피하고 있다가 순장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세 딸과 두 아들을 먼저 죽이고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순장의 딸은 나이 12세인데 역시 목을 매 죽었으며, 이씨의 여동생으로 출가하지 않은 자와 여러 종족의 부녀가 모두 죽고, 사내종 의남(宜男)과 계집종 의례(宜禮)도 죽어 아울러 정려하였다. 《강화지》 《강화록》의 합록
김익겸(金益兼)
김익겸의 자는 -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손자 요, 성균관 생원이다. 지평을 추증하였다가 뒤에 영상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을 추증 아들 만기(萬基)가 국구(國舅)임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며 정려하여 충렬사에 배향하였다.
이상길(李尙吉)
이상길의 자는 사우(士祐)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벼슬은 공조 판서이며, 좌상을 증직하고, 시호를 충숙(忠肅)82세에 죽다. 이며, 정려하였다. 상길이 그때 선원촌(仙源村)에 있었는데 청병이 강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 21일 자손을 지휘하여 배를 타고 섬 속으로 피하게 하고 말하기를, “종묘 사직은 끊어지게 할 수 없다. 나는 나라의 정경(正卿)이니 나라가 파괴되면 마땅히 사직에서 죽어야 한다.” 하고 말을 재촉하여 성에 들어가서 종묘와 사직에 나아가 통곡하고 재배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충렬사에 배향하였다. 《강화지》합록
심현(沈誢)집(諿)의 형
심현의 자는 사화(士和)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벼슬은 돈녕도정이며,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고, 충렬사에 배향하였다.
○ 24일에 심현이 청병의 닥쳐오는 것을 보고 그의 아내 송씨에게 말하기를, “우리 부부가 모두 70세가 되었으니, 이미 오래 살았다. 바위 구멍에 숨어서 피해도 화를 면한다고 보장하기 어렵고 혹시라도 산다 해도 구차하지 않는가.” 하였다. 그의 조카 동귀(東龜)가 배를 강 어귀에 대놓고 배를 타고 피하기를 청하니, 심현이 말하기를, “나라가 깨지고 집이 망하였는데 살아서 다시 무엇하랴. 나는 죽기를 결정했다.” 하고 드디어 조복(朝服)을 입고 북쪽을 향해 사배(四拜)한 후에 유소(遺疏)를 지어 그의 외손자 박장원(朴長遠)에게 맡겼는데, 그 소에 말하기를, “신 심현은 동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남한산성에 계신 주상 전하께 글을 올립니다. 종묘 사직이 이미 망하여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신이 아내 송씨와 함께 같이 죽어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그의 아내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정은 백 년을 함께 하고, 의는 한 번 죽음을 같이 하니, 내가 충신이 되면 그대는 충신의 부인이 되지 않겠는가.” 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지아비는 충성을 위하여 죽고 첩은 절개를 위해 죽어서 몸을 깨끗이 하여 함께 돌아가는 것을 실로 달게 여기는 바입니다. 종용당 고사(從容堂故事)를 본받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서로 마주 보고 목을 매어 죽었다. 임금이 그가 올린 소를 보고 이르기를, “나라에서 심현에게 깊은 은혜와 두터운 혜택을 준 것이 없는데, 병난을 만나서 절개에 죽기를 중신(重臣)보다 먼저 하였으니, 만일 대현(大賢)이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의 아내 송씨가 같이 죽은 절개도 매우 가상히 여길 만하다.” 하고, 아울러 정려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 심현의 종제 숙(諔)이 의병장이 되어, 적이 이름에 미쳐 강가로 달려 나갔는데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대개 또한 전몰(戰歿)했을 것이다. 《강화지》
이시직(李時稷)ㆍ송시영(宋時榮)
이시직의 자는 성유(性유)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요, 호는 죽창(竹窓)김장생(金長生)의 문인 이다. 갑자년에 문과에 올라 봉상시 정이 되었다. 좌참찬을 증직하였으며, 시호는 충목(忠穆)나이는 66세이다. 이고, 정려하였다.
○ 송시영의 자는 -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요, 호는 야은(野隱)이다. 벼슬은 사복시 주부이다. 좌참찬을 증직하고, 시호는 충현(忠顯)이고, 정려하였다.
○ 처음에 시직이 시영과 함께 한 집에 같이 있다가 적이 행궁(行宮)에 들어가 자리잡고 빈궁(嬪宮)을 서편 행랑으로 옮기는 것을 보고, 시직이 말하기를, “종사가 망하였으니 구차히 살기를 구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하니, 시영이 말하기를, “우리가 오늘날 어찌 이런 광경을 볼 줄 알았으랴.” 하자, 시직이 말하기를, “우리가 젊었을 때 옛 사람의 글을 읽었는데 이제 견양(犬羊)이 빈궁과 같은 궁에 거처하는 것을 보게 되니, 신자가 되어 무슨 말을 하랴.” 하였다. 시영이 즉시 그의 아들과 결별하는 글을 써서 종에게 준 다음, 가지고 있던 인신(印信)을 소리(小吏)에게 주고 곧 바로 목매어 죽었으므로 염습하여 관에 넣어서 집 안에 묻었다. 시직은 목을 매고 종을 시켜 잡아당기게 하니, 종이 차마 명을 따르지 못하자 지은 찬문(贊文)과 망건을 종에게 맡겨 그 아들에게 전하게 하였는데, 그 찬(贊)에 “장강(長江)의 험한 요새를 잃으니 북군(北軍)이 날아오듯 건너오고, 술에 취한 장수는 겁에 질려 나라를 배반하고 욕되게 살려 하는구나.파수병(把守兵)은 삽시간에 무너지고 온 백성은 도륙이 되었구나. 하물며 저 남한산성도 조석간에 또 함락될 것이니, 의리가 구차하게 살 수 없어 자결을 달게 여긴다. 목숨을 버려 인(仁)을 이루니 세상에 부끄러울 것이 없구나. 아아, 슬프다. 너희들은 부디 생명을 상하지 말라. 유해를 고향에 매장하고 늙은 어머니를 잘 봉양할 것이며, 고향에 몸을 움츠리고 엎드려 숨어서 나오지 말라. 구구한 유원은 네가 조상의 일을 잘 이어 가는 데 있다.” 하였다. 드디어 윤전(尹烇)과 같은 날 목을 매어 죽으니 뒤에 나라에서 제사를 하사하고 아울러 충렬사에 배향하였다.
윤전(尹烇)
윤전의 자는 회숙(晦叔)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요, 호는 후촌(後村)이다. 벼슬은 필선(弼善)인데,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고, 정려하였다.
○ 윤전이 필선으로서 세자빈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경징(慶徵) 등의 어리석음을 보고 깊이 탄식하기를, “조정에서 이러한 무리들에게 국가 수호의 중임을 맡기는가.” 하고 정승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급히 군사를 조련하여 나아가서 남한산성을 구원하는 계책으로 삼아야 할 것이요, 그 방자함을 그대로 놔두어 일 없이 팔짱끼고 있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성이 함락됨에 미쳐 중관(中官)이 원손(元孫)을 받들고 병란을 피하여 나가며 군중들에게 외치기를,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은 따르라.” 하자, 이시직이 윤전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가야 한다.” 하니, 윤전이 말하기를, “나는 빈궁을 보호하는 명을 받았는데, 이제 난으로 죽지 않고 비록 원손을 따라간다 해도 역시 구차하게 면하는 것이다.” 하고 가지 않았다. 적병이 성중 사람을 모두 몰아내니, 윤전이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찔렀는데 죽지 않았다. 분노하여 꾸짖기를, “내 칼이 짧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어찌 너희를 따르겠느냐. 빨리 나를 죽이라.” 하여, 드디어 피살되었다. 충렬사에 배향하였다. 《강화지》
홍명형(洪命亨)ㆍ김수남(金秀男)
홍명형은 자는 □,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호는 무적당(無適堂)이다. 임자년에 문과에 장원하여 우승지가 되었다. 좌찬성을 증직하고, 시호는 의열(義烈)이다.
○ 김수남은 □, 전 좌랑이며, 승지를 증직하였다.
○ 명형이 벼슬을 그만 두고 시골에 있다가 풍문으로 대가가 강화도로 파천했다는 말을 듣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사잇길로 강화도로 달려갔으나, 대가가 사실 일찍이 파천하지 않았다. 명형이 탄식하기를, “천명이다. 이곳은 반드시 패할 곳이다.” 하였다. 성이 함락됨에 미쳐 김상용에게 나아가서 서로 붙잡고 통곡하다가 드디어 함께 불에 타 죽었다. 충렬사에 추향하였다. 《강화지》
○ 명형의 아내 성씨는 선전관 문개(文漑)의 딸인데, 또한 따라 죽어 정려하였다. 둘째 아들 처약(處約)도 살해당하였다.
○ 수남이 명형과 같이 상용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관직은 대소가 있으나 의리는 동이가 없으니, 낮은 벼슬아치라 하여 유독 충신이 될 수 없겠는가.” 하고, 이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아이종에게 부탁하였다. 그 글에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남자의 본분이라,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구차하게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겠는가. 바라는 것은 오직 두 아이에게 있다. 아이가 있으면 어미에게 위안이 될 것이니, 나의 죽음을 한탄하지 말라.” 하였다. 드디어 같이 불에 타 죽었다. 《강화지》
정백형(鄭百亨)《구강화지(舊江華志)》에 이르기를, “정효성(鄭孝成)과 정백창(鄭百昌)이 모두 죽었다 하나 백창은 을해년에 경기 감사가 되었다가 광릉(光陵)에서 죽었다.” 하였고《신강화지(新江華志)》에 이르기를, “두 사람이 일찍이 병란에 죽은 적이 없다.” 하였다.
