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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통합검색>통합검색결과 (nl.go.kr)
花林誌 卷之下
題詠
東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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嶠南誌(교남지)鄭源鎬(未詳 ~ 未詳)嶠南誌卷之六十安義郡樓亭...張世南以書 來謂曰縣有光風樓霽月堂乃一蠹先生之所創也斯二者 ...
[緖言]
昭和丁丑(1937)黃花節(9.9重陽節)著者識
樓亭 樓亭
光風樓 在客館北舊名宣化縣監鄭汝昌重修改今名宣祖丁酉火辛丑縣監沈宗忱重建後縣監張 世南重創丙辰縣監李顯良重修○宋時烈重修記余嘗讀 野史有曰寒暄精於理一蠹精於數余嘗疑之曰夫所謂數 者若如卲子一生兩兩生四四生八之云則是乃大易之根 柢而所謂理者實在其中矣故朱子曰周子從理看卲子從 數看都只是底理然則二先生之道不可差殊觀也其相與 沿泝於濂洛之源泒可知矣蓋我東圃隱鄭文忠公倡明宋 儒之道大中至正之規如日中天夫豈以先生資質之高明 其學顧偏於數也哉不然李文純公何以編於儒賢錄而前 後章甫何以有聖廡之請乎今年春安陰縣監張世南以書 來謂曰縣有光風樓霽月堂乃一蠹先生之所創也斯二者 歲久而未免支柱矣堂則朴尙書長遠己葺理之而樓則今 裒萃財力以治之此實先賢之遺跡盍爲記以侈之余渙然 而應曰前日之得於聞而質於心者今皆氷解而凍釋矣噫 先生其溯濂洛而達之洙泗者乎夫光風霽月黃魯眞形容 無極翁之氣像者也其後二程夫子有言曰再見周茂叔吟 風詠月而歸有吾與點之意朱夫子亦曰風月無邊庭草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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翠然則此一句兩言雖似海上單方其蘊實無窮而其趣實 難言也然則此其旨終不可知耶曰此非外襲而得之者必 須剖判於敬肆修悖之辨而從事於明通公溥之功使胸中 灑落無纖毫人欲之累而涵太極於方寸之間然後可庶幾 也然則先生之所以修己治人之道亦可不外於此矣抑又 論之朱夫子旣以太極先天之道謂相爲表裏數中有理之 實於是蓋可徵矣卲子楊柳之風梧桐之月未嘗不與濂洛 同其氣像則縱使先生汎濫於數學亦何害於與寒暄殊道 而同歸哉後之登玆樓而想像先生者無徒以氣像揣而必 知所本則其於學道愛人之實豈曰無所補哉朴公以孝友 之政好淸淨之風而先修此堂則其義遠矣而今張侯適値 歲歉手拊口煦之不暇而乃能留意於此眞可謂追仁賢新 耳目而得爲政之本矣樓北又有點風舊基臺下有浴沂岩 侯又欲修復舊貫縣之經生學子苟能因名而責實則眞可 以自濂洛達洙泗矣吾將側耳而聽之也
○林墰詩
霽月堂空廢
光風樓獨存
千年仰遺躅
一脈見眞源
○李顯良詩
鳳去高臺廢
鶴歸華表存
人民依舊俗
山水保靈源
○曺淑詩
裁詩倚醉悲南極
見興登樓望北辰
月霽風光心浩蕩
山明水秀俗尨淳
霽月堂 與光風樓連縣監鄭汝昌創建于金遷上乙酉縣監全克譓移建千此
點風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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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龍門橋上有水石之勝古有樓今廢
花鶴樓 南門樓縣監洪益弼所建
在川樓 鄕校門樓
挹風樓 龍門書院門樓
在斯樓 驛川祠門樓
觀水樓 龜淵祠門樓○趙榮䄷詩絃誦儒宮杜若汀長川如 帶繞階庭眞源浩浩知多積淸派悠悠不暫停肯逐雨晴似 溝澮終兼晝夜到滄溟請君學道須淵博欲識無形見有形 ○愼守彝詩龜淵源接泗洙汀浩潑淸流繞廟庭混混續來 知有本悠悠過去自無停盈科豈憚經千曲勇進終能達四 溟觀水名樓誠有意有形觀處覺無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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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風樓 天 邊 烟 川 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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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집(海藏集) 신석우(申錫愚)생년1805년(순조 5)몰년1865년(고종 2)
海藏集卷之五 / 詩 / 光風樓
霽月光風別洞天。
先賢氣像浩無邊。
攀梯一上餘丹艧。
開戶平臨濕翠煙。
未了仙緣遅出峽。
將尋往蹟逝如川。
十分春色名亭酒。
何似湘江宴宰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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恥堂文集(치당문집) 沈相福(1871 ~ 1951)
恥堂文集卷之二 詩
登光風樓次板上韻
光風飄灑洞中天
百尺元龍活水邊
四野桑麻當肇夏
千家楊柳羃淸煙
堪憐先輩優遊地
可惜光陰逝似川
自此尋眞知未遠
山如太古日如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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誠齋文集(성재문집) 鄭珪錫(1876 ~ 1954)
[誠齋文集卷之二] [詩]
光風樓次板上韻
遊客同來四月天
眼中物色浩無邊
千縭霞霧懸崖嶂
十里桑麻掩陌阡
邑宰題吟追古蹟
野翁耕稼樂豐年
居人沽酒來相勸
往事悠悠一悵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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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農窩文集(사농와문집) 河益範(1767 ~ 1813)
士農窩文集卷之一 詩
登光風樓安義○一蠧鄭先生刱建尤庵宋先生撰記文
光霽胷襟經濟憂
兩賢精彩耀斯樓
勝形不但東南最
江漢秋陽我思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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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齋先生文集(수재선생문집) 金在植(1873 ~ 1940)
