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윳따 니까야(각묵스님 옮김), 제1권 게송을 포함한 가르침, 제1주제 천신 상윳따(S1),
제4장 사뚤라빠 무리 품 - 있는 것이 아님 경(S1:34)』
있는 것이 아님 경(S1:34)
Nasanti-sutta
2. 그때 많은 사뚤라빠 무리의 천신들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어떤 천신은 세존의 면전에서 이 게송을 읊었다.
"인간에게 욕망이란 항상한 것 아니거늘
원하는 것에 묶여 그들 방일하구나.154)
그 사람들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돌아오지 않는 경지155)로 나아가지 못하도다." {102}
3. [다른 신]156)
"욕구 때문에 재난이 생기고 욕구 때문에 괴로움이 생깁니다. 욕구를 길들이면 재난이 길들여지고 재난이 길들여지면 괴로움이 길들여집니다."157)
4. [세존]158)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의도에서 생긴 애욕이 바로 감각적 욕망일 뿐이네.159)
아름다운 것들은 세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
지자는 여기에 대한 욕구를 길들이노라. {103} [23]
분노를 버리고 자만을 내던져야 하고
모든 족쇄 남김없이 건너야 하노라.
정신ㆍ물질 집착 않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160)
괴로움은 그를 결코 덮치지 못하노라. {104}
헤아림을 버리고 자만심도 버린 그는
여기 [이 세상에서] 정신ㆍ물질에 대한 갈애 자르고
매듭 끊고 근심이 없어 바라는 것 없으니
신들이나 인간들이 여기서나 저 너머서나
천상서나 그 모든 거처에서나
그를 찾아보지만 발견하지 못하도다."161) {105}
5. 모가라자 존자162)가 여쭈었다.163)
"신들이나 인간들이 여기서나 저 너머에서나
여여하게 해탈한 분 보지 못한다 하면
그들이 예배하는 최상의 인간이요
인간들의 이익을 위하시는 그분을
그들은 어떻게 칭송할 수 있나이까?"164) {106}
6. 세존께서는 "모가라자여."라고 말씀하셨다.
"비구여,165) 그들은 그들이 예배하는
여여하게 해탈한 분 칭송할 수 있느니라.
[사성제] 법 완전하게 알아 의심을 제거한 뒤166)
비구여, 그들 역시 얽힘 건넌 자 되노라." {107}
154) "'원하는 것들(kamanīyāni)'이란 좋아하는 형색 등 원하는 대상을 말한다. 사람들은 그런 대상에 묶이고(boddha) 방일(pamatta)한다."(SA.i.62)
155) Ee1&2에는 절대분사인 anāgantvā로 나타나지만 다른 여러 본에는 anā-gantā로 나타나는데 이 단어는 『앙굿따라 니까야』 「족쇄 경」 (A2:4:5) 등에서 불환자(anāgāmi)를 설명하는 단어로 나타난다. 역자는 후자 즉 anā-gatā로 읽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지'로 옮겼다.
"이 말은 삼계윤회라 불리는 죽음의 영역(maccu-dheyya)으로부터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라 불리는(apunāgamana-saṅkhāta) 열반으로 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은 열반으로부터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감각적 욕망들에 묶이고 방일한 사람들은 그런 [열반에] 도달하지 못한다."(SA.i.62)
156) 원문에 따르면 위의 게송 마지막에 ti 가 있으므로 §3은 다른 신의 말로 보는것이 더 좋으며, 아울러 게송으로 보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보디 스님 366쪽 71번 주해 참조) 역자는 보디 스님의 이러한 견해를 수용해서 옮겼다.