○ 정백형의 자는 □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음관(蔭官) 감사 효성(孝成)의 아들이다. 갑자년에 문과에 올랐으며, 벼슬은 장령을 지냈다.
○ 백형은 청병(淸兵)이 성에 닥쳐왔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살아서 부형의 죽음을 볼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먼저 목을 매어 죽었다. 그 아버지 효성과 그 서모 및 형 백창(百昌)현곡 감사(玄谷監司) 과 아내 한씨 준겸(浚謙)의 딸 와 첩 두 사람 및 동생들과 그의 아내 등 9인이 모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동주집(東洲集)》에 있는 정효성 비문에 이르기를, “합도(闔島)가 패하니 공 역시 졸(卒)하였는데 나이는 78세이다.” 하였다. 대개 효성은 효행으로써 정려한 것이다.백형의 고조는 성근(誠謹)인데, 연산조에 충효로써 화를 입어 정려하였다. 아들 주신(舟臣)과 매신(梅臣), 손자 원린(元麟)과 원기(元麒) 및 원린의 아들 효성(孝成)이 모두 효행으로 정려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일문(一門)을 정려하였다.
민성(閔垶)아버지 인백(仁伯)이 평난공(平難功)으로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경정공(景靖公)이다.
민성은 고 정승 인백의 아들로, 호는 용암(龍巖)이다. 참판을 증직하고 여흥군(驪興君)을 봉하고, 정려하였다.
○ 민성이 그 아들 지침(之針)참판을 증직하고 정려하었다. 과 지발(之釛)참군(參軍)을 증직하였다. 과 지익(之釴)참군을 증직하였다. 과 더불어 의병에 소속되었는데, 성이 함락되려 하자 그 삼남 사녀 및 지침의 아내 이씨ㆍ지발의 아내 김씨ㆍ지익의 아내 유씨(柳氏) 및 시누이 및 아내 우씨(禹氏)와 함께 흙방의 정결한 곳을 찾아가서 《강도록(江都錄)》에는 “아내와 자질(子侄) 13명을 거느리고 전등사(傳燈寺)에 들어갔다.” 하였다.관복(冠服)을 정제하고 차례로 앉아 그 서누이에게 말하기를, “누님은 늙어서 필시 욕을 보지 않을 것이니, 이 아이를 업고 가는 것이 좋겠다.” 하여 서누이가 떠나자, 첩에게 말하기를, “너도 죽을 필요가 없으니 누이를 따라가라.” 하였다. 첩이 같이 죽기를 청하니, 이에 모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서누이가 선원(仙源)에 이르러 이 소식을 듣고 그 아이를 여종에게 부탁하고 또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강화지》
○ 아들 하나 둘째 아들 지옥(之鈺) 는 먼 곳에 있었으므로 살 수 있었다.
강위빙(姜渭聘)ㆍ이돈오(李惇五)ㆍ이돈서(李惇叙)
강위빙은 본관이 진주이며,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 이돈오의 자는 자전(子典)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요, 벼슬은 익위이다. 좌찬성(左贊成)을 증직하고 시호는 충현(忠顯)이다. 아내 김씨는 하루 먼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자세한 것은 아래에 보인다.
○ 처음에 오랑캐 군사가 강을 건너올 때, 위빙과 돈오는 윤전ㆍ송시영ㆍ이시직과 더불어 사생(死生)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위빙은 적에게 사로잡혔는데, 오랑캐가 번득이는 칼날을 들이대며 항복하도록 하였다. 위빙이 분연히 말하기를 “내 머리는 끊을 수 있어도 무릎은 굽힐 수 없다.” 하니, 그 혀를 끊어서 죽였다. 돈오는 적병이 세자빈을 핍박하여 남한산성으로 가는 것을 보고 비분함을 누르지 못하여 격분하여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윤전ㆍ강위빙과 같이 죽었으니, 다섯 사람이 마침내 모두 그 언약을 저버리지 않았다. 《강화지》
○ 돈오의 아우 돈서는 적병에게 사로잡히자 탄식하기를, “우리 집이 대대로 충효를 지켜 나에게 이르렀는데, 만일 내가 죽지 않는다면 집안이 망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걸어서 진강(鎭江)의 깊은 물에 이르러 드디어 스스로 몸을 던져 죽었다. 정려하였다. 《강화지》
이가상(李嘉相)
이가상은 백주(白洲) 명한(明漢)의 아들인데, 새로 급제하였다. 수찬을 증직하였다.
○ 가상은 문장으로 일찍부터 이름이 높았고 가행(家行)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머니 박씨가 오래 된 병으로 앓은 지 6, 7년이 되는데 잠시도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약과 음식을 종에게 맡기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적병이 이르자, 겨우 그 어머니를 감추고 자신은 바로 적에게 사로잡혔다. 적이 물러간 후에 그 아내 나씨(羅氏)만갑(萬甲)의 딸 가 대신 그 어머니를 업고 달아났다. 그런데 그 아내가 업고 도망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 어머니가 움직이지 못하여 적의 칼날에 죽은 줄 알고 칼날의 위험을 무릅쓰며 빠져나와 돌아와 적진을 왕래하며 어머니의 시체를 찾아다니는데, 적에게 잡히면 문득 빠져나오고 또 잡히면 또 빠져나오기를 여섯 차례나 하였다. 하루는 궁벽한 절간에 도망쳐 들어갔다가 또 적진으로 향하려 하니, 그 친구가 옷을 붙잡고 힘써 말리자, 대답하기를, “나도 역시 이곳에 있으면 살고 돌아가면 반드시 죽을 줄 알지만, 병든 어머니가 살아 계실 리가 없으니 차마 내 혼자 살 수 없다.” 하였다, 곧 글을 써서 중에게 부탁하여 그 부형에게 전하여 반드시 죽은 뜻을 통하도록 하고, 억지로 적진 속에 들어갔다가 마침내 살해당하기에 이르렀다.
이중규(李重揆)ㆍ이사규(李士珪)
이민구(李敏求)의 두 아들 원규(元揆)ㆍ중규(重揆)와 조카인 참봉 상규(尙揆)가 모두 죽었는데, 중규는 적을 만나 격분하여 꾸짖어 굽히지 않고 죽었다. 《강화지》
○ 첨정 이사규도 적의 칼날에 죽었다.
황선신(黃善身)ㆍ구원일(具元一)ㆍ강흥업(姜興業)
본부 중군 황선신자는 사수(士修)이며, 훈련 정이다. 이 주장(主將)이 방비가 해이한 것을 보고 힘써 간하니, 주장이 웃으며 말하기를, “늙은 장수가 겁이 많다.” 하고, 늙고 지친 군사, 1백여 명을 주어 선신으로 하여금 방수하게 하였다. 적병이 이름에 미쳐 선신이 우부 천총(右部千摠) 강흥업자는 위수(渭叟)이며, 훈련 첨정이다. 젊었을 때 권필(權鞸)에게 수학하였는데 권필이 화를 당하게 되니 비분하여 붓을 던지고 무(武)에 종사하였다. 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일이 이미 틀렸으니, 우리들이 나라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죽음뿐이다.” 하고, 드디어 진해루 밑에 나가 적 수십 명을 쏘아 죽이고 힘이 다하자 사로잡혔는데 굽히지 않고 죽었다. 흥업은 선신이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더욱 힘써 싸우며 죽을 때까지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오랑캐가 화를 내어 그 시체를 바다 속에 던지며 탄식하기를, “장하다, 두 백수장군(白首將軍)이여.” 하였다.
○ 효종(孝宗)이 일찍이 연석에 임하여 탄식하기를, “내가 선신의 용모를 보니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른 것이 없고 나이도 늙었는데, 홀로 이런 일을 해냈는가.” 하였다.
○ 좌부 천총(佐部千摠) 구원일(具元一)이 홀로 휘하 수십 명으로 유격대를 만들고 처자와 이별하기를, “오늘에야 나는 죽을 곳을 얻었으니, 다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말라.” 하고, 드디어 갑곶 나루로 달려갔다. 경징과 민구는 배를 빼앗아 달아나고 장신(張紳)은 강 어귀에 배를 정박한 채 싸울 뜻이 없는 것을 보고, 원일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적병이 장차 강을 건너려 하는데 묘사(廟社)는 어느 곳에 두며, 섬 사람이 장차 도륙당할 것인데 대장이 싸우지 않으니, 청컨대 먼저 대장을 벤 후에 싸우겠다.” 하였다. 장신이 크게 화를 내며 그 부하를 시켜 잡게 하니, 원일이 칼을 빼들고 크게 꾸짖기를, “내가 이 칼로 너를 베어 만 쪽을 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어찌 더벅머리 녀석에게 사살되겠는가.” 하고, 동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칼을 쥐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 이 일이 임금께 보고되니 세 사람에게 모두 병조 참의를 증직하고 정려하였으며, 충렬사에 배향하고 표충단(表忠壇)에 아울러 배향하였다.
김득남(金得男)
○ 철곶첨사(鐵串僉使) 김득남은 22일에 자원하여 전쟁에 나가 스스로 모집한 군사 30여 명을 거느리고 부평(富平) 땅에서 싸워 적의 목을 벤 것이 대단히 많았는데, 적진에 달려들어 충돌할 때에 얼굴에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표충단에 배향하였다.