修齋先生文集 詩
暮登安陰光風樓 次板上詩
昔聞蠹翁畵閣修
夕陽歸客暫登樓
六螺群巘簾中出
數曲淸江簷下流
茂樹婆娑靑島睡
襟懷澹蕩白雲遊
遠村日落山容寂
步出東阡南陌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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幾軒集(기헌집) 金基鎔(1869 ~ 1947)
幾軒集卷之一 詩
光風樓次板上韻
蠹老何年始建修
佳山麗水又名樓
簷前野色如藍滴
檻外江聲噴玉流
冶女歌多粧妙態
使君華蓋賸淸遊
錢塘千古名雖藉
想入公評不讓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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果齋先生文集(과재선생문집) 李敎宇(1881 ~ 1944)
果齋先生文集卷之二 詩
同鄭斗山 丙鍚 宋梅石 斌憲 登光風樓
淑氣江山此一樓
登臨不是等閒遊
追懷蠹老光風趣
落日憑軒興轉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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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山遺稿(내산유고) 李敎冕(1882 ~ 1937)
內山遺稿卷之一 詩
光風樓同宋梅石 斌憲
水潔山明起一樓
前賢遊處後生遊
此地幸逢梅石友
滿樽良話作風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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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坡遺稿(죽파유고) 文在琳(1789 ~ 1848)
竹坡遺稿卷之一 詩
登光風樓
午憩于安陰縣因登光風樓樓在水邊甚宏麗又有齊月堂蓋連楣而異名也仰觀璧上記文則尤庵先生作之而一蠹先生建之也
無邊風月一高樓
宛在濂溪水上頭
簾外雲烟三洞近
檻前魚鳥一川幽
稻梁滿夜民生足
梧柳垂庭客意悠
二老襟懷何皎潔
夕陽吟弄下長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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訥窩文集(눌와문집) 李若烈(1765 ~ 1836)
訥窩文集卷之二 詩
題光風樓
絃歌耕鑿巷西東
遺愛千秋一蠹翁
佗夜更宜乘霽月
玆樓今始坐光風
心香細襲濂庭草
琴韻淸生邵砌桐
函席周旋嗟異代
徒然寄想畫圖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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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岡先生文集(서강선생문집) 柳遠重(1861 ~ 未詳)
西岡先生文集卷之一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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登安陰光風樓
官城煙柳暑風淸
朱翠門前畫角聲
霽月堂空人少過
斜陽延佇不堪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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艮嵒文集(간암문집) 朴泰亨(1864 ~ 1925)
艮嵒文集卷之一 詩
上光風樓
十年三度上斯樓
豈爲謾遊取勝區
認是蠹翁遺躅地
光風霽月揭千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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誠齋文集(성재문집)鄭珪錫(1876 ~ 1954)[誠齋文集卷之二][詩]光風樓次板上韻
光風樓次板上韻
遊客同來四月天
眼中物色浩無邊
千縭霞霧懸崖嶂
十里桑麻掩陌阡
邑宰題吟追古蹟
野翁耕稼樂豐年
居人沽酒來相勸
往事悠悠一悵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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笑癡齋遺稿(소치재유고) 姜命世(1632 ~ 1708)
笑癡齋遺稿卷之上 詩
次申必淸光風樓韻
樓臺蕭灑近雲林
霽月光風共一琴
認是千秋芳躅在
且斟杯酒細傳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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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谷先生文集(석곡선생문집) 成彭年(1540 ~ 1594)
石谷先生文集卷之一 七言四韻
次表校理韻題光風樓仍用其意二首 校理沿沫藍溪
鰻川流水水南濱
百代盤空盡閣新
澹子宛憑趨偃日
武城親見割鷄辰
竹階模魚牛羊茁
秦鼎烹龍琥珀醇
遺迹至今磯石老
萬金難鑄釣璜人
又 表作專爲一臺先生作故用其意而變其體云
平生麋鹿喜相親
十室來潛社稷身
自是光風生白室
不緣層榭盪紅塵
文章星斗沈山海
陶冶乾坤屬鬼神
畢竟大江舟不返
可憐樓月獨留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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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전집 제3권 / 시(詩)○영남록(嶺南錄) / 안음의 광풍루에서〔安陰光風樓〕
李敏求 | 1589 | 1670 | 全州 | 子時 | 東州, 觀海 |
할아버지께서 시 지으신 곳 / 吾祖題詩處
높은 누대를 기쁘게 거듭 지나네 / 樓高愜再過
먼 산은 푸른 빛 변치 않았고 / 遙岑靑不改
늘어선 나무는 비취빛 짙어라 / 列樹翠還多
고향은 학이 돌아온 때 같으니 / 故國來如鶴
가는 세월 달리는 뱀처럼 흘렀네 / 流年逝若蛇