157) "'욕구(chanda)'란 갈애를 두고 한 말이다. '재난(agha)'이란 오온의 괴로움이다. 즉 갈애라는 욕구 때문에 오온의 괴로움이 생긴다. '욕구를 길들이면 재난이 길들여진다(chanda-vinayā agha-vinayo).'는 것은 갈애를 길들이면 오온이 길들여진다는 말이다. '재난이 길들여지면 괴로움이 길들여진다(agha-vinayā dukkha-vinayo)'는 것은 오온이 길들여지면 윤회의 괴로움(vaṭṭa-dukkha)이 제거된다는 뜻이다."(SA.i.62~63)
158) 원문에 따르면 위의 문장 마지막에도 ti가 나타나므로 다른 사람의 게송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내용상으로도 세존의 말씀으로 간주하는 것이 좋다. 보디 스님도 이렇게 옮기고 있다.
159) "'아름다운 것들(citrāni)'이란 아름다운 대상들을 말한다. 의도의 애욕(saṅ-kappa-rāga)이란 '의도에서 생긴 애욕(saṅkappita-rāga)'이다. 이처럼 여기서는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vatthu-kāma)이 아닌 오염원으로서의 감각적 욕망(kilesa-kāma)을 '감각적 욕망'이라 부르고 있다."(SA.i.63)
160)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akiñcana)'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라는 그 무엇이 없는 자(rāga-kiñcanādi-virahita)이다."(SA.i.63) 이것은 아라한의 동의어이다. 본서 제4권 「고닷따 경」 (S41:7) §12와 주해를 참조할 것.
161) 본 게송은 본서 「사밋디 경」 (S1:20) {49}와 동일하다. 그곳의 주해들을 참조할 것.
162) 모가라자(Mogharāja) 존자는 『숫따니빠따』 제5장 「도피안 품」 에 나타나는 연로한 바와리(Bāvarī) 바라문의 16명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바라문 출신이었다. 그는 그가 「도피안 품」 (Sn5:16/216~217)에서 세존께 드린 질문에 대한 세존의 답변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가라자 존자는 검증(vīṁsā)만으로 아라한이 된 사람의 본보기로 언급되기도 한다.(SA.iii.256)
그 후 그는 대상이나 염색공이나 옷 만드는 사람들이 버린 거친 천을 거칠게 자르고 거칠게 꿰메고 거칠게 물들여 분소의를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앙굿따라 니까야』 「하나의 모음」 (A1:14:4-16)에서 세존께서는 그를 남루한 옷을 입는 자(lūkha-cīvara-dhara)들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칭찬하고 계신다.
163) 주석서에 의하면 모가라자 존자는 바로 앞의 게송이 그 앞의 게송들과 문맥이 잘 어울리지 않아서(na yathānusandhiṁ gato) 그것을 앞의 게송들과 합치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을 드렸다고 한다.(SA.i.63~64))
164) "'그들이 예배하는 최상의 인간이요 인간들의 이익을 위하시는 그분(nar-uttama-atthacara narāna)'이라고 하였다. 모든 번뇌 다한 분(khīṇāsava = 아라한)들은 최상의 인간이요 인간들의 이익을 위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모가라자 장로는 오직 십력(十力)을 갖춘 분(dasa-bala = 부처님)을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평서문으로도 옮길 수 있지만 주석서에서 의문문으로 풀이하고 있다. 보디 스님도 이를 따라서 옮겼고 역자도 이를 따랐다.
165) Be, Se에는 bhikkhū로 나타나는데 주격 복수이다. 보디 스님도 주격 복수로 옮겼다. 그런데 주석서에서 "비구란 모가라자 장로를 말한다(bhikkhūti mogharājattheraṁ ālapati)."(SA.i.64)라고 설명하고 있고, Ee1&2에는 bhikkhu(단수 호격)으로 나타나며, 문맥상으로도 이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여 역자는 단수 호격으로 옮겼다.
166) "'법을 완전하게 알아(aññāya dhammaṁ)'라는 것은 사성제의 법(catu-sacca-dhamma)을 완전하게 안다는 말이다."(SA.i.64)
세존께서는 중생들이 믿음으로 여래를 칭송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성제의] 법을 이해하고 꿰뚫어서 도와 과를 증득하여 모든 의심을 건너 스스로 해탈한 존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밝히고 계신다.