[주-D001] 종용당 고사(從容堂故事) : 옛날 어떤 선비가 나라가 망하자 절개를 지켜 자기의 서재에서 자결하니, 그 집을 종용당(從容堂)이라 하였다. 종용이란 말은 죽음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조용히 절의에 죽는다는 뜻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학상 (역) | 1967
.........................
명재유고 제42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 이조 판서 구당(久堂) 박공(朴公) 신도비명
현종대왕(顯宗大王) 12년 신해년(1671) 10월 병신일에 구당 박공이 송도(松都)의 관사(館舍)에서 별세하였다. 상이 유소(遺疏)를 보고 하교하기를, “죽음을 앞두고 아뢴 말에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다른 날보다 배나 더하니, 매우 비통하도다.” 하였고, 인하여 공의 노모에게 여생을 마칠 때까지 나라에서 양식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금상(今上) 조정의 상신(相臣) 이상진(李尙眞)과 민정중(閔鼎重) 제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박장원(朴長遠)이 모친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으니, 고인이 이른 바 ‘감히 그 몸을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정려(旌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겸손함으로 신칙하였고 몸가짐에 법도가 있었으므로 조신(朝臣)들이 누구나 공경하고 따랐으며, 사시(賜諡)의 은전을 청하지 말라고 유언을 한 것도 겸양의 뜻에서 나온 것이니, 태상시(太常寺)로 하여금 특별히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또 일을 논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비록 유언으로 경계하였지만, 애도하고 영예롭게 하는 은전이 크게 갖추어졌으니, 현양(顯揚)하는 비석만 유독 없을 수 없다.” 하였다. 이에 공의 여러 아들들이 내가 공의 뜻을 거의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아, 내가 어떻게 공의 뜻을 충분히 알겠는가.
공의 휘(諱)는 장원(長遠)이고 자는 중구(仲久)이다. 그 선조는 고령(高靈) 사람이다. 원조(遠祖) 휘 지순(之順)은 고려 때 대장군(大將軍)인데, 그 후손이 연이어 과거에 급제하여 마침내 대대로 벼슬하는 씨족이 되었다. 휘 지(持)라는 분과 휘 수림(秀林)이라는 분이 있어 모두 청렴함과 효성스러움으로 이름이 드러났으니, 모든 행적이 그 후손인 읍취헌(挹翠軒) 은(誾)이 지은 행장에 실려 있다. 고조 휘 세필(世弼)은 진사로 집의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정(淨)은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효성(孝誠)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문장과 덕행이 있었으며, 고(考) 휘 훤(烜)은 직장(直長)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데 또한 재능과 도량이 있었으나 일찍 별세하였다. 비(妣)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충렬공(忠烈公) 현(誢)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萬曆) 40년 임자년(1612, 광해군4) 3월 무오일에 태어났다. 말을 배우자 곧바로 문자를 해독하였고, 앉을 때에는 다리를 뻗고 앉는 경우가 없었다. 6세 때에 비로소 책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모부인(母夫人)이 자신은 보리밥을 드시고 공에게는 쌀밥을 먹이면서 공이 모르게 하였다. 공이 이 사실을 알고는 곧바로 먹지 않았다. 8세 때에 시구(詩句)를 지으면 매번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11세 때에 문예(文藝)가 크게 진보하니, 사람들이 공을 이필(李泌)과 안수(晏殊)에 견주었다. 일찍이 삼각산(三角山)에 놀러가 시를 지었는데, 상서(尙書) 정경세(鄭經世)가 공을 만나 보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계로약명(溪路藥名)의 시를 지은 아이인가.” 하며 공의 노성(老成)한 기풍에 감탄하였다. 충렬공의 명으로 만퇴(晩退) 신공(申公)에게 《소학(小學)》을 배우고, 다시 관찰사 김치(金緻)를 종유(從遊)하여 두시(杜詩)를 배웠다. 겨우 성동(成童)이 되었을 때부터 명성이 매우 자자했으나, 공은 이미 문예가 작은 기예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마음속으로 홀로 고인(古人)의 뜻과 일을 흠모하여 이전의 현인들을 배워 닮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
병인년(1626, 인조4) 가을에 감시(監試) 양장(兩場)에 합격하였다. 겨울에 서도(西都)에서 혼례를 치렀다. 당시에 처조부 윤공 훤(尹公暄)이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이불 가운데 비단 따위로 지은 것이 있자 공이 즉시 물리치고 포(布)로 된 것으로 바꾸게 하였다.
정묘년(1627)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계유년(1633)에 명나라의 조사(詔使) 정룡(程龍)이 와서 시를 요구하자 조정에서 당대의 재사(才士)를 엄선하여 응수(應酬)하게 하니, 공이 포의(布衣)로서 그 선발에 끼었다.
갑술년(1634)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를 다해 상을 치렀는데, 삼복더위에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병자년(1636)에 상기(喪期)를 마치고, 겨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에 오랑캐의 군대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공은 충렬공을 따라 강도(江都)에 들어갔다. 강도가 함락되었을 때 충렬공이 부인 송씨(宋氏)와 절사(節死)하였는데, 송(宋)나라 종용당(從容堂)의 고사(故事)와 같은 일이다. 공은 모부인을 모시고 바다를 건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무인년(1638)에 사천(史薦)에 들었다. 공은 국가의 화란(禍亂)을 혹독하게 겪어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었으므로 오랜 뒤에야 마지못해 강(講)에 나아갔다. 기묘년(1639)에 검열(檢閱)에 제수되었다가 봉교(奉敎)로 옮겼고, 경진년(1640)에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가 감찰(監察)과 정언(正言), 병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마침 월과(月課)에서 〈반포오시(反哺烏詩)〉를 지어 올렸는데, 그 시에,
어느 선비가 어버이를 모시는데 / 士有親在堂
가난한 살림이라 좋은 음식 못 드리네 / 貧無甘旨具
미물인 새도 사람을 감동케 하나니 / 微禽亦動人
반포(反哺)하는 숲 까마귀에 눈물을 흘리노라 / 淚落林烏哺
하였다. 인조(仁祖)가 이 시를 보고 말하기를, “한 집안의 충효가 사람을 감동시키는구나. 해조로 하여금 미(米)와 포(布)를 넉넉히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전란이 있은 뒤에 공이 상소를 통해 충렬공의 유소(遺疏)를 올리니, 상이 하교를 내려 비탄해하고 특별히 명하여 정려(旌閭)하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와 같은 남다른 대우가 내렸던 것이다.
신사년(1641, 인조19)에 정언에 제수되어, “얼마 남지 않은 백성이 현재 도탄(塗炭)에 빠져 있으니, 안산(安山)의 어전(漁箭)을 다시 설치하지 마소서.”라고 아뢰었고, 또 “기근과 재이가 발생하였으니, 대군(大君)을 위해 저택을 짓지 마소서.”라고 아뢰었다. 이것은 공이 처음으로 간언한 일이었는데, 모두 남들이 하기 어려운 말이었으니, 백성을 이롭게 해 주려는 마음과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정성을 이미 이것을 통해 볼 수 있다. 가을에 명을 받들어 호서(湖西)에서 선비들을 시험하였고, 겸춘추(兼春秋)로서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찬수(纂修)에 참여하였다.
임오년(1642)에 지평이 되어, 혼조(昏朝) 때에 조정립(曺挺立)이 흉론(凶論)을 주창하여 대군(大君)의 원통한 죽음을 초래한 사실을 논하였고, 다시 사인(舍人) 유영(柳潁)이 술에 취해 체모를 잃은 일을 탄핵하였다. 그해 겨울에 옥당(玉堂)에 들어 수찬(修撰)이 되었다.
계미년(1643)에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제수되었다. 직책을 맡아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자신을 바로잡아 사람들을 이끌었으며, 항상 재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임하니, 정사가 평온하고 일이 간소해져서 경내(境內)가 편안하였다. 공무의 여가에는 손수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베끼고, 또 성현이 경계한 말을 기록하여 조석으로 보고 반성하였다. 안음현(安陰縣)은 산수가 수려한 고장으로 불렸는데, 정일두(鄭一蠹) 선생이 일찍이 이곳을 다스릴 때에 지은 광풍루(光風樓)와 제월당(霽月堂)이라는 건물을 공이 중수(重修)하고 기문(記文)을 지어 추념하고 앙모하는 뜻을 담았다. 당시에 말을 타고 나가 노닐며 시를 읊조리고 돌아가기를 잊으니, 사람들은 공이 고을의 수령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갑신년(1644, 인조22)에 수찬으로 소환되었다. 을유년(1645)에 정언에 제수되었고 지제교(知製敎)에 뽑혔으며, 지평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졸하자 양사(兩司)가 의관(醫官)을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였고, 또 전랑(銓郞) 심희세(沈熙世) 등을 원찬(遠竄)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는 계사(啓辭)가 있었는데, 상이 오랫동안 윤허하지 않자 공이 인피(引避)하며 아뢰기를, “지금 하늘과 땅이 서로 통하지 않아 이토록 혹독한 가뭄이 든 것은, 상하가 막히고 언로(言路)가 막힌 결과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만하는 기색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시니, 정의(情意)가 서로 막힌 상황은 바로 가뭄의 형세와 함께 심각합니다.” 하였다. 또 헌납(獻納)에 제수되었는데, 사직소의 말미에 아뢴 내용의 대략에, “삼가 듣건대, 자신에게 죄를 돌리시고 구언(求言)하며 옥사(獄事)를 살피겠다는 하교를 내리셨다고 합니다. 신이 생각건대, 당일로 대신(大臣)과 유사(有司)를 불러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로 맹서하여 퇴폐한 습속을 한 번에 씻어 버리고 문구(文具)의 말폐(末弊)를 통렬히 제거하소서. 구언을 하시면 ‘어떠한 폐단은 개혁할 만하고, 어떠한 정책은 없앨 만하다.’라고 하시고, 옥사를 살피시면 ‘누구의 원통함은 씻어 줄 만하고, 누구의 죄는 다스릴 만하다.’라고 하시어 백성의 이해(利害)를 헤아리시고 온 나라의 공의(公議)를 한결같이 따르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한 장의 승정원 문서로 몇몇 사람을 풀어주어 용서하는 조치를 취한 데 대하여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고사(故事)에 따라 책임만 때운 것이다.’ 하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내탕고(內帑庫)와 제사(諸司)의 비축 및 경외(京外)에 현재 남아 있는 미곡(米穀)을 계산해 보아 만약 1년의 비용을 지탱할 수 있다면 내년의 전조(田租)를 감해 주소서. 그리고 상공(常貢) 가운데 견감할 만한 것은 견감하고, 정지할 만한 것은 정지하소서. 달마다 부과하는 군기(軍器)와 같은 긴급하지 않은 역(役)은 모두 일단 혁파하여 백성들과 환난을 함께한다는 뜻을 보이신다면 백성들이 비록 죽음을 면하지 못할지라도 또한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안하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하였다.