지난 일을 어찌 떠올리랴 / 那堪懷往事
말 타고 이미 산하에 들어왔네 / 騎馬已山河
[주-D001] 안음(安陰)의 광풍루(光風樓) : 안음은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군 지역의 옛 지명이다. 광풍루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 있는 누각이다.[주-D002] 고향은 …… 같으니 : 고향의 모습이 변하고 지인을 만날 수 없다는 말이다. 《수신후기(搜神後記)》 권1에 정 영위(丁令威)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고 신선이 되어 요동으로 돌아와 화표주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 영위라,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이제야 돌아왔네.〔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라고 하였다.[주-D003] 가는 …… 흘렀네 : 흐르는 세월이 빠름을 표현한 것이다. 소식의 《동파전집(東坡全集)》 권1 〈수세(守歲)〉에 “한 해가 가는 것을 알고 싶은가. 골짜기로 달려가는 뱀과 같구나.〔欲知垂盡歳, 有似赴壑虵.〕”라고 하였다.
ⓒ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김문갑 오승준 정만호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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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 제4권 / 병오(丙午, 1606) / 겨울 11월 / 정경운(鄭慶雲 : 孤臺, 1556~?)
○ 11월 18일 계미(癸未)
한강(寒岡) 선생께서 덕산(德山)으로부터 용추(龍湫)를 유람하시고 서원에 오셨다. 나는 조카와 함께 서원에 가서 인사드렸다. 오후에 선생께서 일두(一蠹) 선생의 묘에 제를 올렸는데, 내가 축문(祝文)을 읽었다. 황혼녘에 모시고 정가(鄭家)에 갔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광풍루(光風樓)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고 또 추모사(追慕祠)를 찾아갔다. 이언화의 집을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점풍대(點風臺)에서 절을 하며 인사를 드린 후 이별할 쯤에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충만하여〔充然〕 마치 터득함이 있는 듯하다. 이별을 슬퍼하는 마음〔黯然之懷〕이 없지 않은데, 하물며 텅텅 빈 자루 차고 돌아감이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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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어
안의현읍지(安義縣邑誌) |
내용
1832년(순조32) 경상도 안의현에서 편찬한 읍지이다. 본 책은 필사본이며, 1책 27장으로 되어 있다. 안의현의 채색 지도 1장이 첨부되어 있다. 안의현은 지금의 함양군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과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안의면 금천리, 교북리 일대에 있었다. 안의군은 신라 때 마리현(馬利縣), 이안현(利安縣)이었다. 고려 때 부곡(部曲)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이안현이 되기도 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 안음현(安陰縣)으로 개칭되었다. 영조 때 안의현(安義縣)이 되었다. 본 읍지를 통해 안의군의 역사, 소속 고을의 이름, 거주 성씨 및 군의 풍속, 자연 환경, 물산, 각종 시설의 위치 및 내력, 지역 인물 관련 정보, 인구수 및 토지 면적, 조세 및 환곡 등의 재정 내역 등의 정보를 상세히 살펴 볼 수 있다. 본 읍지에 기록된 호구와 전결의 수로 볼 때 안의는 조선의 지방 고을들 가운데 규모가 작은 고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안의군은 동쪽으로 거창과 20리, 서쪽으로 전라도 장수와 57리, 남쪽으로 함양과 5리, 북쪽으로 거창과 50리 떨어진 위치에 있었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752리였다. 이 책은 지역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 항목을 빠짐없이 설정하여 19세기 초반 안의현의 사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본 읍지 이전에 편찬된 세종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조대의 『여지도서(輿地圖書)』, 본 읍지 이후에 편찬된 고종대의 『안의읍지(安義邑誌)』 등 본 읍지 편찬을 전후로 한 안의 지역 여타 읍지들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동시기 안의 지방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관련자료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奎 666〉, 『영남읍지(嶺南邑誌)』〈奎 12173〉, 『안의읍지(安義邑誌)』〈奎 108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