부수찬으로 옮긴 뒤에 명을 받들어 호남에서 선비들을 시험하였다. 겸사서(兼司書)가 되었다가 전조(銓曹)에 들어가 좌랑이 되었다. 당시에 역적 김자점(金自點)이 국사(國事)를 맡고 있었는데, 그 아들 식(鉽)이 대성(臺省)에서 이미 벼슬을 하면서 전랑(銓郞)과 옥서(玉署)의 자리를 꾀하고 있었으나 공이 두 차례 그것을 저지하니,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병술년(1646, 인조24)에 역옥(逆獄)이 발생하자 문사랑(問事郞)에 차임되었고,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자되었다. 공이 스스로 낭서(郎署)이면서 당상관의 관복을 입는 것을 편치 않게 생각하여 외직을 청하니, 배천 군수(白川郡守)에 보임되었다. 정해년(1647)에 그만두고 돌아왔다.
기축년(1649)에 승지에 제수되었다가 호조 참의로 옮겼으나, 조정의 논의가 서로 어긋나고 각기 주장하는 바가 분분하였으므로 다시 외직을 청하니, 춘천 부사(春川府使)에 제수되었다. 마음을 다해 백성을 돌보니 덕을 칭송하는 소리가 도로에 가득하였으며,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어 백성들의 효심을 흥기하였다.
임진년(1652, 효종3)에 승지로 소환되었고, 중간에 공조 참의와 호조 참의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승정원에 재직한 기간이 길었다. 그리고 경연(經筵)에 자주 참여하여 사안에 따라 건의를 올렸는데,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결점을 바로잡고 미덕을 길러 주는 것보다 절실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여 매번 지성으로 개도(開導)하기를 조용히 반복하였으되, 과격하거나 남의 잘못을 들추는 언사는 일찍이 없었으니, 상도 대부분 가납하였다.
계사년(1653, 효종4)에 사국(史局)에 새로 추천된 사관(史官) 가운데 합당하지 않은 자가 있어 선배에 의해 천거가 막혔는데, 장령 서원리(徐元履)가 그 일을 논하면서, “상벌을 내리는 권한이 전하에게 없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집의로 발탁하여 제수함으로써 포상(褒賞)하였다. 낙정(樂靜) 조공 석윤(趙公錫胤)이 대사헌으로서 서원리를 탄핵하여 체차할 것을 청하다가 엄한 비지를 받고 인피하니, 대사간 목행선(睦行善)이 처치하여 조공을 체차하였다. 교리 이태연(李泰淵)이 차자를 올려 목행선을 배척하다가 도리어 나문(拿問)의 명을 받으니, 공이 재삼 간언하였다. 이튿날 옥당의 홍처윤(洪處尹) 등이 이태연을 나문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고 또 목행선을 파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매우 엄히 노하여 홍처윤 등을 물리쳤다. 그리고 상이 다시 공에게 목행선의 파직을 청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재촉하여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은 바로 어제 이태연을 구호했던 자로서, 이태연을 구호했던 것은 목행선을 그르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상은 공이 논의를 주장했다고 의심하고 이튿날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원찬하도록 하였는데, 그 말의 뜻이 매우 엄하여 삼수(三水)로 유배되었다. 이에 양사(兩司), 옥당 및 삼공(三公)이 번갈아 소장을 올려 공이 편당(偏黨)을 짓지 않았음을 밝혔고, 좌상 김공 육(金公堉)이 또한 아뢰기를, “모자(母子)가 함께 갈 수가 없으니, 효로 다스리는 정사에 손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흥해(興海)로 이배(移配)할 것을 명하였다. 공이 적소(謫所)에서 한 해를 보내면서 한 번도 집의 뜰을 나가지 않고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였는데, 날마다 정해진 진도가 있었다.
갑오년(1654, 효종5)에 방귀전리(放歸田里)되었다. 무술년(1658)에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는데, 정사가 엄하면서도 너그러우니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편안해하였다. 당시에 많은 어진 선비들이 무리 지어 조정에 나아가게 되자 연이어 이조 참의와 부제학에 의망되었다. 겨울에 묘당이 올려 발탁하기에 합당한 인물을 선발하였는데, 공이 거기에 끼었다.
기해년(1659)에 강원 감사에 제수되었다. 효종대왕이 승하하자 기년(期年) 동안 소찬(蔬饌)을 먹고 예법대로 방상(方喪)을 치렀다.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관동(關東) 지방에 큰 기근이 발생하자 동춘(同春) 송공(宋公)이 구휼의 정사가 시급하다는 이유를 들어 공을 체직하지 말 것을 청하였고, 시남(市南) 유공(兪公)도 새서(璽書)를 내리고 직질(職秩)을 올려 준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아뢰니, 잉임(仍任)되었다. 공이 다섯 번이나 상소를 올려 새로운 자급(資級)을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에 영동(嶺東)의 전세(田稅)와 신역(身役)을 모두 면제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고 백성들을 어루만져 안정시키기 위해 사려를 다해 조처하니, 한 지방의 백성들이 이로 인해 온전히 살아나게 되었다. 백성들이 돌을 깎아 송덕비를 세웠다.
경자년(1660, 현종1)에 조정으로 돌아와 대사간과 대사성, 형조 참판에 연이어 제수되었다. 신축년(1661)에 대사헌을 거쳐 다시 대사성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동춘 송공이 연석(筵席)에서 건의하기를, “인재를 배양하는 일은 전적으로 대사성에게 달려 있습니다. 반드시 적임자를 찾아 구임(久任)시켜야 인재를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다른 관직을 가진 사람이 겸대(兼帶)하는 것이 편한지의 여부를 물으니, 송공이 정엽(鄭曄)과 조석윤(趙錫胤)이 모두 겸대하였다고 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현임 대사성도 여러 사람의 신망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였고, 대신(大臣)들도 이구동성으로 모두 구임시켜 임무를 완수하도록 책임을 지워야 한다고 하니, 대사간으로 옮겨 그대로 대사성을 겸직하였다. 공이 스스로 불안하여 연이어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제수하였다.
임인년(1662, 현종3)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양남(兩南)에 어사를 파견하려고 할 때에 공이 아뢰기를, “재이(災異)는 공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갇힌 죄수를 너그럽게 처리하고 재야의 선비를 찾아내어 등용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중요한 일은 비록 구휼하는 정사이지만, 또한 억울함을 풀어 주고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며 인재를 찾아내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대사성, 예조참판 겸 동지성균관사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상소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면서 공을 뒷걸음친다고 비방한 자가 있었는데, 공이 상소를 올려 사직하면서 마땅히 물러나야 할 네 가지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이 물러나려는 것은 참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니, 다른 사람의 비난을 정말 달게 받아들입니다.” 하였다. 공이 졸지에 지적을 받고서도 조금도 성내는 뜻이 없었으니,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이조참판 겸 승문원제조에 제수되었다. 얼마 안 있어 승자(陞資)되어 빈사(儐使)에 차임되었다.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자 사직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대사헌에 제수되어, 여러 궁(宮)의 면세전(免稅田)을 참작하여 제한할 것을 청하고, 여러 궁 및 각 아문, 사대부의 산전(山田)과 해택(海澤)에 장원(莊園)을 설치하여 백성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조사하여 혁파할 것 등을 청하였으며, 문성(文成)과 문간(文簡) 두 현신(賢臣)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다.
체직되어 한성부판윤 겸 도총관에 제수되었는데, 모친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제수되었다. 갑진년(1664, 현종5)에 외직에 오래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연석에서 건의한 사람이 있어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다시 이조 판서로 옮겨 제수되자 힘써 사직하였는데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자들을 억누르고 침체된 자들을 진작하여 항상 왕 문정(王文正)이 장사덕(張師德)에 대해 말했던 것으로 사람을 대하니, 부정한 방법으로 벼슬을 구하던 세도가의 자제들이 모두 손을 움츠렸다.
예문관 제학에 제수되고, 매복(枚卜)에 들었다. 공이 경(卿)의 반열에 발탁된 지 오래지 않아 공의(公議)가 먼저 공에게로 돌아간 것이었는데, 전후로 모두 일곱 차례 의망되었으나 끝내 등용되지 못하니, 당시 사람들이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얼마 안 있어 사소한 일 때문에 불안하여 두 차례나 상소를 올려 사직하고 감히 정사하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으니, 상이 노하여 신하의 분의(分義)로써 질책하고, 법부(法府)에 내려 죄를 다스리고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대신과 정원, 삼사가 간쟁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공은 즉시 나가 교외에 거처하였다. 그 뒤에 여러 신하들이 공을 위해 억울함을 많이 호소하였는데, 정공 유성(鄭公維城)이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박장원은 청렴하고 효도와 우애가 깊으니,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서용하라는 명이 내려 연이어 공조 판서, 형조 판서, 대사헌, 동지춘추관사, 제사(諸司)의 제조에 제수되었다.
을사년(1665, 현종6)에 우참찬, 예조 판서, 도헌(都憲), 지의금부사, 동지경연사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상이 안질(眼疾)로 침을 맞았는데, 공이 아뢰기를, “안질을 다스리는 방도로는 마음을 담담하게 하고 사려를 줄이며 희로(喜怒)의 감정을 삼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였으며, 또 신료를 가까이하여 자주 접견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원옥(冤獄)을 심리하였는데, 공이 장리(贓吏)의 죄를 논하기를, “이러한 부류에게 무슨 원통한 정상이 있다고 심리할 대상에 넣으십니까.” 하였다. 또 재이(災異)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제로(諸路)의 공천(公賤)을 찾아내 쇄환(刷還)하는 일에 대해 원망이 많은 것, 기보(畿輔)의 양전(量田)이 공평하지 못한 것, 군병의 신역(身役)에 대한 번포(番布)와 도주나 사망으로 인하여 징수하지 못한 포(布)를 헤아려 감하기를 청하는 것, 각 아문의 둔전(屯田)을 혁파하기를 청하는 것 등의 일을 아뢰었으며, 이어 국가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있다고 아뢰고, 임금의 덕성에 부족한 점까지 언급하여 경계해야 할 일을 낱낱이 진술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상이 모두 가납하였다. 또 아뢰기를, “구언(求言)을 비록 부지런히 하시지만 응하는 자가 점점 드뭅니다. 여러 신하들의 소차(疏箚) 가운데 채택할 만한 것을 속히 취하여 결연히 실행하소서.” 하였다.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에 제수되었는데, 진강(進講)할 때마다 입으로 풀이하고 손으로 그려 가며 설명하였고 언행과 주선(周旋)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다해 보도(輔導)하지 않음이 없었다.
병오년(1666, 현종7)에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가 이조 판서로 옮겼다. 다시 겨울에 발생한 우레로 인해 인재를 수용해야 한다는 말을 거듭 아뢰어 침체된 채 등용되지 못하고 있는 인재를 특별히 천거하도록 청하였다.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대(兼帶)하였다.
정미년(1667)에 형조 판서, 도헌, 우참찬 겸 봉상시제조, 비국 당상(備局堂上)에 제수되었다. 온천의 행행(行幸)에 호종하고 나서 다시 도헌에 제수되었다가 체직되었다. 당시에 양사에서 상신(相臣)이 나라를 욕되게 한 죄를 논하니, 상이 7명의 간신(諫臣)을 모두 찬축(竄逐)하였다. 공이 청대(請對)를 통해 변론하여 구제하였고, 다시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근래의 일은 단지 성상께만 치욕이 미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며 대간(臺諫)들이 계사를 올리기까지 한 것인데, 성상께서 갑자기 진노하시어 언로가 막히고 조정이 거의 비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한재(旱災)와 상재(霜災) 속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과 세(稅)를 감면하고 진휼하는 정책, 양전(量田)을 다시 실시하여 역(役)을 고르게 하는 방도에 대해 힘써 아뢰었고, 또 아뢰기를, “옛날 사마광(司馬光)이 자신의 임금에게 진언(進言)하여 인(仁)과 명(明), 무(武)의 도를 다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인에 대해서는 넉넉한 듯하지만, 명과 무에 대해서는 오히려 부족한 듯하다고 여기신다면 인 또한 사람들이 일컫는 인은 아닐 것입니다.” 하였으며, 끝으로 자신을 가다듬고 진작(振作)할 것과 학문에 힘쓰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할 것과 검약을 숭상하고 정사에 근면할 것과 구언(求言)하되 반드시 수용할 것 등의 내용을 아뢰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임금의 덕과 백성의 일에 대한 것으로서 정성스러운 마음이 끊이지 않았으니, 상이 답하기를, “깨우쳐 줌이 크게 절실하고 말의 뜻이 매우 간절하여 내가 매우 감탄하였다.” 하였다.
무신년(1668, 현종9)에 도헌, 참찬, 이조 판서, 좌빈객, 홍문관 제학에 누차 제수되었고, 문형(文衡)에 의망되었다. 공이 이조 판서와 지경연(知經筵)을 사직하는 상소에서 아뢰기를, “지금 재이가 연이어 닥쳤으나 성상의 마음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풀어지시니, 뭇 신하들이 재이를 하찮게 여기고 편안하기를 탐내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처럼 양기(陽氣)가 화창한 시기를 맞아 조섭하는 여가에 편전(便殿)에서 신하들을 사대(賜對)하시되, 성실히 접견하여 고금(古今)의 일을 의논하고 정신을 발산하신다면 민심을 위로하고 천재(天災)를 조금이나마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당시 봄 가뭄이 극심해지자, 반드시 비를 내리게 하는 방도가 있고 나서야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는 뜻으로 연석에서 간절히 아뢰었다. 그때에 시종신(侍從臣)의 부모로서 나이가 70인 자에게 추은(推恩)하여 가자(加資)하기도 하고 음식물을 하사하기도 하였는데, 공이 수석(壽席)을 마련하여 영예로운 은혜를 기렸다.
여름에 호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어전에서 전랑(銓郞)의 권한이 너무 크다고 아뢰자 공이 그렇지 않다고 아뢰었는데, 김좌명의 말이 매우 공격적이면서 비방하는 말투였다. 이어서 상신(相臣)이 차자를 올려 이 기회를 틈타 중상(中傷)하자, 공은 힘써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겨울에 다시 전조(銓曹)에 들어갔으나, 고시(考試)하는 데에 나아가지 않은 일로 파직되었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제수되어 사서(史書)를 고출(考出)하는 일로 강도(江都)에 갔다. 다시 우참찬과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며,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지 않고 미(米)와 포(布)를 하사하였다. 다시 이조 판서에 제수되자 공이 힘써 사직하며 아뢰기를, “한갓 녹봉 때문에 벼슬하면서 외람되이 도(道)를 행하는 직책을 차지하여 항상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사는 제 사정을 그 누가 모두 알겠습니까. 또한 어찌 세 번 네 번 들어와서 들어올 때마다 일을 그르치면서도 그만둘 줄 모르는 전조의 장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다섯 차례 상소를 올려서 체직되었다.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당시에 신덕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하였는데, 공이 두루 상고하고 널리 물어 중대한 예식을 잘 완수하였다.
경술년(1670)에 부묘의 예식을 감독한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었다. 순릉(純陵)의 봉분을 다시 만드는 일로 함흥(咸興)에 갔다 와서 다시 도헌이 되었다. 가을에 팔도에 큰 흉년이 들자 상소를 올려 백성의 망극한 사정과 진정(賑政)이 소홀한 상황, 조정의 안일한 태도와 인재 등용에 있어서의 명성과 실제, 언로의 개폐(開閉) 등을 극언하고, 말미에 아뢰기를, “이러한 일들이 어찌 전하의 전일한 마음을 벗어나는 일이겠습니까. 마음이 큰 근본이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학문만 한 것이 없습니다. 일의 성패는 오직 전하께서 학문에 뜻을 두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으며, 아울러 조신(朝臣)들이 붕당을 일삼아 논의하면서 서로 다투느라 백성의 근심과 나라의 계책을 도외시하고 있는 실상을 아뢰었는데, 수천 마디의 곡진한 말이었다.
신해년(1671, 현종12)에 판윤, 도헌,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이미 누차 아뢰어도 효과가 없고 노력해도 세도를 되돌리지 못하자 조정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았는데, 조정이 공의 뜻을 알고서 다시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제수하니, 7월에 부임하였다. 그해에는 아사(餓死)한 사람들이 매우 많아 근심거리가 눈앞에 산적한 형편이었고, 국가의 중신(重臣)이었던 옛사람들도 죽고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공은 어려운 시국에 대한 염려가 간절하여 한밤중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하였다.
10월에 병이 났다. 별세하기 며칠 전에 여러 아들들에게 명하여 붓을 잡게 하고 구술(口述)하여 상소의 초(草)를 잡았는데, 백성을 구제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혼란을 다스리고 위태로움을 부지(扶持)하는 방도에 대해 아뢰고, 말미에 아뢰기를, “임금의 다스림은 ‘정일(精一)’의 16자(字)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학문을 힘쓰시고 어진 이를 가까이하는 것이 오히려 옛날 명철했던 임금이 직분을 다하였던 것에는 미치지 못하십니다. 전하께서는 항상 이 점을 유념하소서.” 하였다. 공이 별세한 뒤에 고자(孤子) 빈(鑌)이 상소를 통해 그것을 올렸다. 공의 향년(享年)은 겨우 60세였다. 그해 12월 정유일에 장단(長湍)의 선영 아래 건좌(乾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장중하며 겸손하고 돈후하였으며 도량이 깊고 원대하였으며 후덕한 기운이 화평하였으니, 한눈에 상서로운 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성적으로 효심이 독실하였는데,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어 미처 봉양하지 못한 것을 늘 지극한 통한으로 여겼으므로 모부인을 봉양할 때에 공경과 사랑을 극진히 하여 잠자리를 보살피는 일과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는 일에서부터 온화한 태도로 모시고 안색을 살펴 뜻을 받드는 일까지 모친의 뜻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다 하였으니, 50년이 하루처럼 한결같았다. 매번 모부인을 위해 조용히 아뢰기를, “신하가 이미 국가에 몸을 바치기로 허락했다면 자신의 어버이를 돌아볼 수 없습니다. 지금 나라가 어렵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만약 위급한 사태라도 발생한다면 바로 목숨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부디 제가 효도를 끝마칠 수 있기를 바라지 마소서.” 하였는데, 항상 도리로써 모친을 깨우쳐 드려 창졸간에 자식과 이별하더라도 의리를 편안히 여겨 지나친 상심(傷心)에 이르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공의 걱정하는 마음이 심원하여 미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 이와 같았다.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고, 그 예법은 《가례(家禮)》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참고하여 사용하였다. 숙부를 매우 공경스럽게 섬겨 매일 반드시 나아가 문안을 드렸는데, 비바람이 불거나 공무(公務)가 있더라도 그만둔 적이 없었으며, 음식과 의복을 반드시 모두 공급해 드렸다. 숙부의 상을 당해서는 장례에 필요한 온갖 물품을 모두 공이 마련하였다. 숙부가 일찍이 그 아들을 꾸짖어 뜰에서 매질하려고 하자 공이 종종걸음으로 뜰로 내려가 함께 잘못을 빌었는데, 마침 비가 내려 의관(衣冠)이 모두 젖었다. 당시에 이미 공의 나이와 지위가 모두 높았으므로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이 그 가법(家法)에 감탄하였다.
30여 년 동안 세 조정을 섬겼는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우러나왔고 청렴한 지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으므로 덕망이 절로 높아지고 사론(士論)이 모두 추중(推重)하였다. 이 때문에 비록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머무르며 내직을 사양하고 외직에 머무는 것이 공의 평소 뜻이었지만, 자신의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임금께 직접 아뢰거나 소장(疏章)을 올릴 때에는 자세하고도 간절하였으되, 과격하게 남의 잘못을 들추는 짓을 하지 않았으며, 사리를 조목조목 아뢰어 의리에 합치되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완곡하고 온순한 말 중에도 남들이 하기 어려워하는 말들이 많았다. 특히 천재(天災)와 수해(水害), 한발(旱魃)에 관한 일과 백성을 돌보고 기근을 구제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간절히 마음을 다하였는데, 상소를 한 번 올리고 또 올려 반복하여 진달하되, 행여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스스로 그만두지 않았고 세속의 여론이 암암리에 비난하더라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 지금과 같은 세상에 어디서 이렇게 논의하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공은 천성이 본래 조용하고 세속을 좋아하지 않은 데다 또 병자호란 이후로 다시 세도(世道)를 담당할 마음을 갖지 않았는데, 모친이 시골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내직과 외직에서 머뭇거리며 결연히 물러나지 못하다가 끝내 그러한 뜻만 지닌 채 생을 마치고 말았다.
공은 벗과의 교유가 물처럼 담담하여 당대의 사류들과 비록 성기(聲氣)가 서로 같더라도 시비와 득실에 있어서는 또한 영합하지 않았다. 효묘(孝廟) 초년부터 많은 어진 선비들이 무리 지어 조정에 나아가 사람들이 모두 기대하였으나, 자신들의 의견을 내세워 다투어 일어나고 아첨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다. 공이 그 사이에서 추종하지도 않고 부딪치지도 않으면서 조용한 가운데 온화하면서도 강인하게 대처하니, 사람들의 비방이 공에게 미칠 수 없었다.
공이 전형(銓衡)을 맡았을 때에는 공정함을 유지하려고 힘써 시의(時議)에 흔들리지 않으니, 공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 점차 많아져 중간에 갑작스러운 곤액을 만나기도 하였으나, 태연히 대처하였다. 오직 당의(黨議)로 분열되는 것을 깊이 근심하며 반드시 망국(亡國)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뒤 세도가 무너져 공이 염려했던 대로 되자 식자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였다. 공의 평생의 본말이 대략 이와 같았다.
약관에 이미 도(道)를 추구하려는 뜻이 있어 날마다 사서(四書), 《근사록(近思錄)》과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성리학 관련 여러 서적을 가지고 침잠(沈潛)하여 완미(玩味)하고 연구하였으며, 의혹이 있으면 매번 첨지(籤紙)를 붙여 표시를 해 두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보아, 붙여 둔 첨지를 모두 제거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공이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면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으나 일찍이 남들과 논설하는 적도 없었고 또한 글을 지어 남에게 보인 적도 없었다. 공이 학문을 할 때는 온전하게 내면으로 마음을 쏟아, 마음을 잡아 보전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공부를 한시도 놓은 적이 없었으며, 자신 혼자만의 거처에 있을 때 더욱 힘써 삼갔다. 말년에 이르러 더욱 안온(安穩)하고 장중(莊重)하여 완전하게 덕을 이루었으니, 공의 공부가 순수하고 독실했던 까닭으로, 단지 천성이 순수하고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부인(貞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감찰 원지(元之)의 따님이고, 영의정 두수(斗壽)의 증손녀이다. 정숙하고 단정하였으며, 청빈함을 편히 여기고 시어머니를 잘 섬겼으며, 남편의 덕과 짝하여 어긋남이 없었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병인년(1686, 숙종12)에 졸하니,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빈(鑌)이니 생원시에 장원하고 안산 군수(安山郡守)를 지냈는데, 상례(喪禮)를 치르다 죽어 칭송을 받았다. 차남은 선(銑)이니 여산 군수(礪山郡守)를 지냈고 청백한 집안의 전통을 이었다. 조정에서 장차 발탁하여 쓰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마침 병으로 졸하니, 사람들이 애석해하였다. 삼남은 심(鐔)이니 학문과 행실로 이름이 드러났고, 현재 영천 군수(榮川郡守)이다. 막내는 진(鎭)이니 뜻을 쌓고 이름을 감추어 벼슬이 교관(敎官)에 그쳤다. 사위는 구봉징(具鳳徵), 지평 이민채(李敏采), 목사 이세귀(李世龜), 승지 이진수(李震壽)이다.
안산 군수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현감 성한(聖漢), 수한(壽漢), 홍구용(洪九容), 이덕소(李德邵), 첨정 증 우의정 심호(沈浩)이다. 여산 군수는 3남을 두었는데, 태한(泰漢)은 정자(正字)를 지냈고 성품이 맑고 순수하였으며 학문에 힘썼으나 불행히도 요절하였다. 항한(恒漢)은 뜻과 행실이 형에 못지않았으나 역시 잇따라 요절하였다. 막내는 사한(師漢)이다. 2녀는 윤채(尹寀)와 함릉군(咸陵君) 이극(李極)에게 출가하였다. 영천 군수의 아들은 양한(亮漢)으로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딸은 어리다. 교관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구봉징의 1남은 정명(鼎明)이고, 지평의 계자는 이명(頤命)인데 판서이고, 목사의 1남은 광좌(光佐)인데 장원급제하여 응교(應敎)이다. 승지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도겸(道謙), 도순(道淳)이고, 사위는 조성수(趙星壽), 신최언(辛最彦)이다.
성한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광수(光秀), 용수(龍秀)이고, 사위는 송호손(宋好孫), 유계기(兪啓基)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심호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고 그다음은 어리다.
내외의 손과 증손이 수십 인이므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과 나의 선인(先人)은 어려서부터 친분이 깊었다. 내가 시골에 숨어 사는 탓에 비록 한 번도 배알하지 못하였으나, 또한 외람되이 공의 인정과 장려를 받았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부친상을 당해 관(棺)을 모시고 교산(交山)에 반장(返葬)하였는데, 공이 마포(麻浦)의 강가로 나와 조문하였고, 그 이듬해 공도 별세하였다. 아, 이제 어느덧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러 아들들이 처음 명문(銘文)을 부탁하자 사양하고 감히 경솔하게 떠맡지 않았는데, 수년 동안에 다시 서로 연이어 세상을 떠나 지금은 단지 셋째 아들 심 대숙(鐔大叔)과 장손인 부여 현감(扶餘縣監) 성한보(聖漢甫)가 생존해 있을 뿐이다.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는 이치가 어찌 이리도 어긋날 수 있는가. 공의 여러 아들들과 손자 태한이 각자 공의 말과 행실, 뜻과 사업을 기술하였고, 사위인 목사군(牧使君)이 다시 모아 매우 자세한 행장을 지었다. 대숙이 거듭 이전에 청했던 명문을 부탁하는데, 의리상 끝내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아, 공의 명문을 짓는 데 무엇이 부끄러우랴. 단지 나의 식견이 얕고 글솜씨가 변변치 못하여 명현(名賢)의 덕업(德業)을 칭술하기에 부족할 따름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효는 백행의 으뜸이고 / 孝首百行
성은 만사의 근본이라 / 誠本萬事
아 구옹께서는 / 於惟久翁
효와 성 두 가지를 갖추었도다 / 乃有諸己
새를 희롱하던 노래자의 효심으로 / 萊子弄雛
증자의 양지를 실천하였고 / 曾輿養志
염계의 고고한 풍모로 / 濂溪高風
속수의 성실한 행동을 본받았었네 / 涑水實地
뛰어난 문학으로 조정에 올랐으나 / 文學登朝
어진 이의 벼슬길이 뒤늦게 트였으니 / 賢路晩亨
명성은 피하여도 높아만 갔고 / 名避愈隆
작위는 사양해도 더해만 갔네 / 爵辭愈嬰
떠나고자 하나 모친이 연로하시고 / 欲去親老
머물고자 하나 세상이 어지럽구나 / 欲留世艱
녹봉 받아 봉양하는 신세였지만 / 身縻祿養
물러나 한거함에 뜻을 두었네 / 志在退閑
얼굴빛은 기쁘고 온화했지만 / 怡愉于色
마음속은 근심하고 탄식했으니 / 憂歎于中
이러한 충심을 가슴에 품고 / 抱玆耿耿
결국 일생을 끝마쳤네 / 以至於終
백성을 이롭게 하려던 초심 / 致澤初心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였지만 / 雖未克展
그래도 소장은 아직도 남아 / 猶有章疏
공의 대략을 살필 수 있네 / 可以略見
아 공의 평생이 / 嗟公平生
은은하게 날로 드러나도다 / 闇然日章
한편으로 존양하고 한편으로 성찰함을 / 一存一省
세상 떠날 때까지도 잊지 않았네 / 至死不忘
어진 자손이 있어 / 有賢子孫
공의 덕을 능히 찬술했으니 / 克述公德
내가 외람되이 명을 지음에 / 我僭作銘
부디 어긋남이 없길 바라네 / 庶幾無忒
[주-D001] 감히 …… 않는다 : 《예기(禮記)》 〈방기(坊記)〉에 “부모가 살아 계시면 자식은 감히 그 몸을 마음대로 하지 않으며, 감히 그 재산을 사사로이 쓰지 않는다.[父母在 不敢有其身 不敢私其財]” 하였다.[주-D002] 이필(李泌)과 안수(晏殊) : 이필(722~789)은 당(唐)나라 때의 문신(文臣)으로 자는 장원(長源)이다. 7세 때부터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는데,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고 궐에 들어가 기동(奇童)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新唐書 卷139 李泌列傳》 안수(991~1055)는 송(宋)나라 때의 문신으로 자는 동숙(同叔)이다. 진종(眞宗) 때에 신동(神童)으로 부름을 받아 시험을 치르고 진사(進士)의 자격을 받았다. 《宋史 卷311 晏殊列傳》 두 사람 모두 신동으로 이름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주-D003] 계로약명(溪路藥名)의 시 : 박장원(朴長遠)이 지은 〈유삼각산문수사(遊三角山文殊寺)〉를 가리킨다. 그 시에 “나무꾼에 기대어 산골짝 길을 물어보고, 승려들과는 때로 약초 이름을 논하였네. 삼경에 선방 창 아래에서 잠을 깨니, 소나무와 계수나무 꽃그늘이 학 소리에 얽히었네.[溪路却憑樵客問 藥名時與寺僧評 三更睡覺禪窓下 松桂花陰繞鶴聲]”라고 하였다. 《久堂集 卷1 遊三角山文殊寺, 韓國文集叢刊 121輯》[주-D004] 만퇴(晩退) 신공(申公) : 신응구(申應榘:1553~1623)를 가리킨다.[주-D005] 서도(西都) : 평양(平壤)을 가리킨다.[주-D006] 종용당(從容堂)의 고사(故事) : 남송(南宋) 사람 조묘발(趙卯發)이 지주(池州)의 통판(通判)으로 재직할 때 원(元)나라 군대가 침입하자 군대를 모아 대항했으나 막지 못하자, 부인 옹씨(雍氏)와 함께 자신의 서재인 종용당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 일을 가리킨다. 《宋史 卷450 趙卯發列傳》 심현(沈誢)도 1637년(인조15) 1월에 청(淸)나라 군대가 강화(江華)를 함락하자 부인 송씨(宋氏)와 함께 목을 매어 죽었다. 《仁祖實錄 15年 1月 22日》[주-D007] 사천(史薦) : 신임 사관(史官)을 뽑을 때에는 반드시 전임 사관의 천거를 통해 선발하는데, 이를 사천 또는 비천(祕薦)이라고 한다.[주-D008] 대군(大君) :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을 가리킨다.[주-D009] 유영(柳潁) : 대본에는 유영의 ‘潁’이 ‘頴’으로 되어 있으나 《문과방목(文科榜目)》, 《인조실록》 등에 의거하여 ‘潁’으로 바로잡았다.[주-D010] 정일두(鄭一蠹) …… 때 : 일두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 1494년부터 1498년까지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재임하였다.[주-D011] 사국(史局)에 …… 포상(褒賞)하였다 : 선배 사관(史官)인 사성(司成) 조복양(趙復陽)이 민점(閔點), 김징(金澄), 이기발(李起浡) 등을 사관에 천거하는 것을 별다른 이유 없이 허락하지 않자, 장령 서원리(徐元履)가 조복양과 현임 사관들이 당론(黨論)을 앞세워 세 사람을 배척하였다고 판단하고 조복양 등의 추고(推考)를 청하였다. 이 일로 인해 동료들의 논박을 받은 서원리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상벌을 내리는 권한이 전하의 손 안에 있지 않은 듯하니, 어찌 매우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근래에 붕당(朋黨)의 편파(偏頗)가 극심하여 친근한 사람이 아니면 한 사람도 힘을 쓸 수 없습니다.” 하니, 평소 붕당의 폐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효종이 서원리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집의에 특진시켰다. 《孝宗實錄 4年 8月》[주-D012] 방상(方喪) : 임금이 죽었을 때에 부모상에 견주어 삼년상을 입는 것을 말한다. 《禮記 檀弓上》[주-D013] 동춘(同春) 송공(宋公) : 송준길(宋浚吉:1606~1672)을 가리킨다.[주-D014] 시남(市南) 유공(兪公) : 유계(兪棨:1607~1664)를 가리킨다.[주-D015] 새서(璽書)를 …… 고사(故事) :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태수(太守) 중에서 백성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있으면, 옥새(玉璽)를 찍은 표창을 내려 장려하고, 직질(職秩)을 올려 주고 상금을 주었으며, 그들의 작위가 관내후(關內侯)에 이르렀을 때 공경(公卿)의 자리에 결원이 생기면 표창을 받은 태수 가운데서 선발하여 차례로 임용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資治通鑑 卷24 漢紀》[주-D016] 당시에 …… 있었는데 : 대사성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여, 홍문록(弘文錄)에 수록할 관원의 명단을 심사할 때에 본관록(本館錄)에서 탈락했던 자가 도당록(都堂錄)에 끼이게 된 것은 사사로움이 개입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와 아울러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잡지 못한 대사헌 박장원과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의 잘못을 논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뒷걸음치는 박장원 같은 자는 본래 꾸짖을 것도 없다.[退步如朴長遠 固無足責]”라는 구절이 있다. 《顯宗實錄 3年 6月 10日》[주-D017] 마땅히 …… 이유 : 박장원은 상소에서 마땅히 물러나야 할 이유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 재주가 없는 사람이 직책을 맡아 일을 그르치게 된다. 둘째, 항상 모친의 병환을 걱정해야 하므로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셋째, 몸이 쇠약하고 정신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 넷째, 과분한 복은 재앙을 부른다. 《顯宗實錄 3年 6月 12日》 앞서 서필원의 상소에서 박장원을 가리켜 뒷걸음친다고 표현한 것은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과감히 지적하여 바로잡지 못하고 물러나 움츠린다는 의미인데, 박장원은 이를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다는 의미로 잘못 파악하여 상소를 올린 것으로 보이며, 명재도 이 부분을 박장원의 입장에서 기술하였다. 박장원이 서필원의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은 실록에 수록된 박장원의 상소에 대한 사관(史官)의 논평을 통해 알 수 있다.[주-D018] 문성(文成)과 문간(文簡) : 이이(李珥:1536~1584)와 성혼(成渾:1535~1598)의 시호(諡號)이다.[주-D019] 왕 문정(王文正)이 …… 대하니 : 왕 문정은 송나라의 재상 왕단(王旦:957~1017)으로, 문정은 시호이다. 그는 사람을 잘 감식하여 발탁하였고, 인사(人事)와 관련된 청탁을 들어주지 않기로 유명하였다. 일찍이 간의대부(諫議大夫) 장사덕(張師德)이 왕단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두 차례 그의 집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그 뒤 지제고(知制誥)에 임명할 사람을 논의할 때에 왕단이 장사덕에 대해 말하기를, “내가 여러 번 임금에게 장사덕이 명가(名家)의 자제로서 선비의 덕행이 있다고 아뢰었는데, 뜻밖에 나의 집을 두 번이나 찾아왔다. 장원급제를 하여 영예로운 진로가 본래 보장되어 있으니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만약 더욱 명리(名利)를 추구한다면 연줄도 없이 관직에 나아가는 자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하였다. 《宋史 卷282 王旦列傳》 박장원이 이조 판서로 재직하면서 왕단처럼 인사 청탁을 물리치고 공정하게 인재를 발탁하였음을 말한 것이다.[주-D020] 매복(枚卜) : 의정(議政) 중에 결원이 생겼을 때, 왕명에 따라 시임(時任) 의정들이 빈청(賓廳)에 나와서 그 후보자로 원임(原任) 의정의 좌목(座目)을 써서 승전색(承傳色)을 통해 입계(入啓)하는 일을 말한다. 시임이 없을 경우에는 원임들이 입시하여 전단자(前單子)에 낙점을 받았고, 원임 가운데 적임자가 없을 경우에는 새로운 인물로 추가하여 뽑았다. 《六典條例 吏典 議政府 枚卜》 《銀臺條例 吏攷 大臣》[주-D021] 사소한 …… 않으니 : 1664년(현종5) 9월에 이조 판서 박장원이 도목 정사(都目政事)에서 가자(加資)해야 할 사람에 관한 초기(草記)를 갖추어 아뢰면서 잘못하여 가자 망단자(加資望單子)까지 함께 올리는 실수를 범하였다. 이에 대해 현종이 엄명을 내려 특별히 박장원을 추고하게 하니, 박장원이 사직소를 올리고 정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顯宗實錄 5年 9月 9日》[주-D022] 양사에서 …… 찬축(竄逐)하였다 : 1666년(현종7) 7월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조선인이 청나라에서 몰래 염초(焰硝)를 매입한 일과 청나라에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나온 안추원(安秋元)이라는 사람을 감추어 준 일을 조사하였다. 청나라 사신들이 안추원의 일을 특별히 문제 삼아 조선의 대신(大臣)을 사율(死律)로 다스리려고 하였는데, 현종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 사율을 감하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해 9월에 허적(許積)이 진주사(陳奏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대신의 감죄(減罪)를 주선하였는데, 청나라에서는 감죄의 대가로 벌금을 바치도록 하였다. 1667년 1월에 허적이 이러한 결정을 받아 돌아오자, 집의 이숙(李䎘), 장령 박증휘(朴增輝)ㆍ신명규(申命圭), 지평 유헌(兪櫶)ㆍ이하(李夏), 헌납 김징(金澄), 정언 조성보(趙聖輔) 등 7명의 대간(臺諫)들이 합계(合啓)하여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해 임금이 혼자 잘못을 책임지고 나라가 치욕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도록 한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홍명하(洪命夏), 우의정 허적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현종은 내막도 자세히 모르고 함부로 대신을 탄핵했다고 하여 7명의 대간을 모두 원찬(遠竄)하였다.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주-D023] 사마광(司馬光)이 …… 권하였습니다 :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즉위하여 사마광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임명하자 사마광이 사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 중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로서 인(仁)과 명(明), 무(武)의 세 조목을 제시했던 것을 가리킨다. 《宋大事記講義 卷14》[주-D024] 사서(史書)를 …… 갔다 : 1669년(현종10) 3월 초에 지춘추관사 박장원과 대교(待敎) 이인환(李寅煥)을 강화(江華)에 보내 실록(實錄)에서 정릉(貞陵)에 관한 사적(事跡)을 고출(考出)하도록 하였다. 《顯宗實錄 10年 3月 2日》[주-D025] 신덕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하였는데 : 신덕왕후는 태조(太祖)의 둘째 부인인 곡산 강씨(谷山康氏)로서, 능호(陵號)는 정릉(貞陵)이다. 태종(太宗)에 의해 사후에 후궁(後宮)의 지위로 격하되어 종묘에도 부묘되지 못하였는데, 1669년(현종10) 1월에 송시열(宋時烈)이 건의하여 능이 복구되었고 그해 9월에는 종묘에 부묘되었다. 《顯宗實錄 10年》[주-D026] 순릉(純陵) : 도조(度祖) 이춘(李椿)의 부인인 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朴氏)의 능이다.[주-D027] 정일(精一)의 16자(字) :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선위(禪位)할 때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고 전일하게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말한 16자를 가리킨다. 《書經 虞書 大禹謨》[주-D028] 숙부 :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박정(朴烶:1600~?)을 가리킨다.[주-D029] 새를 …… 효심 : 초(楚)나라의 효자인 노래자(老萊子)가 70살이 되어서도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하여 어린애처럼 색동저고리를 입고서 새끼 새를 가지고 장난을 치며 놀았다고 한다. 《山堂肆考》[주-D030] 증자(曾子)의 양지(養志) : 증자가 증석(曾晳)을 봉양할 때에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렸고, 상을 물릴 때에는 반드시 남은 것을 누구에게 주고 싶은지를 여쭈었다. 그리고 증석이 “남은 음식이 있느냐?”라고 물으면 반드시 있다고 대답하였는데, 맹자가 이러한 증자의 행동을 가리켜 “부모의 뜻을 잘 받들었다.[養志]”라고 칭송하였다. 《孟子 離婁上》[주-D031] 염계(濂溪) : 송나라의 명유(名儒) 주돈이(周敦頤:1017~1073)의 호이다.[주-D032] 속수(涑水) : 송나라의 명신(名臣) 사마광(司馬光:1019~1086)을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기정 (역) | 2008
..........................
[주-D001] 종용당 고사(從容堂故事) : 옛날 어떤 선비가 나라가 망하자 절개를 지켜 자기의 서재에서 자결하니, 그 집을 종용당(從容堂)이라 하였다. 종용이란 말은 죽음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조용히 절의에 죽는다는 뜻이다.->다음으로 대체하면 자세함 [주-D006] 종용당(從容堂)의 고사(故事)
[주-D001] 종용당 고사(從容堂故事) : 옛날 어떤 선비가 나라가 망하자 절개를 지켜 자기의 서재에서 자결하니, 그 집을 종용당(從容堂)이라 하였다. 종용이란 말은 죽음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조용히 절의에 죽는다는 뜻이다.->다음으로 대체하면 자세함
[주-D006] 종용당(從容堂)의 고사(故事) : 남송(南宋) 사람 조묘발(趙卯發)이 지주(池州)의 통판(通判)으로 재직할 때 원(元)나라 군대가 침입하자 군대를 모아 대항했으나 막지 못하자, 부인 옹씨(雍氏)와 함께 자신의 서재인 종용당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 일을 가리킨다. 《宋史 卷450 趙卯發列傳》 심현(沈誢)도 1637년(인조15) 1월에 청(淸)나라 군대가 강화(江華)를 함락하자 부인 송씨(宋氏)와 함께 목을 매어 죽었다. 《仁祖實錄 15年 1月 22日》
...........................
赵卯发(—1275),又名昴发,字汉卿,昌州(今重庆大足)人。理宗淳祐十年(1250年)上舍登第。历遂宁司户、宣城令。度宗咸淳间,权通判池州。元兵渡江,卯发摄州事,缮壁聚粮以图拒敌。因都统张林暗降敌,知不可守,遂与妻雍氏同缢死。赠华文阁待制,谥“文节”,雍氏赠顺义夫人。
本 名赵卯发 字汉卿 号谥号 :文节 所处时代南宋 出生地昌州 逝世日期1275年
人物生平
淳祐十年(1250),登进士第,为遂宁府司户、潼川签判、宣城宰。素以为官清廉而著称,被人诬陷罢官。咸淳七年(1271),起用为彭泽令。
咸淳十年(1274),暂代池州(今属安徽)通判。元军渡江,太守王起宗弃官而去,赵卯发总管州事,修缮城墙,囤积粮食,为守城做准备。宋将夏贵兵败归,所过纵掠,赵卯发捕斩十余人。
德祐元年(1275)正月,元军至李王河,都统张林屡次建议投降,赵卯发忿气填膺,瞠目视林不能言。有问以禔身之道者,卯发曰:“忠义所以禔身也,此外非臣子所得言。”张林以兵出外巡江,暗里向元军投降,归来后假装继续帮助赵卯发守城,守兵五百余,皆归张林统帅。
赵卯发知不可守,乃置酒会亲友;与饮诀,谓其妻雍氏曰:“城将破,吾守臣不当去,汝先出走。”雍氏曰:“君为命官,我为命妇,君为忠臣,我独不能为忠臣妇乎?”卯发笑曰:“此岂妇人女子之所能也。”雍氏曰:“吾请先君死。”卯发笑止之。明日乃散其家资与其弟侄,仆婢悉遣之。
二月,元军攻打池州,赵卯发晨起书几上曰:“君不可叛,城不可降,夫妻同死,节义成双。”又为诗别其兄弟,裂衣书诗寄弟:城池不高深,无财又无兵。惟有死报国,来生作弟兄。与妻盛服同缢从容堂死。赵卯发始为此堂,名“可以从容”,及兵遽,领客堂中,指所题扁曰:“吾必死于是。”客问其故,曰:“古人谓‘慷慨杀身易,从容就义难”,此殆其兆也。”赵卯发死,张林开门投降。
元朝丞相伯颜入,问太守何在,左右以死对。即如堂中观之,皆叹息。为具棺衾合葬于池上,祭其墓而去。事闻,赠华文阁待制,谥文节,雍氏赠顺义夫人,录二子为京官。 [1]
主要作品
著有《集孟四箴》,已佚,高斯得《耻堂存稿》有《赵卯发集孟四箴赞》。《宋诗纪事》录其诗一首并附传。
参考资料1. 宋史 卷四百五十 列传第二百九 忠义五 赵卯发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